44장: 새 식구(2)
하지만 그뿐이었다.
“캬아아아악~!”
그저 포효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잔뜩 분노에 차 있기는 하지만, 그 분노는 실체를 갖추지 못했다.
놈의 선택이 결국 후자였기 때문이다.
넘어서지 않는 것.
사실상 못 하는 것이라고 봐야 했다.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을 터였다.
이 경계를 넘어서면 결코 성치 못하리라는 걸.
이 또한 심연과의 공명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몬스터에 대한 위압 효과 역시 대폭 향상됐다.
과거 매튜와의 상행에서 오우거에게 행했을 때와는 반응이 천지 차이였다.
당시는 오우거가 내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음에도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반면, 지금은 영역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들어오면 죽는다는 것을.
“캬아악~!”
빙글.
퍼덕퍼덕~
놈은 끝내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몸을 되돌렸다.
그러고는 퍼덕거리는 날갯짓과 함께 다가왔던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냥 보내시게요?”
“왜, 아쉬워? 다시 불러 줄 테니, 진짜 잡아 볼래?”
“아니, 뭘 또 말씀을 그렇게…….”
잡고자 하면 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이너의 상대로 적합하지도 않을뿐더러,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놈을 잡으려면 나 또한 적잖이 힘을 소모해야 했다.
굳이 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당장 뒤처리가 필요한 일도 남아 있었다.
“어어, 저 녀석 저거 그냥 떨어지는데요?”
그리핀이었다.
경계를 넘어선 뒤, 긴장이 풀림과 함께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녀석이 바닥으로 수직 낙하 중이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아무리 그리핀이라 한들 타격이 상당할 터.
아직 새끼인 데다 몸까지 성치 않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가가각~
이에 인력을 이용하여 끌어당겼다.
절체절명의 순간 선택을 한 그리핀이었다.
알고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녀석은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 셈.
그렇다면 옳은 선택에 대한 소정의 보상 정도는 줄 만했다.
후우웅~
투욱.
끌어당긴 녀석을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시켰다.
그러자 다이너가 곧장 다가가 상세를 살폈다.
“상처가 위중합니다. 발톱이 깊이 박혔던 모양이에요. 그냥 떨어졌으면 정말 즉사했겠네요. 에고, 가여운 녀석…….”
심히 안타까워하는 기색과 함께 연신 새끼 그리핀의 털을 쓰다듬는 다이너.
원래부터 연약하고 귀여워 보이는 존재들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었다.
회귀 직후에도 상기했던 바이기는 하나, 이렇게 직접 보니 느낌이 한층 더 새로웠다.
터질 듯 우람한 근육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섬세하디 섬세한 감수성이랄까?
“이 녀석 데리고 가실 거죠, 공자님? 상처가 치료될 때까지만이라도요. 이대로 두면 그냥 죽을 게 분명하잖아요.”
기왕에 보상을 준 거 조금 더 줘도 괜찮을 듯했다.
다이너의 어울리지 않는 감수성 덕분에 어차피 내가 귀찮아질 일도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또, 새끼라고는 해도 최상위 몬스터인 그리핀이었다.
상처도 금방 아물 테니 일정에 크게 차질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 뭐, 상처가 아물 때까지라면야.”
그리하여 결정됐다.
잠시나마 새끼 그리핀을 데리고 다니기로.
딱 상처가 치료될 때까지만.
* * *
“카오야, 많이 먹어. 모자라면 언제든 형 부르고. 형이 더 손질해서 가져다줄게.”
쓰담쓰담.
덩어리 같아 보이는 인간이 고블린 사체를 건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에 그리핀, ‘카오’라는 이름까지 붙여진 새끼 그리핀은 질색했다.
그리고 이 감정을 그대로 담아 행동에 옮겼다.
탁!
부리로 덩어리의 손을 쫀 것이다.
만지지 말라는 명확한 의사 표시.
그 강도 또한 약하지 않았다.
고블린 같은 것들이었다면, 분명 피를 철철 흘렸을 터.
“아야.”
그런데 고작 ‘아야’가 다였다.
이 덩어리, 단단했다.
“흐음, 우리 카오, 아직도 형이 어색한 모양이구나. 형은 카오랑 빨리 친해지고 싶은데.”
“어색한 게 아니라, 그냥 너 자체를 꺼리는 것 같다만?”
“에이, 공자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동물들이 절 얼마나 잘 따르는데요. 아직 어색해서 그러는 게 분명합니다. 아! 아니면 이름이 영 맘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카오는 좀…….”
“아직도 그 얘기냐? 어차피 다 낫고 나면 헤어질 녀석이야.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줘 봤자 뭐에 쓰려고? 그런 쓸데없는 걸로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검이나 한 번 더 휘둘러.”
덩어리는 분명 강하고 단단했다.
그러나 결코 강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 무리의 강자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덩어리를 찍어 누르는 인간, 카오의 본능을 자극해 이곳까지 오게 만든 저 인간이 진짜 강자였다.
“그래도 그렇지, 울음소리를 그대로 가져다 짓는 건 솔직히 너무하잖아요. 애정도 전혀 안 느껴지고. 그러니까 찬찬히 고민해 보고 다시 지어 주는 게…….”
“헛소리나 늘어놓는 거 보니 아직 힘이 많이 남은 모양이네. 좋아, 한 판 더 가자고.”
분명 인간이었다.
연약한 살점으로 둘러싸인 별 볼 일 없는 인간.
그런데 저 인간은 아무리 봐도 인간 같지가 않았다.
강한 것도 강한 것이지만, 검었다.
검고도 검어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떠돌이 수컷 와이번 따위는 상대도 되지 못했다.
어미를 죽이고, 카오 역시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그 괴물조차 말이다.
