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장: 눈빛 교환
“그 퍼디크 루난이라는 상인, 장사 수완이 상당하네요.”
“역시 처음부터 짜고 친 판이었군요.”
내 화답에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마무리된 경매장 일에 관한 것이었다.
하이 엘프의 난동 진압 직후, 입을 연 아이단이 내뱉은 말은 간단했다.
얼마나 걸리겠냐는 것.
이에 퍼디크는 즉각적으로 답을 내놓았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3개월 안에 상품화 과정을 완벽하게 마쳐 놓겠다고.
그러자 아이단은 다시 무심한 목소리로 진행하라는 한마디만을 남겼고 말이다.
이로써 자칫 복잡해질 뻔했던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사건은 황태자 아이단의 바다와 같이 넓은 아량으로 아무런 처벌 없이 종결됐다.
3개월 후, 오늘의 귀빈들을 다시 초청하여 완벽한 상품을 선보이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짜고 친 판이라고 봐야 했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놓고 보자면 상단 전체가 풍비박산 난다 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감히 황태자의 위신에 흠집을 낼 뻔한 꼴이었으니까.
한데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퍼디크의 감정은 너무나 평온했다.
물론 표정이나 태도 따위야 황태자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의 내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새벽녘의 조용한 호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잔잔했다.
아무리 타고난 감정 컨트롤의 귀재라 해도 이는 불가능한 일.
여기에 레나의 근거까지 더해졌다.
“결과가 그러니까요. 하이엘프가 경매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태자의 위엄은 이미 오를 대로 올랐어요. 루난 상단은 황태자까지 활용해서 대륙 차원의 홍보를 한 셈이고요. 지금부터 적어도 3개월은 온 대륙이 루난 상단을 주목하겠죠.”
“아무래도 전에 해 주신 말씀이 맞는 듯합니다. 상단 자체가 사실상 황태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요.”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커요. 상단의 지나치게 빠른 성장도 그렇고, 혹시 모를 불만 제기까지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차단해 주는 걸 보면.”
오늘 일로 위협을 받은 귀족들이 존재했다.
하이엘프가 달려들던 방향에 앉아 있던 경매참가자들.
그 실질이 어떠하든, 상단의 관리 미흡으로 인해 이들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얼마든지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나, 그런 가능성조차 아이단이 직접 나서서 원천봉쇄 해 주었다.
이미 황태자가 공식적으로 용서하고 넘어간 일.
이렇게 된 이상 고위 귀족이라 해도 본격적인 문제 제기는 불가했다.
아이단과 정적이 될 각오라도 품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로써 짜고 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한 편의 쇼가 성황리에 막을 올린 셈이었다.
“그렇군요. 그보다 왕녀님, 아까 황태자 말대로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으시던데, 혹시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거…….”
경매가 끝난 직후, 아이단은 그가 초대한 귀빈 중 유일하게 레나를 콕 집어 질문을 던졌다.
오늘 경매를 관람한 소감이 어떻냐고.
이에 레나는 인상 깊었다는 감상평으로 화답했다.
물론 황태자에 대한 감사의 말도 잊지 않은 그녀였다.
그러자 아이단 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단, 그는 마지막에 단서를 한마디 달았다.
중간중간 레나의 표정이 밝지 못한 듯하여 신경 쓰였는데, 인상 깊었다니 다행이라는 것.
일단 레나는 이를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랬다며 자연스럽게 넘겼다.
그러나 아이단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레나는 경매 관람 중 한 번씩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
“특별한 건 아니에요. 제가 개인적으로 노예 경매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뿐이니까.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제 처지를 연상시키더라고요. 그냥 이게 다예요.”
무슨 다급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하지 않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몹시 특별했다.
레나가 지닌 왕녀라는 신분상의 한계와 연관된 이유였으니까.
“음……. 하면 왕녀님, 제가 어려운 부탁 한 가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기에 이어서 던지는 나의 부탁 또한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부탁이요?”
“그 하이엘프를 가까이서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혹시 왕녀님 성함을 좀 빌려주실 수 있을런지요?”
* * *
“어떻습니까, 공자?”
“달리 할 말이 없군요. 다시 봐도 놀라울 할 따름입니다.”
현재, 내 두 눈은 하이엘프를 가득 담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그럼에도 절로 나오는 감탄은 금할 수가 없었다.
결박된 그의 사지와 흐리멍덩한 초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제약들조차 하이엘프를 향하는 경탄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하면 왕녀님께도 공자가 대신 잘 전해 주기 바랍니다. 이번 경매, 어떤 기대를 품고 오시든 그 이상을 경험하시게 될 거라고. 이 퍼디크 루난이 이름을 걸었다고 말입니다.”
레나의 이름을 빌린 덕분이었다.
이렇게 상단주인 퍼디크의 안내를 받으며 루난 상단 지하 심층부까지 들어와 하이엘프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무리가 따르는 일은 아니었다.
지난 3주간 이렇게 직접 상단을 찾아온 사람은 나 말고도 수두룩했으니까.
오히려 나는 많이 늦은 편이었다.
그만큼 지난 쇼의 홍보 효과는 지대했다.
황도 내에 있는 고위 귀족이란 고위 귀족은 전부 찾아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심지어 수차례 반복해서 찾아오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물론 이 방문에는 고위 귀족만 가능하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조건이었다.
레나의 이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관심을 받는 슈라우드 제1 왕녀의 이름이면 차고 넘쳤다.
더욱이 나 또한 그 관심을 함께 받는 중이었다.
따라서 분명 안 될 것은 없는 일이었다.
단, 바람직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왕녀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좋을 게 없을뿐더러, 레나 본인 역시 노예 경매를 꺼리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 부탁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름을 내준 레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상품화 과정이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군요. 좀 더 물리적인 수단이 사용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말이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레나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이엘프를 눈에 담은 채 그것들을 확인해 가는 중이었다.
