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47화 (48/200)

24장: 그녀들

“셀레스티나 왕녀님?”

“그쯤 해 두세요, 바이퍼 공자.”

카르사노와 베로카 사이에 일이 벌어지려 하는 광경을 레나가 목격했다.

하여 곧바로 개입했다.

베로카의 뺨으로 뻗어져 나가던 카르사노의 손을 막아 세운 것이다.

“연약한 아이에게 백작가 공자 정도 되는 분이 직접 손을 쓰는 건 보기가 영 좋지 않아요.”

“왕녀님, 이건 왕녀님같이 고귀한 분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음, 제 말을 미처 듣지 못한 모양이시군요, 아직도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걸 보면. 저는 분명히 그쯤 해 두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레나의 지적에 추켜세워졌던 카르사노의 손이 그제야 아래로 내려갔다.

동시에 카르사노가 그녀 쪽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얼굴.

한데, 그렇게 마주한 카르사노의 표정에는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왕녀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런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중인 것이다.

“왕녀님, 이건 크리스토퍼 왕자님과 연관된 일입니다.”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낮게 깔린 음역대가 그의 표정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런데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무래도 모르고 계신 듯하여.”

카르사노는 크리스토퍼의 측근이었다.

레나는 왕녀인 만큼 그가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벌벌거리며 무조건 따라야 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바이퍼 백작가의 입지도 있으니 더더욱.

“음, 정말 모르긴 모르겠네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라는 건지.”

“……?”

“정말로 모르겠으니 공자가 좀 알려 주세요. 오빠가 연관된 일이라는 걸 제가 알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그리고 안다면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도.”

단, 이 점은 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르사노가 크리스토퍼의 측근이라고 하여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주워 삼켜야 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가 바이퍼 백작가의 장남이라면, 레나는 슈라우드 왕가의 장녀였다.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만 아니라면 그녀가 거리낄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일, 왕자님께 있는 그대로 보고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한층 더 낮게 깔린, 그리고 굳어진 목소리로 되묻는 카르사노.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사실상 경고나 다름없었다.

지금 상황, 크리스토퍼에게 모조리 일러바치겠다는 경고.

“다 알 만한 분이 굳이 뭘 또 확인까지 거치시나요? 얼마든지요. 부풀리거나 과장하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레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원래 가던 길 가시는 게 어떨까요? 일개 하녀의 태도까지 꼼꼼히 신경 쓰고 다닐 만큼 공사가 다망한 분이신데, 이렇게 시간 낭비 하시면 안 되죠.”

카르사노가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을 하든 말든, 그리고 지금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속내를 드러내든 말든, 그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이 순간 그녀가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아니면, 제가 먼저 이 아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특별히 시킬 일이 좀 있어서요. 괜찮겠죠?”

베로카였다.

터진 입술과 뻘겋게 부어오른 뺨에도 불구하고 자세조차 풀지 못하고 있는 라이오넬의 전담 하녀.

오직 이 아이를 위기 상황에서 끄집어낸 뒤 라이오넬에게 데리고 갈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상대의 답변은 듣지도 않았다.

베로카를 추슬러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답변 따위가 나오기를 기다릴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저도 노파심에 한 말씀 드릴게요.”

다만 먼저 떠나기 직전,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카르사노를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일종의 경고이자 안전장치 같은 것이었다.

“이 아이에게 저를 시중드는 일도 겸임시킬 생각이에요. 그러니 앞으로 오늘 같은 일을 벌일 때는 제 얼굴도 한번 떠올려 주기를 바라요. 그러는 편이 피차 맘 상하는 일도 없고 좋을 테니까.”

* * *

“감사드립니다. 왕녀님 덕분에 베로카가 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군요.”

“감사 인사나 받자고 한 일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지. 그리고 감사 인사라면 오는 내내 베로카에게 넘치도록 받았어요. 더 받았다가는 저 체할지도 몰라요.”

“그러시다면 저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왕녀님.”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레나.

