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발악(2)
“막 나가는군요.”
“이미 내친걸음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못 할 것도 없어.”
“이런다고 해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현재 빈손이었다.
당연했다.
방금 막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온 참이었으니까.
반면, 나를 둘러싼 그로자 병력은 손에 시퍼렇게 날이 선 무기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극도로 불리해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국면은 정반대였다.
흔들리는 드로카의 눈빛이 이를 방증했다.
드로카는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일부분이나마 알고 있었다.
나와 케인의 대결을 본인의 눈으로 직접 관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자 자작가 내에는 나에게 대적 가능한 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실력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사 단장까지 포함한 기사들 전부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하.
더구나 이마저도 현재로서는 전력이 온전치 못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기사라고 해 봐야 넷이 다였다.
나머지는 바르코스 요새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중이었다.
절대적인 머릿수야 어느 정도 된다지만, 그래 봤자 나 하나조차 감당 버거운 상황인 것이다.
“감옥으로도 병력을 보내 뒀다. 그러니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사람들 다치는 꼴 보고 싶지 않다면.”
그래서 드로카는 보완책을 한 가지 마련해 뒀다.
그 보완책이란 바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인질로 쓰는 것.
나름 그럴듯한 수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드러낸 성향 때문이었다.
나는 내 아랫사람들을 살뜰히 챙겨 왔고, 이 사실을 생도회의 일원인 드로카가 모를 리 없었다.
하여 이번에도 다르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실제로 현재 감옥에는 매튜가 갇혀 있는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
“좋습니다. 원래 얌전히 떠나 줄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죠.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봅시다.”
하지만 드로카가 나에 대해 아는 바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내 성향을 제대로 저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위기감을 심어 주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성향은 맞췄으되 내 실력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내 사람들을 인질로 삼으려 한다?
그들이 채 인질이 되기도 전에 끝내면 그만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이 없어도 되고, 보는 눈 때문에 오러 블레이드를 꺼내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소드마스터로서의 육체적 능력, 그리고 정령력이면 충분했다.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사람들이 다치는 꼴을 기어이 보겠다는 거냐?”
“아니, 안 봐요. 그 전에 끝낼 거니까.”
뚜둑, 뚜둑.
내가 관절을 꺾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로카는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병력 전체가 잔뜩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두가 느끼는 것이다.
곧 이 집무실 내부에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리라는 사실을.
뚝.
그렇게 나의 몸풀기가 끝이 나고, 폭풍 직전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이제 정말 휘몰아치는 일만을 남겨 둔 일촉즉발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만!!!”
* * *
감옥에 수감됐다 풀려난 날로부터 일주일 뒤, 상행은 무사히 라인하트 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매입해 온 곡물을 차질없이 전달했다.
덕분에 라인하트 영지는 자칫 심각해질 뻔했던 위기를 문제없이 넘길 수 있었다.
이에 이드리스는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 주었고 말이다.
그렇게 상행에 대한 대강의 정리가 마무리된 뒤에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마련됐다.
그리하여 현재 나와 이드리스, 에일린, 매튜, 이렇게 넷이 영주 집무실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맙다, 매튜. 네 덕분에 영지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부디 말씀 거둬 주세요, 영주님. 영주님과 공자님, 아가씨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해요.”
거듭해서 감사를 전하는 이드리스.
이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매튜였다.
“그리고 라이 공자님 덕분에 손해는 전부 메웠어요. 오히려 이득까지 남긴 상황인데, 이렇게 금칠만 해 주시면 제가 너무 민망해서…….”
“손해를 메웠든 뭘 했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내가 특별히 허락할게. 앞으로도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우리 오빠 마음껏 가져다 써. 아니, 이런 일 없을 때도 얼마든지. 라인하트 영지의 구원자라면 그럴 자격 충분해. 차고 넘쳐.”
거두어 달라는 매튜의 바람과 달리 에일린까지 가세했다.
그러고는 한층 금칠을 더해 갔다.
매튜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숫제 놀리는 모양새.
이렇듯 칭찬이지만 칭찬 아닌 것 같은 칭찬의 시간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매튜가 겸양을 완전히 체념할 때쯤 돼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에 접어들었다.
