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75화 (76/200)

41장: 레나의 결심

“…….”

문을 열고 들어선 뒤 느낀 분위기는 예상했던 방향과 차이가 있었다.

차분하고 잔잔했다.

실제 눈에 들어오는 광경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격식을 갖춘 식사가 진행 중이던 것처럼 보였다.

비록 레나의 앞에 놓인 음식들에는 손댄 흔적이 전무했지만, 어쨌든 보이는 광경만 놓고 보면 그러했다.

레나의 용모 또한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단정한 상태였다.

즉, 우려하던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모양.

아니면 애초에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회귀 전, 나는 이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했다.

레나가 나와 브로든을 자주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날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다.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혼자 속으로 삭였을 뿐.

그렇다고 나나 브로든이 먼저 물을 만한 성격들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차피 당시에는 진실이 의미를 갖지도 못했다.

진실이 어떠하든 레나는 네 번째 황태자비로 제국에 팔려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까.

이런 이유로 나는 현 상황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 다시 한번 레나를 유심히 살펴 가던 때였다.

“왔나?”

황태자 아이단이 먼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이에 나 또한 레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정은 이미 납검한 뒤였다.

황태자 앞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한들, 그의 앞에서 검을 빼 들고 있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대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여기까지 도달했다라…….”

내가 비밀통로를 거쳐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아이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보고를 받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는 놀랍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 저택 3층까지 당도한 시간, 그리고 이로부터 추정되는 나의 실력이 그 원인이었다.

“보기보다 굉장히 음흉한 친구였군. 대체 언제 마스터에 도달한 건가? 심지어 숨겨 둔 게 더 있는 듯도 하고. 흠, 아무래도 정령석이려나?”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대륙의 역사를 새로 써 놓고 운이라니? 가이덴 드라이슬러 공작도 그대 나이에 그대 같은 기적을 써내지는 못했어.”

가이덴 드라이슬러.

대륙 전체에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는 로만 제국의 근위기사단장이자 유일한 공작이라는 사실을 제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직위나 작위 따위는 이 사람의 유명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을 형용하는 다른 수식어들이 너무나도 엄청난 것들뿐이었으니까.

에펜시아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마스터, 그리고 대륙 최강.

가이덴 드라이슬러를 칭함에 있어 이 외의 것들은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아이단은 나를 이런 초인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충분히 오해 가능한 상황이기는 했다.

고작 19살에 이미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심지어 완숙한 소드마스터를 눈 깜박할 새에 처리하기까지 했다.

언제 뛰어넘은 것이고, 어떻게 처리한 것인지 등은 알지 못하겠지만, 객관적으로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보는 아이단의 눈빛 또한 한층 더 심유해지는 중이었다.

“역시 대답해 주지 못하겠다는 거군. 그럼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같은 것도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겠지?”

“…….”

물론 대답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여러 가지가 얽혀있었다.

정령석부터 아인한드라, 그리고 근본적으로 회귀까지.

그렇기에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뭐, 직접 알아 가는 것도 재미있겠지. 그러는 편이 끝내 원하는 걸 얻어 냈을 때의 성취감도 훨씬 커질 테고.”

작게 피식하는 아이단.

그러고는 성취감 이야기와 함께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였다.

이로 인해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 그럼.”

잠시 후, 이 정적을 깬 것 역시 아이단이었다.

“어차피 오늘 일은 완전히 어그러졌겠다, 이만 가 봐도 좋소, 레나.”

“…….”

“가서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도록 하시오. 아마 오늘 여러모로 많이 놀랐을 테니.”

그의 어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고 산뜻했다.

다만, 그 내용까지 가볍고 산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의미심장했다.

“또 봅시다, 레나. 예상보다 길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아, 그리고 이건 그대도 마찬가지겠군. 금방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리고 이는 비단 레나만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라인하트 공자. 아니, 라이오넬.”

* * *

“같이 갔으면 다들 참 좋아했을 텐데, 아쉽게 됐네요.”

“그럴 사정이 못 된다는 거, 유모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지요. 단지 풀 죽어 있는 아이들이 눈에 밟힐 뿐이랍니다.”

슈라우드 왕국으로 복귀하는 길 위.

이 길 위의 마차 안에서 줄리아는 떠나간 이를 아쉬워하는 중이었다.

사실 줄리아 혼자가 아닌 시녀들 전체의 아쉬움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떠나간 이가 바로 아인한드라였기 때문이다.

사태가 있었던 날로부터 나흘 뒤, 황도 아카데미에 매튜가 도착했다.

이에 예정대로 매튜 편에 아인을 북방 극지대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가량 지난 지금, 슈라우드 사절단 또한 귀국길에 오른 상태인 것이다.

“공자님도 아쉽지 않으신가요?”