그런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베로카와 함께 입장한 이는 바로 레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베로카의 몰골이 엉망이 된 이유에 대해서.

그렇기에 감사 인사를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레나 역시 정 그러하다면 알겠다며 끝내 받아 주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이렇듯 일련의 상황이 대강 정리된 직후, 레나가 한 가지 질문을 던져 왔다.

사실상 이 상황 자체를 관통한다고 봐도 좋은 그런 질문이었다.

“왜 거절한 건가요? 공자와 라인하트 자작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을 텐데.”

작금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 원인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크리스토퍼가 내민 손을 내가 매몰차게 뿌리쳤기 때문이다.

이에 자존심 상한 크리스토퍼가 치졸한 수를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나를 무릎 꿇리고자 하는 것이다.

굳이 입 아프게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였다.

지금 레나가 직접 묻고 있는, 내가 크리스토퍼의 휘하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이유.

“사실 전부터 궁금했어요.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다음 대 국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을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오히려 어떻게든 잡지 못해 안달이라면 몰라도 말이죠.”

현실이 그랬다.

현재 크리스토퍼는 왕가 내에서 다음 대 국왕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

1왕자라는 사실로도 모자라 왕국 동부의 맹주인 나로움 후작가를 외가로 둔 그였다.

정통성과 힘, 어디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물론 아직 확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서부 그레이엄 후작가가 배경인 3왕자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장자라는 태생을 바탕으로 경쟁에서 최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

그렇기에 남들은 잡지 못해 안달인 크리스토퍼의 손이었다.

한데, 난 그 손을 쳐 낸 것이다.

매몰찰 정도로 단호하게.

레나 입장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글쎄요, 이걸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곤란한 부분인가요? 그럼 굳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왕녀님께서 납득하실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고 황당한 이유인지라…….”

문제는 내가 이 당연한 의문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는 점이었다.

크리스토퍼의 손을 거절한 이유?

그가 라인하트 자작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와 내 가족의 원수인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명료했다.

하지만 이를 명시적으로 밝히는 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진실을 밝혔을 때 정신병자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일 터.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유를 가져다 대야만 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 공주님께서도 그럴 때 있지 않으신가요? 그냥 이유 없이 사람이 싫고 꺼려지는 거. 불손한 언사이기는 하지만, 제게는 1왕자님과 그 측근들이 그랬습니다. 첫인상부터 하는 짓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물론 갖다 붙인 이유라고 해서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회귀 후, 그들과 대면한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그러했다.

싫었다.

구체적인 묘사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그냥 ‘싫다’는 단어 한 마디면 충분했으니까.

“…….”

다만 이것을 바람직한 이유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냥 싫어서 그랬다기에는 이 거절에 걸려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막대했다.

지금 벌어지는 괴롭힘 같은 건 애들 장난 수준에도 못 미쳤다.

나는 물론이고 라인하트 영지의 안위와 미래가 걸려 있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때는 바람직하지 못한 수준을 넘어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

“……이유가 걸작이네요.”

단, 누군가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 이유를 흡족하게 여길 누군가도 분명 존재했다.

나를 별종 보듯 신기하게 쳐다보는, 그러나 동시에 그 눈빛에 실린 호감도를 무한대로 상승시켜 가는 사람.

슈라우드 왕국의 1왕녀이자 크리스토퍼의 이복동생인 레나가 바로 그 누군가였다.

“공자 말대로 정말 어이없고 황당한 이유이기는 한데,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요.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납득도 더 잘 되고요. 다른 어떤 정치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보다도 훨씬 더. 속이 다 시원해질 지경이네요.”

레나와 크리스토퍼의 관계가 원인이었다.

연년생 남매인 두 사람의 관계는 원수에 가까웠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제국행을 통해 실제 원수지간이 될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크리스토퍼가 레나를 극도로 질투하고 시기했다.

