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잘 키운 인재 하나
데파이는 내가 케인을 데리고 온 사실에 대해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이런 성격임을 알기에 데리고 온 것이기도 했다.
그간 흑광석 일로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에 한 번씩 이곳을 드나들며 성격 파악을 완료한 참이었다.
덕분에 방문 목적 달성도 아주 수월했다.
케인에게 데파이가 만든 검을 한 자루 선물한 것이다.
본인 기준 실패작들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두는 데파이였기에 이 또한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 실패작은 그냥 실패작이 아니었다.
원래도 수작 혹은 명작의 반열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그런 작품들.
한데, 이제는 그마저도 뛰어넘었다.
무려 흑광석을 통해 진일보 중인 데파이의 실패작이었다.
비록 여정에 미치지는 못하나 명작을 넘어 대작이라 불리기에 모자람 없는 괴물들이 돼 버린 것이다.
이런 괴물을 선물했다.
선물로서의 가치?
두말하면 입 아플 뿐이었다.
겸양이나 사양도 어지간한 수준일 때나 가능한 것이다.
검사라면 누구라 해도 이 선물을 거절하지 못할 터였다.
그것이 호의에 기반한 것이라면 더더욱.
이리하여 케인에 대해 신경 쓰였던 부분도 완벽하게 떨어 냈다.
물론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겠으나, 떨어 낸 것 이상을 얻었음은 당연하고 말이다.
하나,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케인을 먼저 들여보낸 뒤, 데파이로부터 괴물 같은 실패작들 몇 자루를 더 얻었다.
그 이유야 한 가지뿐.
내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함이었다.
단, 무작정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데파이에게도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다.
대가란 데파이가 가장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 바로 흑광석이었다.
데파이에게 건넸던 흑광석은 현재 거의 다 소진된 상태였다.
수천, 수만 번을 제련하고 변형시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방학이 끝나는 대로 더 가져다주기로 했다.
그간 데파이의 실력이 향상되고 흑광석에 익숙해진 만큼 내 도움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오로지 그가 배 터지도록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많은 양의 흑광석이 필요할 뿐.
하여 굴타르 산에 있는 것들을 몽땅 다 파내서 가져다줄 작정이었다.
당연히 데파이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흡족함을 표했다.
이렇듯 서로 윈윈하는 거래를 마친 뒤,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 돌아왔다.
방학 기간 몇 개월의 짧은 작별에 대한 인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상당히 길어질 것이 분명한, 어쩌면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기나긴 작별의 인사를 고하는 중이었다.
“마탑 가서도 절대 주눅 들지 마, 센트럼. 넌 누구보다 특별하니까.”
“예, 공자님.”
대상은 내가 발굴하고 키워 낸 미래의 대마법사들, 센트럼과 베로카였다.
두 사람은 결국 마탑에 가게 됐다.
막시무스 슈러그혼과 함께.
경연 날의 마법 시연을 계기로 막시무스의 제자가 된 것이다.
“혹시라도 그럴 것 같으면, 네 뒤에 있는 마검학연 사람들을 떠올려. 알지, 우리 면면이 굉장히 화려한 거?”
“네, 공자님. 걱정 마세요. 저 정말 잘하겠습니다.”
센트럼이 내 옆에 서 있는 마검학연 사람들을 한 명씩 눈에 담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레나와 사네, 그리고 브로든까지, 모두 함께 마탑으로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는 중이었다.
비록 신분 차이는 아득할지언정, 나를 구심점으로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한 상태.
그렇기에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도 두 사람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베로카. 너는 어차피 알아서 잘할 테니까 딱히 걱정은 안 해. 대신 가서 좀 쉬엄쉬엄해.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예.”
다음 차례는 베로카.
한데, 베로카의 모습이 평소의 그녀와는 많이 달랐다.
당차고 똘똘하며 냉철하던 베로카는 어디 가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이었다.
표정은 최대한 담담한 척을 하나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눈망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막시무스는 두 사람의 제자 영입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신선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원인은 베로카.
베로카가 막시무스의 제안에 망설임을 보이며 답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막시무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경연 직후 동아리 방으로 향하며 센트럼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 들었다.
센트럼의 과거사, 베로카의 신분과 직업, 그리고 두 사람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경위까지.
따라서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는 수락을 예상했다.
