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64화 (65/200)

35장: 대적

“설마 내 명령을 듣지 못했다 따위의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건 아니겠지?”

바이젠과의 사건이 일단락된 후, 슈라우드 사절단은 곧바로 황도에 입성했다.

그러고는 안내인을 따라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한데, 이 길 위에서 크리스토퍼가 나를 호출했다.

그런 뒤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 참이었다.

사실 질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내놓을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들었습니다.”

“들었다? 분명 들었다 이 말이지? 그런데도 감히 내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나서서 일을 키워? 총책임자인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 또한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었다.

노골적인 힐난과 질책이었다.

그 사유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대꾸가 없었다.

나는 분명 사절단 총책임자인 크리스토퍼의 명령에 불복했다.

물론 그 이유와 정당성에 대해서야 수백, 수천 마디고 늘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선, 그래 봤자 별 의미가 없었다.

나는 신분상 크리스토퍼보다 명백히 아랫사람이었다.

그런 나로서는 명령 불복이라는 결과 자체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말이다.

“아니. 라이는 명령을 어긴 적이 없어.”

나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줄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크리스토퍼와 신분도 대등하고 언변 또한 훨씬 유창한 그런 변호인.

바로 레나였다.

크리스토퍼의 부름에 함께 온 레나가 곧바로 나에 대한 변호에 들어갔다.

“무슨 억지냐? 난 분명 나서지 말라고 했다.”

“맞아, 그랬어. 나도 그렇게 들었거든. 그런데 오빠는 분명 거기에 단서도 달았어.”

“단서?”

“생도들 일이니 기사들은 나서지 말라는 단서. 그래서 생도인 라이가 나선 거잖아. 여기 어디에 명령 불복이 있다는 거야?”

레나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궤변 늘어놓지 마라. 유치한 말장난이나 하고 앉았을 기분 아니니까.”

“그래? 그런데 어쩌지? 장난하지 말라는 그 말, 내가 딱 오빠한테 되돌려주고 싶은 말인데. 유치한 장난은 오빠가 먼저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레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역으로 크리스토퍼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야말로 좀 물을게. 꼭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그런 그녀의 표정은 크리스토퍼 못지않게 굳어져 있었다.

“왕국 내에서 날 모함하고 깎아내리는 거야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쳐.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아니야. 오늘 오빠가 한 그 유치하고 비열한 짓이 왕국의 위신을 얼마나 깎아 먹었는지 알기나 해?”

“착각하지 마라. 애초에 네가 처신만 똑바로 했으면 그깟 놈한테 트집 잡힐 일도 없었어. 네가 네 분수를 모르고 까불어서 생긴 일이다.”

“그건 오빠의 편견이고 아집일 뿐이지. 왕녀가 승마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어. 왕국은 물론이고,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 제국에도.”

레나의 지적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오늘 크리스토퍼가 한 짓은 비열함 이전에 일국의 왕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어디 일개 자작가 같은 곳도 아니고 무려 왕가였다.

왕족끼리의 갈등과 다툼은 어떤 경우에든 내부에 국한 지어야 하는 법.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국가적 혼돈은 그 예시가 발에 차이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어쨌든 오늘 일의 모든 원인은 오빠에게 있어. 그러니까 라이 이전에 오빠 본인에 대한 책임부터 물어. 아니면 지금 이런 상황, 1왕녀로서 나는 절대 인정 못 하니까.”

단순한 지적만이 아니었다.

이를 바탕으로 레나는 상황을 순식간에 종결지으려 했다.

“가죠, 라이. 볼일은 끝났으니까.”

나에게 불이익이 생길 수 있는 자리 자체를 뭉개 버리려 하는 것이다.

물론 크리스토퍼가 가만히 두고만 보지는 않았다.

그가 레나를 저지하고자 했다.

“웃기지 마. 내 용건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말귀 못 알아들어? 그 용건, 시작이라도 하려면 제대로 된 명분을 들고 오라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 그만 부리고.”

“하, 억지? 이게 억지라고? 저놈은 방금 단순히 내 명령만 어긴 게 아니다. 바이젠 놈들에게 또다시 전쟁의 빌미까지 줄 뻔했어. 이런데도 제대로 된 명분이 아니라는 거냐?”

