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조건 수정
마검학연 동아리 방.
나와 내 사람들의 아지트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현재 이곳에 전혀 의외의 인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방과 대척점에 서 있는, 따라서 나의 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인물의 정체는 바로 클리앙 나로움.
생도회 부회장으로서 크리스토퍼의 최측근인 그가 이곳으로 나를 찾아와 독대를 청한 참이었다.
“이제 슬슬 목적을 밝히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만하면 변죽은 충분히 울리신 듯한데.”
나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일을 계기로 찾아온 것인지도 짐작하는 상태였으니까.
하여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초장부터 거침없이 나갔다.
클리앙이 펼치는 초반 탐색전을 중간에 끊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고는 곧장 본론을 요구했다.
“카르사노나 왕자님 말씀대로 확실히 직선적인 성격이군. 좋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쁠 것 없겠지.”
어차피 클리앙은 무언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입장일 터.
그 또한 내 요구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고, 덕분에 대화는 지체 없이 본론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한 달 뒤 대결 관련해서 제안을 한 가지 하러 왔다. 승부를 좀 더 재미있게 꾸며 볼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아카데미의 모든 생도들이 궁금증을 품고 있는 사안, 그걸 이번 승부를 통해 해소해 주는 거지. 현재 아카데미의 최강이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 말이야.”
이걸로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졌다.
클리앙은 이번 승부에 나를 직접 참가자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상대가 될 인물이야 빤했다.
“케인 타리우드 말이군요.”
“그래. 케인과 너, 라이오넬. 아카데미가 배출한 역대급 천재와 트윈 슬레이어라 불리며 떠오르는 신성의 대결. 여기에 관심 보이지 않을 생도가 있겠나? 지금 제안을 하는 나는 물론이고, 크리스토퍼 왕자님께서도 상당한 호기심을 표하시더군.”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 내 부동의 최강으로 불리던 케인 타리우드였다.
나의 입학과 함께 그 지위가 살짝 흔들릴 뻔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그를 최강으로 꼽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고작 20살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른 실력이라면 그럴 만했다.
이 압도적인 재능은 나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순수하게 검술에 대한 재능만 따진다면 나보다 우위에 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부가적으로 최선을 다해 나를 평가절하해 온 르로이의 공도 나름 무시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하는 제안이다. 겔포이와 사네의 대결을 한 달만 더 미루는 게 어떻겠나? 그때면 케인이 서부에서 복귀할 테니, 딱 알맞을 거야. 케인과 네가 펼칠 메인 이벤트의 애피타이저로 활용하기에.”
단판이었던 승부 방식에 변화를 주자는 것이다.
사네와 겔포이의 대결에 이어 나와 케인의 대결까지 두 판으로.
다만, 이 경우 자연스럽게 한 가지 문제가 뒤따랐다.
“그럼 결과는요? 승패가 갈릴 시 결과는 어떻게 도출할 생각입니까?”
바로 결과의 집계였다.
한쪽이 두 번 다 승리해서 2대0의 결과가 나온다면 상관없지만, 승패를 번갈아 나눠 가진다면 문제가 됐다.
승부의 향방을 명확하게 가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된다면, 결과는 추가적인 대결을 통해 도출하면 그만이겠지. 대결 방식이야 그때 가서 따로 정하면 될 테고 말이야. 아니면, 네가 원하는 방식을 제시해도 좋고.”
물론 클리앙이 이런 간단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찾아왔을 리 없었다.
다만, 그는 이 문제를 말 그대로 정말 간단하게 생각했다.
대결 방식이야 그때 가서 정하면 된다는 말이 그 뜻이었다.
클리앙은 애초에 패배 가능성 자체를 거의 상정하지 않았다.
2대0 승리를 자신 있게 점치는 중이었다.
그러니 추가 대결의 방식은 따로 마련해 두지도 않았을뿐더러, 선심 쓰듯 나에게 공을 넘기는 것일 터였다.
