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60화 (61/200)

33장: 왕궁에서

그로자 영지의 갑작스러운 곡물 거래 중단 선언.

이로 인한 라인하트와 그로자의 갈등.

갈등 과정에서 발생한 그로자의 실크로 상단 구속 사건.

여기서 비롯된 나와 그로자 병력의 무력 충돌 위기까지.

이렇듯 두 영지 간 곡물 거래 파동은 가볍지 않은 추이를 보이며 그 양태를 키워 나갔다.

그리하여 갈등은 최소 대전사 결투가 아니고는 해소 불가능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데 이렇듯 부풀 대로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에 도달한 그 순간, 사태의 발단만큼이나 뜬금없는 결말이 찾아왔다.

그로자 측에서 갑자기 백기 투항을 해 온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전조도 없었다.

급발진에 이어 급정지까지, 그로자 혼자 생쇼를 한 것처럼 보일 뿐.

하나, 이 생쇼가 가져온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그로자 영지에게 그러했다.

급발진 한 번 잘못했다가 사실상 라인하트의 위성 영지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7년간의 곡물 무상 제공과 이후 거래 요청 거절 불가 조건이면 그리 볼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그로자의 무조건 항복을 라인하트 측에서 선심 쓰듯 감안해 준 결과이니 말 다 한 것이다.

부가적으로 금전적 보상 역시 빠지지 않았고 말이다.

“고마워, 라이. 역시 잘난 동생 두니 좋네. 동생 덕에 이런 예상 못 한 대박도 다 터져 보고.”

“나도 나지만, 크리스토퍼 왕자한테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어? 형 말마따나 우리 영지에 이렇게 대박을 안겨 준 장본인인데.”

“그야 당연하지. 안 그래도 요즘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왕자의 쾌변 정도는 기원해 주고 있어. 이런 선물이면 그쯤은 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물론 사건의 본질은 표면과 완전히 달랐다.

당연히 그로자 혼자 벌인 생쇼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1왕자 측의 작품이었다.

1왕자 측이 그로자 영지를 꼬드겨 시작됐고, 그들이 그로자를 버림으로써 끝이 났다.

이론의 여지는 없었다.

그로자는 달 때 삼켜졌다가 쓴맛이 돌자마자 바로 뱉어진 것일 뿐이다.

단, 이것이 1왕자 측에도 바람직한 결과라고는 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도 손해였다.

안 좋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사건의 내막을 짐작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와 크리스토퍼의 관계에 관한 단서가 넘쳐났으니까.

따라서 앞으로 1왕자 측의 세력 확장에 있어 이 일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언제 어떻게 그로자처럼 뱉어질지 모르니 말이다.

만약 크리스토퍼가 다음 대 국왕으로 내정된 상태라면 그들도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에게는 3왕자라는 대권 경쟁자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의미한 전력 손실은 자칫 독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나와 라인하트는 치명적인 맹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만 최소 둘 이상 필요했다.

이것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100%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또, 결투 와중에 1왕자 측 실력자가 중상을 입기라도 하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지고 말이다.

어떻게 따져 봐도 득보다 실이 지대했다.

그렇기에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중도에 발을 뺀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 사람들이 내놓은 분석과 예측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이로부터 한 치의 벗어남 없이 그대로 도출된 참이었다.

“그보다 라이, 이번 일로 우리 라인하트도 제대로 주목받기 시작할 거야. 그러니 이제는 선명히 할 필요가 있어, 앞으로 우리가 걷게 될 노선에 대해서.”

이드리스가 농담 뒤에 꺼내 든 진지한 주제.

이 주제의 논의 필요성에 대해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라인하트가 받게 될 주목도를 고려하면 분명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에도 에릭스와 나의 존재가 이목을 집중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차원이 달랐다.

일전의 관심은 나나 에릭스 개인을 향한 것이었다.

라인하트 영지는 곁가지에 가까웠다.

한데, 이번에는 라인하트 영지가 메인이었다.

