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장: 혼담
스아악~
머리를 노리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검.
한데 이 검은 그냥 검이 아니었다.
두 가지 특징을 지닌 검이었다.
하나는 검 위에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나 있다는 점.
즉, 검을 휘두르는 이가 소드마스터라는 의미였다.
나머지 하나는 이 검의 제작자를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파이 스토스가 만든 검이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현재 나에게 검을 내리치고 있는 이는 소드마스터이자 데파이와 연이 닿아 있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현재 검이 휘둘러지는 장소가 슈라우드 왕궁 내 연무장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인물의 정체는 한 명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카이트 쉬르더 후작.
슈라우드 왕국의 근위기사단장이자 둘뿐인 소드마스터 중 하나.
이런 카이트가 나에게 오러 블레이드가 덧씌워진 검을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콰강!!
물론 방어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러 블레이드가 덧씌워진 여정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검격을 막아 냈다.
가각.
단순히 막아 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카이트의 검격이 지닌 무게중심을 아주 살짝 비트는 데에 성공했다.
극히 미세해서 비틀림을 당한 당사자조차 정확히 포착해내지 못할 정도.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했다.
오롯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려오던 카이트의 힘.
이 힘을 조금이나마 분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 간의 대결에서 이 조금은 결코 조금이 아니었다.
일격 일격에 따르는 힘의 소모도에서 극명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러 블레이드 간 충돌이 유발하는 힘의 소모는 그 비교 대상이 전무할 지경.
따라서 당장에 승부를 가를 만큼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제국행을 통해 얻은 소득 중 하나라고 할만했다.
검술에 있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라인하트 검법의 핵심은 무게중심을 다루는 것.
자연스레 마스터로의 키 또한 여기에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완성을 바탕으로 상대의 무게중심까지 통제하는 것 말이다.
라인하트 검법으로 마스터에 도달한 나는 당연히 이것이 가능했다.
단, 상대에 따른 활용도 차이는 불가피했다.
상대의 경지가 소드 익스퍼트까지라면 무게중심을 얼마든지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
반면,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면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의 무게중심을 느끼더라도 거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제국을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그랬던 것이 제국을 다녀오며 달라졌다.
정확히는 브루노 다스를 상대한 뒤부터였다.
경지에 발전이 있었고, 덕분에 이제는 미세하게나마 영향을 미치는 일이 가능해졌다.
지금 내가 카이트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콰강! 콰캉!!
재차 이어지는 내려치기와 사선 베기까지 깔끔하게 막아 냈다.
마찬가지로 카이트의 무게중심을 약간씩 흔들어 준 덕분이었다.
이만하면 역습도 충분히 노려 볼 만한 상황.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오히려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금 펼치고 있는 대결의 성격 때문이었다.
이 대결의 목적은 승부를 가리는 데에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증명에 불과했다.
제국행을 통해 드러난 내 경지에 대한 공식적인 증명, 그리고 이를 위한 대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브루노 때처럼 진심으로 카이트를 쓰러뜨릴 이유는 없었다.
카이트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음…….”
다만 카이트는 어딘지 개운치 못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럴 만했다.
카이트의 검법은 쾌검 계열.
따라서 공세의 와중에는 상성 상 중검을 밀어붙이는 장면이 펼쳐져야 했다.
속도 면에서 앞서는 만큼 반 템포씩 먼저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세라면 반대로 힘에 밀려 손해를 보는 장면이 그려지겠지만, 지금껏 카이트의 공세가 이어진 참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그가 이득을 보는 것이 정상적인 흐름이었다.
하나, 딱히 이득을 봤다고 느끼지는 못했을 터.
비록 전력을 다하는 승부가 아니라 해도 찝찝함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번뜩.
파앗!!
이런 이유로 판단됐다.
카이트의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진심이 번뜩인 것은.
동시에 그가 오늘 대련에서 처음 보이는 속도로 짓쳐 드는 것 역시도.
스각~!
그의 쾌검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나를 찔러 들어왔다.
단순한 속도만이 아니었다.
트릭까지 가미된 상태였다.
오른쪽 허리 부근을 찌르는 듯하다, 순식간에 왼쪽 어깨 부근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이에 내 대응 또한 살짝 늦어지고 말았다.
이대로면 방어 자체는 문제없겠으나, 힘의 소모 측면에 있어 약간의 손해는 감수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카강!!
카가가각~!
이번에도 재탕이었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막아 냈다.
검의 밑부분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공격이 어깨 위로 빗나가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이렇다 할 힘의 손해 또한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중심을 흔들며 찌르기가 지닌 힘을 분산시킨 덕분이었다.
“…더 해 봤자 의미가 없겠군.”
그리고 이 지점에서 대련은 끝이 났다.
회심의 일격까지 깔끔하게 막히자 카이트가 먼저 검을 거둔 것이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후작 각하.”
“그리 말하면, 내가 민망해지지 않나? 솔직히 내가 한 수 배운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브루노 백작을 순식간에 제압한 게 결코 운은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었다.
비록 지금처럼 무게중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신 당시에는 정령력을 비장의 무기로 활용했다.
그 결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운과는 거리가 아득히 먼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들을 내 입으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
그저 가벼운 침묵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짝짝짝짝.
때마침 굳이 답변에 대한 고민조차 필요 없게 만들어 주는 변수가 끼어들었다.
나와 카이트가 서 있는 연무장을 향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박수 소리였다.
“정말 대단한 대결이었소.”
동시에 목소리도 함께였다.
나와 카이트의 대련을 관람한 이의 한껏 들뜬 목소리.
“검은 잘 모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그렇지 않았소, 백작?”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까지 봐 온 대결들하고는 확실히 수준 자체가 다르더군요.”
