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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48화 (49/200)

25장: 사네의 변화

“으흠흠~ 흥흥~”

겔포이 드레이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카데미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기분이 아주 산뜻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끝난 로이 드로그난 교수의 검술 수업에서 깔끔하게 몸을 풀어 준 덕분이었다.

딱 적당한 수준으로 운동하고 땀을 흘리니 컨디션이 최상으로 치솟아 오른 것이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었다.

최근 로이 드로그난 교수의 수업이 있는 날이면 늘 이러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수업 시간마다 적절한 운동은 물론이거니와 쌓였던 스트레스까지 단번에 해소해 버리는데.

누군가를 샌드백 삼아 두들기는 것만큼 재미를 보장해 주는 놀이는 또 찾기 힘들었다.

특히 그 샌드백이 아주 미운 놈이거나, 미운 놈과 관계된 놈이라면 더더욱.

최근 수업 시간마다 겔포이의 샌드백이 되어 주는 상대가 여기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겔포이의 샌드백 사네 발터우스, 그 머저리 말이다.

일단 사네는 그 자체만으로도 꼴 보기 싫은 존재였다.

더러운 핏줄을 타고난 서자 출신인 것으로도 모자라 지닌 바 재능까지 극악한 수준.

그야말로 귀족의 수치라고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주 밉고 싫어 죽겠는 놈을 지인으로 두기까지 했다.

건방지고 재수 없으며 제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라이오넬 놈과 둘도 없이 절친한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샌드백의 조건에 있어 사네 이상 가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런 완벽한 샌드백을 흡족할 만큼 두들기고 나온 참이었다.

기분이 산뜻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산뜻한지 콧노래까지 절로 나올 지경.

“겔포이 드레이크.”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하이 텐션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방지고 재수 없으며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목소리, 그래서 밉고 싫어 죽겠는 어떤 목소리가 겔포이의 발걸음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라이오넬이었다.

온갖 부정적 수식어를 죄다 갖다 붙여도 모자란 거지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뭐지?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냐?”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너도 대충 짐작 갈 텐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난 네놈과 할 얘기 없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가라.”

없지 않았다.

분명 있었고, 원래는 겔포이도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었다.

사네 일로 라이오넬이 그를 찾아온다면 당당하게 마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크리스토퍼 왕자가 있으니만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놈을 열 받게 만들 생각으로 내심 언제쯤 찾아오려나 기다리기까지 하던 그였다.

그런데, 분명 그랬던 계획과 생각이 쏙 들어가 버렸다.

실제로 라이오넬을 마주하게 된 그 순간 말이다.

왜 그런지는 겔포이 본인도 몰랐다.

놈과는 아직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태.

한데, 그럼에도 웬 정체 모를 불안감이 그의 뇌리를 뒤덮어 가고 있었다.

어떤 경종 같은 것이었다.

절대 가까이 마주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종.

“쓸데없는지 아닌지는 얘기해 보면 알겠지.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저벅, 저벅.

하나, 겔포이의 본능적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이오넬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아주 천천히,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저벅, 저벅, 저벅.

그래서였을까?

놈의 걸음 소리가 지나치리만치 또렷하게 겔포이의 고막을 울려 왔다.

동시에 그 울림이 점점 커져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어질 때마다, 그리하여 놈과의 거리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그 소리 또한 한 단계씩 증폭되는 것이다.

“오지 마…….”

이상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불안, 공포, 떨림, 두려움 등등 살면서 겪어 온 모든 부정적 감정과 같은 듯하면서도 또 달랐다.

걸음 소리에 비례해 증폭되는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겔포이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확실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 정체 모를 감정과 쉬지 않고 울리는 본능의 경종은 모두 한 놈이 원인이라는 사실, 그놈이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오고 있는 라이오넬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놈에게 경고했다.

오지 말라고.

“더 다가오면 벤다. 오지 마!”

하나, 겔포이는 이 또한 알 길이 없었다.

지금 내뱉어지는 그의 경고가 라이오넬을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겔포이 본인을 향하는 것인지.

그저 발작적으로 외칠 뿐이었다.

오지 말라고, 오면 벨 거라고.

