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장: 혼담(3)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귀국길의 마차 안.
때는 레나가 나에게 혼담 진행을 허락해 주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아, 물론 진짜 혼인을 하자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라이가 원치 않는데 제 처지를 이용해서 억지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거든요. 더구나 이 혼담, 어차피 성사될 리도 없고요.”
이제 막 이야기가 시작된 참이었다.
한데, 레나는 시작 지점부터 이 혼담의 실패를 예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혼사를 제안한 장본인이 말이다.
“……?”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제국이 개입할 테니까. 황태자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 눈에 전 이미 그 사람 것이나 다름없을 테고, 그런 만큼 분명 훼방을 놓을 거예요.”
“하지만 왕녀님,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제국과 황태자의 개입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이에 대해 마차 안에 함께 있던 유모 줄리아가 의문을 제기했다.
“왕녀님 혼사는 왕국 내부의 일 아닌가요?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드마스터인 라이오넬 공자님과 진행하려는 혼사인데, 외부에서 무슨 명분으로 훼방을 놓을 수 있겠어요?”
“명분은 이미 주어졌어. 라이가 저택에 침입한 그 순간부터. 라이가 황태자를 위협했다, 뭐 이런 명분으로 딴지를 걸 거야.”
“그렇지만 공자님이 그곳에 침입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않나요? 분명 황태자가 먼저 왕녀님을…….”
“날 납치한 건 결국 내 오빠니까. 크리스토퍼, 그 인간이 연관된 이상 라이가 침입한 이유 같은 건 얼마든지 무시하고 넘길 수 있어.”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레나의 예측이 지닌 설득력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줄리아였다.
“하면 그날 그 자리에서 저를 잡아들이지 않았던 건……?”
“라이가 소드마스터니까요. 일국의 보물을, 그것도 제국에 손님으로 와 있는 상태에서 잡아들이는 건 황태자 입장에서도 부담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귀국한 뒤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직접 잡아들이지는 못하겠지만, 명분으로 쓰는 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레나는 제국 개입 이후의 상황도 짐작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왕국은, 그중에서도 특히 나는 이 난국을 타개할 힘이 없어요. 최소한 무언가 하나는 내줘야 할 가능성이 크고, 현실을 고려할 때 그 무언가는 높은 확률로 내가 될 거예요.”
그 내용은 심히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레나가 내놓은 전망이기까지 했다.
뭐라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상황.
“그런데 어찌 보면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번 일 덕분에 제 삶의 이정표를 확실히 정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죠.”
그러나 레나에게 좌절의 기색 같은 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더는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조금 똘똘할 뿐인 일개 왕녀로 살지 않아요. 내 세력을 만들고 키워서 당당한 한 명의 계승권자로 우뚝 설 작정이니까.”
“왕녀님, 그건…….”
“알아, 줄리아. 왕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 극도로 험난하기도 할 테고. 하지만, 그래도 난 할 거야. 그 가능성을 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내 옆에 있는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내 그 눈빛이 똑바로 나를 향했다.
“그러니까 라이, 지금부터 하는 게 내 진짜 부탁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강렬의 수준이 아니었다.
“날 위해 희생해 줄 수 있나요? 내가 라이를 다시 내 곁에 불러올 그 날까지, 오직 나 하나만을 믿고.”
강렬을 넘어 폭발의 지경에 다다랐다.
활화산과도 같은 의지의 폭발.
“오롯한 내 첫 번째 신하로서.”
폭발하는 의지와 함께 레나는 나에게 부탁했다.
자신의 신하가 되어 달라고.
그녀를 위해 그 어떠한 희생도 감내할 수 있는, 그녀 생애 첫 번째 신하가.
“…….”
이런 그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대답?
한 가지뿐이었다.
말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릉.
그리고 여정을 뽑았다.
비좁고 흔들리는 마차 안이라는 사실 따위 개의치 않았다.
찌를 것도, 휘두를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어깨너비로 벌린 양 손바닥 위에 가만히 얹어 두었다.
