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두 사람과의 첫 대면(2)
나의 회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레나.
그런 그녀와 회귀 후 처음으로 만남을 가지는 자리였다.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무수한 의미를 지닌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곧장 무언가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 내지는 못했다.
첫인사와 통성명, 그리고 담소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다.
나야 몰라도 레나는 나를 말 그대로 처음 보는 상태.
첫 만남부터 무슨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지나치게 억지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대화의 장이 펼쳐지려 할 무렵, 브로든의 연구실로 전령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1왕자의 전령이었다.
그가 당장 나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회귀 전에는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회귀 전의 나는 아카데미 내에서 이렇듯 크리스토퍼의 관심을 끌지 못했었다.
내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졸업 즈음이었고, 그때는 이미 크리스토퍼가 아카데미를 떠난 지 2년이나 흐른 뒤였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입학 전부터 유명세를 얻었고, 자연스레 관심을 끌었으며, 종국에는 그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이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
어차피 나 역시 그를 한번은 직접 눈에 담을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크리스토퍼를 이렇듯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중이었다.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을 이제야 보게 되는군, 라이오넬 라인하트. 아니, 트윈 슬레이어라고 불러 주는 걸 더 좋아하려나?”
“처음 뵙겠습니다, 왕자님. 그리고 이름으로 불러 주시는 편이 제겐 더 좋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왕자를 눈앞에 둔 내 심정은 유쾌하지 못했다.
내가 가학적인 변태도 아닐진대, 원수를 보고도 유쾌한 기분을 느낄 리 만무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의 증오와 복수심을 느낀다면 모를까.
물론 왕족답게 각종 아티팩트를 덕지덕지 처발랐다는 점, 호위 역시 상당하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감정을 다이렉트로 풀기는 어려웠다.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다만, 이 감정에 잡아먹힌다거나 어설프게 겉으로 드러내는 일 역시 없었다.
부정적 감정에 대한 컨트롤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흔들림 없는 단단한 눈빛으로 크리스토퍼를 응시하는 사이, 놈은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칭호보다 이름이 낫다라. 그럼 뭐 하나만 묻지. 대체 실력이 어느 정도인 거지? 내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들려와서 말이야.”
“그냥 어디 가서 욕은 들어먹지 않을 정도입니다.”
“기왕이면 정확한 경지를 밝혀 주는 게 어때? 괜히 헷갈리게 두리뭉실한 표현으로 넘기려 들지 말고.”
“왕자님께서 저에 대해 추론하고 계시는 수준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얼마만큼일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게 맞을 겁니다.”
내가 삐딱 선을 타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을 터.
추정하는 바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 나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설령 진실을 말해 준다 해도 믿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어느 수준으로 추정하든 내 진짜 실력과의 격차는 저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소드 익스퍼트와 마스터의 격차는 감히 저들의 어설픈 상상 따위로 메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밝히기 싫다 이거군, 감히 내가 물은 것인데도.”
크리스토퍼는 욕심이 많은 놈이었다.
왕국의 웬만한 것들은 죄다 그의 손아귀 아래 두고 싶어 했다.
물론 이런 욕심 자체를 허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왕자라면, 그것도 현 계승서열 1위의 1왕자라면 충분히 가질 법한 욕심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넘치는 욕심을 일신의 능력이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이 문제는 어릴 때부터 그의 한 살 아래 이복동생인 레나와 비교당하며 한층 더 부각되어 왔다.
레나가 사내로 태어나기만 했어도 계승 구도가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세간의 평가.
이런 굴욕적인 평가가 어릴 때부터 그의 귓가와 심기를 쉼 없이 어지럽혀 온 것이다.
그래서였다.
크리스토퍼의 속이 적잖이 뒤틀려있는 것은.
이 뒤틀림이 쉽사리 겉으로 표출되는 것 역시도.
특히 그 대상이 본인보다 아래라고 판단되는 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더더욱.
가벼운 미소로 대신하는 나의 화답에 크리스토퍼의 표정이 대놓고 굳어져 가는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역시 브로든과 가깝다더니, 그 인간 못지않게 시건방지네. 아니, 그 이상이야. 그 인간도 이렇게 대놓고 내 말을 거역하지는 못했거든.”
완전히 굳어진 안색, 냉랭함과 적의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입을 타고 나오는 표현 역시 직설적이었다.
나에 대한 그의 탐색 작업은 이로써 마무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더 끌어 봤자 남는 거라고는 더러운 기분밖에 없을 듯하니, 쓸데없는 것들은 생략하지. 이것저것 다 생략하고 딱 한마디만 하겠다.”
피차일반이었다.
나 또한 크리스토퍼에 대한 탐색을 끝냈다.
슈라우드 왕궁 내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혹시나 했다.
하지만 역시나 크리스토퍼는 크리스토퍼였다.
내가 알던 폭풍 이후의 그나 현재 눈앞에 있는 그나 본질은 다를 바가 없었다.
여러모로 덜된 인간이라는 점은 회귀 전과 똑같았다.
따라서 나에게 역시 방향 수정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이대로 뚝심 있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제안이다. 지금이라도 머리 숙이고 내 밑으로 들어오도록. 그럼 지금까지의 무례는 모두 눈 감고 없던 셈 쳐 줄 테니.”
그렇기에 크리스토퍼가 건네온 처음이자 마지막 제안에 대해서도 태도를 달리할 이유가 없었다.
