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잘 키운 인재 하나(2)
어쩐지 머쓱한 기색의 매튜.
그가 다소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
“사실 이번에 제가 좀 무리를 했거든요. 이대로면 결국 상단에 손해를 입히는 꼴이라 어떤 식으로든 만회가 필요한 입장이에요.”
분명 미리 마련해 둔 거래선을 이용한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첫 거래조차 개시하기 전.
더욱이 한 영지의 운영에 필요한 만큼이라면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급구 조건까지 더해지다 보니 손해를 면하기는 어려웠다.
매튜가 아무리 수완이 좋다 한들 이건 어쩔 도리가 없는 부분이었다.
이에 매튜는 굳이 안 되는 걸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모르되, 지금은 급박한 상황.
일정 정도의 손해는 깔끔하게 수용했다.
다만, 단순한 수용에서 그치지 않았다.
손해를 봤다면 어떻게든 이를 만회하는 것이 상인으로서의 이치이자 도리.
마침 여기에 특화된 최고의 능력 보유자가 바로 옆에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지난번의 그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기 있는 마차들 채울 수 있을 정도로만…….”
애초에 날 부른 목적부터 무력 확보가 끝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상행에 끌고 온 빈 마차의 수가 저리 많지도 않았을 터.
처음부터 만회 그 이상을 노린 매튜였다.
한마디로 나를 철저히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부탁씩이나. 매튜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철저히 이용당한 기분?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당연히 최고였다.
기특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예뻐 죽겠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매튜.”
“네, 라이 경.”
“자신은 있는 거지?”
“네……?”
“자신 말이야, 감당할 자신.”
단, 이 심정을 쓸데없이 말로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기특함에 대한 보상 같은 건 입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최고였다.
최고의 기분에 상응하는 최대의 물질적 대가.
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매튜에게 제공할 보상의 모토였다.
“고블린! 고블린이 나타났다!!”
역시 스타트는 고블린이 끊어 줘야 제맛.
때마침 계절도 적당했다.
찬 바람 쌩쌩 불고, 굶주림에 흉폭해진 몬스터들이 넘쳐나는 이 겨울.
매튜의 상행은 여정 내내 후텁지근할 예정이었다.
범람하게 될 몬스터들의 선혈로 말이다.
* * *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크리스토퍼 왕자님 쪽에서 연통이 온 것이냐?”
드로카가 할 말의 내용을 밝히기도 전이었다.
콜루가네 그로자가 그 내용을 지레짐작했다.
그러고는 눈에 띄게 환해진 얼굴로 물었다.
1왕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냐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드로카에게 연락이 왔는지를 묻던 참이었고 말이다.
다소 한심해 보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드로카는 평소 이 부분을 답답하게 여겨 왔다.
왕국의 당당한 자작이자 한 영지의 온전한 주인치고는 지나치게 심약한 성정이었으니까.
드로카의 아버지, 콜루가네 그로자 자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묻지 않느냐? 연락이 왔느냐니까?”
다만 이번만큼은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불안에 떨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약한 콜루가네라면 더더욱.
그로자 영지가 라인하트와의 거래 중단을 선언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1왕자에 대한 항복이든 저항이든 어떤 결정이 나와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로자 자작가의 명운이 걸린 상태였다.
중앙에 진출하여 정계에서 활약하는 가문이 될 수도, 혹은 북부 촌구석에 처박힌 채 이대로 썩어 가는 가문이 될 수도 있었다.
심지어 후자의 경우 그냥 썩어 가는 수준에서 끝이 아니었다.
라인하트라는 최악의 적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썩어 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몰락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라인하트는 이렇다 할 대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한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말뿐인 항의 서한 몇 통이 전부.
실질적인 행동은 전무했다.
에릭스 브란부르트조차 아직 바르코스 요새에 머무는 중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꾸미기라도 하는 모양새.
염려를 품기에 나름 타당한 상황인 것이다.