그럼에도 레나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어조로 반문할 뿐이었다.

“그래서, 줬어?”

“뭐?”

“그 빌미, 그래서 줬냐고? 안 줬잖아.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너, 왕녀씩이나 돼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오빠야말로 왕자씩이나 됐으면 말 좀 똑바로 해. 아까부터 자꾸 전쟁의 빌미, 빌미 그러는데, 우리가 언제 바이젠하고 싸우지 않은 적이 있기는 해?”

아니, 없었다.

벌써 30년이었다.

무려 한 세대 동안 짧으면 2년, 길어도 4년마다 한 번씩은 전쟁을 치러 온 것이다.

“빌미 같은 거, 우리가 주지 않아도 어거지로 만들어서 쳐들어올 자들이야. 이제 슬슬 그럴 시기가 되기도 했고. 그런데 대체 빌미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아까부터 그렇게 강조하는 건데?”

지난 전쟁에서 슈라우드가 판정승을 거둔 뒤로 벌써 3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따라서 곧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어차피 예정된 사실.

이런 상황에 빌미 따위를 주고 말고는 별 의미가 없었다.

“더구나 주기라도 했으면 또 몰라.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잖아. 되려 적국 왕자의 사죄만 받아 왔지. 이런데도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책임을 묻겠다고?”

“…….”

“좋아, 정 하고 싶거든 그렇게 해. 단, 전하와 대신들 정식 승인부터 받아와. 오빠 말처럼 이게 전쟁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절단의 권한은 한참 넘어선 사안이니까. 물론, 보나마나이겠지만.”

레나의 확신이 눈에 보였다.

이 사건이 공론화된다 해도 나에게 결코 처벌은 없으리라는 확신 말이다.

또, 크리스토퍼 역시 결국 이를 공론화시키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더 할 말 있어?”

“…….”

“없는 모양이네. 그럼 가 볼게.”

이어지는 크리스토퍼의 침묵이 그 방증이었다.

“가요, 라이. 진짜로 볼일 끝났으니까.”

그렇게 레나가 먼저 휑하니 몸을 돌렸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두말없이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떠나갔다.

입은 꾹 다문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크리스토퍼를 등 뒤에 남겨 둔 채로.

* * *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렇게 탄산이 주는 시원함, 알콜의 쌉싸름함을 음미하며 다소 떨어진 곳에서 귀족들에 둘러싸인 상태의 레나를 눈에 담았다.

오늘 처음 만난 귀족들과의 대화에 한창 몰입 중인 레나.

그런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특별했다.

왕녀치고 비교적 꾸밈이 적은 편인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오늘만큼은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들로 치장한 그녀.

이런 화려함이 레나의 지적인 스타일과 합쳐져 아름답고도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여기에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그녀의 주도적인 성격이 더해지니 그 특별함은 배가 되었다.

이곳 연회장에 레나보다 예쁜 여성은 있을지언정, 그녀보다 더 눈길을 잡아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렇듯 현재 내가 샴페인을 홀짝이고, 레나가 타고난 매력을 유감없이 발산해 가고 있는 이곳.

이곳은 황도 아카데미 내 연회장이었다.

아카데미 간 교류 행사를 기념하여 황태자가 주최한 환영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다만, 나는 레나와 달랐다.

지닌 바 사교성을 한껏 발산 중인 그녀와 달리, 이 자리를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 이렇듯 사람들과 동떨어져 홀로 샴페인이나 홀짝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정령석을 섭취하며 감정이 풍부해졌다 하나, 기본적인 성향 자체가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검에 미쳐 살던 나로서는 이런 자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연회장 입장 전, 레나에게 부탁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혼자 조용히 구석에 박혀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귀족들로 북적이는 연회장 내에서 이렇게 소외와 고독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한 번씩 힐끔거리는 슈라우드 인사들, 대놓고 분노의 눈빛을 쏘아 보내는 바이젠 놈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야 가뿐하게 무시해 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시선만 보내올 뿐, 직접 접근해 오지는 않았으니까.

‘음?’

그런데 그때였다.

