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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62화 (63/200)

34장: 로만 제국으로

“올해 19세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한 살 차이라면 나쁘지 않네요.”

크리스토퍼는 결국 내 소원권을 수용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것.

그 결과, 현재 나는 로만 제국 황도 아카데미로 향하는 여정 중에 있었다.

동시에 호구조사를 당하는 중이기도 했다.

“라인하트 자작가의 차남이시고요?”

“줄리아.”

“예, 그렇습니다.”

“딱 보기에도 반듯하신 걸 보니, 형제간 우애도 남다르실 것 같고…….”

“유모, 그만 좀!!”

줄리아 르완이라는 40대 중년 여성으로부터 당하는 호구조사였다.

이에 목소리를 높인 레나의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의 직위는 왕녀의 유모.

따라서 나는 허투루 넘기지 못하고 성실한 답변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레나는 이 상황을 탐탁지 못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여 높고 강한 어조로 줄리아의 말을 끊은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시나요, 왕녀님? 저는 그저 라이오넬 공자님께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여쭤보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줄리아 의도가 그게 아니잖아.”

“아니면요?”

“지금 나랑 라이를…….”

마치 본인은 순진무구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줄리아.

이런 유모의 뻔뻔한 반응에 레나는 잠시 말문을 잃고 말았다.

“하아, 어쨌든 이제 그만해. 우리는 줄리아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런 관계가 아니면 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요?”

“무슨 관계는 무슨 관계야? 그냥 친구지, 친구.”

레나의 어조가 강해질수록 줄리아의 눈빛 또한 한층 더 의미심장해져 갔다.

“줄리아, 정말…….”

“왕녀님도 참, 누가 뭐라던가요? 저도 안답니다, 두 분이 그저 절친한 친구 관계일 뿐이라는 거. 그런데 좀 섭섭해지려고 하네요. 왕녀님을 업어 키운 제가 왕녀님의 친구분에 대해 기본적인 관심조차 가지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러더니 그 눈빛의 목적지를 순간적으로 확 틀었다.

레나가 아니라면 목적지가 될 만한 대상은 하나뿐이었다.

“그런 걸까요, 라이오넬 공자님? 혹시 제 질문이 기분 나쁘셨나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물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좀 난감했을 뿐.

“성격까지 시원시원하시군요. 왕녀님의 유모로서 저는 찬성이랍니다. 공자님이 지금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신다면 정말…….”

“줄리아!! 거기까지. 더 하면 나 진심으로 화낼 거야.”

“알겠습니다, 그만하지요. 대신 왕녀님께서 대답해 주시겠어요? 왕녀님은 공자님 어떤 면이 …….”

그렇게 공은 다시 레나에게로 넘어갔다.

그러고는 아옹아옹하기 시작한 레나와 줄리아.

이렇듯 두 사람은 모녀같이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에 제국에서의 체류 기간은 짧지 않을 터.

따라서 줄리아를 비롯한 레나의 개인 시녀들이 제국행에 동행 중인 것이다.

오브리가 국왕이 특별히 붙여 준 호위 기사들과 함께.

물론 우리가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는 오히려 사절단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다만 사절단의 나머지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같은 일행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유리돼 있을 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사절단은 크리스토퍼의 수족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그 안에서 나와 레나, 그리고 3왕자 측 극히 일부만이 반1왕자 파라고 할 수 있었다.

레나가 왕녀이기에 대놓고 차별은 불가능하지만, 경원시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

나를 향해 줄리아의 거침 없는 질문 공세가 쏟아질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였다.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치 사춘기 딸의 이성 관계에 관심을 보이는 여느 어머니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줄리아였다.

단, 그렇다고 하여 이 물음의 무게가 무작정 가볍지만은 않았다.

분명한 현실 인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나에게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이라던 줄리아의 읊조림이 그 방증이었다.

비록 레나의 개입으로 끝맺어지지는 못했으나, 그 뒤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아마 정말로 부마가 될 수 있으리라는 말일 터.

현재 레나의 입지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왕녀였기 때문이다.

국왕이 아끼는 자식이라 하나, 그래 봤자 왕녀는 왕녀.

결국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확률이 다분했다.

이 불안정성을 극복하려면 나에게 왕녀라는 한계를 무마시킬 만큼의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하나,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나에게는 아직 그 무언가가 모자랐다.

그렇기에 실력이든 세력이든 지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줄리아의 바람은 처음부터 방향이 어긋난 상태였다.