줄리아가 마차 안에 함께 있던 나에게 되물었다.

애초에 아인을 구해 온 장본인은 나였다.

그런데 이렇듯 금세 그를 떠나보내게 됐으니 아쉽지 않냐는 것.

“물론 저도 아쉽긴 합니다만, 아인과의 인연이 이대로 끝은 아닐 겁니다. 머지않아 또 만날 수 있을 테지요.”

다만, 내 아쉬움은 실제로 그리 크지 않았다.

떠나기 전, 아인은 일족의 일이 안정되고 나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이엘프의 약속이었다.

하면 재회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것.

그리고 꼭 이 약속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모르게 아인과의 관계는 이대로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당장의 짧은 이별은 나에게 크게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단 아인만이 아니었다.

그래플 스트라우스와도 짧은 이별을 고한 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국인 마이바크 왕국을 향해 떠나간 상황.

하나, 이 또한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역시 머지않아 분명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제국행을 통해 얻은 소득이 적지 않았다.

아인과 그래플, 이 두 친구와 인연을 쌓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냥 친구들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앞으로 내가 펼쳐 갈 싸움에 있어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조력자들이기도 했다.

적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 소득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제국행이 나에게 가져다준 소득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건너편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레나였다.

원래라면 그녀에게 벌어졌어야 할 비극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다.

이는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소득이었다.

두 친구와의 인연은 굉장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가외 소득.

운 좋게 얻어걸린 측면이 강했다.

반면, 레나의 비극을 막아 낸 일은 이번 제국행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제국행의 목표는 처음부터 오직 이것뿐이었으니까.

이 목표를 끝내 이룩해 낸 참이고 말이다.

그날, 결국 황태자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뒤로한 채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밖에 서 있던 크리스토퍼를 마주했지만, 특별한 해프닝은 발생하지 않았다.

레나는 그저 그를 일별하고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물론 거기에는 벌레 보듯 경멸 어린 시선이 가미돼 있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크리스토퍼였다.

레나 옆에 선 내 눈치를 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잡혀 있던 시녀와 호위 기사들까지 데리고 처소로 복귀하며, 그날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단, 마무리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날 하루에 불과했다.

사건 자체가 매듭지어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레나가 벌써 2주 가까이 그날 이야기에 대해 침묵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회귀 전과 같이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회귀 전처럼 극도의 우울함과 침울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깊이 고민하는 기색이랄까?

하여 이번에도 나서서 묻지 않았다.

레나가 먼저 이야기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부른 레나였다.

말이 아닌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인 것도 그런 이유일 터.

“그날 일, 많이 궁금했죠?”

나와 줄리아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음 정리를 완전히 끝낸 모양이었다.

이윽고 닫혀 있던 레나의 입이 열렸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나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할 것들이 좀 있었거든요.”

“괜찮습니다. 힘드시거든 굳이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생각도 마쳤고, 또 그와 관련해서 라이에게 부탁할 것도 있어요. 그러니까 라이가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레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나가 망설임 없이 그날의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날, 결국 물리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물론 라이의 공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지만, 설령 라이가 구하러 와 주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역시 그때 느꼈던 바가 맞았다.

예상과는 달리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

실제 상황 또한 이 분위기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황태자가 하는 말이, 분명 저를 범하고 싶은 욕구는 일지만, 딱히 강제로 하는 것에 취미는 없다더군요. 어차피 저는 본인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제가 정식 황태자비가 되는 날 좀 더 즐겁게 해소할 작정이라고.”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시 레나가 느꼈을 암담한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강간을 예고한 셈이었다.

심지어 당시 상황대로라면 120%의 확률로 실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예고.

여기서 오는 두려움, 참담함, 무력함 따위의 감정들은 남이 재단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왕녀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나요? 혹시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기 어려운 부분이면 저한테만이라도 따로…….”

“말했다시피 몸은 괜찮아, 줄리아. 정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마음이 괜찮지를 않았어. 그래서 혼자 정리를 좀 했던 거고.”

잠시 줄리아를 안심시킨 레나.

그런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나에게로 넘어왔다.

그러고는 오늘의 본론, 정리된 마음을 털어놓는 그녀였다.

“그동안 쭉 참아 왔어요. 크리스토퍼 그 인간이 저를 대놓고 인형 취급하든, 왕실 사람들이 은근히 희생을 강요하든, 뭐가 됐든 전부다. 그게 저에게 주어진 운명이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요.”

마음이라기보다는 의지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했다.

앞으로 그녀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레나 본인의 의지.

“더는 참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생각이에요. 그래서 라이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해요.”

그리고 이런 레나의 의지에는 내가 포함돼 있었다.

아니, 포함된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만큼이나 강렬한 레나의 제안이 이를 방증했다.

“나, 라이와 혼담을 진행하려고 해요. 허락해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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