미소면 충분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에게 가벼운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나에게는 한없이 가벼운, 그러나 크리스토퍼의 눈에는 극도로 건방져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런 미소로 말이다.
이렇듯 회귀 후 나와 크리스토퍼의 첫 대면은 짧지만 굵게, 동시에 선명한 방향성을 남긴 채로 마무리됐다.
* * *
“라이오넬 그놈, 무조건 내 앞에 무릎 꿇려야겠다.”
라이오넬이 물러간 직후, 크리스토퍼가 씹듯이 내뱉었다.
방금 나간 라이오넬을 떠올리는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도, 또 그럴 생각도 없는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말해 봐, 클리앙. 너라면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을 거 아니야?”
하여 클리앙에게 요구했다.
이 분노를 풀 방안, 라이오넬을 그의 앞에 무릎 꿇릴 계책을 얘기해 보라고.
그간 라이오넬을 유심히 지켜봐 온 클리앙이라면 분명 준비해 둔 바가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예, 있습니다.”
크리스토퍼의 믿음은 그르지 않았다.
나로움 후작가의 후계자로서 크리스토퍼의 정치적 동반자인 동시에 그의 참모 역할을 하는 클리앙이었다.
그에게는 당연히 생각해 둔 방안이 존재했다.
“다만, 시간이 다소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걸린다고? 어째서?”
“라이오넬을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가 없으니까요. 명분이야 어떻게든 만든다 쳐도, 케인이 자리를 비운 현재로서는 놈을 제압할 수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한 역시 함께 존재했다.
라이오넬의 실력이 문제였다.
공적과 실력이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소드 익스퍼트 중급.
현재 아카데미 내에는 라이오넬에게 대적 가능한 생도가 없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면 유력 기사단 내에서도 몇 손안에 꼽히는 실력자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케인 타리우드가 있기는 했다.
하나, 그는 당장 끌어다 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가 현재 아카데미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지 귀족을 제외한 일반 생도들, 그중에서도 기사 학부 생도들은 마지막 해에 전방으로 실습을 떠난다.
그리고 케인은 올해 20살로 아카데미 기사 학부의 졸업반.
영지 귀족이 아닌 그 또한 당연히 이 실습 참여를 위해 전방으로 향해 있었다.
따라서 연말까지는 케인의 활용이 불가능했다.
즉, 라이오넬을 직접적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방안이 당장은 따로 없는 것이다.
“해서 간접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는데, 이 경우 라이오넬의 굴복까지 걸리는 시간은 감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흐음…….”
“다만 그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라이오넬을 더 괴롭게 만들 가능성은 오히려 이쪽이 더 큽니다.”
라이오넬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간접적인 방식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클리앙은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방향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판단.
이 점이 크리스토퍼의 눈을 기대로 반짝이게 만들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라이오넬 그놈은 제 수하들을 끔찍이도 챙기더군요. 바르코스 요새에서도 그랬다 하고, 여기서 보인 행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저와 관련된 사람들이 당하는 꼴을 절대 그냥 두고만 보지 않았습니다.”
“놈의 주변이 놈에게는 아킬레스건이다?”
“그렇습니다. 주변을 슬슬 건드려 주다 보면 분명 참지 못하고 전면에 나서려 할 겁니다. 그때를 기회 삼아 놈을 왕자님 앞에 무릎 꿇리면 될 듯합니다.”
확실히 라이오넬의 행적은 자기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치우친 면이 강했다.
당장 그가 만든 동아리의 구성원들만 해도 그러했다.
객관적인 조건상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들뿐이었다.
그런 약자들을 라이오넬이 제 손으로 직접 일일이 케어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때마침 놈의 주변에는 우리가 건드리기 쉬운 것들뿐. 덕분에 놈을 끌어내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부터가 아주 간단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약자란 다른 말로 손쉬운 사냥감 혹은 먹잇감을 뜻했다.
강자, 특히 크리스토퍼와 생도회 같은 절대 강자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날름 집어삼킬 수 있는 손쉬운 먹잇감 그 자체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생도회의 힘으로 심심풀이처럼 툭툭 건드리는 것쯤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음, 방향 자체는 좋아. 그런 식으로 놈을 압박해서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만 이미 한번 실패했다는 점이 좀 걸리는데?”
한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례.
이 방식은 이미 실패를 경험했다.
그것도 불과 나흘 전에.
그냥 실패도 아니고 처참한 실패였다.
카드로 썼던 기드 패거리가 완전히 망가져 재활용조차 불가능해졌으니까.
따라서 방향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 구체적인 방식에 있어 보완책이 필수적이었다.
반복 실패를 경험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흘 전 일은 어디까지나 탐색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지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대결이니만큼, 주력을 투입하면 그만인 문제입니다.”
단, 결코 심각해질 만한 사안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클리앙은 이에 대한 보완책 역시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이 보완책이란 것은 굉장히 단순했다.
하나, 그렇기에 더 강력했다.
방식은 그대로 두되 패만 살짝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한번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패가 아니라 생도회가 주력으로 내세울 만한, 그래서 라이오넬의 사람들은 함부로 건드릴 수조차 없는 그런 패로.
그렇게 이어지는 클리앙의 꿍꿍이를 모두 들은 크리스토퍼.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계획의 시행을 지시했다.
“좋아, 진행해. 시간은 좀 걸려도 좋아. 대신 내년에 제국으로 가기 전까지만 확실히 내 앞에 무릎 꿇려 놓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