비록 르로이의 일 때문에 새로운 제안을 들고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보험에 불과해 보였다.
천재지변에 준하는 최악의 경우조차도 대비해 두고자 하는 그런 보험 말이다.
따지고 보면 객관적으로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초 사네와 겔포이의 격차는 절대적이었다.
소드 유저에조차 온전히 올랐다고 보기 힘든 사네와 안정적으로 소드 유저 상급을 마크하고 있는 겔포이.
비교 자체가 필요치 않은 압도적 차이였다.
나와 사네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를 부린다 해도 이 격차를 메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고작 반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내라면 더더욱.
따라서 겔포이의 승리는 클리앙에게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르로이의 일도 있고, 센트럼 때와 같은 비현실적인 불상사도 존재하니만큼,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려 하는 것이다.
나와 케인에 있어 케인의 우위를 점친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 없었고 말이다.
“흐음, 그렇군요.”
“어째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인 듯한데?”
“솔직히 그렇습니다. 딱히 응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크리스토퍼 측의 입장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난 클리앙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왜지? 너에게도 나쁠 것 없는 제안일 텐데? 기회를 한 번 더 부여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잘만하면 마지막 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짤 수도 있지 않나?”
“아, 제안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이대로라면 너무 밋밋할 것 같아서 말이죠.”
단, 기본적인 방향 자체는 나도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 쌍수 들어 환영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 엮는 것이 좋을까 고민 중이던 참이었으니까.
때마침 르로이가 벌여 준 해프닝 덕에 이런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고 말이다.
“제안은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그 조건을 일부 수정하고 싶습니다. 지금처럼 애매하게 말고, 선명하고 확실한 조건으로.”
따라서 이대로가 아닐 수 있도록 조건을 일부 수정한 뒤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다만, 여기서 일부라는 것이 실제 적용에 있어서까지 일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는 이 일부에 의해 승부의 양상 자체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결을 세 번째까지 끌고 가는 건 그냥 배제하죠. 깔끔한 걸 원합니다. 두 번의 대결 중 한 번이라도 지면 제가 진 것으로 간주하고 왕자님께 무릎 꿇겠습니다.”
“……?”
“대신 사네와 제가 둘 다 승리할 시, 원래 약속했던 것 이외에 추가적인 보상을 약속해 주시죠.”
“……어떤 보상을 원하는 거지?”
“필요할 때 왕자님 찬스를 쓸 수 있는 기회. 왕자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일종의 소원권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모호함을 배제한 깔끔한 승부, 그리고 이에 걸맞은 확실한 보상.
이것이 내가 수정을 원하는 일부이자, 역으로 건네는 제안이었다.
분명 원하는 대로 됐음에도 어째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클리앙에게 말이다.
* * *
역제안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클리앙이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는 내가 보인 넘치는 자신감 때문.
내용만 놓고 봤을 때, 크리스토퍼 측에 문제 될 만한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클리앙이 예상했던 것 이상의 소득이라고 봐야 했다.
결과적으로 나와 케인의 대결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날 낚기 위한 미끼로 준비했던 추가 대결 방안은 고이 접어 다시 넣어 두었다.
더욱이 나든 사네든 둘 중 하나만 져도 승부는 끝나는 것으로 정리됐다.
비록 내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대가가 추가되기는 했지만, 이는 거래에 있어 당연한 반대급부.
여기에 크리스토퍼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인 수준의 일이어야 한다는 제한까지 걸어 두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패배할 가능성 자체가 거의 0에 수렴했다.
크게 염려할 만한 사안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크리스토퍼 측의 관점에서는 그러했다.
아카데미 내에 소문을 퍼뜨린 것도 아마 이런 관점에 기인한 것일 터.
나와 케인의 대결 소식이 아카데미 내에 쫙 퍼진 상태였다.
대결에서 패배 시 내가 크리스토퍼에게 무릎을 꿇기로 했다는 조건까지 말이다.
