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사네의 승부
슈아악~!
검이 자신에게로 짓쳐 드는 와중에 반격을 가하는 사네.
사네로서는 승부를 건 최후의 일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강!
하지만 끝내 막히고 말았다.
상대 목덜미 한 뼘 앞에서.
아깝기 그지없는 결과지만 동시에 잔혹하기 짝이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사네는 이 일격에 그의 전부를 걸었다.
따라서 실패는 곧 패배를 의미했다.
그리고 한 뼘 앞이든 뭐든 결국 그의 검은 상대에게 도달하는 데에 실패했다.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곧 사네의 패배.
이제 상대의 처분과 거기에 수반되는 고통을 감내할 차례였다.
“하아, 하아, 하아~”
하나, 감내는 없었다.
감내는커녕 한껏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그나마 있던 약간의 고통마저 덜어내는 중이었다.
실패한 사네에게 상대가 처분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처분 따위는 배제함이 당연했다.
사네의 검을 목덜미 한 뼘 앞에서 막아 낸 상대, 그리하여 패배를 안겨 준 상대가 바로 나였으니까.
“잘했어, 사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승부의 끝에서 내가 사네에게 안겨 준 것은 고통이 아닌 칭찬, 그리고 격려였다.
강행군을 견뎌 온 지난 5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 사네는 정말 죽을 힘을 다했다.
옆에서 지켜본 내가 한 번씩 그의 훈련을 강제 중단시킬 정도로 말이다.
“모두 네 덕분이야, 라이.”
이런 뼈를 깎는 수련의 결과, 사네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냈다.
방금 펼쳤던 최후의 일격에서도 그랬듯, 마나 수발조차 제대로 못 해 쩔쩔매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을까? 결국, 넘어서지 못했는데…….”
다만 사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실력의 눈부신 향상 폭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안심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대결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현재, 사네의 실력은 소드 유저 중상급에 도달한 상태였다.
소드 유저 최하급도 간당간당한 수준에서 5개월 만에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절대 수치만 놓고 따졌을 때는 기적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현실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쪽은 절대 수치가 아니었다.
상대 수치였다.
비교를 통해 우열이 가려지는 바로 그 수치 말이다.
그리고 이 수치 면에서 사네는 겔포이에 미치지 못했다.
소드 유저 상급인 겔포이가 사네보다 여전히 우위에 있는 것이다.
당장 내일 펼쳐질 대결의 당사자로서 염려를 금치 못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사네 너를 못 믿겠거든, 그냥 나를 믿어. 준비한 대로만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
반면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사네와 달리 크게 걱정 않고 있었다.
이 대결의 결과에 운명이 걸린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와 안절부절못한다고 해서 어차피 달라지는 바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네의 잠재력이 지닌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사네의 극악한 검술 재능으로 소드 유저 상급 이상은 불가능했다.
여기까지도 원래 안 되는 걸 억지로 쥐어짜 올라온 터.
따라서 되지도 않을 일에 목매달려 심력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정면 돌파가 어렵다면 측면으로 돌아들어 가면 그만이었다.
고수들의 영역에서는 몰라도 소드 유저급이라면 가능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치밀한 준비와 뼈를 깎는 훈련,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삼위일체를 이뤄야만 했다.
다만, 앞의 두 가지는 이미 충족한 상태.
따라서 승리까지 남은 조건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파직, 파직, 파직.
그렇게 이 마지막 조건을 채워 가려던 때였다.
나와 사네가 훈련을 진행 중이던 공터에 파직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뒤이어 조언의 탈을 쓴 일종의 잔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집중력이 확 떨어졌잖아요. 조준을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네, 베로카 양!”
“집중해요, 다시 갑니다.”
전자는 센트럼, 후자는 베로카였다.
두 사람도 이 공터에서 무언가를 훈련 중인 것이다.
방금 막 마무리된 우리와 달리 이들의 훈련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촤악~
잔소리를 짧게 끊은 베로카가 공중으로 나뭇잎들을 흩뿌렸다.
한 장 한 장이 확실하게 분산될 수 있도록 마나까지 동원된 고도의 산개 작업.
이렇듯 낱개로 쫙 펼쳐진 나뭇잎들을 향해 센트럼의 마법이 발사됐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여기에 적중된 나뭇잎들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일종의 마력탄이었다.
다만 그 효과를 통해 분명 알 수 있듯이, 평범한 마력탄은 아니었다.
센트럼의 뇌전이 가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슈팅’이라는 센트럼의 독자 마법이었다.
일주일 뒤 시작될 동아리 경연에서 선보일 마검학연의 성과물이기도 했다.
