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구출 작전
눈빛을 교환한 때로부터 닷새째 되는 날, 아인한드라 구출 작전에 돌입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야심한 시각, 은밀하게 루난 상단의 담을 넘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물론 시작점부터 살짝 삐끗할 뻔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월담 직후의 착지 과정에서 돌멩이를 밟으며 미세한 소리를 낸 것이다.
아무래도 이쪽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보니 발생한 약간의 실수였다.
하지만 재수 없게 초장부터 발각되는 불상사는 없었다.
담을 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극도로 발휘 중인 정령력을 이용, 화톳불 사이의 음영으로 스며든 덕분이었다.
이것이 내가 월담을 자신 있게 선택하고 실행한 근거이기도 했다.
침투와 잠입 쪽으로는 소드마스터로서의 경지 이상 가는 효율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의 진행은 순조로웠다.
실수가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도 했거니와, 정령력 활용의 숙련도가 수직상승 한 덕분이기도 했다.
역시 실전 이상 가는 스승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로 1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노예 상품화가 진행되는 상단 지하로의 출입구가 바로 1차 목적지였다.
즉, 현재 나는 출입구를 눈앞에 둔 상황인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난도가 높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상단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경비병 간 교대시간을 기다렸던 점 정도?
하나, 약간의 시간 소모에 불과했을 뿐, 일반 병사들에게 기척을 숨기는 일 자체는 간단했다.
지하 출입구를 찾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하 출입구까지의 길은 거의 미로에 가까웠다.
상단 건물 내부를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짜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한 차례 방문한 바 있는 나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지만.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었다.
이 지점부터는 은신 해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출입구까지 은신 가능한 엄폐물이 없기도 하거니와, 출입구에 서 있는 두 명의 보초 또한 문제였다.
보초 임무에 어울리지 않게 둘 다 소드 익스퍼트였다.
하급이기는 해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기사들인 것이다.
당연히 일반 병사들보다 기척에 몇 배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력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웠다.
정령력의 경지 자체가 오른다면 또 모르겠지만, 당장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따라서 다른 방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스윽.
무릎을 살짝 굽혔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튀어 나갈 추진력.
그랬다.
이것이 내가 필요에 따라 도출해 낸 새로운 방법이었다.
정면돌파.
내가 암살자도 아닐진대, 이 시점에 저들의 눈을 피할 묘안 같은 게 떠오를 리 만무했다.
차라리 나에게 익숙한 방식을 활용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터.
굽힌 무릎을 펴는 순간, 출구 앞 기사들에게 일직선으로 돌진할 생각이었다.
나아가 은신 상태 또한 유지할 작정이었다.
은신이 뭐 별거겠는가?
어떤 과정을 거치든 결과적으로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그게 바로 은신인 것이다.
마침 이 주변으로 상단의 일반 경비병은 거의 접근하지 않았다.
보는 눈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둘 수 있었다.
파앗!!
마침내 무릎을 폈다.
그러고는 일직선으로 튀어 나갔다.
목표는 당연히 출구 앞을 지키고 선 두 명의 기사.
“……!!”
내가 대놓고 돌진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이들답게 반응이 빨랐다.
출입구와의 거리를 절반가량으로 좁혔을 무렵, 놈들이 나의 돌진을 눈치챘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절반을 좁혔을 무렵에는 대응에 들어갈 기미를 보였다.
손을 허리춤의 검으로 가져가는 동시에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웨…….”
물론 이대로 간다 해도 기사들의 처리에는 문제가 없었다.
소드 익스퍼트 하급을 쓰러뜨리는 정도야 식은 수프 먹기보다도 쉬웠다.
중요한 점은 소음이었다.
아마도 오른쪽에 선 보초가 내뱉으려는 단어는 ‘웬 놈이냐’일 터.
이 단어가 완성되면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두 명 말고도 나의 침입을 알아채는 이들이 생길 테니까.
그리고 이대로라면 아슬아슬했다.
지금 거리가 좁혀지는 속도로 보면 ‘웬 놈’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판단됐다.
그 자체로 소음이 된다는 사실에는 별 차이가 없고 말이다.
스륵, 스륵.
그래서 양팔을 뻗었다.
각각 한쪽씩 두 놈 모두를 향해.
그러고는 끌어당겼다.
“어……??”
아직 팔이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하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내가 가지 않아도 놈들이 나에게 올 테니까.
가가가각~
정령력이었다.
