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노예 경매장
그간 황도 아카데미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 온 레나.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주의해 온 레나였다.
그것은 바로 황태자와 마주치는 일.
그녀는 아이단과 마주치게 될 것 같은 자리가 있으면 적절한 핑계를 대 가며 어떻게든 피해 왔다.
내 당부 때문이었다.
나는 연회가 끝난 뒤 레나에게 당부했다.
아이단은 어딘지 꺼림칙하다고.
왠지 예감이 좋지 않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레나는 이 당부를 유념하며 최대한 아이단을 멀리해 온 것이다.
나에 대한 레나의 신뢰는 두터웠다.
특히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영역은 나를 전적으로 믿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 눈의 신통함을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던 최고의 원석들, 센트럼과 베로카.
이 원석들을 유일하게 나만이 알아봤다.
그리고 이들을 발굴하여 가장 적합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했다.
이런 완벽한 예시들을 두고도 내 판단에 의심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
따라서 아이단에 대한 나의 판단 또한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녀였다.
여기에 아이단이 굉장히 바쁘다는 사실 역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아이단은 현재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건강이 위중하기에 황태자로서 그 자리를 대신 중인 것이다.
제국의 국정 전반을 돌봐야 하는 그.
바쁜 것이 당연했고, 덕분에 레나가 그를 피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단이 각국 사절단 중에서도 극소수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레나를 직접 지목했다.
재미있는 시간이 될 테니 꼭 참석해 주기를 바란다고.
심지어 이 초대장의 전달자는 크리스토퍼이기까지 했다.
따라서 참석 거부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거부의 선택지 같은 건 주어지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하여 나에게 부탁을 해 온 것이다.
거부가 불가한 상황이니 함께 가 달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현재.
“다음 노예는 레오파드 일족의 수인입니다. 이미 교육이 끝난 만큼 집고양이보다 얌전하고 순종적일 것을 루난 상단의 이름으로 보증하는 상품입니다.”
경매장의 매대 위로 수인 하나가 올라왔다.
루난 상단의 주인이자 오늘 경매의 주최자, 퍼디크 루난의 말대로였다.
자아가 붕괴된 듯, 수인의 눈빛은 완전히 죽어있었다.
매대 위에서 그저 사회자가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손을 들라면 손을 들고, 배를 까라면 발라당 배를 깠다.
차라리 고양이보다 강아지에 더 가까울 지경.
“역시 제국은 스케일이 다르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레오파드 일족을 경매장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저렇게 완벽한 상품으로.”
“이런 자리에 초대해 주신 황태자 전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경매장의 VVIP룸에 자리 잡은 각국 사절단의 극소수 핵심인사들.
이들은 이어지는 경매를 관람하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확실히 제국은 제국이었다.
노예 경매에 수인이, 그것도 극히 희귀해서 일생에 한 번 눈에 담기조차 힘들다는 레오파드 일족이 출품된 것이다.
더구나 지금 이게 처음도 아니었다.
이전 순서에서도 아인종들이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이쯤 되니 오히려 인간이 더 희귀한 상품으로 느껴질 정도.
각국의 왕족과 고위 귀족들조차 도저히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수준인 것이다.
동시에 이런 자리에 초청해 준 아이단에 대한 찬양을 펼쳐 갔다.
온갖 아부와 아첨, 감언이설의 향연이었다.
“정말 너무 놀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입니다. 이 모두가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치세이기에 가능한 것들이겠지요. 저희 슈라우드에도 이러한 전하의 은총이 하루빨리, 더 광범위하게 미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찬양의 대열에 가장 앞장선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토퍼였다.
그는 왕국 내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매끄러운 혀 놀림을 자랑하고 있었다.
황태자 앞에서의 크리스토퍼는 왕국 내에서 그에게 무한한 아첨과 찬양을 늘어놓던 여느 귀족가 자제들 못지않았다.
오히려 그들보다 한층 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였다.
“…….”
