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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71화 (72/200)

39장: 황태자의 노림수

루난 상단 노예 대탈출의 그 날 이후,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그날 상단을 빠져나갔던 노예들은 극히 소수만을 제외하고 다시 잡혀 들어갔다.

결국, 황도조차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상단은 2인자였던 프레즐이라는 자가 이어받아 수습에 들어갔으며, 금세 정상궤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상단주의 탁월한 수완 때문일 리는 없었다.

사실 새로운 상단주가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황태자의 힘이 일궈 낸 결과물이었으니까.

다만, 이런 황태자의 힘도 어찌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했다.

바로 하이엘프 아인한드라.

사라진 그만큼은 황태자의 힘으로도 되찾을 도리가 없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예정됐던 경매가 물 건너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물론 사태는 공식적으로 퍼디크 개인의 실책으로 마무리 지어졌고, 여기에 황태자는 아무런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황태자가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을.

당장 어떤 유의미한 타격을 입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적어도 체면이 많이 깎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반면, 이렇듯 급박하게 돌아간 바깥 상황과 달리, 황도 아카데미 내부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특별한 사건·사고 없이 무난하게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 말인즉슨, 아인한드라 또한 아카데미 내에서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는 의미.

실제로 그는 레나와 시녀들의 방에 콕 박힌 채 지루하리만치 평온한, 동시에 안전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덕분에 나 또한 그와 격의 없는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가까워질 수 있었고 말이다.

그를 ‘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 방증이었다.

“음, 볼 때마다 감탄스럽네. 아인, 네가 입고 있는 걸 보면, 이게 내가 입었던 옷들이 맞긴 한 건가 의심스러워.”

아인을 보러 온 나는 오늘도 압도적인 그의 외모와 차림새에 감탄하고 말았다.

거의 매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절로 나오는 감탄은 도저히 금할 길이 없었다.

현재 아인이 입고 있는 옷은 분명 내 것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내가 입었던 옷 같지가 않았다.

덕분에 아인을 볼 때마다 깨닫는 중이었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입는 사람(?)이 옷의 날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는 대로 입었을 뿐이다.”

“물론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같이 지내기에 많이 불편하지? 갇혀 있는 것도 답답할 테고.”

“내가 감내할 부분이다. 내가 저들의 공간에 들어온 셈이니, 저들 역시 편치 않겠지.”

시녀들의 작품이었다.

아인을 자신들의 공간에 입성토록 허락해 준 레나의 시녀들.

아인의 무탈한 은거는 사실상 전부 그녀들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이것을 그녀들의 인내 혹은 희생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 그렇지 않았다.

아인을 모델로 연일 자신들만의 패션쇼를 펼쳐 가는 중이었으니까.

몇 벌 되지도 않는 옷으로 정말 대단한 재능과 열정을 발휘 중인 그녀들이었다.

지금도 저편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연신 얼굴을 붉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이 상황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에 대해.

“그래도 일단은 내가 왕녀님과 유모님께 한 번 더 부탁드려 볼게, 조금만 자제시켜 달라고.”

그래서인지 아인도 내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감내라는 표현도 그렇고,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도 살짝 힘에 부친 모양.

물론 이는 과정에 존재하는 약간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상황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인은 황도 아카데미 내에서 이렇듯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으면 돼. 매튜라는 아이가 상행을 꾸려서 이곳으로 오는 중이야. 거리가 거리이니만큼 시일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너를 무사히 제국 밖으로 내보내는 데에는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봐.”

“인정한다.”

단, 언제까지고 아인을 이곳에 숨겨 둘 수는 없었다.

안전 문제도 있을뿐더러, 나와 레나도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시작할 때였다.

그렇다고 사절단 행렬에 아인을 끼워 넣을 수도 없는 노릇.

아인을 제국 밖으로 빼낼 다른 대안이 필요했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매튜였다.

매튜가 이끄는 상행이라면 별다른 문제 없이 아인을 숨겨 갈 수 있을 터였다.

워낙 똑똑한 아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 또한 없었다.

“제국에서 탈출하면 곧장 북방 극지대로 간다고 했지?”

“그럴 생각이다. 그곳으로 간 일족을 찾아야 한다.”

아인은 올해로 82살의 하이엘프로서 겨울바람 엘프 일족의 수장이었다.

300년가량으로 알려진 엘프의 수명을 고려하면 상당히 젊은 나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인간의 시대에 접어든 이후 천수를 누리는 엘프는 찾아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하이엘프는 더더욱 그러했다.

정령 소환은 엘프 내에서도 하이엘프에게만 허락된 권능.

그만큼 강력했다.

그리고 이 강력함에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뒤따랐다.

최전선에서 일족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하이엘프들은 누구 하나 이 책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간과의 전쟁에서 전사자 명단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인이 제국으로 잡혀 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겨울바람 일족의 은신처에 갑자기 제국군이 들이닥쳤다.

격퇴는 불가능한 전력 차.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인이 뒤에 남았다.

혼자 남아 제국군의 발목을 잡으며 일족이 도망칠 시간을 번 것이다.

시간을 최대한 오래 끌어야 하다 보니 결국 자결하지 못한 채 사로잡힌 것이고 말이다.

그래도 그의 희생 덕분에 일족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도망친 일족이 향한 곳은 분명 북방 극지대일 터.

마지막 은신처마저 발각되고 나면 최후의 도피처로 내정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북방 극지대로 향하려는 이유였다.

“찾고 나면? 그 뒤의 계획은 있어?”

