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구출 작전(3)
땡 땡 땡 땡!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새벽 시간.
안락한 수면을 위해 고요함이 기본 덕목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황도 한가운데 위치한 루난 상단의 현재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고요함은커녕 시끄럽기 짝이 없는 타종 소리가 상단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단 타종 소리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상단 직원들의 고함과 비명까지 추가됐다.
아우우우우~
“라이칸슬로프가 날뛴다!”
“베어족도야! 젠장할!!”
“크아악~!”
“저 드워프 막아! 정문으로 못 가게 막으라고! 도끼 뺏어!!”
“으아아악!!”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상품화 과정에 있던 노예들이 대거 풀려났기 때문이다.
단순히 풀려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강제로 자아를 상실할 뻔한 이들이었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상단에 있는 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들은 구성도 평범하지 않았다.
아인종이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평범한 인간들은 대개 아인종을 상대하지 못했고 말이다.
이들이 지닌 특별함 때문이었다.
힘이나 속도, 기술 면에서 이들은 평범한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아인종들이 분노에 가득 차 날뛰는 것이다.
상단 전체가 난장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아가 난장판은 루난 상단 내부에서 그치지 않았다.
노예들의 난동에 상단 정문이 박살 났고, 그들이 황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상단에서 황도 전체로까지 번진 것이다.
사태는 이제 일개 상단이 수습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연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이렇듯 아비규환이 펼쳐진 틈에 조용히 담벼락을 넘어가는 두 존재가 있었다.
나와 아인한드라.
모두의 시선이 분노한 아인종과 뚫려 버린 정문에 쏠린 사이, 유유히 상단을 빠져나온 것이다.
내가 아인한드라에게 다 됐다고 말하던 시간이 바로 이것이었다.
상단 지하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나는 은신과 암습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교대 시간이 되기도 전에 지하 3층에 도달했을 터.
적들은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를 나와 대면한 뒤에야 알아차렸을 터였다.
하지만 은신과 암습으로 각 층을 정리 후, 그곳에서 한 가지 작업을 더 했다.
정령력을 발휘하여 노예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그런 뒤, 아인한드라를 구출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약간의 회복 시간도 부여했다.
덕분에 아인한드라와 함께 다시 올라왔을 때는 대부분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증오와 분노로 점철된 난동 준비를 말이다.
그리하여 계획된 난장판이 펼쳐졌고, 나는 현재 아인한드라와 함께 상단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한창 황도를 가로지르던 중이었다.
말없이 뒤따르던 아인한드라가 갑자기 의문을 제기했다.
“바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대는 지금 황도의 중심 쪽으로 길을 잡고 있다. 나를 탈출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샤라락~ 샤라락~
그런 아인한드라의 주위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가 구속을 풀어 준 직후부터 불기 시작해 쉼 없이 그의 주위를 맴도는 산뜻한 바람.
정령이었다.
바람의 정령이 현신하여 아인한드라를 보호함과 동시에 그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황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맞아, 지금 우리 밖으로 나가는 거 아니야. 오히려 중심으로 가고 있어.”
의문은 정확했다.
나는 아인한드라를 이대로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원래는 아인한드라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에 대해 설명할 계획이었다.
단지 허무하리만치 간단했던 아인한드라의 동의에 그 타이밍을 놓쳤을 뿐.
“이유를 알고 싶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너를 설득하면서 얘기해 주려고 했던 건데……, 잠깐.”
하여 이제라도 그 이유를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내 감각에 포착되는 것이 있었다.
끄덕.
마찬가지였다.
아인한드라 역시 그것을 인지했고, 나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함께 근처의 건물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이 새벽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어쩌겠어? 상단 노예들이 탈주해서 황도를 헤집는 중이라잖아.”
“그러니까. 상단 노예들이 탈주한 거면 상단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왜 우리 황도 수비군까지 나서서 이런 개고생을 해야 하는 거냐 이거지, 내 말은.”