센트럼과 베로카의 조건도 그렇거니와, 여태까지 그에게는 제자 좀 삼아 달라며 매달린 사람들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베로카가 그 예상을 무참히 깨 버렸다.
어느 유서 깊은 가문의 고귀한 핏줄도 아니고, 일개 하녀라는 조건에 불과한 그녀가 말이다.
막시무스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신선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 막시무스의 경험이 신선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베로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이유는 바로 나였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싶다는 마음, 옆에서 끝까지 보필하고 싶다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복잡하게 얽혀 베로카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상황을 알게 된 나 역시 이런 베로카의 마음과 고민을 알아챘다.
하지만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아무 말 않고 그저 베로카의 결정을 기다렸다.
믿었기 때문이다.
베로카라면 스스로 옳은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틀 후, 베로카는 고민을 끝냈다.
어떤 길이 더 옳은지는 사실 비교조차 필요 없었다.
하여 망설였던 자신의 속마음을 내게 모두 털어놓고는 제 발로 막시무스를 찾아갔다.
본인의 의지로 막시무스의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쓰담쓰담.
대견했다.
이 대견한 마음을 가득 담아 베로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베로카는 그렁그렁하던 두 눈을 꼭 감은 채 이를 가만히 받아들였고 말이다.
“이보게, 공자. 아무리 자네가 찾아낸 아이들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스승인 내 앞에서 열심히 말고 쉬엄쉬엄하라니?”
“남작님께서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마 저보다 더 말리실걸요?”
마지막은 막시무스였다.
비록 만난 지는 이제 겨우 나흘째에 불과하나, 그 또한 나에게는 중요한 사람이 됐다.
앞으로 센트럼과 베로카를 전적으로 도맡아 키워 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작님. 제게는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걱정 말게. 내가 책임지고 훌륭한 마법사들로 키워 낼 테니까. 장담하지.”
막시무스에게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고, 또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회귀 전, 슈라우드에서 유일하게 6서클의 경지에 발을 들인 대마법사였으니까.
적어도 왕국 내에서만큼은 막시무스 이상 가는 스승을 구하지 못할 터였다.
“예, 남작님만 믿겠습니다.”
막시무스를 끝으로 인사가 모두 마무리됐다.
진짜 작별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렇게 센트럼과 베로카가 떠나갔다.
아카데미를 뒤로한 채 마탑으로, 나아가 미래의 대마법사를 향해서.
“자자, 이제 우리도 각자 집으로 돌아갈 준비들 해야죠.”
아쉬운 작별의 직후, 남겨진 사람들의 분위기는 살짝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러자 레나가 나섰다.
“그건 그렇고 다들 방학 동안 따로 생각해 둔 계획 있나요?”
밝게 끌어 올린 목소리로 남은 사람들의 방학 계획을 묻는 그녀였다.
그리고 다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학기 시작 전에 왕궁에 들르는 거 어때요? 저는 내년에 여기 없을 테니, 따로 시간 내서 한번 모이면 좋을 것 같은데.”
이에 레나가 모두를 그녀의 집, 슈라우드 왕궁으로 초대했다.
레나는 내년 한 해 동안 제국에 가 있을 예정이었다.
하여 제국 행에 오르기 전,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제안에 돌아오는 답변들은 긍정적이지 못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마 어려울 겁니다. 가문 내에는 아직 제 편이 없는지라…….”
우선 사네가 난색을 표했다.
르로이가 발광할 것이 훤했기 때문이다.
영지 밖이라면 몰라도 안에서는 사네가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왕녀님은 제 성격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왕궁 같은 곳은 질색입니다. 골치만 아프고, 저랑 너무 안 맞아요. 그냥 제국으로 가시기 전에 밖에서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브로든은 질색했다.
확실히 그는 왕궁같이 답답하고 권위적인 곳과는 상극이었다.
이에 단호하게 거절하는 그였다.
거듭된 부정적 답변에 살짝 시무룩해진 레나.
그런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향했다.
“알겠습니다, 왕녀님. 날짜 정해 주시면 그때 맞춰서 왕궁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앞선 두 사람과 달랐다.
레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년 초에 찾아가기로 약속했고, 덕분에 레나는 표정에 깃들었던 시무룩함을 걷어 낼 수 있었다.
어차피 그때쯤 크리스토퍼를 한번 만날 생각이었다.