“일단 터전 마련에 전념할 생각이다. 그곳에서는 생존조차 버거운 일일 테니.”

맞는 말이었다.

북방 극지대는 인간이 완전히 포기한 지역.

카르가디아 산맥보다도 극악했다.

몬스터 때문에 개척이나 주둔은 어려워도 진입은 가능한 산맥과 달리, 그곳은 진입부터가 쉽지 않았다.

뼈를 얼리는 극한의 추위 때문이었다.

엘프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보다야 조금 낫겠지만, 엘프에게 역시 생존이 벅찬 환경임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 말고 연락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까.”

하여 나는 끝까지 아인을 도울 생각이었다.

아인이 그의 일족을 재건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정령력에 기반한 엘프의 힘은 언젠가 나에게도 큰 힘이 될 터.

아인에 대한 개인적 호감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안배까지 충분히 고려한 각오였다.

다만, 아인의 입장은 달랐다.

“라이, 그대의 말이 진심임을 안다. 하지만 이건 공정하지 못하다. 나는 그대에게 받기만 하고 있어. 그대도 나에게 원하는 바를 얘기해 주기 바란다.”

아인은 그러마 하고 간단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또한 당장 나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했다.

“글쎄,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중이면 몰라도 지금은 딱히……, 아!”

나로서는 당장 아인에게 바랄 만한 것이 없었다.

원래는 그랬다.

한데, 지금 막 한 가지가 떠오른 참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학기 말이 다가오며 부쩍 빈도가 늘어난 황태자의 초대.

이와 관련된 부탁이었다.

* * *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왕자님?”

황태자의 심복, 카일 이반 자작.

그는 현재 슈라우드의 1왕자 크리스토퍼를 찾아온 상태였다.

그러고는 크리스토퍼의 최근 안부를 묻는 그였다.

“나야 잘 지내고 있긴 한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것이오? 우리가 가끔 보는 사이도 아니고.”

크리스토퍼의 말대로였다.

기회가 될 때마다 황태자에게 들러붙는 크리스토퍼였다.

자연스레 황태자의 심복인 카일과 함께 하는 시간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따라서 카일의 질문은 그에게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었다.

“흠, 제가 지레짐작한 모양이군요. 저는 최근 왕자님의 심기가 불편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말이오?”

“셀레스티나 왕녀님 때문입니다. 왕녀님이 아카데미 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해서 그리 짐작한 것입니다.”

다만, 아예 근거 없는 질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최근 레나의 행보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능력이 꽃을 피우다 못해 만개했다.

과장 좀 보태면, 황도 아카데미 내의 국가 간 교류는 대부분 그녀를 통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발군의 활약을 보이는 레나였다.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레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였다.

황도 입성 첫날부터 대놓고 으르렁대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노릇.

그러므로 레나의 행보와 관련한 그의 심기 역시 편할 리 만무했다.

“흥! 그래 봤자 왕녀에 불과하오. 한낱 계집 따위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지.”

“그렇다 해도 각국 귀족들이 그분에게 극도로 호의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요. 현시점, 아카데미 내 사교의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왕녀님이니 말입니다.”

“글쎄, 그래 봤자라니까! 아니, 그보다 대체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뭐요? 쓸데없이 기분만 더러워지게.”

실제로 크리스토퍼는 그것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누가 봐도 신경 쓰는 게 맞았다.

그는 레나의 활약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심기가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럴 의도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하면? 이유를 말해 보시오.”

“좋은 제안을 하나 드리기 위함입니다. 제 주군이신 황태자 전하께는 물론이고 왕자님께도 유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제안을.”

지금 카일이 건네려는 제안은 여기에 기초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가 레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기에, 그녀를 극도로 싫어하기에 건네는 그런 제안.

“왕녀님을 향하는 전하의 눈길,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모를 리가 있겠소, 내가 직접 초대장을 전한 적도 있는데? 솔직히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지만.”

“그거야 취향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전하께서는 셀레스티나 왕녀님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황태자비로 들이는 것까지 고려하실 정도로.”

레나를 걸고 하는 제안이었다.

레나를 아이단의 비로 들이고자 하는 것.

사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왕녀의 정략혼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상대가 황태자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다음의 조건이 더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미 세 분의 황태자비께서 계시지요.”

황태자에게는 이미 세 명의 부인이 존재했다.

즉, 혼인이 성사될 시 레나는 네 번째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다.

쌍수를 들려다가 슬며시 내릴 수밖에 없는 조건이랄까?

이렇다 할 메리트가 없었다.

슈라우드 왕국이 무슨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니 더더욱.

“그렇다 해도 거래만 잘하면 안 될 것도 없을 텐데?”

물론 크리스토퍼의 반문대로 꼭 안 된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쌍수를 들 메리트가 없다면 만들어 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전하께서는 그 거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왕자님을 찾아뵙게 된 것이고요.”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 황태자의 노림수가 존재했다.

“아,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거래 자체를 꺼리신다는 뜻은 아니니까. 전하께서도 얼마든지 거래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단지, 그 거래 상대로 왕자님을 원하시는 것뿐이지요.”

“나를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왕자님을 각별하게 여기십니다. 하여 거래의 수혜 역시 왕자님께 돌아가기를 바라고 계시지요. 왕자님께서 슈라우드의 차기 국왕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거래 상대를 바꾸는 것이다.

레나의 아버지이자 현 국왕인 오브리가가 아니었다.

레나에게 앙심을 품은 이복 남매이자 1왕자인 크리스토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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