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왕궁에서(2)
“그렇게 아쉬우십니까?”
왕궁 방문 첫날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왕녀궁으로 향하는 길.
그 길 위에서 연신 고개를 내젓는 레나였다.
아쉬움, 안타까움 따위의 감정을 담은 채로 말이다.
“당연히 아쉽죠. 다른 것도 아니고 정령석이잖아요.”
조금 전 대화를 마친 아이르만 다스더 백작으로부터 전해 들은 한 가지 소식이 원인이었다.
정령석에 관한 소식이었다.
남부 지드린느 자작가의 영지에서 정령석이 발견됐다고 한다.
대략 한 달 전쯤의 일이며, 발견된 것은 대지의 정령석.
물론 그 종류는 크게 상관없었다.
정령석은 종류 구별 없이 발견되는 것만으로도 왕국 전체의 경사라고 볼 수 있었다.
국가 차원의 전략 물자로 취급되는 귀물이니만큼 지극히 당연한 대접이었다.
“제국은 전략 물자로 황실 차원에서 철저히 관리하기 시작했다는데, 우리는 그런 걸 이렇게……, 하아.”
단,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회귀하기 전에 통용되던 인식.
진정한 전략 물자로 취급 및 관리되기 위해서는 아직 시작이 필요했다.
적게 잡아도 10년 이상.
정령석의 가치를 밝혀낸 것 자체가 기껏해야 5년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위력이나 사용방식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이 중요한 자산이 국가 차원의 관리는커녕 마구잡이로 소비되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정령석 역시 지드린느 자작가의 장남이 섭취했다고 한다.
전투 관련 재능이 젬병이라고 알려진 인사가 말이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제국과의 격차만 더더욱 벌어질 뿐이겠죠. 우리는 왕실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고요.”
물론 대륙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기는 했다.
현재로서 체계적인 관리에 들어간 곳은 로만 제국이 유일했다.
강력한 황권으로 귀족들의 반발을 억눌렀기에 가능한 일.
반면, 왕권이 부실한 슈라우드 같은 곳에서는 아직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레나는 이 점을 못내 안타까워하는 중이었다.
“아, 제가 제 생각만 너무 일방적으로 늘어놨네요. 라이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아니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왕녀님. 이건 정령석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완전히 짓밟아 버린 꼴입니다.”
“음, 의외인데요? 쉬르더 후작님이나 여타 검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데……. 그래서 저는 라이도 비슷하리라고 짐작했거든요.”
레나의 말대로였다.
정령석에 대한 검사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부정적인 편에 속했다.
일종의 편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정도를 걷다 보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그런 하찮은 잡기 말이다.
오히려 궁극적인 깨달음에 방해가 될 거라고 여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검사로서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내가 바로 이런 케이스였다.
“물론 대부분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비슷한 경지 간 승부에서는 극히 미세한 차이 하나가 결과를 가르죠. 그리고 정령석이야말로 이 차이를 만들어 내는 최고의 기제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러나 회귀 직전 이 편견이 산산조각 났다.
회귀 직전의 나는 분명 소드마스터였다.
검이라면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경지.
그럼에도 결국 화염이 만들어 낸 미세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소드마스터가 못 한다면 대륙의 어떤 검사도 불가능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명 있는 그랜드 소드마스터라면 모를까.
따라서 이 또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대다수 검사들의 견해는 회귀 전의 나처럼 편견과 아집에 불과했다.
정령석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정령석 섭취자가 된 현재는 더더욱 강하게 확신했다.
“라이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솔직히 그간 답답했거든요, 다들 너무 고지식한 것 같아서. 그럼 눈치 안 보고 속마음 좀 털어놓을게요. 어쨌든 우리도 제국처럼 체계적인 관리에 들어가야 …….”
B22
남은 길은 그렇게 레나의 토로와 함께였다.
단, 논리 정연하고 나름의 대안까지 갖춘지라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그런 토로였다.
덕분에 왕녀궁 도달도 순식간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들어서게 된 레나의 처소.
“늦었네요.”
한데, 선객이 있었다.
주인 없는 처소에서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던 손님.
이 손님이 오히려 돌아온 주인을 맞이해 주었다.
“와 있었구나, 로튼. 연락하지 그랬어?”
카리우스 드로튼 슈라우드.
슈라우드 왕국의 2왕자이자 올해 17살인 레나의 친동생이었다.
“그런다고 누님이 일찍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겠어요, 왕녀답지 않게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분을 누님으로 둔 제가 감수해야지.”
“너도 알잖아. 궁에만 갇혀 있는 거, 나한테는 너무 답답한 일이야.”
“누님 마음이야 알죠. 그래도 최대한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언제까지고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친남매라 하나 드로튼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레나를 왕녀라는 한계에 묶어 두고 있었다.
남매로서의 정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소식 듣고 왔지요. 요즘 가장 핫한 라인하트 공자가 궁에 방문했다는 소식. 솔직히 저에게 제일 먼저 소개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윽고 드로튼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공자. 슈라우드 왕가의 2왕자 카리우스 드로튼 슈라우드입니다.”
“뵙게 돼 영광입니다, 왕자님. 라인하트 자작가의 차남 라이오넬 라인하트입니다.”
“나야말로 영광이지요. 요즘 왕국 전역에 공자의 이름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크리스토퍼 형님을 제대로 물 먹인 일까지. 전해 듣기만 했는데도 나까지 다 속이 시원해지지 뭡니까?”
“허명일 뿐입니다.”
“허명일 리가 있습니까? 전부 사실들뿐인데.”
확실히 1왕자 크리스토퍼와는 태도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다.
주어진 배경과 처한 상황 자체가 천지 차이였으니까.
