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메인 이벤트의 겉과 속
“고마워, 라이.”
내가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깔끔한 승리에 대한 축하의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버리는 사네였다.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네, 네가 이겨 준 덕분에 나야말로 한 시름 덜었는데?”
“정말 시름 했던 거는 맞고? 겔포이하고 직접 검을 맞대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 네가 어떻게 내 승리를 그리 장담할 수 있었던 건지. 그리고 그게 단순히 격려 차원에서 늘어놓은 빈말이 아니라는 것도.”
나를 바라보는 사네의 눈빛은 감사 이외에 다른 뜻도 품고 있었다.
놀라움 혹은 신기함 같은 것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아무리 네 경지가 한참 위라지만, 이 정도로 샅샅이 겔포이를 해부하는 게 정말 가능한 거야?”
사네의 표현이 딱 알맞았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겔포이를 완벽하게 해부했다.
그렇기에 사네가 이렇듯 깔끔한 승리를 거머쥐고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겔포이는 비기를 펼치다 사네의 검에 목젖을 가격당해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두 사람의 검이 수련용 철검이기에 망정이었다.
진검이었다면 졸도가 아니라 그대로 즉사였을 테니까.
단, 즉사를 면했다뿐이지, 겔포이의 상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쇠몽둥이에 급소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꼴이었다.
그것도 마나가 잔뜩 실린 쇠몽둥이에 말이다.
곧바로 치료를 위해 옮겨졌지만, 그는 현재 위중한 상태였다.
객관적인 실력 면에서는 분명 겔포이가 우세했다.
그럼에도 이런 업셋이 도출된 원인은 바로 그 비기에 있었다.
단, 비기 자체가 흠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수 대에 걸쳐 다듬어져 온 비기에는 이렇다 할 흠이 없었고, 기술 자체는 훌륭했다.
흠이라면 기술 시전자의 모자람에 있었다.
훌륭한 비기를 온전히 소화해 내기에는 겔포이의 실력이 많이 모자랐다.
미흡한 상태에서 억지로 펼치려다 보니 빈틈이 대문짝만하게 발생했고, 사네는 그 틈을 가볍게 열고 들어간 것뿐이었다.
물론 그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여는 방법 등을 사네에게 알려 준 이는 나였고 말이다.
“글쎄, 그냥 감이 좋아서? 해 보니까 되더라고.”
감은 분명 감이었다.
다만, 남들과 같이 대충 때려 맞추는 종류의 감은 아니었다.
자세한 정보와 정확한 분석을 보장하는 정령력에 기인한 것이었으니까.
대결을 제안하고자 겔포이를 찾아간 날이었다.
그날 겔포이를 낱낱이 파악했다.
그의 현재 실력과 잠재력의 크기, 이를 바탕으로 한 앞으로의 발전 양상, 그리고 구사하는 검법의 초식과 사소한 버릇들까지 전부.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을 선사하고자 그렇게 시간을 끌었던 것이 아니었다.
겔포이 해부의 전말은 이러했다.
다만, 굳이 밝힐 필요까지는 없는 전말이기도 했다.
“하긴, 너라면 뭔들. 다시 한번 고마워, 라이. 덕분에 앞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게 됐어.”
사네 또한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영지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는 관람석.
그중에서도 상석에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사네의 말마따나 앞으로의 관계를 많은 부분에서 재정립해야 할 그의 이복형, 르로이 발터우스가.
이 사실을 르로이 또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나와 사네를 번갈아 가며 노려보고 있는 것일 터.
질겅질겅 씹히는 그의 입술과 함께 말이다.
“천만에. 사네, 네 힘으로 이루어 낸 거야. 무엇보다 아직 한 단계 더 남아 있기도 하고. 정 고맙다고 하려거든, 그때 가서 해.”
이번에는 내가 르로이의 바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도 르로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바로 이 상황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크리스토퍼와 클리앙이었다.
둘 역시 방금 대결의 결과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치고 있었다.
다만, 르로이보다는 좀 덜했다.
