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 로만 제국으로(2)
크리스토퍼가 내 반발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당연히 뒤에서 난리가 났다.
허락할 수 없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감히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는 거냐 따위의 고성이 들려왔다.
물론 깔끔하게 무시했다.
처음부터 허락받을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고, 여기서 그만둘 거였으면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금껏 크리스토퍼의 명령에 따랐던 기억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거침없이 바이젠 사절단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하여 폴리단의 정면에 마주 섰다.
그러고는 단숨에 일을 키웠다.
“방금 내뱉은 말, 사과해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크리스토퍼는 나를 더는 저지할 수 없었다.
여기서 상황을 무마하고자 한다면 폴리단에게 아쉬운 소리라도 해야 할 터.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고, 또 그래서도 안 됐다.
그건 슈라우드의 자존심을 통째로 내다 버리는 짓거리였으니까.
따라서 이제 등 뒤의 골칫덩어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저 눈앞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에 집중하면 그만일 뿐.
“하, 내가? 왜? 누구에게 그래야 한다는 거지?”
마침 눈앞의 쓰레기, 폴리단은 딱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헛웃음 치며 반문하는 놈이었다.
“방금 셀레스티나 왕녀님께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무례를 범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왕녀님께 정중한 사죄의 말씀을 전하시거나, 싫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셔야 합니다.”
이에 절차상 한 번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한데, 친절에 대한 반응은 그 수혜자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수혜자보다 더 격하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놈이 있었다.
“감히 제 정체도 밝히지 않은 놈이 대 바이젠의 왕자님께 뭐? 무례?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구나.”
“아아, 바투 경, 너무 열 내지 마시오. 특별할 것도 없지 않소? 애초에 경우라는 걸 기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외다.”
“그렇다 해도 왕자님의 위신이 걸렸습니다. 절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부디 소신에게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 저 경우 없는 놈에게 경우란 걸 심어 주고 오겠나이다.”
“역시 믿음직하구려. 좋소, 바투 경. 다녀오시오.”
바투라는 놈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 주군과 찰떡궁합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놈.
놈이 응답에서 그치지 않고 나를 응징해 주겠다며 나섰다.
“보아하니 어디 귀족가 도련님쯤 되는 모양인데, 용기는 가상하구나. 왕녀가 욕을 먹어도 나서는 놈 하나 없는 저기 떨거지들보다는 좀 나아.”
다만 목적은 나에 대한 응징만이 아니었다.
내 앞에 마주 서서는 조롱부터 늘어놓기 시작했다.
양측 사절단 모두에게 들릴 만큼 아주 큰 목소리로.
이에 등 뒤에서 슈라우드 기사들의 발끈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아, 아닌가? 사실이라는 걸 아니까 창피함에 나서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어. 혹시 네놈도 그런 것이냐? 왕녀가 약속이라도 했나 보지? 이렇게 나서 주면 가랑이 한 번 벌려 주겠다고.”
기사들에서 그치지 않았다.
첫인상이 들어맞았다.
폴리단과 찰떡궁합이 확실했다.
그걸 자랑이라도 하듯 레나에 대한 조롱까지 재탕하는 놈이었다.
물론 슈라우드와 바이젠이 붙으면 쌍욕이 기본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감안한다 해도 두 놈은 선을 너무 심하게 넘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상식과 예의범절을 갖춰 가며 상대해 줄 필요가 없었다.
“우리 기사들이 왜 잠자코 있느냐고? 간단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쓸 필요 있나? 바이젠 따위는 아직 졸업도 못 한 일개 생도면 충분한데 말이야.”
“허, 이놈 보게……?”
“그리고 기왕이면 입은 좀 다물어 주지? 입에 걸레를 물었나, 열 때마다 악취가 진동하거든. 주인이나 개새끼나 쌍으로.”
욕설이나 조롱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을 구른 횟수가 얼만데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모르겠는가?
단지, 자제하는 것뿐이었다.
내 입과 기분도 함께 더러워지기 때문.
그러나 눈앞의 쓰레기들에게는 괜찮았다.
진짜 쓰레기들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뭐라?”
“역시 그 주인에 그 개새끼인 건가? 말귀를 한 번에 못 알아듣는 점조차 똑같군.”