특히 마법 동아리의 경연에는 매년 마탑에서 관전을 오는 것이 관습.
왕국 마법계의 알파요 오메가인 마탑에 제대로 눈도장 찍을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인상 깊은 경연을 펼친다면 그 이상도 가능했다.
이런 자리이니만큼 그 중요성은 이루 다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
“조준과 발사 간 간격이 너무 길어요.”
한데,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마법의 숙련도가 지나치게 낮은 것이다.
뇌전에 불타 재가 된 나뭇잎은 몇 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이 멀쩡한 상태로 바닥에 착지했다.
“컨트롤 능력에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그럴 만한 실력은 충분히 갖췄으니까. 단지 확신이 부족하니 망설임이 생기는 거예요.”
당연히 베로카의 질책이 뒤따랐다.
그녀는 상당히 엄격한 조교였다.
“다시!”
“예, 예!!”
재시도가 이어졌다.
센트럼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않고.
그리고 이런 광경을 일별한 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베로카 말 들었지? 사네 너도 실력은 충분해. 그러니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가지면 돼.”
“……뒤에 더 중요한 말이 들렸던 것 같은데?”
센트럼의 훈련을 쭉 지켜보던 베로카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집중 상태인 센트럼에게는 안 들렸겠으나, 나와 사네의 귀에는 확실히 들렸다.
살짝 고개를 젓는 모습까지 함께.
“흠흠,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중요한 부분이 아니니까.”
이에 다소간 민망함 섞인 헛기침으로 사네의 주의를 돌렸다.
그러고는 내일 대결에 있어 정말 중요한 부분을 사네에게 전달했다.
사네의 승리를 확보해 줄 보증수표 같은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말로 더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 그냥 이거 하나만 명심해, 사네. 내일 대결 시작 직전에 꼭 나를 봐. 절대 잊지 말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해. 그러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
* * *
“언제까지 비겁하게 막고 피하기만 할 거냐? 공격 안 해? 뭐, 네놈 같은 머저리에게 딱 어울리는 모습이기는 하다만.”
겔포이가 사네에게 도발을 걸어 왔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비록 5개월 만이기는 하지만, 한때는 심심하면 반복되던 장면이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굉장히 어색했다.
이전까지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몇 가지 요소들 때문이었다.
이 몇 가지가 분명 익숙한 장면을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우선은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겔포이의 태도.
사네를 모욕하고 도발하는 쪽은 분명 겔포이였다.
그런데 이 태도에서 평소와 같이 진심으로 멸시하고 깔보는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입은 그리 하려 노력 중인데, 눈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중요한 대결이 한창인 이 와중에 자꾸만 다른 곳을 흘끔거리는 겔포이였다.
이전의 장면과 다른 또 한 가지, 바로 대결의 관람석 쪽이었다.
사네와 겔포이의 대결을 관람하는 관전자들이 존재했다.
물론 이전 대련에서도 없지는 않았다.
로이 드로그난 교수의 수업을 수강하는 생도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관전자의 급이 그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무려 크리스토퍼 왕자를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관람 중인 것이다.
심지어 그 예하 생도회 소속 영지 귀족들까지 전부.
겔포이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요소로서 이와 상반되는 사네의 여유가 있었다.
겔포이와의 대련에서 언제나 막기 급급한 모습만을 보이던 사네였다.
도저히 막을 수 없겠다 싶은 공격은 심심찮게 몸으로 때웠고 말이다.
지금도 겔포이의 공격을 막기만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막는 과정에서 급급한 태도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며, 때때로 슬쩍 피하거나 흘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다섯 달 전이라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개.
이 전혀 다른 전개가 익숙한 장면을 극도로 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글쎄, 그 머저리조차 어쩌지 못해서 절절매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정 마음에 안 들면 직접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보든가. 저기 계신 왕자님 인상 더 구겨지기 전에.”
“너 따위가 감히!!!”
오히려 역으로 겔포이가 도발에 걸려들었다.
그가 무지막지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겔포이의 검에는 눈에 보일 것 같이 선명한 분노가 그득하게 실려 있었다.
반면 사네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또다시 이를 막아 갔고 말이다.
후우웅~!
카앙! 차캉!
단, 이런 흐름이 비단 겔포이의 참을성 없는 성질머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크게 영향을 미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평판.
현재 겔포이의 평판은 급락한 상태였다.
검술 젬병으로 널리 알려진 사네 따위조차 빠르게 처리 못 하고 쩔쩔매는 그런 놈으로 말이다.