나와 레나는 정말로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는 영지 식구들과 매튜, 사네, 센트럼과 베로카, 브로든 등처럼 레나 역시 소중한 내 사람이었고 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줄리아의 찬성은 전제가 잘못된 찬성이었다.

“그나저나 라이오넬 공자님은 혹시 정인이라든가 약혼자가 따로…….”

“줄리아!!!”

다만, 이 사실을 당장에 정색하고 지적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다고 딱히 믿지도 않을 터.

무엇보다, 이 초라하고 삭막한 여정에 한 줄기 미소와 훈풍을 가져다주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 * *

제국으로 가는 길은 순탄했다.

순탄하다 못해 지루할 지경이었다.

그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당연했다.

사절단의 규모가 작지 않기에 큰길로만 이동했다.

또, 왕족이 둘이나 포함된 사절단이니만큼 그 호위 병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도적 떼나 몬스터 따위가 감히 덤벼들 만한 수준이 아닌 것이다.

나 또한 내 능력을 활용하지 않았다.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크리스토퍼 측에 부수적인 수입이나 안겨 주는 꼴일 뿐.

그렇기에 지루하리만치 순탄한 제국행 여정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 지루한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른 현시점, 처음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장소는 로만 제국 황도의 서문.

안내인을 기다려 달라는 요청에 따라 슈라우드 사절단이 성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적국인 바이젠 왕국의 사절단과 함께.

바이젠은 슈라우드 남부에 국경을 맞댄 인접국이었다.

동시에 지난 30년여간 남부 이베리아 영지를 두고 갈등을 벌여 온 국가이기도 했다.

이 갈등의 수준은 직접적인 무력 충돌, 즉 전쟁.

비록 이베리아 영지에 한정된 국지전이라고 하나, 그것이 2~4년에 한 번씩 30년을 지속해 왔다면 지닌 바 의미는 전면전 못지않았다.

갈등의 골을 전면전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깊게 패 놓은 것이다.

현재로서 양국의 관계는 원수지간이라는 표현으로도 다 담기 어려웠다.

“먼저 도착한 쪽은 우리 바이젠 사절단이다. 하니 슈라우드 떨거지들은 우리가 먼저 입성하기 전까지 얌전히 대기하도록.”

바이젠의 4왕자인 폴리단 코드모스 바이젠이 선제공격을 날려 왔다.

그러자 슈라우드 사절단의 총책임자인 크리스토퍼가 이에 맞대응했다.

“나라 자체가 미개해서 그런가, 명색이 왕자란 놈이 위아래도 모르는군. 4왕자면 4왕자답게 꼬리 말고 얌전히 엎드리지? 네놈과 나는 격 자체가 다르니.”

“다르긴 뭐가 다르지? 어차피 왕세자 책봉 못 받았기는 똑같은데. 명색이 1왕자라는 놈이 그 떨거지들 사이에서조차 아직도 빌빌대는 중이니, 쯧쯧쯧. 얼마나 머저리일지는 안 봐도 훤하다.”

“뭐? 이베리아 영지에서 쫓겨난 패배자들 주제에 나불나불 입만 살아서는…….”

이런 식의 공방이 오갔다.

각자의 치부를 거침없이 할퀴고 물어뜯는 날 선 공방.

당연히 분위기는 급속도로 험악해져 갔다.

서로 칼을 빼 든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

다만, 이 분위기가 끝내 무력 충돌까지 이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로만 제국 황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목적지까지 크리스토퍼 레너드 슈라우드 1왕자님과 슈라우드 사절단을 안내할 그리엄 파나스 자작입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려던 그 순간, 제국에서 준비한 안내인이 나왔기 때문이다.

슈라우드 측에 배정된 안내인은 그리엄 파나스 자작이라는 인물.

그리고 이 지점에서 슈라우드와 바이젠 사이의 승부가 갈렸다.

각국에 배정된 안내인의 작위 차이가 그 원인이었다.

바이젠 측에 배정된 안내인은 쿠로 노다인이라는 자.

물론 이 안내인의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작위.

쿠로 노다인의 작위는 남작이었다.

자작보다 한 계단 낮은 바로 그 남작 말이다.

이것으로 더 이상의 공방은 무의미해졌다.

물론 바이젠 측의 항의가 없지는 않았다.

“대관절 우리 바이젠이 왜 저 슈라우드 떨거지들 따위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바이젠 사절단의 총책임자로서 이런 푸대접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송구합니다만 왕자님, 각 사절단 총 책임자의 의전 서열상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는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재가를 받아 결정하신 사항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황제의 재가까지 거친 로만 제국 황태자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섣불리 대응하기에는 부담이 지나치게 컸다.

