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55화 (56/200)

30장: 또 다른 수작, 그리고 선물 혹은 뇌물

“원하는 건?”

“아직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필요할 때 쓰도록 하겠습니다.”

“나 역시 분명히 말했다는 사실, 잊지 말길 바란다. 왕자님과 우리가 수용 가능할 만한 일이어야 한다는 거.”

클리앙이 약속된 사항에 대해 재차 확인을 거쳤다.

이에 라이오넬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아카데미를 뜨겁게 달궜던 크리스토퍼 측과 라이오넬의 대결.

이 대결의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했다.

크리스토퍼 측의 0대2 패배.

이론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만큼 깔끔하게 깨져 버렸으니까.

크리스토퍼와 클리앙 입장에서는 이 상황, 그리고 라이오넬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이미 약속한 바를 뒤집어엎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려 슈라우드 왕국 1왕자의 이름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라이오넬의 주변을 건드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아카데미 내에서만큼은 그러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라이오넬 본인을 건드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지. 내 손 잡을 생각은 정말 끝까지 없는 건가? 지금이라도 잡는다면 모두 없던 일로 잊고 용서해 줄 수 있다만.”

그리하여 크리스토퍼가 정말 마지막 제안을 던졌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이에 대한 라이오넬의 반응은 여전했다.

여전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반년 전 첫 번째 제안 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미소만이 전부였다.

물론 그거면 충분했다.

말로 하는 그 어떤 거절보다도 더 분명한 의미를 띠고 있었으니까.

하면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그렇게 크리스토퍼의 제안을 두 번이나 걷어찬 라이오넬이 자리를 떴다.

당연히 걷어차인 채 남겨진 크리스토퍼의 심기는 편치 못했다.

그가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함께 남겨진 클리앙에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얘기한 그거, 어떻게 돼 가?”

“그렇지 않아도 드로카 그로자와 저녁 약속을 잡아 두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다만, 그 불편함이 도저히 못 참고 폭발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준비 중인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클리앙이 진행하기로 한 이것만 제대로 풀려 간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반전 가능했다.

“좋아, 진행해. 대신 이번에는 절대 실수가 있으면 안 돼. 라이오넬 놈의 그 시건방진 비웃음, 그거 더는 못 봐주겠으니까.”

그렇게 라이오넬을 향한 또 다른 수작질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클리앙은 크리스토퍼에게 언급했던 대로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드로카 그로자.

북부 그로자 자작가의 첫째이자 올해 아카데미 2년 차의 생도였다.

그리고 영지 귀족이니만큼 당연히 생도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클리앙과 초면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 친하거나 익숙한 관계라고도 할 수 없었다.

드로카가 생도회 소속이기는 하되, 딱히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목을 끌 만한 요소가 없었다.

가문은 북부 시골 영지의 일개 자작가에 불과했고, 개인의 능력이 특출나지도 않았다.

굳이 공을 들여 가며 관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를 따라도 그만, 따르지 않는다 해도 그만이었다.

“어때, 드로카? 할 수 있겠나?”

그런데, 분명 그랬던 조건이 현재는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클리앙이 직접 드로카와 약속을 잡고, 저녁을 대접하며, 무언가 은밀한 제안을 건네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토퍼의 최측근인 그가 말이다.

단, 이것이 드로카나 그로자 영지 그 자체에 기인한 변화는 결코 아니었다.

원인은 다른 인물, 다른 가문에 있었다.

라이오넬, 그리고 그의 가문인 라인하트 자작가.

라이오넬이 크리스토퍼와 본격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며 덩달아 드로카와 그로자 영지의 가치가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그로자 영지가 라인하트 영지와 맺어 온 특수한 관계 덕분이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라인하트 영지는 농업 생산력이 극도로 빈약했다.

그 정도란 식량 자급이 불가능한 수준.

하여 부족한 식량은 근처 영지들과의 거래를 통해 수급해 왔다.