“예, 조금 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오, 그래서? 라인하트 자작이 항복하기로 했다더냐? 라이오넬을 무릎 꿇리기로 했어?”
절레절레.
“하면? 이 아비 말려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얼른 얘기 좀 해 보란 말이다.”
“그게…….”
잔뜩 초조한 기색으로 재촉하는 콜루가네.
그런 아버지에게 드로카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콜루가네의 불안과 염려가 들어맞았다.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라인하트가 끝까지 가 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실크로 상단이 곡물을 매입해서 라인하트 영지로 운반 중이라고 합니다.”
“실크로 상단이라면, 그 라인하트의 전속이나 다름없는 곳? 거기서 어떻게? 곡물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은밀하게 진행해 왔던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파악이 늦었다고 하더군요.”
좋지 못한 소식만큼이나 상황도 좋지 못하게 흘러갔다.
그로자 영지 입장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잘못하다가는 모든 게 말짱 꽝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그렇지 않아도 소심하고 심약한 콜루가네였다.
자연스레 그의 초조함 역시 한층 더 심해져 갔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냐? 이를 어찌해, 이를.”
“아직 좌절할 단계는 아닙니다, 아버지.”
“아니긴 뭐가 아니란 것이냐? 이대로면 라인하트가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생겼는데? 하면 분명 그 칼끝을 우리에게 돌릴 테고, 우린 그들을 막을 힘이 없단 말이다.”
“이미 수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힘, 우리에게 절대 쓰지 못한다고. 우리 뒤에는 크리스토퍼 왕자님과 나로움 후작가가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까지 뒤에 있어 줄 성싶으냐? 이번 일 실패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우리부터 버릴 터인데. 처음부터 발을 들이면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초조함이 극에 달했는지, 드로카를 보는 콜루가네의 눈빛에는 원망까지 섞여 있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책임 전가.
그리고 이 또한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1왕자와 손잡고 라인하트를 곤경에 빠뜨리는 이 일, 분명 드로카가 추진한 것이었다.
콜루가네는 처음부터 염려를 표했었고 말이다.
“그럼 처음부터 강하게 반대를 하셨어야 할 거 아닙니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 놓고서는 이제 와 이러시는 게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드로카는 바로 이 점이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심약한 성격만큼이나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부터 발을 들이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못 하게 제지했으면 될 일.
하지만 콜루가네는 이번에도 염려만 표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래 놓고는 부질없게 이제 와 드로카를 탓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직 끝난 거 아니라고. 아니, 됐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처럼 그냥 가만히 앉아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물론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런 아버지임을 알기에 처음부터 모든 것을 드로카가 결정하고 추진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그리해 가면 될 뿐이었다.
분명 흘러가는 상황은 좋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었다.
여전히 돌파구는 존재했다.
“두고 보세요. 제가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이런 북부 촌구석이 아니라 중앙 정계에 진출시켜 놓을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공자님, 나타났습니다!”
며칠 뒤, 집사 도리안이 다급한 목소리로 드로카에게 알려 왔다.
드로카가 미리 그에게 일러 두었던 사안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드로카는 전후 사정 같은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곧바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파악에 들어갔다.
“상행 책임자는?”
“매튜라는 평민입니다.”
“특이점 같은 것은?”
“나이가 많이 어려 보인다는 점 말고는 따로 없었습니다.”
일단 책임자는 통과였다.
크게 신경 쓸 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하면 상행 구성은? 혹시 귀족이나 기사가 포함돼 있던가?”
“아닙니다. 평범한 상인과 용병들이 전부였습니다. 그중에 특별한 인물은 분명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쁘지 않군. 그 외에는? 혹시 또 참고해야 할 만한 건 없었나?”
“말씀해 주셨던 곡물 외에도 운반하는 물건의 양이 상당했습니다. 전부 몬스터 부산물인데, 그 양이 오히려 곡물보다 많아 보였습니다.”
“그야 뭐, 실크로 상단 자체가 원래 그런 곳이니.”