사태의 핵심이 라인하트 영지의 곡물 수급에 있었으며, 진행과 해결 역시 영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사태의 결과로 라인하트는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새로운 미래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높은 확률로 자작가 이상을 노려 볼 수 있는 그런 미래.

더불어 이것이 크리스토퍼를 물 먹이며 얻어 낸 성과라는 점도 주효했다.

한마디로 라인하트 영지의 왕국 내 입지와 영향력이 대폭 향상된 것이다.

어쩌면 약간이지만 세력 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모를 만큼.

그러므로 라인하트가 취할 노선 역시 자연스레 관심사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크리스토퍼 왕자와는 시작부터 틀어졌으니 글렀고, 지금처럼 셀레스티나 왕녀님과 같이 갈 생각인 거야?”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

“셀레스티나 왕녀님이라면 선택지가 두 가지뿐인데, 설마 2왕자를 염두에 둔 건 아니지?”

이드리스가 언급한 인물은 카리우스 드로튼 슈라우드.

왕국의 2왕자이자 레나의 친동생이었다.

그리고 레나의 친동생이라는 의미는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뒷받침해 줄 세력이 없다는 사실.

그렇지 않아도 레나와 드로튼의 외가는 한미한 가문이었다.

한데 친모가 일찍 죽기까지 한 상황이라 사실상 기반 자체가 전무했다.

든든한 외가를 둔 1왕자, 3왕자와는 기본 조건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2왕자는 둘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계승 논의 자체에서 배제돼 있었다.

이드리스가 2왕자를 언급하며 탐탁지 않은 기색을 드러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데 2왕자는 무슨. 아니야. 2왕자 말고, 형이 짐작하는 대로야. 중립 노선.”

당연히 나 역시 아니었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도 2왕자와는 제대로 된 일면식조차 없었다.

내가 함께하고자 마음먹은 이는 어디까지나 레나 본인.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중립 노선이 알맞았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말이다.

“일단 나는 중립 노선을 생각하고 있는데, 형은 어때?”

“역시 중립이라……. 우리가 그 길을 택하면 분명 다들 손가락질할 거야, 주제 파악도 못 한다고.”

단, 원래 이 중립이라는 노선이 가장 힘든 길이었다.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인하트가 중립 노선을 택할 시 외부의 시선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기반 살짝 마련한 주제에 거만 떨고 앉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룰 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한테는 라이, 네가 있으니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의 시선과 평가에 불과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고 현시점,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드리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나는 어떤 경우에든 네 선택을 믿고 지지할 거야. 그럴 수 있도록 영지도 지금부터 많은 부분을 바꿔 나갈 거고. 그러니 라이, 뒤는 걱정하지 말고 네 생각대로 밀고 나가. 네 의지가 곧 라인하트의 의지야.”

* * *

그로자 사태의 뒷정리와 함께 연말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새 학기 시작 전, 나는 지난해보다 한 달여 일찍 왕도로 출발했다.

레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이번 왕도행 역시 매튜와 함께였다.

그 주된 목적이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지경.

다만, 나 역시 여기에 개인적인 목적과 편의를 투영했다.

굴타르 산에서 캐낸 흑광석의 운반을 전적으로 일임한 것이다.

묻혀 있는 전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일단 채굴 가능한 만큼은 최대한 캐낸 참이었다.

그렇기에 전과 같은 개인적인 운반은 불가능한 상황.

해서 실크로 상단에 맡겼다.

운반의 편의는 물론이고 매튜라면 보안까지 알아서 책임져 줄 터.

덕분에 아주 쾌적하고 편리한 왕도행이 될 수 있었다.

또, 마무리 역시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흑광석의 양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잡음 하나 없이 데파이에게 전달 완료한 것이다.

그렇게 왕도에서의 볼일을 마친 뒤,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이윽고 도착한 그곳에서는 환한 미소와 함께 레나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왕궁에 친구를 직접 초대한 것은 처음이라며 한껏 들뜬 상태의 그녀.

이런 레나의 손에 이끌려 방문 직후부터 왕궁 이곳저곳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한데, 이 들쑤심에는 성역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방문지의 면면이 그러했다.