정령력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지, 정령력 자체를 쓰지 않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인력으로 놈들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터억! 터억!
그리하여 놈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눈 깜박할 새에 0으로 만들었다.
뻗은 양팔에 놈들의 목을 정확히 안착시킨 것이다.
즉, 양손에 두 보초이자 기사의 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콰득! 콰득!
그대로 끝을 봤다.
비명이나 신음 따위를 내뱉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두 인명을 살상한 것이다.
“…….”
따지고 보면 이것이 회귀 후 나의 첫 살인이었다.
지금까지 죽인 생명은 어디까지나 몬스터에 한정돼 있었다.
사람은 죽인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분명 처음이 맞았다.
저벅저벅.
물론, 망설임은 없었다.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두 시체의 목을 움켜쥔 채 출입구를 향해 무심히 걸어갈 뿐이었다.
제국 놈들, 그것도 황태자와 연관됐을 것이 분명한 놈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런 말랑말랑한 것들을 품을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또, 지하로 진입한 뒤에는 무수히 반복할 행위이기도 했다.
그런 나약한 것들에 흔들릴 여유 따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척, 척.
대신 기반 다지기에 들어갔다.
출입구 앞까지 옮긴 시체를 그대로 자리에 내려놓았다.
단, 그냥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세심한 공을 들여서 내려놓았다.
등 뒤의 벽과 그들의 무기에 기대어 서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를 위해 무게중심에 대한 소드마스터로서의 깨달음까지 십분 활용했다.
“후우.”
그리하여 끝내 원하던 광경을 연출해 냈다.
벽에 기댄 상태이기는 하나, 어찌 됐든 시체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광경.
어색하기는 해도 멀리서 보면 나름 그럴듯해 보일 터였다.
이만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기에 충분했다.
‘그럼,’
이렇듯 기반은 잘 다져 두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본론에 들어갈 차례였다.
‘가 볼까.’
이 밤, 나는 회귀 후 처음으로 살계를 열 작정이었다.
은밀하게, 그리고 잔혹하게.
* * *
“고드 경, 아무래도 뭔가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변고? 무슨 변고?”
오늘 당직의 부관인 주라크 메이트리가 사령실에 찾아왔다.
그러고는 변고를 입에 담았다.
사령인 레고리 고드 입장에서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는 그런 주제였다.
“위층에 교대 조를 올려 보낸 지 한참인데, 교대된 기사들이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지났는데?”
“교대 조가 올라가고 10분가량입니다.”
“그걸 왜 이제 보고하나!”
그 주제만큼이나 내용 또한 레고리의 짜증을 유발했다.
지금 이곳 루난 상단 지하 교육장을 지키는 이들은 모두 기사였다.
어디 시정잡배 같은 용병이나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규율과 기강이 엄격한 기사 말이다.
그런 이들이 10분가량이나 시시껄렁한 이유로 복귀를 미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 변고가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확실치 않아 조금 더 기다려 본다는 것이…….”
“쓸데없는 변명은 집어치워. 그래서 조치는?”
“일단 크론을 올려 보냈습니다. 그가 상황 파악 후 곧바로 이리로 올 겁니다.”
그나마 필요한 조치는 곧장 이루어진 상태였다.
상황 파악을 위해 올라갔다는 크론 그리스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
크론이라면 그래도 믿고 맡길 만했다.
일단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레고리가 이곳을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쯧! 하필 오늘…….”
이곳에는 한 달 전부터 황태자 직속 기사들이 주둔 중이었다.
달리 말하면, 황태자의 기사씩이나 되는 이들이 일개 상단의 지하나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 수준 또한 상당했다.
당장 이곳에 있는 기사만 해도 20명.
지방 영지의 기사 수가 보통 8~10명 내외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개 상단이 지니기에는 지나친 전력이라고 봐야 했다.
심지어 옆 방에는 4서클 마법사 한 명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 이들이 지켜 온 것은 황태자의 위신과 직결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대륙 전역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하이엘프 노예.
거래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 노예를 무사히 보관하는 것이야말로 황태자의 위신을 드높이는 일이었다.
주군의 위상을 세우는 일에 기사가 의문 같은 것을 품을 리 만무했고 말이다.
레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이 일 자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단지, 오늘 이 상황이 못마땅할 뿐이었다.
오늘은 레고리가 당직사령을 맡은 날.
그런데, 하필 그가 당번인 오늘 같은 날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자칫 굉장히 재미없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문제가.