처음 검은 인간의 눈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분명 무시무시한 두려움이었다.
한데 경계를 넘어선 순간, 완전히 뒤집혔다.
더는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고 포근했다.
어미의 품과 같은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고 싶지 않은 그런 안락함이랄까?
동시에 본능 또한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에 저 인간의 옆만큼 안전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저 인간의 영역을 절대로 벗어나지 말라고 말이다.
“아니요, 남은 힘 없습니다. 제발 좀 보시라니까요, 제 팔다리 떨리고 있는 거?”
“보이긴 하는데, 아직 서 있잖아? 그럼 된 거지.”
“안 됩니다! 우리 카오 때문에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이 가여운 녀석, 밥때랑 약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렇지, 카오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때였다.
덩어리의 시선이 돌아왔다.
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차 머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쓰다듬기라도 하려는 모양.
그러자 본능이 한 번 더 가리켰다.
바로 지금이라고.
투욱.
이번에는 쪼지 않았다.
대신 슬며시 밀었다.
덩어리의 몸을, 검은 인간에게로.
“어어……?”
무슨 상황인지는 당연히 몰랐다.
하지만 이러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하면 왠지 검은 인간이 좋아할 것만 같았다.
“저런, 너희 카오는 너랑 생각이 다른 모양인데?”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검은 인간이 좋아하고 있었다.
“카, 카오야…….”
카오는 굳게 다짐했다.
무조건 저 검은 인간 옆에 착 달라붙어 있으리라고.
덩어리를 희생양 삼아서라도, 반드시.
이것이 졸지에 어미를 잃고 거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카오의 유일한 목표이자 청사진이었다.
* * *
처음 계획은 분명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이었다.
상처가 아문 뒤에는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당연했다.
새끼이기는 해도 그리핀은 분명 몬스터였으니까.
그런데 이 녀석이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를 않았다.
억지로 떠나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서라도 악착같이 따라붙는 카오였다.
또, 내가 하는 말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귀신같이 이행하는 녀석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데리고 다니게 되었고, 어어 하는 사이에 끝내 카오도 우리 일행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셋으로 불어난 일행을 이끌고 이베리아 영주성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곧장 지휘부로 불려 들어가 남부군 사령관을 대면하고 있는 참이었다.
한데 이 남부군 사령관, 나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닿은 사람이었다.
“늦었지만 일단 감사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각하.”
“감사 인사?”
“4년 전, 카르가디아 산맥에서 제 목숨을 구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디카프리 델로나 후작.
내 등장 전까지만 해도 슈라우드 왕국 전체를 통틀어 단둘밖에 없는 소드마스터 중 하나였던 인물.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아아, 그 일 말이군.”
“그때는 의식이 없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인사 올리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트윈 헤드 오우거가 출현하여 바르코스 요새를 뒤집어 놓았던 4년 전.
당시 나는 정찰대의 일원으로서 트윈을 뒤쫓아 카르가디아 산맥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트윈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결국 놈을 처치했지만,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이때 디카프리가 직접 산맥 안으로 들어와 나와 정찰대원들을 구조한 것이다.
“음, 감사를 받기에는 좀 민망한데. 솔직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경들을 이송한 것밖에 없지 않나?”
“어찌 됐든 그 덕에 저희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경이 정 그렇다면야. 알겠네, 감사 잘 받았네.”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계속 방치됐다면 우리는 여타 몬스터들의 한 끼 식사 거리가 되고 말았을 터.
따라서 디카프리는 감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고, 결국 그것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현 상황 및 작전에 관한 논의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나?”
“전력 배치 현황 정도는 들었습니다만, 자세한 부분까지는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사항은 기본적인 병력 현황 정도였다.
현재 슈라우드 군 5천과 바이젠 군 1만이 전투를 앞둔 상태였다.
두 배나 차이 나는 병력.
그러나 이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난 전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쪽은 슈라우드였다.
그렇기에 슈라우드가 이베리아 영지의 2/3와 함께 영주성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
즉, 수성의 입장인 것이다.
두 배 정도 되는 병력 차는 얼마든지 극복 가능했다.
“그런가? 어차피 전체적인 전력 면에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으니, 지금 알고 있는 정도만 해도 충분할 걸세.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전력이 아니야.”
“하면……?”
“의도야. 바이젠 놈들이 이번 전쟁에 품은 의도. 저놈들, 무언가 숨겨 놓은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단 말이지.”
“어떤 면에서 말씀입니까?”
“며칠 전 바이젠의 총사령관이 갑자기 바뀌었네. 미르겔 마이웨더 후작에서 놈들의 왕세자로. 지금 바이젠 진영에 왕세자가 직접 와 있어.”
지난 10년간 벌어졌던 세 번의 전쟁 동안 양측 총사령관은 각각 고정돼 있었다.
슈라우드는 디카프리로, 바이젠은 미르겔 마이웨더 후작으로.
미르겔 또한 소드마스터임은 두말할 필요 없었고 말이다.
따라서 이번 전쟁 역시 미르겔이 맡을 것이라 예상됐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미르겔이 부사령관으로 내려가고, 그 자리에 바이젠의 왕세자 미르카디안 아조네스 바이젠이 앉았다는 것이다.
“바이젠도 분명 경의 존재를 계산에 넣고 있네. 그런데도 전쟁을 미루거나 축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전격적으로 왕세자까지 나섰어. 이게 뭘 뜻하겠나?”
“확실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게 아니고야 말이 되지 않아. 문제는 그 구석이 뭔지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고.”
디카프리의 말대로였다.
바이젠이 바보도 아닐진대 내 참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전력 보강 없이 왕세자만 전장으로 보낸다?
이는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수를 준비해 둔 것이 분명했다.
“해서 경에게 한 가지 협조를 구하고 싶은 게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