성역이 존재한다면 결코 들를 수 없는 장소들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첫 방문지부터가 이 왕궁에서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곳이었는데.

“그대였군. 내 딸과 가깝게 지낸다는 라인하트 자작가의 둘째 공자가.”

국왕 집무실이었다.

슈라우드 왕국의 지존이 업무를 보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바로 그곳.

환한 대낮이니만큼 국왕은 당연히 집무실에서 한창 일을 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그리하여 회귀 후 첫 만남을 가지게 됐다.

슈라우드의 현 국왕, 알렉산드로스 오브리가 슈라우드와.

“레나의 친구가 돼 주어 고맙네, 라인하트 공자. 다만, 아비로서의 염려는 어쩔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내 공자에게 조금만 부탁을 하지.”

비록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무엇에 대한 당부인지는 명확했다.

괜한 추문에 얽히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것이다.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당부였다.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바는 역시 레나에 대한 애정.

여러 자식 중에서도 레나를 각별히 여긴다는 소문답게 오브리가 국왕의 당부에서는 부정이 느껴졌다.

다만, 이것이 다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부의 기저에는 국왕으로서의 입장이 깔려 있었다.

그에게 레나는 각별한 딸인 동시에 왕국의 1왕녀이기도 했으니까.

왕녀라면 왕실을 위해 해 줘야 할 의무 같은 것이 존재했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당장 레나를 향하는 국왕의 애정 어린 눈빛과 달리, 끝내 후자가 승리한다는 것을.

그 결과 올해를 기점으로 레나의 삶이 망가져 버린다는 사실 역시도.

회귀 전의 경험이 증명하는 바였다.

물론, 아직은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일.

또, 이번에는 절대 발생하지 않을, 미래에서 완전히 지워질 일이기도 했다.

내가 반드시 그리 만들 작정이니까.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딱히 문제 될 것 없는 애정이고 당부였다.

덕분에 오브리가 국왕과의 첫 만남은 별다른 해프닝 없이 조용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단, 국왕과의 만남이 마무리됐다는 것일 뿐, 레나의 들쑤심은 이제 시작이었다.

국왕 집무실에 이은 다음 방문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근위기사단장 카이트 쉬르더라고 하네.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연이 닿는군.”

이번에도 집무실이었다.

국왕 집무실 바로 옆에 위치한 근위기사단장 집무실.

어떤 면에서는 국왕 집무실보다 지닌 바 의미가 더 큰 곳이기도 했다.

검사들에게 특히 그러했다.

근위기사단장이기 이전에 소드마스터가 머무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카이트 쉬르더가 나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의외의 반가움을 드러냈다.

비단 내가 지닌 실력과 나를 둘러싼 소문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데파이 그 친구가 요즘 많이 바뀌었길래 연유를 물었더니 자네 이름이 나오더군. 대체 어떻게 한 건가? 그 친구 괴팍함 때문에 쉽지 않았을 터인데.”

데파이가 매개체였다.

데파이와 카이트가 서로 친우인 것이다.

그리 어색할 것 없는 관계였다.

연배는 물론이고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비슷한 두 사람이었으니까.

어쨌든 그 덕에 대화 내내 호의적인 분위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다만, 데파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카이트 이후의 만남과 대화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중재자로서 레나의 능숙한 활약 덕분이었다.

레나는 처음 만난 사이조차 대화가 끊기는 일 없도록 완벽한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나는 왕궁 방문 첫날부터 다양한 인사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것도 왕국을 이끌어 가는 주요 인사들 위주로만 말이다.

또, 단순히 관계를 맺은 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각지의 정보들 역시 자연스럽게 주워들을 수 있었다.

개중에는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내무 대신 아이르만 다스더 백작과의 대화 중 얻은 정보가 그러했다.

“후우, 정령석은 여기 라인하트 공자같이 전도유망한 인재가 섭취해야 하는 것인데…….”

“설마, 또……?”

“예, 왕녀님. 또 그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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