“난들 아나? 위에서 내려온 명령인데, 까라면 그냥 까야지. 그리고 말조심해. 황궁에서 기사님들까지 나왔다는 거 너도 알잖아? 재수 없으면 경을 칠 수도 있어.”
“아니, 뭐 그냥 그렇다는…….”
황도를 수색 중인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가까워지기에 일단 몸을 숨긴 것이고, 덕분에 현재 황도 돌아가는 사정도 접할 수 있었다.
다만, 딱히 이들의 입을 통해 들을 필요는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런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이게 그 이유야.”
그렇게 수색 병력이 지나간 후, 끊겼던 대화를 다시 이어 갔다.
“황도 전체는 이미 비상 경계 태세에 들어섰어. 들었다시피 사태 수습에 황궁의 기사들까지 동원된 상태이고. 황도 폐쇄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루난 상단은 황태자의 것이다.
전부터 짐작하던 부분이기는 하나, 이번 구출 작전을 통해 완벽하게 굳어졌다.
상단 지하나 지키고 앉아 있던 기사들과 마법사, 그리고 지금 이렇게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병력까지, 증거가 너무나 확실했다.
이론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 말인즉슨, 황도를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아인한드라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고작해야 일개 상단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황태자, 그리고 로만 제국 황실이라는 의미였다.
“더구나 지금 저들은 오로지 너만 노리고 있어. 나머지는 죄다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큼은 무조건 잡으려 들 거야. 황태자의 체면이 걸려 있는 문제니까.”
그리고 이는 비단 황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황태자가 연관된 이상 범위는 제국 전체라고 봐야 했다.
“물론 네 실력이면 어떻게든 황도는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멀리는 못 가. 제국의 영역 내에서, 인간의 관습에도 익숙하지 못한 데다, 그런 특출난 외모까지 지닌 상태로는 절대.”
“그렇군. 인정한다. 하나, 그렇다 해도 황도 중심을 향해 가는 건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또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건가?”
“있지, 합당한 이유.”
일반적인 방법으로 아인한드라의 제국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내가 끝까지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따라서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원래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거든.”
그로부터 20분여 뒤.
“와……, 정말 이 세상 미모가 아니네요.”
“내가 그랬잖아. 무작정 염려만 하지 말고, 일단 보고 나서 얘기하라고.”
“이건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이 정도면 왕녀님이나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 이 엘프를 걱정해야 할지도…….”
“줄리아.”
나와 아인한드라는 레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레나의 유모, 줄리아도 함께.
“인사드려. 이분들은 당분간 너를 이곳에 숨겨 주실 비아트릭스 셀레스티나 슈라우드 왕녀님과 줄리아 르완 유모님.”
특별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분간 아인한드라를 황도의 중심부인 황도 아카데미에 숨겨 놓는 것.
그 구체적인 장소는 레나와 시녀들이 머무는 방으로 정해졌다.
물론 레나와 미리 협의가 된 내용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사안이기도 했고 말이다.
이에 대해 줄리아가 다소 염려를 표하기는 했다.
왕녀의 유모로서 지극히 당연한 염려.
하나 그마저도 아인한드라를 직접 눈에 담은 직후 눈 녹듯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공자님, 정말 괜찮으신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외모의 소유자를 우리 왕녀님과 함께 둬도 불안하지…….”
“줄리아!!”
* *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알긴 아는군.”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부복한 상태로 간절히 애원하는 퍼디크.
상단이 소요에 휩싸이고, 그 소요가 이미 황도 전체로 번져 나간 현재, 퍼디크가 이처럼 간절히 애원할 만한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상단의 진짜 주인이자 사실상 황도의 주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자.
황태자 아이단, 그뿐이었다.
“시끄러우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하도록.”
“예, 예!”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단에게서는 고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차가울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퍼디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 상황은?”