우선 하이엘프의 상태.
한데, 이 부분은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하이엘프는 눈의 초점이 풀려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외관상 아주 멀쩡했다.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고문의 흔적 같은 것이 전무했다.
비단 눈앞의 하이엘프만이 아니었다.
하이엘프가 갇혀 있는 이곳은 루난 상단 지하에서도 가장 깊숙한 장소.
자연스레 이곳까지 오는 과정에서 보게 된 다른 노예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외상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공자. 저것들은 결국 고객의 손에 쥐어질 상품. 어떤 고객이 흠집 많은 물건을 좋아하겠습니까? 마법과 약물로 흠집을 최소화하는 것이야말로 실력이고 노하우인 것이지요.”
루난 상단은 상품화 과정에서 육체적 고문을 배제했다.
대신 정신적인 고문을 극대화했다.
정신 마법과 약물을 통해 한 인격체의 자아를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전의 레오파드 수인과 같은 완벽한 노예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퍼디크의 첨언이었다.
끔찍하리만치 악랄했다.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하이엘프라 한들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황태자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뒷받침되는 이상 버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3개월 내로 끝내겠다던 퍼디크의 장담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여유를 부릴 상황이 못 됐다.
사아아아~
그래서였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 정령력을 움직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어둠이 서서히 뻗어 나갔다.
마법과 약물에 취해 착란 상태에 빠져 있는 하이엘프를 향해.
그러고는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금 이 순간 하이엘프를 둘러싼 어둠은 음습함 따위와 거리가 멀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형용할 수 없는 아늑함·포근함에 가까웠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꿈틀.
하이엘프에게서 어떤 변화가 생겨났다.
완전히 흐트러져 있던 그의 동공에 생긴 변화였다.
흐릿하던 초점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움직임을 보였다.
“응? 저거 지금……?”
나를 제외하고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포착한 인물은 퍼디크였다.
동공의 움직임을 발견한 그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비서에게 물었다.
“저거 지금 움직이잖아. 작업 똑바로 한 거 확실해?”
“부,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한 시간 전에 마법사님께서 다녀가셨고, 약물 투여도 제가 직접 확인했는데…….”
물론 비서라고 영문을 알 리 만무했다.
하이엘프에게 시전된 마법과 투여된 약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
그저 지금 이 자리에 예측하지 못한 제3의 변수가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그럼 대체 왜 이 시간에 정신이 돌아……, 흠흠.”
이에 목소리가 높아지려던 찰나, 퍼디크가 그것을 스스로 끊었다.
그런 뒤 짧은 헛기침과 함께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상품이 상품인지라 저항이 상당한 편입니다. 물론 작업 과정의 일부일 뿐, 상품화 자체는 차질없이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나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작업 과정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시행착오에 불과할 뿐, 크게 신경 쓸 일 아니라고 말이다.
또, 일단 나를 내보내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래도 추가 작업은 필요할 것 같군요.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늘은 이만 물러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근시일 내로 다시 날을 잡아 제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나는 별말 없이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어차피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내보내려 할 터.
굳이 여기서 부딪칠 이유는 없었다.
하여 순순히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단,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충분히 여유를 두고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는 중이었다.
초점이 돌아올 시간은 확보해 줄 수 있을 만큼 천천히 말이다.
그렇게 출구로 이어지는 문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쯤이었다.
사아아아~
하이엘프와 연결되어 있던 정령력을 완전히 거두어들였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초점을 전부 되찾은 하이엘프의 동공을 향해서.
그리하여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또렷이 나를 향하고 있는 하이엘프의 눈빛.
이로써 나와 하이엘프 아니, 아인한드라 사이에 사실상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대면으로부터 도출되는 나의 마음이었다.
아인한드라와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나는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이 친구, 내가 구하기로.
* * *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루난 상단의 경비원 호드는 오늘도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의 임무는 상단 외곽 순찰.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동료 나스와 함께 서쪽 담벼락 부근을 돌던 그였다.
그때였다.
다각.
“으음?”
“왜 그래, 호드?”
“아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무슨 소리? 난 못 들었는데?”
“나도 확실한 건 아니야. 뭔가 밟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호드의 귀에 웬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들렸다기보다는 들려온 것만 같다고 해야 할까?
호드 본인도 들은 것이 맞는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애매한 소리였다.
“잠깐만.”
그래도 일단 그의 임무는 상단 외곽 경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면 확인해 보는 것이 의무였다.
하여 소리가 들려온 듯한 담벼락 부근을 한번 쭉 훑었다.
“흐음, 아닌가……?”
하지만 딱히 시야에 걸리는 건 없었다.
깔끔한 담벼락과 그 아래 일정 간격으로 놓여 주위를 밝히는 화톳불들.
늘 봐 오던 그대로의 광경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보지. 이렇게 봐도 뭐 없잖아.”
“그런 모양이네.”
“그래,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또, 혹시라도 도둑놈 같은 게 들어오잖아? 그러면 난 오히려 그놈이 불쌍해질 것 같아. 지금 여기는 상단인지 영주성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니까.”
“하긴.”
이내 호드도 수긍했다.
눈에 걸리는 것도 없을뿐더러, 나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 루난 상단은 실수로라도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곳이었다.
경비 수준이 결코 일개 상단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럼 가자.”
그렇기에 별다른 의심도, 걱정도 없이 다시금 발걸음을 떼는 호드였다.
하지만 그래서였다.
일렁이는 무언가를 캐치하지 못한 것은.
호드가 떠나간 직후, 화톳불과 화톳불 사이의 짙은 음영 속에서 일렁이는 사람 형체의 무언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