그로자 영지는 이런 라인하트 영지의 2대 곡물 거래처 중 하나였다.

타스파 영지와 함께 라인하트 영지민들의 식량을 좌지우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였다.

드로카의 가치가 갑자기 껑충 뛰고, 클리앙이 그를 직접 부른 것은.

나아가 모종의 제안을 건넨 것 역시도.

아카데미 내에서 더는 라이오넬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밖에서 건드리면 되는 일.

공개적인 굴욕만 맛본 채로 접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밖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라인하트 영지였고 말이다.

“라인하트와의 거래를 당장 끊어 버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당장. 에릭스 브란부르트가 이미 군량과 병력을 끌고 떠난 상태라고 한다. 손을 쓸 거면 바로 지금이 최적기야.”

클리앙이 건넨 제안은 뚜렷하고 분명했다.

라인하트 영지와 예정돼 있던 곡물 거래를 당장 중단하라는 것.

그리하여 라인하트 영지를 곤경에 빠뜨리라는 것이다.

클리앙의 말마따나 분명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계절은 이미 가을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북부에서는 몬스터 웨이브 대비가 한창인 시기.

북부의 병력이 일제히 바르코스 요새로 집결 중이었다.

물론 라인하트의 병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바르코스 요새로 출발한 상태였다.

300명분의 군량과 함께 말이다.

자연스레 곡물 비축분이 대폭 감소했을 터.

라인하트 영지에는 추가 비축을 위한 거래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거래를 끊는 것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지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따라서 라인하트 입장에서는 당장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가 않았다.

일단 북부 내에서는 수급이 어려웠다.

다른 영지들도 바르코스 요새에 병력과 군량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서 들여오는 방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와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 일은 그리 녹록지 못했다.

또, 설령 뚫는다 해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절실한 상황에서의 거래는 언제나 호구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으니까.

한마디로 라인하트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것이다.

“으음…….”

라인하트 영지가 심각한 곤경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

그로자 영지가 행동에 나서 주기만 한다면 분명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직 결정된 바는 아니었다.

행동에 나서야 할 그로자 영지의 결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단은 그로자 영지와 드로카 입장에서 커다란 모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라인하트 영지에 치명적인 비수를 꽂는 일이었다.

심지어 영지민들의 생존이 연관된 부분이기까지 했다.

가만히 앉아서 바보같이 당하고 있지는 않을 터.

무슨 짓이든 벌일 것이고, 여기에 그로자 영지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사실 역시 자명했다.

북부에서 라인하트의 무력은 명성이 자자했고 말이다.

최상급에 이른 것으로 확인된 에릭스는 물론이고, 얼마 전 케인을 꺾은 라이오넬까지.

평범 그 자체인 그로자의 전력으로는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드로카의 망설임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클리앙은 이 당연한 것을 당연한 상태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무슨 고민을 하는 건지는 잘 안다. 하지만 드로카, 잘 생각해 봐라. 너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거야. 앞으로도 촌구석에 처박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갈지, 아니면 크리스토퍼 왕자님과 함께 큰물에서 놀아 볼 건지를 선택하는 그런 중대한 기로.”

“물론 저도 크리스토퍼 왕자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가문의 존립이 걸린 문제라는 거겠지. 자칫 라인하트와의 전면전으로까지 비화될지도 모르는 사안이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저지만, 아버님을 절대 설득하지 못할 겁니다.”

드로카가 하는 고민의 핵심 역시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이는 클리앙이 얼마든지 뒤집어 줄 수 있었다.

“그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라인하트는 절대 극단으로 치닫지 못해. 명분 없는 영지전이 우리의 반대를 뚫고 통과될 수 있으리라고 보나?”

이 일은 어디까지나 라이오넬을 압박하려는 목적에 불과했다.

그가 크리스토퍼에게 굴복하기만 한다면 금세 없던 것으로 될 일.