레나를 보러 간 김에 크리스토퍼에게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하여 레나와 약속을 잡고 구체적인 날짜를 조율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저, 라인하트 공자님.”
웬 하녀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편지 한 통을 전달했다.
“실크로 상단에서 매튜라는 상인이 보내온 편지입니다. 급히 공자님께 전해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고맙다.”
발신인은 매튜였다.
상단 일로 한창 정신없이 바쁠 매튜가 급히 전해야 한다며 보내온 편지 한 통.
분명 평범한 소식은 아닐 터였다.
해서 하녀를 돌려보내자마자 곧장 편지를 개봉했다.
그러고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으음…….”
예상이 맞았다.
안에 적힌 내용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무겁고 중대한 소식을 담고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예, 왕녀님. 아무래도 크리스토퍼 왕자님께서 또 손을 쓰신 듯합니다. 이번에는 저희 라인하트 영지에.”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이 경.”
“그렇구려, 크로나 대장. 잘 지냈소?”
“예. 지난 1년간 저희 용병대에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모두 라이 경과 함께했던 상행 덕분입니다. 오우거한테서 살아남았다는 경력이 더해지니 의뢰가 정말이지 끊이지를 않더군요.”
크로나 용병대의 대장 크로나.
올해 초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을 함께했던 그가 반갑게 인사해 왔다.
“그래서 중간에 합류하신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용병대 전원을 이끌고 왔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라이 경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 왔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어쨌든 고맙소, 대장.”
상황은 연초와 비슷했다.
실크로 상단의 상행에 크로나 용병대가 호위를 맡았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꼽사리 낀 상태였다.
그때와 다른 부분이라면 이번에는 아카데미행이 아닌 라인하트 영지행이라는 점, 매튜가 상행을 책임지는 행수로서 전체를 총괄하고 있다는 점 정도.
물론 이 작은 부분이 유발하는 의미 차이는 상당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크로나가 물러났고, 이제는 행수로서 내 옆에 서 있는 매튜와의 대화를 재개했다.
“그래서, 그로자 영지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곡물 매입에 들어갔다고?”
“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으니까요. 라이 경과 1왕자의 일도 있고 하니, 무언가 정치적 상황이 엮여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일주일 전, 그로자 영지가 갑작스레 우리와의 곡물 거래 중단을 선언했다.
내부적인 사정으로 곡물 판매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 십수 년간 아무런 문제 없이 이어져 온 거래였다.
한데, 그런 것을 사전 통보조차 없이 끊어 버렸다.
사정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 돌아가는 흐름으로 볼 때 대강의 추측은 가능했다.
분명 어떤 정치적 요인이 개입한 것일 터.
이에 매튜는 곧바로 대응에 들어갔다.
그동안 마련해 둔 거래선을 총동원하여 당장 라인하트 영지에 필요한 만큼의 곡물을 매입했다.
이것이 정치적 상황이라면, 일단은 라인하트 영지가 꿀리지 않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저희 상단이 아직 본격적인 곡물 거래를 시작하기 전이었어요. 일단 거래선만 터 둔 상태로 진입 타이밍을 재고 있던 참인데, 소식을 듣게 된 거죠. 그래서 1왕자 쪽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곡물 거래 시장 진출에 관한 내용은 연초 매튜와 이야기를 나눈 바 있었다.
매튜는 그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왔다.
그리고 이제 그 준비가 끝나 각을 재는 중이었는데, 마침 그로자 영지 사태가 터진 것이다.
운이 따라 준 상황이었다.
여기에 매튜는 혹시 모를 경우까지 대비했다.
그는 매입한 곡물을 왕도에서부터 운송하지 않았다.
영지로 가는 길 곳곳에 분포한 거래처를 직접 방문하여 현장 수령하기로 했다.
1왕자 측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또, 나를 상행 중간에 합류시켰다.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여 무력을 확보해 두기 위함이었다.
완벽했다.
어디 흠잡거나 나무랄 데 하나 없이 정말 완벽한 판단이고 대응이었다.
덕분에 골치 아파질 뻔했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됐다.
해결책에 대한 고민을 시작조차 해 보기 전에 말이다.
남은 것은 매튜가 풀어 준 이 상황을 기회로 만들어 가는 일뿐이었다.
수작질에 대한 마땅한 응징과 통쾌한 반격의 기회로.
“저, 라이 경. 그런데 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