털썩.
그대로 왼쪽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양손에 받친 여정을 위로 들어 올렸다.
무릎과 검 모두 오로지 한 사람, 레나를 향해서.
“부탁하지 마십시오.”
“라이.”
“명령하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레나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숙인 내 고개를 향해 쏟아지는 그녀의 타오르는 눈빛이.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내 그녀가 이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꽈악.
내가 내민 나의 검, 여정을 쥐었다.
툭.
그러고는 칼등을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얹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툭.
다음은 머리 위를 지나 나의 왼쪽 어깨에.
“나, 비아트릭스 셀레스티나 슈라우드, 주군으로서 나의 오롯한 첫 번째 신하에게 명한다.”
툭.
마지막으로 오른쪽 어깨 위에 다시 한번.
그리고 명령했다.
“그대의 주군을 위해 그대의 모든 것을 바치라.”
이에 나는 주었다.
지금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줘야만 하는 한 가지 대답을.
“신 라이오넬 라인하트,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 * *
한 가지 바람이 있다는 말을 꺼낸 뒤, 잠시 레나와의 일을 떠올렸다.
“얘기해 보게. 무엇을 바라나?”
오브리가 국왕의 질문이 그런 내 짧은 회상을 끝마쳤다.
그렇게 다시 현재, 대전 안.
상황은 이미 마련해 두었다.
대신들 모두의 시선이 오로지 내 입에 쏠려 있는 현 상황.
거칠 것이 없었다.
“반드시 제 잘못을 상쇄하는 공을 세우겠습니다. 아니, 그 이상을 왕국에 안기겠습니다.”
하여 내 한 가지 바람, 정확히는 처분 수용의 조건을 밝혀 갔다.
담담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타협의 여지 따위는 완전히 배제한 채로.
“대신, 그때까지 1왕녀님의 혼인은 미뤄 주십시오. 상대가 그 누가 됐든, 어떤 이유가 됐든 상관없이, 무조건.”
“그게 무슨 뜻인가?”
“작위나 영지 따위 평생 받지 못한다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정계 진출 금지가 아니라 아예 왕도 출입을 금지당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 바람은 오직 1왕녀님만을 향해 있을 뿐입니다.”
오로지 레나였다.
그녀만이 내 바람이고 조건이었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녀의 혼인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 이외에는 그 누가 됐든, 설령 상대가 황태자라 할지라도.
“너무 과한 조건을 걸고 있구려, 라인하트 경. 왕실을 의도적으로 곤란하게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오.”
“나로움 후작?”
물론 이에 대한 걸림돌은 존재했다.
오브리가 국왕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는 대신 하나가 딴지를 걸고 들어왔다.
슬런트 나로움 후작.
동부 나로움 후작가의 현 주인이자, 클리앙 나로움의 아비인 동시에, 1왕자 크리스토퍼의 외삼촌이기도 한 인물.
그가 대놓고 내 조건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왕녀님은 슈라우드 왕국의 안녕과 평화에 이바지할 의무를 지니고 계십니다. 이 의무에 예외를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때마침 더할 나위 없는 혼처에서 왕녀님께 관심을 보이는 만큼…….”
“제 충성에 다른 것들은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방지턱 정도에 불과했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했다.
대륙 최연소 소드마스터이자, 그럼에도 방금 부당한 처분에 대한 전적인 수용 의사를 밝힌 나에게는.
나로움 후작이 언급한 왕국의 안녕과 평화?
여기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누가 뭐라 해도 소드마스터였다.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소드마스터가 놓는 엄포 아닌 엄포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1왕녀님뿐입니다, 슈라우드 왕국을 향한 제 충심을 굳건히 해 주실 분은. 1왕녀님만 있다면, 왕국을 위해 지옥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자신이 있습니다.”
레나를 나 이외의 남자에게 시집보내면, 왕국을 향한 내 충성도 끝이라는 엄포.
나를 왕국에 붙들어 두려거든 레나를 그 자리에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다.