물론 두 놈이 내뱉은 만큼은 불가능했다.
이 분야 있어 내 능력은 이 쓰레기들에게 한참 미치지 못했으니까.
하나,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남 욕 잘하는 쓰레기들이 원래 본인 욕은 못 참는 법.
“감히……. 아주, 죽여 달라고 용을 쓰는구나. 그래, 소원대로 해 주마. 검을 뽑아라.”
“개새끼가 왜 사람 흉내를, 그것도 기사 흉내를 내는 거지? 그냥 하던 대로 해라. 어차피 개새끼 교육에 검은 사치일 뿐이니까.”
폴리단의 레나 모욕 직후부터 쭉 검을 빼 들고 있던 바투였다.
반면, 내 검은 여전히 검집에 고이 잠들어 있는 상태.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기껏해야 소드 익스퍼트 중상급 정도 되는 놈 하나 잡는 데에 검은 필요치 않았다.
맨손이면 차고 넘쳤다.
“미친놈. 오냐, 그럼 그냥 그대로 죽거라!”
애초에 정식 결투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
여기에 원래 성격도 그렇겠다, 역시나 쓰레기다운 모습을 보이는 바투였다.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슈아악~
나를 정수리부터 단번에 쪼개 죽이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검이 내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내 죽음을 확신하는 듯한 놈의 조소와 함께.
저벅.
그러나 지금부터였다.
놈의 확신과 조소가 산산조각 나는 것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검은 무시했다.
그대로 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뿐이었다.
단, 그냥 한 걸음이 아니었다.
보폭이 상당히 큰 한 걸음이었고, 이로 인해 놈과 나 사이의 거리가 성큼 줄어들었다.
가볍게 팔만 뻗어도 닿을 정도까지.
턱.
우뚝!
그러고는 왼팔을 뻗어 놈의 양 손목을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이에 떨어져 내리던 검은 자연스레 공중에서 우뚝 멈춰 섰다.
내 머리 한 뼘쯤 위의 지점이었다.
“이익……!!”
당연히 바투는 용을 썼다.
어떻게든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빼내기 위함이었다.
하나,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쉽게 거리를 내주지도 않았을 터.
사아아아~
무엇보다, 그에게는 붙잡힌 손목에 신경 쓸 겨를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더 큰 힘이 그를 덮쳐 갔기 때문이다.
구구궁~
어둠의 정령력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힘, 바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중력 말이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 힘이 바투를 사정없이 짓뭉개는 중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양 무릎은 서서히 굽혀져 가고 있었다.
저 밑의 땅바닥을 향해서.
“끄으으……!”
물론 순순하지는 않았다.
바투는 굽혀지는 무릎을 다시 펴고자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미친 듯이 발악했다.
단지, 그의 뜻대로 되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을 뿐.
털썩.
끝내 바투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그의 양손은 붙잡혀 한데 모여 있는 상태.
검을 쥔 채이기는 하나, 살짝 거리를 두고 보면 얼추 합장과 비슷해 보일 터였다.
종합하면 양 무릎을 꿇고 팔까지 들어 올린 채로 양손 합장을 한 모양새인 것이다.
극도로 공손한 자세라고나 할까?
“일단.”
바투를 이런 자세로 만들어 놓은 뒤, 나는 한걸음 옆으로 비켜났다.
그러자 바투의 이 지극한 공손함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게 됐다.
“일단 개새끼부터 왕녀님께 범한 무례를 사죄드리도록.”
레나였다.
내가 비켜서며 놈이 마주하게 된 방향에는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놈의 공손한 사죄를 받아야 할 이는 내가 아닌 모욕의 당사자였으니까.
“그리고,”
단, 고작 바투 하나로 끝낼 일은 결코 아니었다.
당연히 그 주인에게까지 갈 필요가 있었다.
스윽.
이를 위해 잠시 검을 빌렸다.
다만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다.
반대나 저항 같은 것이 없기에 그냥 원주인의 손에서 건네받듯 가져왔을 뿐.
그러고는 개새끼의 주인을 향해 겨누었다.
“개새끼들부터 하나씩 꿇리다 보면 결국 주인 차례도 오겠지.”
바투라는 개새끼의 주인, 폴리단을 향해서.
“미친!”