물론 이런 인간인 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여동생한테 지독한 열등감이나 느끼고, 제국 발가락이나 핥고자 제 신하의 가문을 몰살시킨 것일 터.
다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또 달랐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내심 욕지거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는 레나 또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였다.
VVIP룸의 한구석에 나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레나.
그런 그녀의 손등에 미세한 핏줄이 잡히고 있었다.
크리스토퍼의 입이 열릴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2,000골드. 레오파드 일족의 수인은 2,000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이렇듯 엄청난 아부의 향연이 펼쳐지는 사이, 사회자의 낙찰 선언이 떨어졌다.
치열한 경쟁을 거친 끝에 도출된 최종 낙찰가는 2,000골드.
1골드가 20실버이고, 평민 기준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가 4실버이니, 방금 무려 1만 가구의 한 달 치 생활비가 오간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 그런 걸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귀빈 여러분, 드디어 마지막 순서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황태자 전하와 여러 귀빈 여러분을 모시게 된 한없이 뜻깊고도 영광스러운 날이니만큼 저희 상단 비장의 무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그때, 퍼디크 루난이 나서서 다시금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제 마지막 순서에 다다른 것이다.
밖의 사회자 역시 오늘 경매의 클라이맥스를 알리고 있었다.
“저는 비록 일개 상단의 주인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합니다. 오늘의 이 마지막 순서가 여기 계신 모든 귀빈 여러분께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최고의 순간이 되리라는 것을. 최고의 흥분과 감동, 그리고 경악을 선사해 드리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자리의 귀빈들은 그냥 귀빈이 아니었다.
에펜시아 대륙의 차기 지배자들이라 칭해도 무방한 ‘진짜’ 귀빈들이었다.
이 말인즉슨, 한마디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도 모자란 자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퍼디크였다.
이 진짜들조차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겠다고 말이다.
간덩이가 부은 걸 넘어 아예 밖에 드러내 놓고 다니는 수준의 자신감이랄까?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이윽고, 이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의 근원이 공개됐다.
“겨울바람 일족의 족장, 하이엘프 아인한드라입니다!”
웅성웅성.
근원이 공개된 직후였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진짜 하이엘프라고? 그 하이엘프?”
“말도 안 돼…….”
퍼디크의 장담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방안의 귀빈들은 경탄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인 것이다.
이것이 모두의 첫 경험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에펜시아 대륙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뿐 아니라 엘프, 드워프 등을 비롯한 수많은 아인종, 그리고 각종 몬스터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생존의 장이었다.
100년여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인간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고, 이를 기반으로 에펜시아 대륙 전체를 인간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왔다.
그렇게 100년이 흐른 현재, 바야흐로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다.
번성했던 아인종의 국가들은 모조리 몰락했고, 현재는 소수의 무리만이 남아 은둔생활로 간신히 연명 중이었다.
물론 이 또한 회귀 전 흐름대로라면 얼마 가지 못할 테지만.
이렇듯 완연해진 인간의 시대.
아인종들은 자연스레 노예로 전락했다.
인간과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 여겨졌던 이들을 이제는 경매장에서 동물원의 동물 보듯 관람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단,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쉬이 구경하기 어려운 종들은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엘프였다.
엘프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수요는 넘쳐나지만, 공급이 턱없이 모자랐다.
사로잡힐 것 같은 족족 자결을 시도하니 노예 사냥꾼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연히 엘프 노예는 엄청난 희소성과 가치를 지니게 됐다.
그냥 부르는 게 값인 것이다.
따라서 엘프가 출품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오늘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을 터.
하지만 퍼디크와 루난 상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발, 아니 서너 발쯤은 더 나아갔다.
이들이 내놓은 것은 그냥 엘프가 아니었다.
무려 하이엘프였다.
엘프 일족을 이끄는 수장이자, 직접 정령을 부릴 수 있는, 엘프 중에서도 극히 희소한 바로 그 존재 말이다.
이는 노예 경매의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었다.