스르릉~

그 연장 선상에 있었다.

겔포이가 발작적인 외침에 이어 실제로 검을 뽑아 든 것은.

본능에 따른 행동이었다.

검이라도 빼 들어 겨누지 않으면 이 정체 모를 떨림과 감정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하지만 검을 빼 들었음에도 나아지는 바는 없었다.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이제는 도저히 주체가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걸음 소리도, 떨림도, 경종도, 감정도 모두.

라이오넬이 열 발자국 이내로 접어든 그 순간 말이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파앗!

스아악~

그래서 더는 참지 못했다.

참지 못하고 놈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그리고 젖먹던 힘까지 다해 검을 휘둘렀다.

이것이 정말 그의 의지인지 또한 불확실했다.

단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챙!

퍼억~!

물론 소용없었다.

혼신의 힘을 담은 겔포이의 검은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혔다.

그러고는 오히려 놈의 검면에 정통으로 몸을 내주었다.

“크흡!!”

절로 흘러나오는 고통의 신음.

그러나 뼈가 시릴 정도의 가격을 당했음에도 겔포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정체 모를 감정과 본능의 경종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음에도 되려 불어난 이것들로 인해 겔포이는 다시금 달려들었다.

고통을 수습할 여유 같은 건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꽉 문 채로 미친놈처럼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챙! 차앙! 차창!

퍽! 퍼억! 퍼걱!

똑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겔포이가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허무하게 막힌다.

그리고 라이오넬의 검에 얻어맞는다.

팔뚝, 어깨, 다리, 배, 허리 등등 전신을 골고루.

겔포이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의 신음을 뱉어 낸다.

하나, 이내 또다시 달려들어 미친놈처럼 검을 휘두른다.

이렇듯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장면이 쉼 없이 반복해서 펼쳐졌다.

겔포이의 전신이 시꺼먼 피멍으로 알록달록해질 때까지.

“크아아아~!”

비록 광전사처럼 달려드는 중이라지만 겔포이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끝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겔포이 본인의 육체적 한계를 뜻했고 말이다.

그래서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드레이크 가문 검술의 비기.

이것으로 끝장을 보고자 했다.

이 정체 모를 감정과 떨림을 어떻게든 털어 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비명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검을 뻗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챙강!

콰득!!

“……!!!”

결과는 확실했다.

겔포이는 그가 펼친 최후의 일격으로 결국 끝장을 봤다.

단, 겔포이 본인을 향하는 방향으로.

우선 그의 검은 이번에도 막혔다.

단순히 막히는 데에서 끝이 아니라 아예 두 동강 나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라이오넬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대신 그 타격을 고스란히 겔포이 본인이 감당해야만 했다.

극심함을 넘어선 극한의 고통은 비명조차 잠재울 지경이었다.

다만, 이렇듯 처참한 꼬락서니로 전락한 겔포이에게도 긍정적인 부분이 한 가지는 존재했다.

끝내 털어 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이성을 잠식했던 정체 모를 감정,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더 이상 그의 뇌리에서는 경종 역시 울리지 않았다.

어찌 된 노릇인지 모르겠지만 모조리 깔끔하게 사라졌다.

라이오넬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바로 그 직후부터.

“크으윽, 너…….”

이성의 회복과 함께 실종됐던 그의 사고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덕분에 이제야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라이오넬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점을.

여태껏 겔포이가 사네에게 해 왔던 유린을 가뿐히 뛰어넘는 수준으로 말이다.

“라이오넬, 네놈…….”

“착각하지 마, 겔포이.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난 그냥 너랑 대화를 좀 하자고 했을 뿐이고.”

그런데 이 철저한 유린에 대해 겔포이는 마땅한 문제 제기를 할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라이오넬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라이오넬이 먼저 한 행동이라고는 할 얘기가 있다며 천천히 다가온 게 전부였다.

그런 라이오넬에게 다짜고짜 달려든 것도, 미친놈처럼 검을 휘두른 것도 모두 겔포이가 한 짓이었다.

라이오넬은 이를 단순히 막아 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과한 손속으로 겔포이의 전신을 두들겨 대기는 했지만, 문제 될 만한 부분은 없었다.