“그나저나 그로자 영지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핏 듣자 하니 분위기가 많이 험악해졌었다던데.”
이드리스가 그로자 영지에서의 일을 물어왔다.
환영식 도중 상단 사람들로부터 인질이 될 뻔했던 상황을 전해 들은 것이다.
“드로카가 상단과 곡물은 어떻게든 붙잡아 두려고 발악을 하더라고.”
“그래서? 실제로 충돌까지 갔던 거야?”
“아니, 그럴 뻔했는데 충돌 직전에 끊겼어. 그로자 자작이 나섰거든.”
“그로자 자작이? 그 사람이 그럴 만한 위인은…… 아, 하긴. 오히려 그래서 더 절실하게 나섰던 걸지도 모르겠네.”
“그런 것 같아. 거기서 충돌했으면 빼도 박도 못 하게 영지전 감이었으니까. 지금도 버거워 보이던데, 영지전은 정말 기절초풍할 일이었겠지.”
일주일 전, 일촉즉발의 그 순간 개입한 이는 바로 콜루가네였다.
존재감 없던 그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선 것이다.
그러고는 그로자 병력에 당장 무기를 거두라고 명령했다.
나와의 충돌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물론 중간에 드로카의 반발이 있었지만, 영주는 본인이라며 묵살했다.
그렇게 그는 드로카가 했던 모든 조치를 무른 뒤, 나에게 사과까지 건넸다.
이에 결국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매튜와 상행을 이끌고 다시금 조용히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평소의 심약한 콜루가네에게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모습.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의 위중함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여태까지 대립은 해 왔을지언정 그 수준에는 분명한 제한이 있었다.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탐색전이나 전초전, 혹은 최대 국지전 정도.
그로자 측에서 이 이상의 명분은 주지 않아 온 덕분이었다.
그런데 직접 충돌은 아니었다.
이는 전면전의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라인하트 직계와의 무력 충돌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아도 극도의 불안과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던 콜루가네였다.
이런 그에게 영지전 발발은 그냥 심장마비로 죽으라는 이야기.
심약한 그이기에 오히려 그 순간 더 필사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마무리는 어떻게 짓는 거야? 셀레스티나 왕녀님과 사네 발터우스 공자님이라고 했지? 그분들은 뭐라셔?”
지금까지의 흐름은 이러했다.
전면적인 영지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명분은 충분히 쌓아 둔 상황.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에일린의 말마따나 마무리뿐이었다.
축적해 온 명분을 바탕으로 한 라인하트의 반격 말이다.
“역시 대전사 결투로 가는 건가?”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 * *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라니요? 이건 대놓고 우리를 식민지로 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드로카는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 한 인물을 성토하는 중이었다.
그 인물의 정체야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로자 영지를 잔뜩 헤집어 놓고 간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 말이다.
―그렇긴 하지. 지나치게 노골적이야.
상대 또한 이에 동의했다.
당연했다.
그 또한 라이오넬에게 적잖이 감정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맞습니다. 그놈 그거,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머저리입니다. 왕자님은 물론이고 선배님의 후작가가 지닌 힘 자체를 모르는 게 분명해요.”
클리앙 나로움이었다.
라이오넬이 상단과 떠난 뒤, 드로카는 곧장 마탑 지부로 달려왔다.
클리앙에게 마법 통신으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울분을 토하고 이에 대한 클리앙의 공감을 끌어내고자 했다.
―그럴지도. 알았다면 감히 왕자님께 반기를 들지도 못했을 테니.
“그렇습니다.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꼴이 딱 그래요. 본때를 보여서 제 분수를 깨닫게 해 줄 필요가 있는 놈입니다.”
공감 유도는 더할 나위 없이 간단했다.
비방 한두 마디면 됐다.
일부러 끌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단, 드로카의 목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선배님, 제게 힘을 좀 실어 주십시오.”
성토와 공감에 이어 마지막 한 가지를 얻어 내고자 했다.
그리고 이 한 가지가 오늘의 진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로카로 하여금 허겁지겁 마탑으로 달려와 클리앙에게 연락하게 만든 진정한 목적.