군중 속 고독을 즐기던 중인 나에게 다가오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슈라우드나 바이젠 쪽 사람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최소한 얼굴 정도는 눈에 익었을 터.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공자이시지요?”

“예, 제가 라이오넬 라인하트이기는 합니다만, 혹시 저를 아시는지……?”

“당연히 알고 있지요. 바르코스 요새의 영웅이자 트윈 슬레이어라고 불리는 분 아닙니까?”

반면, 이 인물은 나를 알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내 행적과 칭호까지.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마이바크 왕국 스트라우스 백작가의 장남 그래플 스트라우스라고 합니다.”

“어……?”

“들어 보지 못하셨다 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검사이신 분이 타국 가문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마이바크와 슈라우드가 서로 가까운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았다.

내 순간적인 당황은 이 사람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어색하지 않게 적당한 인사말로 되받았을 터.

반대로 내가 들어 봤기 때문이었다.

마이바크 왕국의 그래플 스트라우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제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좀 많다 보니, 공자에 대해서도 듣게 됐습니다. 본인만의 길을 걸으시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더군요. 그래서 꼭 한번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내 속내를 모르는 그래플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적절히 반응해 주었다.

다만, 그가 건네오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나는 그래플 스트라우스라는 인물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임은 확실했다.

회귀 전에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분명 그래플을 알고 있었다.

대륙 전체에 퍼진 그의 이름 덕분이었다.

마이바크의 마지막 등불.

이것이 그가 얻은, 아니 앞으로 얻게 될 별칭이었다.

그리고 이 별칭을 얻기까지 남은 시간은 10년이 채 안 됐다.

마이바크 왕국의 남은 수명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마이바크 왕국은 앞으로 길어야 10년 이내에 망하게 된다.

원인은 간단하다.

제국과의 전쟁, 그리고 패배.

대략 6~7년쯤 뒤, 제국이 마이바크 왕국을 침공한다.

침공의 명분으로 제국은 황족의 죽음이니 뭐니 따위를 내세우지만, 모두가 알았다.

이유는 마이바크의 발전 가능성에 있었다는 것을.

몇 년 내로 마이바크는 썬더실크라는 특산품을 대륙에 내놓는다.

나아가 이를 통해 폭발적인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 점이 못마땅한 제국은 마이바크를 침공하여 왕국 자체를 지워 버리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망국의 과정에서 그래플이 떠오른다.

마이바크를 지탱하는 마지막 등불이자 최후의 보루로.

그가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통해 제국을 적잖이 애먹이는 것이다.

비록 끝내 몰락을 막지는 못하나, 그가 아니었다면 전쟁은 채 1년을 넘기지 못했을 터.

이렇듯 그래플은 대륙 전체에 그의 이름을 퍼뜨리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래플 스트라우스라는 인물 자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사흘 전에는 성문 앞에서 직접 신위도 보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쉽네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특별히 신위라고 할 만한 건 아니었습니다. 선을 하도 심하게 넘길래 살짝 제재를 가했을 뿐입니다.”

“살짝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 전혀 아니던데요? 하긴, 지금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쏴 대는데, 당시에는 얼마나 더 심했을지 충분히 짐작되네요. 사실, 상황이 어떠하든 저는 공자의 행보를 응원하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오늘 이 시간부터 마찬가지 입장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그래 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그렇기에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로서는 설령 안면을 트지 않았다 해도 그래플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 또한 제국이라는 괴물과 필사의 사투를 벌이게 될 운명이었으니까.

나처럼 말이다.

한데 이렇게 대화까지 잘 통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래플과는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로만 제국의 적법하고도 유일한 계승자이신 세바스티안 나다니엘 아이단 로만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를 갖춰 주시기 바랍니다.”

단,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지금 막 연회장에 발을 들이는 인물 때문이었다.

좋은 예감을 지속해 나가기에 이 인물은 너무나도 불길했다.

로만 제국의 황태자 세바스티안 나다니엘 아이단 로만.

레나를 시작으로 슈라우드 왕가, 종국에는 나의 라인하트까지, 모든 것에 끔찍한 비극을 선사하는 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극복하고 끝내 무찔러야만 하는 진정한 대적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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