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대적(2)
아이단 황태자 입장 후, 모든 참가자에게 연회는 사실상 뒷전이 됐다.
모두가 황태자와 한 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그가 있는 곳만을 오매불망 바라보는 상황.
그러나 모두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공평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극소수만이 기회를 부여받았다.
황태자의 간택을 받은 극히 소수만이 따로 불려가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연회장 내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이곳에는 각각의 왕국에서 나름 쟁쟁한 가문 출신들뿐이었다.
하나같이 계급 피라미드의 최상위권에 서식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한데, 이런 최상위 존재들의 세계가 그 내부에서 다시 한번 계급화·서열화를 거치는 중이었다.
황태자의 부름을 받았는지 여부, 이 단 하나의 기준에 의해서 말이다.
물론 부름을 받은 이의 대부분이 왕족이나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기는 했다.
다만, 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시가 존재했다.
바로 바이젠 왕국의 4왕자 폴리단 코드모스 바이젠 같은 예시가.
그는 왕족에다 바이젠 사절단의 총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의 부름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객관적인 서열상 폴리단보다 낮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부름을 받기도 했다.
이 또한 단적인 예시가 존재했다.
바로 레나와 나.
현재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인 우리 두 사람이 그 예시였다.
“며칠 전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들었소. 왕녀가 원한다면 내가 나서서 중재해 줄 수도 있을 듯하오만?”
“아닙니다, 전하. 이미 사과까지 받고 다 끝난 일입니다. 그런 별거 아닌 일로 황태자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릴 수야 없지요.”
“별거 아닌 게 아니지. 왕녀의 위신뿐만 아니라 슈라우드 왕국의 자존심까지 걸려 있는 일인 것을.”
사흘 전에 발생했던 폴리단과의 충돌.
이 일에 본인이 중재자로 나서 주겠다고 제안하는 아이단이었다.
레나는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좀 이상하구려. 따로 사과를 받은 적은 없다고 들었는데?”
“물론 말로써 사과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줄기 진심 어린 눈빛이 더 큰 위로가 되는 법 아닐지요? 전 그런 눈빛을 받았고, 덕분에 티끌만 한 응어리 한 점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거절을 거듭했다.
비록 말투와 어조는 부드럽고 공손했지만, 그 뜻만큼은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보통의 왕녀에게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 앞에서.
“그런가? 그래도 난 좀 아쉽구려. 그대같이 매력적인 왕녀의 위신을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었거든. 또, 주변국들의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건 제국과 나의 기쁨이기도 하고.”
레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재가 제국과 아이단의 진정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재를 가장한 완벽한 이간질이었으니까.
제국이 개입하면 당장의 갈등은 어떻게든 봉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겉보기에 불과했다.
제국은 결코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속으로는 더 큰 갈등을 유발한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골은 한층 더 깊게 파이고, 종국에는 더 심각한 수준으로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제국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었으며, 대륙의 역사가 이를 증명했다.
아이단은 이런 제국의 방식에 가장 특화된 황족이라는 평이 도는 인물이었고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나 본인이 나에게 직접 인지시켜 준 내용이었다.
그런 레나가 아이단의 꼬임에 쉬이 넘어갈 리 만무했다.
“그러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전하와 한 자리에서 담소 나누는 것만으로도 제 위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니까요. 저는 지금 전하께 한없이 감사드리는 마음뿐이랍니다.”
극구 거절하는 레나.
당사자가 이렇게 괜찮다며 거절하는데 아무리 황태자라 한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왕녀가 정 그렇다면야.”
결국 그가 제안을 거둬들였다.
이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며 아이단에게 목례를 올리는 레나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으음…….’
그러나 이건 진정한 마무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라고 봐야 했다.
회귀 전, 레나가 감당해야만 했던 끔찍한 비극의 시작.
옅은 미소와 함께 레나를 바라보는 아이단.
그런 그의 내부에서는 어둠이 태동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 나지 않았다.
아이단은 눈빛뿐만 아니라 표정까지도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 중이었으니까.
하나, 나에게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꿈틀거리기 시작한 그의 검은 욕망이.
“그럼 이제 이쪽 차례인가? 홀로 나서서 왕녀의 체면을 지켜 낸 이 시대의 낭만 기사.”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태동의 단계에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단의 관심이 일단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대에 관한 소식이 많이 들려오더군. 그래서 이렇게 함께 불렀어. 직접 묻고 싶은 것들이 많거든. 성실한 답변을 기대해도 되겠나?”
“하문해 주십시오.”
“다른 부분들이야 겉으로 드러난 바가 있으니 나름 추론 가능한데, 이거 하나만큼은 어렵더군. 대체 비결이 뭐지? 그렇게 갑자기 폭발적으로 실력이 향상된 비결.”
“…3년 전에 마나 폭주를 겪었습니다.”
황태자가 직접적으로 보이는 관심이었다.
슈라우드 1왕자 따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연히 크리스토퍼 때처럼 무시하고 넘기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대충 얼버무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적어도 묻는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성실한 답변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나 폭주를 시작으로 나의 많은 면이 까발려지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추론 및 납득 가능한 면들이 말이다.