나를 빼도 박도 못하게 옭아매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물론 나로서는 상관없었다.
실제로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건 내가 아닐 테니까.
어쨌든 이로 인해 아카데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클리앙의 말마따나 나와 케인의 대결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생도 최강을 가리는 대결이었다.
그런 대결에 한창 호기심 많고 혈기 왕성한 나이 대의 생도들이 무관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렇듯 뜨겁게 달궈진 슈라우드 왕도 아카데미.
그런 아카데미 내에서 지금 생도들의 관심을 달구다 못해 아예 폭발시켜 버릴 만남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바로 이 대결의 당사자인 나와 케인의 첫 만남이었다.
꾸벅.
“오랜만이에요, 케인 경. 이번에 서부에서 카디즈 군도 해적들을 상대로 위명을 떨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왕녀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제대로 된 만남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만남이라기보다는 우연한 마주침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했다.
레나와 함께 식사하러 가던 중 우연히 마주하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막 복귀하셨다고 들었는데, 바로 어디 가시는 모양이네요.”
“짐을 풀기 전에 크리스토퍼 왕자님께 복귀 보고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셨군요.”
케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크리스토퍼의 사람.
그럼에도 케인을 대하는 레나의 태도에 부정적 기색 같은 건 서려 있지 않았다.
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나를 향하는 그의 눈빛에 거리감은 느껴질지언정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레나를 거쳐 나에게로 향하는 눈빛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레나를 바라보던 때와 달리 어떤 이채 같은 것이 추가돼 있을 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리우드 경.”
“라인하트 공자.”
케인은 나를 단번에 알아봤다.
이미 소식을 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터.
레나와 함께 있는 내 정체를 유추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쓸데없는 자기소개를 생략한 채, 그와 좀 더 시선을 교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 서로의 눈빛만으로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이만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나중에 또 봬요, 케인 경.”
꾸벅.
물론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시선을 돌린 케인은 레나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린 뒤 금세 멀어져 갔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사이였다.
주고받은 눈빛이 어떠하든 입장상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관계였으니까.
“타리우드 경과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친분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냥 오가다 가끔 대화 몇 마디 나눈 게 다니까. 단지 케인 경 처지가 좀 안타까운 면이 있어서 그런지 한 번씩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요.”
레나는 케인의 개인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기본적인 성향 등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몰락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모님은 어린 시절에 여의었고, 유일한 가족인 누나 손에 컸다고 하더군요. 한데, 도중에 누나가 나로움 후작가 방계의 며느리로 들어가게 됐고, 이때부터 케인 경도 후작가의 지원을 받게 됐다네요. 후작가에서야 옳다구나 했겠죠. 저런 복덩이가 절로 굴러들어 왔으니.”
“그런데도 처지가 안타깝다는 말씀은?”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개인적인 성향이 크리스토퍼 오빠나 클리앙과 잘 맞지 않는다고 해요. 실제로 대화를 해 보니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얕은수를 부리는 쪽과는 상극이에요. 하지만 처지가 처지이니만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레나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케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한 그녀.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은 여기까지였다.
“그건 그렇고 라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케인 경만큼은 정말로 조심해야 해요.”
그녀가 화제를 전환했다.
전환된 화제 또한 케인과 관련돼 있었다.
단, 이번에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케인이 지닌 객관적인 힘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지닌 실력만큼은 진짜예요. 제국에서도 주시한다고 하더군요, 왕국이 보유하게 될 차세대 소드마스터로.”
레나의 정보력과 판단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했다.
실제로 케인은 진정 무서운 상대였다.
나로서는 소드마스터에 오른 뒤에도 솔직히 그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재능 면에서 격차를 느꼈던 것이다.
분명 그랬다, 회귀 전에는.
“그러니 주의를 기울……, 라이?”
그렇기에 레나의 염려도 충분히 이해되는 바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그녀의 염려에 은은한 미소로 답을 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뒤집힌 지금, 회귀한 지금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