“보고부터 올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대략적인 상황이라도 파악해야 보고를 올리든 말든 할 거 아닌가? 상황도 모른 채 그냥 무턱대고 보고부터 올려?”
“…죄송합니다.”
“됐고. 자네도 나가 봐. 나가서 크론과 같이 최대한 빨리…….”
그때였다.
“웬 놈이냐!!”
상황은 안타깝게도 레고리의 우려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령실 밖에서 들려온 커다란 외침.
문제를 굉장히 재미없게 만들어 가는 그런 외침이었다.
* * *
움찔.
검으로 향하는 상대의 손을 인력으로 끌어당겼다.
강하지는 않았다.
그저 빠르게 손잡이로 향하던 손을 잠깐 움찔하게 만들 정도.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푸슉!
“꾸르륵…….”
상대의 목젖을 완전히 갈라 버리기에는 말이다.
잠시 움찔하는 사이 내가 쥔 단검이 순식간에 목을 베고 지나간 것이다.
그렇게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 하나가 유명을 달리했다.
쓰러진 기사 입장에서는 억울하리만치 허무한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지하 3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비명횡사한 꼴이었으니까.
그래도 이 중급의 기사는 앞선 그의 부하보다는 좀 나은 편이었다.
그보다 먼저 2층에 발을 들인 소드 익스퍼트 하급의 기사는 영문조차 몰랐다.
흉수를 눈에 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물론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비록 내가 흉수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오늘 저승으로 보낸 기사는 이 둘만이 아니었다.
벌써 10명째였다.
입구에서 둘, 지하 2층까지 내려오며 여섯, 그리고 지금 막 둘.
기사가 아닌 일반 관리인들은 카운트에 넣지도 않았다.
나아가 여기서 끝나지도 않을 터였다.
황태자의 주구들에게는 일말의 자비조차 베풀지 않을 예정이었으니까.
하여 이제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갈 차례였다.
남은 주구들까지 전부 처리하고, 최종적으로 아인한드라를 구출하기 위해.
지상과 반대로 이곳 지하의 구조는 오히려 심플했다.
지하 1층과 2층, 그리고 3층, 이렇게 총 세 개의 층으로 구성돼 있었다.
상품화 과정 중에 있는 노예들은 지하 1층과 2층에 구분되어 머무는 상태였다.
지하 1층은 주로 인간 노예와 아인종 중에서도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노예들.
지하 2층은 아인종으로서 상품 가치가 상당한 노예들.
덕분에 2층 끝까지 오는 과정에서 인간 말고도 다양한 종족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려가려 하는 마지막 지하 3층.
이곳 역시 노예 상품화를 위한 장소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단지 그 대상이 되는 노예의 가치가 위층과는 비교를 불허할 뿐.
그렇기에 현재 3층에 머무는 노예는 아인한드라가 유일했다.
나머지는 전부 그를 지키고 감시하기 위해 주둔 중인 황태자의 주구들이었다.
따라서 지하 3층에서의 행동방식 또한 2층까지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은신과 암살은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럴 만한 공간도 충분치 않았을뿐더러, 어차피 적들도 나의 존재를 눈치챈 상태였다.
상황 파악을 위해 올라온 마지막 두 기사가 그 증거.
저벅저벅.
그런 연유였다.
계단을 내려가며 따로 기척을 숨기지 않은 것은.
“웬 놈이냐!!”
역시 예상대로였다.
지하 3층에 발을 들이자마자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나를 에워쌌다.
반응 속도로 보건대 비상대기 중이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뭐 하는 놈이지?”
주둔 기사들의 리더로 보이는 자가 전면에 나섰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보아 이 또한 확실했다.
그런 그가 내 정체를 물어왔다.
물론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하긴, 굳이 지금 들을 필요는 없겠지. 잡은 뒤에 강제로 불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러자 그 또한 굳이 질질 끌지 않았다.
여기까지 내려온 이상 목적이야 어차피 뻔했다.
쓸데없는 부분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는 것이다.
“라샤 경, 지금 즉시 보고 올리시오. 하이엘프를 노린 놈이 침입해 왔다고. 그리고 이제 곧 제압할 예정이라고.”
“예, 고드 경.”
그가 옆에 서 있던 로브 차림의 마법사에게 보고를 지시했다.
이에 라샤라 불린 마법사가 지체 없이 품속에서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마나를 주입했다.
“헛……?”
아니, 주입하려 했다.
통신구가 갑자기 손에서 빠지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뜬금없이 공중을 날지만 않았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