대륙의 그 어떤 경매장에서도 하이엘프가 출품된 적은 없었으니까.
지금 이 자리가 최초였다.
경악성을 내뱉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누구 하나 예외는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하이엘프가 매대 위로 올라선 뒤에도 웅성거림은 멎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외모 때문이었다.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완벽했다.
완벽하다는 한마디 외에 그 외모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했다.
남성체인 하이엘프를 향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묘하게 뒤틀린 장탄식이 그것이었다.
경매장은 거의 사내들로 가득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음?’
나 또한 순수한 감탄을 금하지는 못했다.
다만, 거기에 빠져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외모 이외의 요소가 내 관심을 한층 더 강하게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이 하이엘프는 달랐다.
그보다 앞서서 매대에 올랐던 다른 노예들과 분명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차이가 현실로 도출됐다.
관리인들이 그를 매대 위에 홀로 세워 두고 살짝 거리를 벌린 그 순간이었다.
번뜩.
흐리멍덩하게 초점이 사라진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눈에 갑자기 정광이 돌아왔다.
자아가 붕괴됐던 것이 아니었다.
붕괴된 것처럼 숨기고 있었을 뿐.
파앗!
그렇게 되찾은 초점과 함께 강하게 바닥을 박차는 하이엘프였다.
수갑과 족쇄는 이미 풀려 있는 상태였다.
레오파드 일족 수인 때처럼 얌전하고 순종적이라는 사실을 보이려던 것이다.
덕분에 하이엘프는 이렇다 할 물리적 제약 없이 운신 가능했다.
그런 그가 바닥을 박참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한 방향을 향해 튀어 나갔다.
“어어?”
한데 그 방향이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경매장의 출입구 쪽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온다!”
관람석, 즉 경매참가인들이 앉아 있는 쪽이었다.
오늘 이곳에 자리한 경매참가인들은 하나같이 제국의 고위 귀족들뿐이었고 말이다.
아마 귀족을 인질로 잡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짐작이 맞는다면, 하이엘프는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출입구 쪽은 경비가 삼엄했다.
양 손목, 발목에 마나 구속구들이 채워진 상태에서 정면으로 뚫어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차라리 인질을 하나 붙잡아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이었다.
차앙~
물론, 눈곱만큼 더 현실적이라는 것뿐이지 결코 확률이 높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성공 확률은 여전히 0에 수렴했다.
일단 참가자들 모두가 고위 귀족이니만큼 양옆에 실력 있는 호위를 끼고 있었다.
이들은 재빨리 검을 뽑아 들며 하이엘프의 진행 경로를 막아섰다.
정말 인질극이 목적이라 해도 이들을 뚫어 내야만 했다.
하나, 마나가 구속된 채로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울 리 만무했다.
파지지직.
무엇보다, 이들 앞까지 도달하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나 구속구의 역할은 마나 동결에만 있지 않았다.
착용자의 반발 진압 역시 그 주요 기능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 하이엘프에게 채워진 구속구로부터 강력한 뇌전이 일었다.
난동 진압에 들어간 것이다.
파지지지지지직.
적어도 3서클 급은 되어 보이는 그런 뇌전이었다.
하이엘프가 어떻게든 버텨 내려 했지만,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털썩.
결국, 견뎌 내지 못한 그가 썩은 통나무처럼 넘어가고 말았다.
더 이상의 시도는 꿈도 꾸기 어려워 보였다.
관람석에조차 채 닿지도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갑작스러웠던 난동이 그 발발만큼이나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
하지만, 신속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내리눌렀다.
특히 VVIP룸 내부는 한층 더했다.
무거운 침묵에 더해 살얼음 낄 듯한 긴장감까지 흐르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가 지닌 의미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제국의 황태자가 특별히 귀빈들을 초청한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난동이 발생한 것이다.
당장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루난 상단 전원이 참수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
자연스레 긴장감 서린 시선들이 일제히 황태자 아이단에게로 향했다.
“얼마나…….”
이윽고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그의 입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