둘에게는 아직 믿는 구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것을 무너뜨리러 갈 차례였다.
“솔직히 그래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하나 이따 하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거든. 그냥 지금 할 테니까, 가서 얼른 마무리 짓고 와.”
그 길에 더할 나위 없는 응원까지 받았다.
사네가 보내는 무한한 신뢰라는 응원이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알겠어. 다녀올게.”
그렇게 사네와 바통을 터치한 뒤 무대 위로 올랐다.
클리앙이 했던 표현에 따르면 오늘의 메인 이벤트, 케인과의 대결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크리스토퍼와 클리앙의 표정을 르로이의 그것과 완전히 같아지게 만들어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타리우드 경.”
무대 위에서는 먼저 올라온 케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일단 사과의 뜻부터 전했다.
“우선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저 때문에 괜히 이런 자리에 서게 되셨네요.”
누군가는 유명세를 탈 수 있다며 바라마지 않을 자리였다.
아마도 크리스토퍼의 측근 중에는 그런 인간들이 상당할 터.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 현재 나와의 대결을 앞둔 케인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 자리를 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레나가 전해 준 정보뿐 아니라, 내가 아는 케인의 성향도 분명 그러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공자가 왕자님께 무릎 꿇지 않는 이상, 당장이 아니라 해도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으니까.”
레나처럼 개인사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나 또한 케인의 기본적인 성향 정도는 알고 있었다.
회귀 전의 인연 덕분이었다.
회귀 전에는 나도 지금의 케인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토퍼를 주군으로 섬겼었다.
덕분에 그와 대련 명목으로 두어 차례 검을 맞댈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 느꼈다.
채 마흔이 되기도 전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의 천재성을.
또, 케인이 굉장히 진중한 성향을 지녔다는 사실 역시도.
비록 직접적인 대화는 몇 마디 나누지 못했으나, 검의 대화를 통해 파악한 부분이니만큼 오히려 더 정확했다.
“그보다 공자에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하십시오.”
“왕자님께서는 공자의 칭호가 심하게 과장된 것이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당연히 칭호의 진위를 묻는 그의 태도 또한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수작 따위나 부리고자 묻는 눈빛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케인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답변의 방향이란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크리스토퍼의 물음에 대답 자체를 거부했던 때와는 달랐다.
어느 정도는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고, 이에 케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하면 처음부터 부담 없이 가겠습니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끄덕임이었다.
동시에 경고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할 것이니 조심하라는 그런 경고.
비단 경고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대로 검을 빼 들어 나를 겨누는 케인이었다.
“바라던 바입니다.”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케인이 처음부터 전력으로 임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쓸데없는 심력이나 시간 낭비 따위를 건너뛸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케인에게서 받았던 바를 돌려주고자 했다.
물론 나 혼자만 간직하는 과거이기는 하나, 어쨌든 그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가 아니면 앞으로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도 않을 터였다.
회귀 전과는 내 위치와 입장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해서 나 또한 망설임 없이 검을 쥐었다.
그러고는 마주하여 케인을 겨누었다.
파밧!
그것이 신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서로를 향해 짓쳐듦과 동시에 대결이 시작됐다.
콰앙~!
앞선 그것과는 충돌의 효과부터가 달랐다.
검과 검이 부딪힌 것임에도 충돌음은 거의 폭음에 가까웠다.
카가가각!
충돌 지점을 중심으로 파편까지 튀고 있었다.
그냥 파편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바윗덩어리쯤은 푹푹 파고 들어갈 파괴력을 지닌 오러의 파편이었다.
쾅! 콰광! 카가각~!
그런 것들이 순식간에 넓은 대련장 안을 가득 채웠다.
눈 한번 깜박할 때마다 수차례의 검격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만하면 클리앙의 묘사가 확실히 들어맞았다.
사네와 겔포이의 대결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아니, 지금 펼쳐지는 광경만 놓고 봐서는 애피타이저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만큼 나와 케인이 벌이는 메인 이벤트의 양상은 화려하고 강렬했다.