어찌 됐든 폴리단은 4왕자에 불과했고, 이에 따라 황태자의 결정에는 그럴싸한 근거가 확보된 상태였으니 더더욱.

결국 그대로 순서가 결정됐다.

슈라우드가 자작을 따라 먼저 입성하고, 바이젠은 남작과 함께 뒤에 남아 기다리는 것으로.

당연히 반응 또한 극명하게 갈렸다.

크리스토퍼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띤 반면, 폴리단은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연신 쏟아 내는 불만과 그 안에 섞인 수위 높은 욕설들은 덤이었다.

물론 그 대상을 제국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

폴리단의 수위 높은 욕설들은 오롯이 앞서가는 크리스토퍼와 슈라우드 사절단에게로 향했다.

그럼에도 슈라우드 측에서는 이렇다 할 동요를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한데, 이것이 폴리단을 제대로 약 올린 모양이었다.

그가 선을 넘었다.

“하긴 일국의 왕녀라는 년이 품위 없이 바지 입고 말이나 타는 작태를 가만히 두고 보는 것들에게 뭘 기대할까?”

그 대상은 레나.

사절단 내 다른 귀족들처럼 말을 타고 이동 중인 그녀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러고는 도저히 입에 담기조차 힘든 원색적인 조롱을 쏟아 냈다.

“아, 혹시 그런 건가? 천박한 슈라우드 계집답게 왕녀조차 음탕한 창부나 다름없는 거. 말 등에서 가랑이 쫙 벌린 채로 질질 흘려 대는 중일지도 모르겠군.”

“……!!!”

순간 모두의 시선이 폴리단의 입으로 모여들었다.

그만큼 폴리단의 언사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오호? 발끈하는 걸 보니 정곡이라도 찔린 모양이군. 역시 음탕하기 이를 데가 없는 년이었어. 발밑으로 뚝뚝 떨어질까 봐 치마는 차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고 말이야.”

이에 폴리단은 더 신을 냈다.

모여든 시선에 자제는커녕 더욱더 거리낌 없이 입을 놀린 것이다.

스르릉~ 챙채채챙~

결국 상황은 다시금 악화일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번 상황은 한층 더 심각했다.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모욕에 국왕이 붙여 준 레나의 호위 기사들이 먼저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바이젠 기사들 또한 즉각적인 맞대응에 나섰다.

마찬가지로 검을 빼 들어 슈라우드를 향해 겨눈 것이다.

이로써 양측은 직접적인 무력 충돌 직전의 순간에 다다르게 됐다.

폴리단의 사과가 없는 이상 어찌해도 충돌은 피하기 어려운 상황.

그때였다.

“그만.”

이 어려움을 단번에 정리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폴리단의 사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 상태.

애초에 목소리의 진원지는 바이젠 사절단 쪽이 아니었다.

슈라우드 쪽이었다.

그것도 사절단의 최선두, 일행의 리더가 자리하고 있는 쪽 말이다.

“그만하고 검들 집어넣도록.”

크리스토퍼였다.

사절단의 총책임자인 그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패배자의 넋두리 따위에 귀 기울여 줄 필요 없다. 거기에 맞장구쳐 줄 이유는 더더욱 없고.”

“하지만 왕자님, 모욕이 도를 넘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면? 고작 이런 하찮은 문제로 진짜 충돌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저들에게 쓸데없이 전쟁의 명분만 주는 꼴인데도?”

레나의 호위 기사가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반발을 가볍게 짓뭉개는 크리스토퍼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충돌도 불사할 것처럼 으르렁대던 인간이 맞나 싶을 지경.

“그저 승자의 관대함으로 가볍게 웃어넘기면 그만인 일이다. 물론 일정 부분 빌미를 제공한 왕녀도 처신을 똑바로 할 필요는 있겠지.”

“그렇지만…….”

“거기까지만 하도록. 아카데미 생도들 간의 교류를 위해 나선 길이다. 생도도 아닌 정식 기사들이 전면에 나서서 일을 키우는 짓은 사절단의 책임자로서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사절단의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크리스토퍼.

불만이 있다 해도 그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반발은 강제로 잠재워졌고, 기사들은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방금 하신 말씀, 생도가 나서는 건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잠재워진 것은 어디까지나 기사의 반발일 뿐.

생도의 반발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었다.

생도의 반발이란 곧 나의 반발을 의미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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