“저놈이 감히!!”
“죽고 싶은 것이냐!!!”
내가 쥔 검이 폴리단에게 겨누어진 직후, 또다시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맨 처음 바투가 전면에 나서며 보였던 것들과 대동소이한 반응이었다.
미쳤다든지, 감히라든지 따위의 반응들.
단, 그때와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우선 반응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바이젠의 기사들 전원에게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웅~!
또, 단순히 말뿐인 분노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검에서 일제히 오러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초장부터 물리적인 수단을 꺼내 든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물론,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오히려 기다리던 바였다.
주인까지 가는 길에 있어 귀찮음을 한결 줄일 수 있으니 말이다.
“들어와라, 바이젠의 개새끼들.”
* * *
“…너, 정체가 뭐지?”
드디어 내 정체를 묻는 폴리단이었다.
어쩌다 보니 폴리단과 바이젠 측은 지금껏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시기를 놓치기도 했거니와,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참담한 광경, 그리고 그 광경을 만들어 낸 나 때문이었다.
로만 제국 황도 서문 앞에는 현재 10명의 사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조차 필요 없었다.
갑옷에 박혀 있는 문양부터가 대놓고 바이젠의 기사들임을 알려 주었으니까.
하나같이 기괴한 자세로 고꾸라져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바이젠의 기사들.
모두 바투 이후 나에게 호기롭게 덤벼든 자들이었다.
그래도 꼴에 기사랍시고 처음에는 한 놈씩만 짓쳐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셋이 당하고 나자 다음은 세 명이, 또다시 그다음은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어차피 그 결과야 눈에 보이는 바와 같았지만 말이다.
“라이오넬 라인하트라고 합니다.”
“라인하트? 설마……?”
그래도 일국의 왕자다웠다.
폴리단은 성을 듣자마자 내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놈이구나. 라인하트 자작가의 트윈 슬레이어.”
하나,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의 입이 레나에게 지은 죄는 여전했다.
내 정체를 파악했다는 사실이 경감 요소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죄를 재촉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면 모를까.
“그런데도 계속 버티실 생각입니까?”
구구구구~
“크아아아악~!”
“왕녀님께 사죄의 말씀을 올리고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끄아아악! 와, 왕자님! 크아아아악~!!”
그리고 이 재촉의 요소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심복의 고통과 비명.
폴리단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던 바투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는 중이었다.
애타게 폴리단을 부르며.
그는 현재 엎드린 채로 내 발밑에 깔린 상태였다.
마치 오체투지와도 같은 자세.
동시에 사정없이 짓눌려지고 있었다.
내 발이 올려진 등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이 대상이었다.
전신이 중력에 짓눌리며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훈련받은 기사조차 애처로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그런 압력, 그리고 고통을.
심지어 지금만 이렇지도 않았다.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된 뒤로 쭉 이러했다.
내 발밑에 깔린 채 쉬지 않고 처절한 비명을 질러 온 바투였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기사들을 전부 쓰러뜨린 것이고 말이다.
“…….”
그리하여 현재 폴리단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레나에게 사죄 같은 것이 가능할 리 만무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슈라우드였다.
30년의 원한이 쌓여 온 철천지원수.
한데 그런 왕국의 왕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한다?
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그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다.
남은 기사뿐만 아니라 병사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나를 치는 것.
물론 매우 바람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꼬리를 말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사죄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하여 완전히 끝에 다다른다면 내릴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끄아아아악~!!!”
그럼에도 나는 그를 극단의 극단까지 몰아붙였다.
일단 자신 있었다.
설령 바이젠 사절단의 호위 병력 전체가 덤벼든다 해도 가볍게 짓뭉갤 자신이.
다만, 이것을 진짜 이유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 있다 한들 이곳은 제국 황도 앞.
결투를 넘어선 병력 간 전투는 슈라우드 입장에서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저들에게 천사와도 같은 자비가 내려지리라는 사실을.
“이제 됐어요, 라이오넬 공자.”
“왕녀님.”
“태도를 보아하니 본인이 저지른 무례에 대해 뼛속 깊이 반성하고 있는 듯하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왕자?”
“…….”
“봤죠? 그렇다네요.”
차라리 직접 사죄를 하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그러나 도저히 받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자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