양측 모두 굳이 극단까지 치달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인하트가 치닫고자 한다면, 그 대응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냥 무시하면 됐다.

허락해 주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영지 간에 전면전 혹은 이에 준하는 대전사 결투를 벌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명분이 필요했다.

왕실의 허락을 얻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절차였다.

개인 간의 관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클리앙의 계획대로라면 명분은 그로자 영지 쪽에 있었다.

내부적인 사정으로 곡물을 팔지 못하겠다는데, 저들이 뭘 어쩌겠는가?

이 내부 사정이야 상황에 맞춰 대충 하나 만들어 내면 그만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영지전은 절대 성립되지 못할 터.

클리앙은 이 점을 상세히 풀어 가면서 드로카의 마음을 흔들었다.

“간단해. 명분만 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명분만.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나온다면 왕자님과 후작가가 적극 개입하면 되는 것이고.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그렇긴 하지요…….”

“그러니 길게 고민하지 마라, 드로카.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왕자님께서 너를 바로 옆에 두실 거다. 알다시피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선배로서 네가 이 기회를 꽉 잡고 놓지 말길 바란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드로카는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절대 날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클리앙의 입가에서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

* * *

“오셨습니까, 타리우드 경?”

“예, 공자.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자정을 훌쩍 넘긴 야심한 시각, 케인을 아카데미 밖의 모처로 불러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은밀한 부름에 응답한 케인이 막 약속장소에 도착한 참이었다.

“제가 경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최근 케인의 입장은 좋다고 보기 힘들었다.

크리스토퍼의 체면이 걸린 승부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케인은 그들이 승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던 카드였다.

한데 그런 케인이 패배했으니 그 충격도 배로 작용했을 터.

당사자인 케인으로서는 입장이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단, 내가 걱정해 줄 만한 부분은 되지 못했다.

케인의 패배가 미친 영향이 나름 묵직하기는 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케인이 지닌 가치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역대급 천재였다.

단지 그 위에 한 번의 패배와 나라는 논외의 존재를 두게 되었을 뿐.

약간의 눈치는 줄지언정 1왕자 측은 절대 케인을 버리지 못했다.

더불어 케인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내 부름에 망설임 없이 응한 점, 그리고 현재 나를 향하는 호의적인 눈빛 등이 이를 뒷받침했다.

레나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최근 케인은 미친 듯이 수련에 임하는 중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내가 짚어 준 그의 약점들.

겉으로 드러난 이 약점들을 보완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확실했다.

케인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잠재력이 그 증거였다.

“여기서 말입니까?”

케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되물었다.

여러모로 어색한 것이 당연했다.

이 늦은 시간에 줄 게 있다는 이유로 불러낸 것도 그렇지만, 특히 장소는 더더욱 그러할 터.

왕도 내이기는 해도 아카데미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의 이곳 외곽에는 웬 허름한 집 한 채뿐이었다.

이제 검 한번 맞댄 것이 전부인 케인과 나 사이의 약속 장소로는 심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예, 여기 맞습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물론 겉보기에만 그랬다.

내가 케인을 불러낸 목적을 생각하면 이곳보다 더 적합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드워프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 한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다.

목적이 검과 관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결 당시, 케인은 나에게 진심이 담긴 일격을 요청했고, 나는 이를 들어주었다.

비록 오러 블레이드를 꺼내 든 것은 아니지만, 검격에는 소드마스터로서의 깨달음이 일부 실려 있었다.

당연히 케인은 이를 견뎌 내지 못했다.

그의 검도 마찬가지였다.

내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반 이상 갈라져 버렸다.

사실상 검으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다.

그래서 케인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내 나름의 선물이자, 언젠가는 효력을 발휘할지도 모르는 값비싼 뇌물을 건네기 위해서.

“저 왔습니다, 데파이 스토스님.”

검사라면 도저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그런 선물이자 뇌물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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