더욱이 대결의 기본 조건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소드 익스퍼트라는 달인들끼리의 정면승부였다.
진검으로 펼쳐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일 검 일 검이 각자의 목숨을 담보로 뻗어 나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런 살 떨리는 충돌이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중이기까지 했다.
관전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승부는 또 찾아보기 힘들 터였다.
“…….”
그러나 충돌 당사자들 간의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바와 달리 실제 대결의 진행 양상은 전혀 긴박감을 지니지 못했다.
결과가 처음부터 정해진 승부였기 때문이다.
나와 케인의 격차는 더할 나위 없이 또렷했으며, 케인이 무슨 수를 쓰든 이 간극은 극복이 불가했다.
나야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긴장감을 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이제는 케인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착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이를 드러냈다.
“이 승부…….”
슈아악~
콰앙! 콰광!
충돌 후 처음으로 케인이 입을 열려 했다.
다만,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중간에 끊었다.
당장은 들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케인에게 받았던 바를 열심히 돌려주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한참 부족했다.
돌려줘야 할 것들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이에 스퍼트를 올렸다.
이제는 내 쪽에서 케인을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콰가가각~!
관전자들이 느끼는 대결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승부의 팽팽함은 여전하되, 공수의 흐름이 살짝 바뀌었다는 정도?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케인은 현재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의 약점들만을 골라 교묘하게 찔러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케인은 올라운더였다.
검에 실리는 힘, 속도, 무게, 펼쳐지는 검의 교묘함 등 모든 면에서 평균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분명한 장점이었다.
어떤 적과 마주하더라도 이렇다 할 틈을 노출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한 약점이기도 했다.
특출난 강점이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동급의 실력자와 상대할 때는 드러나지 않을 취약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모든 면에서 특출난 상대, 예를 들어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현재 케인에게는 내가 바로 그런 상대였고 말이다.
“크읍…….”
검이 충돌할 때마다 케인은 신음을 흘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찌르기는 속도가 부족했고, 횡베기는 힘이 모자랐으며, 종베기는 검의 무게가 가벼웠다.
일 검 일 검마다 노출되는 각각의 약점들을 커버하느라 힘에 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단지 귀청을 찢는 폭음에 묻히고, 비산하는 오러의 파편에 가려졌을 뿐.
이 상태로 족히 수백 합은 되는 격돌이 쉼 없이 이어졌다.
후우우우~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찾아온 소강상태.
그 속에서 잠시간 숨을 고른 케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승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었군요.”
이번에는 나도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목적했던 바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회귀 전, 나는 케인에게 지금 내가 해 준 것과 같은 도움을 받았다.
말은 도움이지만 실제로는 지도·편달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때의 경험은 소드마스터 도달에 커다란 자산이 됐다.
그리고 현재, 당시의 케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얼추 비슷한 수준으로는 되돌려준 상태였다.
하여 더는 그의 말을 끊을 이유가 없었다.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졌습니다.”
그러자 케인 또한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단, 단순한 인정에서 그치지는 않았다.
“다만, 공자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공자의 진심이 담긴 일격을 한번 받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을 뛰어넘고자 했다.
물론 당장은 절대 불가능이겠지만, 언젠가는 기필코.
이런 의지가 케인의 눈빛과 표정에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스윽.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깨달음의 단초를 제공해 주었던 케인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여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대답 대신이었다.
“고맙습니다.”
감사를 표한 케인.
그 역시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사실상 마지막 충돌만을 남겨 둔 시점.
덩달아 관중석 또한 고요해졌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이번 충돌로 앞으로의 많은 것들이 결정되리라는 사실을.
구우우웅~
준비는 끝났다.
이격까지는 필요 없었다.
이 일격이면 여태까지의 일들이 깔끔하게 일단락될 터.
이윽고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짓쳐 들었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챙강~!
결판이 났다.
승부의 결과는 명료했다.
케인의 검이 반쯤 갈라진 채로 바닥에 떨어지는 그 순간, 승패도 확실하게 갈렸다.
나의 승리, 그리고 크리스토퍼의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