“역시 재미있어.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는 친구야.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복잡할 것 없어. 미래 구상을 묻는 것뿐이니까. 아까 1왕자에게 그대에 대해 물었거든.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아주 가관이더군. 굳이 설명은 필요 없겠지?”
“…예.”
“그래서 묻는 거야. 물론 소드마스터가 된다면 좀 낫겠지만, 그렇다 해도 국왕과 척을 지는 건 분명 쉽지 않을 테니까.”
타당한 질문이었다.
크리스토퍼와 척을 진다는 것은 미래의 국왕과 적이 된다는 의미에 가까웠으니까.
현재로서는 분명 그러했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다소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왜? 답변이 곤란한가? 설마 내가 1왕자에게 전해 주리라 여기는 건 아닐 테고.”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단지?”
“제가 드릴 답변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이가 없는지라 잠시 고민했습니다.”
“대체 무슨 답변이길래?”
그렇게 약간의 머뭇댐 뒤에 어쩔 수 없다는 기색과 함께 재차 입을 열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저와는 성향이나 가치관 같은 것들이 완전히 다른지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뒷일은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가?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말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리가 맞다는 의미의 끄덕임.
“…….”
그러자 아이단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의도는 명백했다.
내 눈빛과 표정 따위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통해 답변의 진위를 밝히겠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것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나를 꿰뚫어 보고자 하는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단을 납득시킬 자신이.
우선 그간의 행적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내 행보는 굉장히 무모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바르코스 요새에서도 그렇지만, 아카데미에서는 특히 더했다.
이상한 동아리를 만들어 주류에서 벗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1왕자와 정면으로 대립하기까지 했다.
또, 갈등의 해결 방안 역시 지나치게 직선적이었다.
오로지 결투만을 고수한 것이다.
정치적인 면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었다.
솔직히 무모를 넘어 무식해 보일 수밖에 없는 행적인 것이다.
나의 가장 큰 비밀 두 가지를 알지 못한다면 말이다.
“흠…….”
그리고 나만의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나의 숨겨진 두 가지 비밀 중 하나, 어둠의 정령력.
정확히는 어둠의 정령력에 기반한 감정 컨트롤 능력이었다.
감정을 숨기거나 조절하는 면에 있어 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령력이 나와 함께하는 이상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따라서 황태자의 간파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수준이 어떻다 한들, 내가 세운 방어벽의 돌파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으니까.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골 때리는 친구였군.”
이윽고 황태자가 납득하고야 말았다.
나의 대책 없는 무모함에 대해서.
“그래, 검사라면 응당 그대와 같은 면이 있어야겠지.”
동시에 그의 내부에서는 다시 한번 어둠이 태동했다.
레나를 향한 그것과 세부적으로는 달라도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종류의 욕망이었다.
즉, 또 다른 시작이 도출된 것이다.
단, 이번 시작은 앞선 그것과 분명 달랐다.
일방향이 아니었다.
쌍방향이었다.
어둠은 아이단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니까.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나아가 훨씬 더 짙고 음습하기까지 했다.
아이단의 그것과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지금 막 이 어둠을 태동시킨 참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모든 것들을 바꿔 나가기 위해.
그리하여 내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 내기 위해.
* * *
황도 아카데미 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기본적으로 시스템 자체가 슈라우드 아카데미와 똑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제국의 아카데미 제도를 각국이 그대로 가져다 베낀 것이었으니까.
따라서 적응에 문제가 된다거나 하는 부분은 생기지 않았다.
레나의 경우, 적응 문제는커녕 슈라우드에서보다 몇 배는 더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중이었다.
애초에 사람을 사귀고 교류하는 데에 능력을 보여 온 레나였다.
이런 레나에게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곳은 슈라우드 왕국 밖이었다.
자연스레 레나에게 가해지던 제약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크리스토퍼의 눈치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작부터 상당한 이목을 집중시키기까지 했다.
왕녀로서는 유일하게 연회에서 황태자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덕분에 누구도 레나의 접근을 꺼리지 않는,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레나는 이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말이다.
나 또한 딱히 나쁠 것은 없었다.
나를 향한 분위기 역시 레나와 대동소이했다.
단지 나는 이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뿐.
주로 그래플과 함께 다니며 조용한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 갔다.
센트럼과 베로카급 인재를 발견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여 딱히 나설 일도 없었다.
물론 가끔가다 귀찮게 구는 것들이 있기는 했다.
내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대련을 신청하는 그런 것들.
다만, 이는 처음 한 달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처방했기 때문이다.
일단 찾아오는 족족 신청을 받아 주었다.
그러고는 아예 작살을 냈다.
최소 한 달은 정양이 필요한 수준으로.
그렇게 본보기로 몇 놈 몸져눕고 나니 더는 귀찮게 구는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조용한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대략 두 달가량 이어졌을 무렵, 드디어 이벤트가 발생했다.
어쩐지 지금까지의 조용함을 깨뜨릴 확률이 다분해 보이는 그런 이벤트였다.
“웬만하면 피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황태자가 저를 직접 지목했다고 하네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것의 전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레나였다.
“그래서 말인데 라이, 저랑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황태자가 초대한 노예 경매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