“경보가 울리자마자 즉각 대응에 들어갔고, 지금은 대부분 큰 상처 하나 없이 회수한 상황입니다. 모두 전하께서 황도를 폐쇄하고 수색 인원을 증원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니 나머지도 금……, 금방 정리될 겁니다.”
“그리고?”
“그, 그리고…… 그러니까 그게…….”
퍼디크는 이에 대해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제3의 인물이 그를 재촉하고 나섰다.
“전하께서 하문하시는 바가 뭔지 뻔히 알 텐데? 아인한드라, 그 하이엘프에 대해 어서 답변드리시오.”
“이반 자작님, 그것이…….”
카일 이반 자작이었다.
황태자의 심복으로서, 그의 계획과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자.
머리인 아이단의 손이나 발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아인한드라까지 직접 언급해가며 퍼디크를 압박했다.
“흔적은? 흔적은 찾았소?”
“백방으로 찾고 있습니다. 이제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분명 시간문제…….”
“여태 하나도 찾지 못했다는 말이구려. 하면 흉수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을 테고.”
중요한 것은 아인한드라였다.
사태 수습의 성패는 결국 아인한드라를 찾는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퍼디크는 사라진 하이엘프에 대해 눈곱만한 흔적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황도 폐쇄는 물론이고 황궁의 병력까지 끌어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쿵! 쿵! 쿵!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면 제가 목숨을 걸고 반드시 되찾아오겠습니다!! 제발 전하, 제발 한 번만…….”
뒷일은 안 봐도 훤했다.
이를 직감한 퍼디크도 황태자에게 더욱더 간절하게 매달렸다.
아이단의 용서와 자비 말고는 답이 없는 것이다.
대리석 바닥에 온 힘을 다해 이마까지 찧어 가며 애원하는 그였다.
스윽.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이단의 가벼운 손짓 한 번이면 끝이었다.
퍼디크 루난의 모든 것이.
“전하, 살려 주십시오!! 전하, 제발 자비를, 전하 …….”
신호에 따라 기사들이 들어왔고, 애원하는 퍼디크를 끌고 나갔다.
그렇게 그의 애절한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고, 이내 황태자 궁에서는 들리지 않게 됐다.
“당장은 흔적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필이면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하이엘프인지라.”
어차피 상황은 퍼디크의 손을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지금은 카일이 도맡고 있었기에, 퍼디크가 사라진 뒤에도 보고는 차질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절로 눈에 띄는 조건들을 골고루 갖춘 상태입니다. 결국은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단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전하. 흉수의 존재까지 고려하면 단시간 내에 찾기는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두 달 뒤에 있을 재경매는 물 건너갔군.”
“송구합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 대령토록 하겠습니다.”
단, 차질이 없는 것은 보고 행위 그 자체에 불과했다.
행위 속의 내용에는 차질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중 이 사태의 흉수 또한 아인한드라 못지않게 중대한 문제였다.
“흉수는?”
“다스 백작이 지금까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암살 계열일 확률이 높습니다. 기사들 절반 가까이가 제대로 반응도 못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흉수에 대해 파악하고자 초고급 인력까지 급파한 상태였다.
소드마스터 브루노 다스 백작.
황태자 호위 기사인 그를 사건 발발 직후 현장으로 보낸 것이다.
“다만, 백작도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전해 왔습니다. 지하 3층에 남겨진 흔적이 특이하다고 합니다. 기사들의 운신 흔적이 꼭 누가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연스럽다는 것인데, 해서 흉수가 다수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의미한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무언가 좁혀지는 듯했지만, 끝내 특정되는 바는 없었다.
비단, 브루노 다스만이 아니었다.
뒤이어진 보고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나 기타 추적 전문가들 또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결국, 뭐 하나 제대로 흘러가는 부분이 없었다.
황도를 폐쇄하고, 황궁의 병력을 동원하며, 황태자가 직접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하이엘프는 황도를 빠져나간 것인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했으며, 흉수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기에 현 상황은 아이단의 다음 한마디로 정리 가능했다.
“농락당했군.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