슈라우드 왕국의 현 국왕, 알렉산드로스 오브리가 슈라우드였다.
그가 내무 대신인 아이르만 다스더 백작과 함께 연무장으로 내려오며 박수와 칭찬을 쏟아 냈다.
“전도유망하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20살도 되기 전에 이런 위용을 뽐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현 상황이 나타내듯, 나는 귀국 후 곧장 라인하트 영지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왕궁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었다.
또, 그 기간도 적잖이 길어질 예정이었다.
현재 슈라우드 왕국 정계에 불어닥친 태풍, 이 태풍의 핵이 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왕이 직접 배정해 준 귀빈실에 머물며, 연일 그의 부름과 주요 귀족들의 방문을 받는 중이었다.
여담으로 이런 나와는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1왕자 크리스토퍼.
레나는 답답하게 참거나 끙끙 앓지 않았다.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국왕에게 곧바로 일러바쳤다.
크리스토퍼가 저지른 만행과 월권에 대해서.
이 과정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적절한 양념을 치는 것 역시 빼먹지 않았고 말이다.
그 결과, 현재 크리스토퍼는 국왕의 명령으로 자신의 궁에서 근신하는 처지였다.
“이러다 우리도 제국처럼 그랜드 소드마스터 보유국이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려. 아아, 그렇다고 부담 갖거나 하지는 말게, 라이오넬 경.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니.”
이렇듯 한껏 들뜬 국왕의 주도 아래 연무장에서 국왕 집무실로까지 담소가 이어졌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이 전부였지만, 어색할 틈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국왕과 아이르만이 대화를 쉬지 않고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부 나와 관련된 주제들로만 꽉꽉 채워서.
“그건 그렇고 라이오넬 경,”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었다 여겼는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오는 국왕이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그의 질문 역시 눈빛만큼이나 의미심장했다.
“우리 레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레나에 대해 묻는 국왕.
그 의도야 뻔했다.
바로 레나와의 혼인.
국왕은 제국으로 향하기 직전의 만남 때와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당시는 괜한 추문에 얽히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며 부탁을 가장한 경고까지 하던 그였다.
한데, 이제는 본인이 먼저 나서서 혼담을 꺼내는 중이었다.
물론 충분히 이해는 갔다.
내가 소드마스터임이 밝혀지며 달라진 것들이 많은 상황이었으니까.
“마침 우리 레나가 경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모양이더군. 내 눈에는 어쩐지 경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말이야.”
무엇보다 레나가 먼저 국왕에게 운을 띄웠을 터였다.
마차에서 나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말이다.
“경 생각은 어떤가? 경만 괜찮다면 내가 레나의 아비이자 국왕으로서 혼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볼까 하는데.”
* * *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전하, 지금 추진 중이신 혼사, 접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혼사를 접으라니?”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1왕녀님과 라인하트 둘째 공자의 혼사, 중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 또한 그래서 묻는 것이네. 두 사람의 혼인은 엄연히 우리 슈라우드 왕국 내부의 일. 제국의 사신인 그대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 않나, 이반 자작?”
오브리가 국왕이 한창 레나와 라이오넬의 혼사를 주도해 가던 때였다.
일이 막 순조롭게 본궤도에 오르려던 찰나, 갑작스러운 태클이 들어왔다.
뜬금없이 제국의 사신으로 슈라우드 왕궁에 입궁한 카일 이반 자작이었다.
그가 레나와 라이오넬의 혼사에 정면으로 태클을 걸고 나선 것이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 다만 제가 사신으로 온 일과 전하께서 추진하시는 혼사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보니, 우려되는 마음에 그만……. 주제넘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전하.”
자칫 제국의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있는 사안.
이에 간섭의 의도는 없었다며 사죄를 올리는 카일이었다.
국왕을 향하는 눈빛과 표정, 그 어디에도 진심은 서려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제국의 사신과 혼사가 관련되어 있다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얘기해 보게.”
“제가 사신으로 온 것은 라이오넬 라인하트를 제국으로 압송해 가기 위함입니다.”
“……!!”
실제 그가 전하는 내용은 한층 더했다.
사죄가 그저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하필 이 타이밍에 라이오넬을 압송해 가겠다는 것 자체가 그런 의미였다.
제국이 슈라우드 왕실의 혼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미.
간섭의 의도가 충만하다 못해 넘쳐 흐를 지경이었다.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혼사의 한쪽 당사자에게 문제가 생길 것을 아는 입장인지라.”
“…이러는 이유가 대충 짐작은 되네만, 무슨 명목으로? 어설픈 명목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거, 자작이 더 잘 알 테지?”
제국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야 자명했다.
이 혼사를 방해하고, 끝내 레나를 황태자의 품에 안기려는 것일 터.
단, 오브리가의 경고대로였다.
어설픈 명목을 들이댔다가는 되려 역풍만 맞게 될 수 있었다.
라이오넬이 지니는 의미와 무게 때문이었다.
라이오넬은 소드마스터였다.
그리고 소드마스터가 지니는 의미는 간단명료했다.
국력의 지표.
소드마스터의 숫자가 곧 국력을 의미했다.
따라서 소드마스터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국가 차원의 보물이 되는 것이다.
한데, 라이오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륙 최연소 소드마스터이자, 그랜드 소드마스터를 가시권에 둔 불세출의 천재였다.
이제 겨우 19살이라는 나이, 브루노 다스를 꺾은 실적 등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지닌바 무게가 여타 소드마스터들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이런 라이오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국이라 한들 정말 제대로 된 명목을 들이밀어야만 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납득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만큼 무거운 죄목이니까요.”
“그러니까, 그 납득할 수밖에 없는 죄목이라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시해 미수입니다. 로만 제국 황태자 전하에 대한 시해 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