어릴 때부터 레나와 적잖은 비교를 당해 왔고, 그 결과 증오에 버금가는 지독한 열등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본인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으나, 어쨌든 본질은 이것이었다.

결국 크리스토퍼의 열등감이 남매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따라서 내가 댄 ‘그냥 싫다’는 이유는 레나 입장에서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훌륭할 수밖에 없었다.

나 못지않게 크리스토퍼가 싫은 그녀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예, 왕녀님.”

“저도 마검학연에 가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죠?”

* * *

레나가 굳이 뭘 어떻게 할 건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내 구상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저 나와 함께하겠다는 의지뿐이었고, 방금 자발적으로 그 의지를 밝힌 참이었다.

레나 본인이 브로든 포섭을 가입 선물로 내걸기는 했으나, 성공 여부는 상관없었다.

의지를 밝힌 그 순간, 레나의 가입 절차는 저절로 완료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완벽하게 내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 레나.

그런 그녀가 개인 스케줄 때문에 동아리 방을 나선 뒤, 나는 레나 등장 전부터 하던 일을 계속 이어 나갔다.

“너도 봤다시피 여유 부릴 시간이 없어, 사네. 당장에 수를 내야 해.”

사네가 대응책을 수락하도록 설득하는 것.

그의 활약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바로 그 일 말이다.

“하아, 그래 보이네…….”

사네도 더 이상 거절만 하지는 못했다.

거절을 어렵게 만드는 단적인 예가 눈앞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베로카의 뺨과 입술이었다.

사네 혼자만 참고 버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네는 쉬운 편에 속했다.

무시는 당할지언정 귀족의 탈은 쓰고 있었으니까.

반면, 베로카와 센트럼은 그렇지 못했다.

레나가 베로카를 자기 사람으로 선언했어도 마찬가지.

결국 하녀는 하녀였다.

마음만 먹으면 괴롭힐 방법이야 무궁무진했다.

설령 레나 때문에 베로카를 건들지 않는다 해도 문제는 여전했다.

하면 모든 수작이 센트럼 일인에게 집중될 터.

어떤 식으로든 즉각적인 대응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를 알기에 사네도 깊은 고민이 서린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저, 공자님.”

그때, 베로카가 다시 한번 나와 사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저도 공자님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응? 베로카, 네가?”

나에게 직접 무언가를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철저하게 하녀의 자세를 고수하던 그 베로카가 말이다.

“얘기해 봐. 어떤 건데?”

물론 나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일.

오히려 적극 권장하는 태도 변화이기도 했다.

“주제넘는 건 알지만, 저에게도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기회?”

“제 손으로 직접 복수할 기회요. 센트럼 생도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제 손으로 해결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애매했다.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것은 좋은데, 그 부탁의 내용이 굉장히 난감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베로카, 그건 힘들어. 기회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설령 만든다 해도 네 안전을 장담하지 못해.”

베로카가 직접 복수하기를 원하는 상대가 문제였다.

그 상대가 무려 카르사노였으니까.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베로카의 잠재력이 대륙급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1서클에 불과했다.

3서클인 카르사노에게는 비벼 볼 수조차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분의 차이.

카르사노는 유력 가문인 바이퍼 백작가의 후계자였다.

실력의 격차는 어떻게든 메운다 해도 신분의 격차는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녀인 베로카가 정면으로 대적하려 들었다가는 무슨 해코지를 당한다 해도 항변조차 불가했다.

“저도 잘 압니다, 공자님. 당장은 죽었다 깨나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거.”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베로카는 그리 허무맹랑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래에도 불가능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나요? 10년이든 20년이든 상관없습니다. 얼마가 걸리든 오늘 일, 꼭 제 손으로 갚고 싶어요. 안 될까요, 공자님?”

이제야 깨달았다.

베로카에게 하녀로서의 태도를 버리느니 마느니 하는 조언 따위, 하등 쓸모없다는 것을.

베로카는 이미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중이었으니까.

활활 타오르는 녀석의 눈빛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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