중요한 부분은 그의 눈빛에 깃든 어떤 열망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많이 놀랍고, 또 기껍기도 하더군요. 이런 대단한 공자가 우리 누님과 이토록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는 사실이.”
“왕녀님께서 많이 챙겨 주신 덕분입니다.”
“하긴, 우리 누님이 원래부터 사람 끌어모으는 능력이 남다르기는 해요. 항상 동생으로서 걱정되는 마음이 우선이었는데, 오늘 보니 꼭 그리만 여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니.”
세간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드로튼은 계승 논의에서 언급조차 안 되는 처지.
그럼에도 그에게는 의지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만나게 돼 정말 반갑습니다, 공자. 이건 내 진심이에요.”
굳이 말로 할 필요 없었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진심 어린 기꺼움이 절절하게 느껴졌으니까.
이로 인해 나와 그의 대화는 꽤 길게, 그리고 활발하게 이어졌다.
내 답변은 일관되게 단답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10분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소재가 다 떨어진 것인지, 나에게 쏟아지던 그의 질문 세례도 잦아들었다.
대신 다시금 레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그였다.
“아, 그 소식 들었어요, 누님? 크리스토퍼 형님이 제국행 사절단 인선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거. 역시나 죄다 자기 사람들로 채워 넣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 주제란 바로 제국행 사절단.
로만 제국 황도 아카데미에서 3년마다 한 번씩 주최하는 각국 아카데미 간 교류 행사.
이 행사에 참여하는 슈라우드 아카데미의 사절단에 관한 것이었다.
각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였다.
그 의미가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특히 올해 교류는 더더욱 그러했다.
경쟁자들을 모조리 찍어 누르고 다음 대 황제로서 완벽히 자리를 굳힌 황태자, 세바스티안 나다니엘 아이단 로만이 직접 주최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교류는 향후 에펜시아 대륙 국제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하는 슈라우드 사절단의 총책임자는 1왕자 크리스토퍼였다.
명분은 확고했다.
1왕자라는 신분, 비록 졸업생이라 하나 3년 내내 역임했던 생도회장 이력이면 충분했다.
아직 아카데미에 입학조차 못 한 두 왕자, 올해 3학년이기는 하지만 왕녀인 레나와는 조건 면에서 비교 불가인 것이다.
“그래, 들었어. 그리고 어쩔 수 없지. 오빠가 총책임자로 내정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크리스토퍼의 노골적인 인선 작업에 있었다.
그는 사절단 명단 대부분을 그의 사람들로 채워 넣었다.
3왕자 측 생도들이 서넛 정도 들어가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레나의 사람들은 아무도 포함되지 못했다.
레나는 직접 사절단에 참여하는 입장임에도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라인하트 공자까지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건 지나치게 노골적이잖아요. 트윈 슬레이어보다 우수한 아카데미 생도가 대관절 어디 있다고?”
이 말인즉슨 나 역시 배제됐다는 뜻이었다.
자격이야 그 누구보다 차고 넘쳤다.
영지 귀족 출신 생도에 트윈 슬레이어이기까지 했으니까.
단지, 마지막 한 가지이자 가장 중요한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
바로 크리스토퍼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그와 적대관계를 형성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
“이러면 사절단에서 누님은 완전히 외톨이나 다름없어요.”
“괜찮아, 사람이야 거기서 새로 사귀면 그만이야. 어려울 것 없어.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돼.”
결국 레나는 외톨이가 되고 말 처지에 놓였다.
그럼에도 괜찮다며 동생을 달래는 그녀였다.
하지만 절대 괜찮지 않았다.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는 드로튼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그랬다.
되려 친동생인 그보다 내가 더했다.
나는 펼쳐질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대로 넋 놓고 앉았을 생각은 없었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것이다.
그리하여 레나 앞에 드리울 예정인 모든 암운을 깔끔하게 걷어 낼 작정이었다.
* * *
왕궁 방문 며칠 뒤였다.
레나의 손에 이끌려 다니며 진행되던 왕궁 견학이 적당히 마무리됐다.
이에 나는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레나 초대로 왔다더니, 나한테는 웬일이지? 우리가 굳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저의 왕궁 방문 목적에는 왕자님을 뵙는 일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 시작점은 크리스토퍼였다.
레나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홀로 1왕자 궁에 방문한 상태였다.
다만, 길게 보고 싶은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
해서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왕자님께 작년에 받은 소원권, 그걸 지금 쓰고자 합니다.”
“지금 갑자기?”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필요할 때 쓰겠다고만 했을 뿐, 시기를 특정해 두지는 않았으니까요.”
지난해 대결에서 승리한 뒤 저장해 둔 소원권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해 마련해 둔 장치였다.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 들어주지. 단, 명심해라. 내가 수용 가능할 만한 일이어야 한다. 무리가 되는 일은 들어줄 수 없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어도 왕자님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겁니다.”
어차피 다른 상황에서는 활용이 어려웠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들어주지 않으려 할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명분까지 갖춰진 지금이 적기였다.
“말하도록.”
“올해 제국행 사절단에 저도 포함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사절단 총책임자는 크리스토퍼였다.
심지어 사절단 인원 대부분을 제 사람으로 채워 넣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나 하나 포함시키는 것쯤이야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이미 인선 작업이 마무리된 상태다. 국왕 전하의 재가는 물론이고, 대상자들에게 통보까지 끝낸 사안이야.”
“그러니 소원권을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최강 생도인 저를 포함시키는 게 겉보기에도 훨씬 더 좋은 그림일 겁니다.”
물론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한 크리스토퍼였다.
하지만 그런 기색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
“하면 받아들여진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가도 괜찮겠습니까,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