겔포이는 대놓고 라이오넬을 죽이려 달려들었으니까.

“크으으…….”

겔포이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대체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였는지 본인조차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곳은 탁 트인 복도 한복판.

상황에 대한 목격자들도 수두룩했기에 발뺌조차 불가능했다.

따라서 지금 겔포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는 그저 침묵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럼 이제 얘기해도 되겠지? 내가 널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이렇듯 말문을 잃은 겔포이에게 라이오넬이 본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겔포이를 찾아온 진짜 목적, 전하고자 하는 어떤 제안에 관한 것이었다.

“가서 네 윗사람에게 전해. 치졸하고 품위 떨어지는 수작질 그만 부리고, 깔끔하게 단판 승부로 마무리 짓자고.”

겔포이의 윗사람, 크리스토퍼와 클리앙에게 전하는 제안이었다.

사실 그들을 직접 찾아갔다면 아주 간단했을 일.

그런 일을 굳이 빙빙 돌아 겔포이를 거친 라이오넬이었다.

굳이 말이다, 굳이.

* * *

크리스토퍼 측에 대결을 제안했다.

지저분하게 질질 끌지 말고 단판 승부를 통해 깔끔하게 마무리 짓자고.

제시한 승부의 대가 역시 명료했다.

크리스토퍼 측의 승리 시 내가 크리스토퍼에게 굴복한다.

반면 우리의 승리 시, 더는 내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한다.

1왕자 크리스토퍼의 이름을 걸고.

그리고 그들은 이 제안을 별다른 고민 없이 곧바로 수락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하기로 한 굴복의 수준.

나는 완벽하게 무릎을 꿇겠다고 약속했다.

패배 시 크리스토퍼의 둘도 없는 충견이 되기로 한 것이다.

나를 충견으로 만들 시, 에릭스 브란부르트까지 포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측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는 대결의 당사자.

현재 생도회 내에는 나에게 대적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가 부재했다.

따라서 나의 출전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터.

이에 나는 크리스토퍼 측이 수용할 만한 인물을 출전자로 내밀었다.

“드레이크 백작가의 검법은 환검 계열이야. 검식 자체가 상대를 현혹하는 쪽에 집중돼 있어.”

“어쩐지, 겔포이 녀석한테 당할 때마다 자꾸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검이 날아오더라니. 내 실력 때문에 확신은 못 했는데, 역시 환검이 맞았구나.”

바로 사네였다.

사네라면 크리스토퍼 측도 수용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오히려 내 제안을 전해 들었을 때 쌍수 들어 환영했을 터.

당연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사네를 잘 안다고 자부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네를 무려 18년이나 괴롭혀 온 르로이가 있었다.

여기에 최근 대련의 명목으로 구타를 자행해 온 겔포이까지.

이쯤 되면 사네를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사네의 검술 재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극악함이 저들에게 너무나도 훤히 공개돼 있었다.

이를 르로이가 18년이나 목격해 왔고, 최근 겔포이가 확인도 거쳤다는 점에서 센트럼 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이런 사네가 출전한다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내가 크리스토퍼 측 출전자로 겔포이를 지목하기까지 했다.

그 순간 이미 대결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넉 달의 준비 기간도 흔쾌히 수락한 것일 터였다.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철철 넘쳐흘렀을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라이, 훈련은 어떤 식으로 진행할 계획이야? 솔직히 그동안 내가 안 해 본 방식이 거의 없어. 물론 효과는 전부 미미했고. 그래서 정말 특별한 방법이 아니면 안 돼. 너만의 특별한 훈련법 같은 게 있는 거지?”

그들의 확신은 분명 잘못되지 않았다.

사네의 검술 재능은 그간 내가 봐온 이들 중에서도 바닥을 기는 수준.

일반적인 훈련 방식으로는 답이 없었다.

아니, 그 어떤 특별한 훈련법을 적용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극악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냥 원래 하던 방식으로 양만 좀 늘려서 하면 돼. 그게 다야.”

“……???”

하지만 지금 이 시간부로는 아니었다.

그들의 확신은 완전히 뒤집힐 예정이었다.

분명 잘못되지 않은 것에서 확실히 잘못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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