더구나 대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니만큼, 평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영지 귀족으로서 선민의식이 가득한 겔포이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터.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토퍼의 눈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대결을 끝내고자 이렇듯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차앙! 카가강!
‘크윽!’
또, 사네 역시 정말 여유가 넘치는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마나가 잔뜩 실린 겔포이의 검을 받아넘길 때마다 신음이 절로 흘러나오려 했다.
단지 사네가 억지로 집어삼키는 것일 뿐.
고작 소드 유저에 불과하기에 그리 크지 않다고는 하나, 상급과 그 아래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검에 마나를 싣는 속도와 양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검을 맞대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조금씩 선명해져 갔다.
얼마 전까지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했던 것 또한 이 차이 때문이었다.
“흡!”
콰창~!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네는 불안감 따위의 감정을 일소한 상태였다.
동작이 커지며 드러난 겔포이의 빈틈을 찔러 뒤로 물러나게 만든 것이 그 증거.
급박한 이 와중에도 침착함과 평정심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5개월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밀리기는 할지언정 겔포이의 검을 받아넘길 수 있었고, 나아가 준비한바 역시 차분히 풀어놓을 수 있었다.
짐짓 여유로운 척 시간을 끌며 겔포이를 초조하게 만든다.
그리고 적당한 타이밍에 그를 도발하여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게 만든다.
여기까지 준비한 대로 차질 없이 흘러온 상태였다.
특히 대결 직전 마주한 라이오넬의 눈빛 덕이 컸다.
어제 라이오넬이 한 신신당부에 따라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순간부터였다.
사네를 불안에 떨게 했던 갖가지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은 것은.
덕분에 열세의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게 다야? 그렇다면 좀 실망인데.”
지금까지 준비한 바를 착실히 쌓아 왔다.
하면 이 축적을 기반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였다.
겔포이를 뒤로 물러나게 만들자마자 던진 추가 도발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제대로 실성했구나. 그래, 좋다. 진짜 끝장을 내 주지.”
겔포이가 다시 한번 미끼를 물었다.
드디어 그것을 꺼내 든 것이다.
드레이크 검법의 최종 비기.
이것이 그가 지닌 최후의 무기였다.
그르륵.
몰라볼 수가 없었다.
비기를 펼치기 위해 벌리는 발의 보폭부터 어깨의 너비, 그리고 비스듬히 틀어쥔 특이한 파지법까지, 모든 부분이 비기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5개월 동안 수도 없이 직접 보고 겪어 왔다.
그것도 비기의 주인인 겔포이보다 더 완성에 가까운 형태로.
당연했다.
시전자가 무려 라이오넬이었으니까.
그리고 여태까지의 밑 작업은 전부 겔포이로부터 이 비기를 최대한 빠르게 끌어내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기본적인 경지 차이로 인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승산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사네가 먼저 지치기 전에 결판을 낼 필요가 있었다.
이런 현실적 제약에 대한 고민 끝에 내놓은 해법이 바로 지금 겔포이가 펼치려는 비기인 것이다.
“각오해라, 죽여 주마!”
이윽고 겔포이가 짓쳐 들었다.
비기 시전을 위해 검을 상단으로 높이 세워 들고 말이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사네를 향해 베어 내렸다.
스아악~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수직 베기.
한데, 검이 사네의 머리 위 두 뼘 정도 거리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샤샤샥~
검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수직 베기의 숫자가 갑자기 둘로 늘어난 것이다.
“…….”
물론 둘 다 진짜일 리는 없었다.
드레이크 백작가의 검법은 환검.
그런 검법의 최종 비기이니만큼 한쪽은 상대를 혼란케 하는 가짜 검격이었다.
당연히 이 사실을 사네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진짜를 구별해 낼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라이오넬의 말에 따르면 그건 고수들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
하수들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었고,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슈아악~!
하지만 라이오넬은 사네에게 전혀 다른 선택지를 마련해 주었다.
일반적인 양자택일이 아니었다.
겔포이가 강요하는 양자택일의 판 자체를 엎어 버리는 제3의 선택지였다.
이에 따라 사네는 깔끔하게 둘 다 무시했다.
떨어져 내리는 검격 자체에 아예 신경을 껐다.
대신 오직 한 지점만 바라보고 집중했다.
그러고는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검을 찔러 들어갔다.
바로 겔포이의 목젖, 자랑스레 비기 명을 내뱉으며 꿀렁이는 그 한 지점을 향해서.
“폴링 스…….”
콰득!!
“켁!!!”
그렇게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비기 명의 완성도, 꿀렁이던 목적의 움직임도, 나아가 이 대결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