일종의 협박이라고 봐도 좋았다.
슈라우드 왕실을 향한 협박은 황태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나 또한 얼마든지 가능했다.
나아가 내 것이 황태자의 그것보다 배는 강력했다.
소드마스터의 숫자는 일국의 안보와 직결된 사안.
여타 대안을 강구할 수 있는 외교 문제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나 대신 다른 소드마스터를 보충해 주는 게 아닌 한은 말이다.
더욱이 난 과하고 부당한 처분을 모두 수용하기로 한 참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명분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황태자가 나에 대한 압송 카드를 더는 써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면 눈치 볼 것 없었다.
대놓고 협박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레나를 가지고 장난질 치면 정말 재미없을 거라고.
“그러니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왕녀님 혼인은 미뤄 주십시오. 모든 처분을 수용하고, ‘그럼에도’ 왕국을 위해 분골쇄신할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당연히 눈치 따위 보지 않았다.
나의 노골적인 협박이 대전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
대전이 다시 한번 침묵에 잠겼다.
다들 속으로 계산하느라 바쁠 터였다.
내가 내건 조건이 향후 슈라우드 정계에 불러일으킬 변화에 대해서.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했다.
판도에 영향을 미칠 새로운 세력가가 등장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레나였다.
조건의 거부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미 받아들여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를 통해 레나가 슈라우드 정계에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더는 언제 팔려 갈지 모르는 일개 왕녀가 아니었다.
제국 황태자는 물론이고 대륙 최연소 소드마스터의 열렬한 구애를 받는 왕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이에 끼어 오히려 세력 축으로서의 안정성을 확보한 왕녀이기도 했다.
황태자나 소드마스터 급이 아니고는 함부로 찔러 볼 수조차 없는 위치가 된 것이다.
동부도 서부도 아닌 중립 세력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조건.
중앙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최적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말처럼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중립 세력의 요구는 각양각색일 터.
그것들을 적절히 조율해서 하나로 뭉치는 게 간단할 리 만무했다.
또, 1왕자 측의 견제와 방해는 불 보듯 뻔했으며, 3왕자 측과의 관계도 복잡할 터였다.
무엇보다 왕녀라는 신분이 지니는 사회적 인식과 그 한계를 극복해야만 했다.
험난한 가시밭길이 예고된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않았다.
레나라면, 내가 선택한 그녀라면 누구보다 현명하게 헤쳐 나갈 테니까.
설령 그 길 위에서 드높은 벽에 막힌다 해도 상관없었다.
레나에게는 좌절하거나 주저앉을 틈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첫 번째 신하인 내가 모조리 박살 내 버릴 작정이었으니까.
압도적인 힘으로,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 * *
“최전방으로 간다지?”
“예, 그러려고 합니다. 제가 벌인 일을 수습해야 해서요.”
“하긴, 듣자 하니 거하게도 벌여 놓았더구나. 아예 왕국을 뒤집어 놓았으니.”
“소식이 데파이 님 귀에까지 닿은 모양이네요.”
“딱히 알려고 한 건 아니다만, 카이트 녀석이 떠벌리고 가더구나.”
오랜만에 데파이 스토스에게 들른 참이었다.
흑광석을 건네기 위해 들른 뒤로 첫 방문이니만큼 근 1년 만의 재회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해 들었습니다, 쉬르더 후작 각하와 친우시라고. 그나저나 살짝 얼떨떨하네요, 데파이 님이 먼저 저를 부르신 게 이번이 처음이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한데, 이 재회가 조금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때 되면 내가 알아서 찾아오는 식이었다.
반면, 이번 만남은 데파이가 먼저 나를 불러낸 상황인 것이다.
데파이의 성격을 고려하면 무언가 일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혹시 흑광석이 더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영지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 가지고 놀 만큼 가지고 놀았으니까.”
“그 말씀은……?”
“그래, 이제 필요 없다. 네 녀석을 부른 건 그 결과를 보이기 위함이고.”
확실히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