―힘을 실어 달라?
“라이오넬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왕자님과 선배님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힘을 어떻게 지원해 달라는 거지?
“예, 대전사 결투에 출전시킬 만한 기사들을 부탁드립니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저와 저희 가문이 앞장서서 그 건방진 놈을 응징하고, 왕자님 앞에 무릎 꿇리겠습니다.”
기사를 지원받고자 함이었다.
상황은 더 이상 충돌을 회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전사 결투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그러자면 크리스토퍼와 클리앙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로자 단독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라인하트를 이길 수 없었다.
승리를 노린다면 최소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 둘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1왕자와 나로움 후작가라면 지원 가능할 터.
또, 애초에 이 사태는 클리앙의 속삭임이 발단이었다.
그가 드로카를 꼬드기지 않았다면, 그로자와 라인하트의 관계가 이리 악화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클리앙에게 역시 이 난국을 함께 헤쳐 나갈 할 책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위급 상황 시 1왕자와 후작가의 적극 개입을 약속했었다.
따라서 드로카는 지금 일방적인 부탁이 아니라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왜 그래야 하지?
“예……?”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왕자님과 내가 왜 기사를 지원해야 하지?
그러나 이는 드로카의 입장에 불과했다.
통신구를 타고 전해져 오는 클리앙의 뉘앙스는 그와 정반대였다.
“그야, 위급 상황 시에 적극 개입하겠다고 약속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난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어.
“아닙니다! 선배님께서 분명 왕자님과 후작가를 동원해서…….”
―네 맘대로 왜곡하지 마라, 드로카. 난 분명 거기에 전제 조건을 걸었으니까.
실제 그의 생각과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드로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 우리 약속은 곡물 부족을 유발해 라인하트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라인하트에 곡물이 들어갔고, 결과적으로 놈들은 더 기세등등해졌지.
“하지만 그건…….”
―실크로 상단을 잡아넣은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라이오넬까지 같이 구속하라고 했던가? 제대로 확인 후 진행하라고 신신당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분명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
하나, 드로카 입장에서는 모두 반박이 가능했다.
애초에 실크로 상단의 곡물 매입을 확인하지 못한 건 클리앙이었다.
그것만 확인했어도 상황이 이리 악화되지는 않았을 터.
실크로 상단을 잡다가 라이오넬까지 구속해 버린 것도 그랬다.
라이오넬의 존재를 미리 확인한다고 뭐가 달라졌겠는가?
라이오넬이 있다 하여 그냥 보냈다면 어차피 일은 실패인 것을.
―여기까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끝내 상단과 곡물을 보내 준 건 어떻게 변명할 거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묶어 뒀어야 했다. 그래야 지금 뭐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이 또한 다르지 않았다.
물론 드로카도 끝까지 발악하는 선택을 하려 했었다.
비록 콜루가네의 개입으로 중간에 막혔지만, 어쨌든 그 의지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제 와 보면 콜루가네의 개입이 옳았다.
그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정말 영지전까지 확대됐을 터.
그리됐을 시 1왕자 측의 행태는 굳이 가정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지금 클리앙이 고스란히 드러내는 중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너와 그로자 영지는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심지어 저쪽에 명분까지 넘겨줬어. 이런데도 왕자님과 내가 기사를 보내 줘야 한다고?
“…….”
분명 반박 거리는 넘쳐났다.
클리앙의 주장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드로카는 그러지 못했다.
반박은커녕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였다.
―혹시 더 할 말 남았나?
“…….”
―없는 모양이군. 그럼 이만 끊지. 더 해 봐야 의미도 없을 테니.
깨달음 때문이었다.
클리앙은 이미 그로자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드로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앉아서 속절없이 망해 가는 수밖에.
처음부터 그런 관계였으니까.
이런 냉혹한 현실에 대한 깨달음이 그의 말문을 앗아 갔다.
동시에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해서 반박은커녕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것이다.
뚝.
그렇게 끝나 버렸다.
클리앙과의 통신도, 드로카가 품었던 야망도, 나아가 그로자 자작가의 미래까지도.
모든 것이 허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