책임자 외에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몰라 확인해 봤지만, 역시 상행에 귀족이나 특별한 인물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또, 실크로 상단 자체가 몬스터 부산물 거래를 통해 급성장한 곳이었다.
부산물 좀 많이 운반한다고 해서 따로 신경 써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어쨌든 좋아. 일단 크게 문제 될 만한 건 없다 이거지……. 도리안.”
“예, 공자님.”
“준비한 대로 진행해. 지금 즉시.”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차피 뒤는 없었다.
그래서였다.
드로카는 승부수를 던졌다.
성패에 따라 가문의 명운이 완벽하게 갈리게 될 그런 필사의 한 수를.
* * *
지난 한 달하고도 일주일가량, 매튜가 이끄는 실크로 상단의 상행은 강행군을 이어 왔다.
우선 예정된 거래처들을 빠른 속도로 돌았다.
혹시라도 1왕자 측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기 전에 일단 곡물부터 수령해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우선 품목인 곡물을 확보한 뒤에는 곧장 라인하트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번 상행의 또 다른 목적을 충족하기 시작했다.
아주 진하게, 제대로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몬스터를 맞닥뜨렸다.
특히 북부에 접어들고부터는 하루가 멀지 않았다.
반나절이 멀어졌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몬스터 무리와 조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행의 피해는 전무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직접 나섰으니까.
내가 용병들의 가장 앞에 서서 몬스터를 도륙했다.
전처럼 정령력에 대해 이것저것 실험해 볼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그럴 여유도 충분치 않았다.
급박한 것까지는 아니나, 가능하면 영지에 빨리 곡물을 건네는 편이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앞장선 덕분에 몬스터를 처치하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오히려 부산물을 추려 내는 과정이 시간을 몇 배는 더 잡아먹었을 정도.
또, 시도 때도 없이 몬스터와 전투를 벌인 것 치고는 꽤 빠른 이동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행은 현재 라인하트 영지를 일주일가량 앞둔 지점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곳 들판에서 순탄하게 야영을 준비 중이었다.
“이곳 책임자가 누구인가?”
일단의 병력이 우리를 둘러싸기 전까지 말이다.
갑작스러운 병력의 포위와 함께 이 순탄함은 깨져 나갔다.
“저입니다.”
병력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기사가 우리 측 책임자를 찾았고, 이에 매튜가 나섰다.
당연히 포위 이유에 대한 질문이 뒤따랐다.
“실크로 상단의 매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왜 저희를……?”
“나는 그로자 기사단 소속 기사 더보 그리스티다. 너희를 출처 불분명의 장물 보유 및 운반 혐의로 구속한다.”
라인하트 영지를 일주일가량 앞둔 지점이 의미하는 바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이곳이 바로 그로자 영지 인근이라는 점, 그렇기에 그로자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로자의 병력이 현재 우리에게 위력을 행사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그럴 리가요? 저희는 아까 그로자 영주성에서 나온 도리안이라는 분의 조사에도 성실히 임했습니다. 물건이 장물이라면 저희가 그랬을 리 있겠습니까?”
“진위는 영주성에서 조사해 보면 가려질 일. 너희는 일단 영주성으로 압송된다. 혹시 반항할 생각인가?”
더보라는 기사가 용병들을 일별하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포위에 대응하여 크로나와 용병들이 무기를 빼 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가소롭다는 시선과 말투도 함께였다.
객관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이었으니까.
“…….”
순간 말문을 잃은 매튜.
그가 황망함 가득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상단을 압송하겠다는 기사, 이에 맞춰 포위망을 펼친 그로자 영지군, 비록 무기를 뽑아 들기는 했으나 턱없이 모자란 전력의 용병들까지.
상황은 뭐 하나 좋아 보이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끄덕.
매튜의 시선이 용병들 가운데 한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어떤 신호가 전달됐다.
그 지점에 자리하고 있던 내가 매튜에게 보내는 모종의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