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청산(2)
“자신은?”
카르사노가 다짜고짜 물었다.
어쩌면 밑도 끝도 없어 보일 수 있는 질문.
그럼에도 기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카르사노의 의도, 그리고 이에 대해 기드 본인이 내놓아야 할 답을 모두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넘쳐흐릅니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저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잘 아시다시피 조나스가 당한 건 어디까지나 뜻밖의 상황 탓이었습니다. 센트럼 그 모자란 놈이 운 좋게 2서클에 올랐다는 사실, 그래서 메모라이즈 해 둔 마법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절대 당하는 일 없었을 겁니다.”
조나스 가격 당시 센트럼은 부지불식간에 스트렝스 마법을 썼다.
당사자인 조나스는 물론이고 함께 지켜보던 기드와 티안이 반응조차 못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이다.
이 과정을 통해 추론 한 가지가 확실한 사실로 드러났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머저리 센트럼이 결국 2서클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메모라이즈 마법이 아니고야 센트럼이 보인 캐스팅 속도는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모라이즈란 수식을 미리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하는 마법.
절체절명의 순간, 미리 저장해 둔 마법으로 위기 상황을 넘길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마법사들의 구명절초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 굉장한 효용을 자랑하는 최고의 마법이 고작 2서클에 불과했다.
혹자는 밸런스 붕괴라고 할지도 몰랐다.
하나, 실제로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서클에 따른 제한이 확실했으니 말이다.
메모라이즈 할 수 있는 마법의 수는 딱 본인이 지닌 서클 개수만큼이었다.
즉, 2서클이면 두 개밖에 못 하는 것이다.
또, 이마저 무조건 개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스터한 서클의 개수가 기준이었다.
따라서 2서클 초반부에 머물고 있는 기드 일행이 저장해 둘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한 개뿐.
여기에 한 가지 제한이 더 있었다.
바로 마법의 수준.
메모라이즈 해 둘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은 본인 경지의 한 단계 아래까지였다.
2서클이면 1서클 마법만 저장해 둘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 즉석에서 캐스팅 한 마법보다 위력이 떨어진다는 점 등도 제한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 모든 제한을 다 고려한다 해도 최고의 마법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냥 싸워도 무조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님께서 완벽한 판까지 짜 주신 덕분에 이제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게 됐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자님.”
“생도회의 위신이 걸린 일이다. 체면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반드시 승리하도록.”
“예, 공자님! 공자님께서 특별히 만들어 주신 자리인데, 이런 자리에 저희 체면 같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확실히, 철저하게 짓밟고 오겠습니다.”
저서클 마법사끼리의 대련은 실전성이 매우 낮았다.
기본 조건 자체가 그러했다.
일단 사용할 수 있는 마법부터가 몇 가지 없었다.
기껏해야 2서클 마법의 파이어볼이나 애로우 계열 정도.
1서클에는 이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마법들에 대한 캐스팅 속도까지 극악에 가까웠다.
고작 파이어볼 하나 캐스팅하면서 1분 가까운 시간이 소모되는데, 이런 조건에서 실전성이 어떻게 담보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저서클 마법사 간의 대련이라 하면 지루함은 감수하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차피 당사자끼리도 승패보다는 수련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라는 것이 존재했다.
저서클 마법사끼리도 진짜 싸워야만 하는 경우, 지금 센트럼과 기드 일행의 대결 같은 경우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캐스팅을 위해 수십 초씩 소모하는 것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차라리 캐스팅 중인 상대를 맨주먹으로 가격하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즉, 진정한 마법 결투는 저서클의 세계에서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단,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편법이 있었다.
메모라이즈를 이용한 편법이 바로 그것.
그래도 1서클에 스트렝스, 헤이스트 등 전투에 보조적으로 활용 가능한 마법 정도는 존재했다.
이런 마법들을 대결 전에 메모라이즈 해 두는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캐스팅 최소화 후 곧장 사용 가능하도록.
그러고는 직접 몸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가한다.
주먹과 발로 개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마법 대결이라는 타이틀이 심히 부끄러워지는 방식이었다.
실전성이야 일정 부분 확보한다지만, 있는 대로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정말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모두가 기피했다.
한데 카르사노는 지금 이것을 기드에게 지시한 참이었다.
또, 기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였고 말이다.
객관적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기드 본인이 판단하기에도 분명 그러했다.
대결 방식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이 저급해지는 만큼 센트럼도 똑같이 저급해질 테니까.
문제는 짜여진 판 자체에 있었다.
기드, 조나스, 티안과 센트럼의 3대1 대결.
이 판에서 센트럼은 1대1 대결을 세 차례 연달아 펼쳐야 했다.
당연히 중간에 제대로 된 휴식 시간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을 터.
이런 조건에서의 대결은 센트럼에게 극도로 불리했다.
오히려 한 번에 세 명을 전부 상대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저서클 간의 저급한 대결 방식을 떠올려 보면 간단했다.
저서클 간 실전에서 결국 핵심은 메모라이즈에 있었다.
대결 중 캐스팅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대결 전 메모라이즈 해둔 마법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그러나 2서클 비기너일 것이 분명한 센트럼이 저장해 둘 수 있는 마법은 고작 한 개.
따라서 연이어질 세 판의 대결에서는 당연히 그에게 가망 자체가 없었다.
즉, 승부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
솔직히 비열하고 치사하며 더없이 졸렬했다.
그러나 기드는 그런 것 따위 쥐똥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찌질한 센트럼을 짓밟는 일이었다.
정정당당해야 할 이유가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 기드의 출세가 걸린 문제였다.
이 일만 카르사노의 뜻대로 잘 처리하면 그의 심복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야비하고 비겁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기드가 내심 필승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 사이, 카르사노가 입을 열었다.
단, 그 방향이 기드를 향해 있지는 않았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이제 라이오넬이 우리와 대적하려 한다는 사실은 확실해졌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회장?”
함께 자리하고 있던 생도회의 부회장, 클리앙을 향해서였다.
이에 클리앙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센트럼이라는 생도가 그리 과격하게 나온 것도, 사건이 터지자마자 라이오넬이 곧바로 전면에 나선 것도 전부 의도했다고밖에 안 보이니까. 애초에 생도회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이고.”
라이오넬은 이제 생도회의 적으로 명확히 규정됐다.
물론 생도회장이 복귀해 놈과 직접 대면한 뒤에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러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로 변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생도가 현장에서 캐스팅으로 상황을 뒤집을 가능성은? 확실히 없는 건가?”
그 연장 선상에서 이어지는 클리앙의 마지막 확인 작업.
이에 대해서도 기드는 역시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었다.
확실했다.
그런 역전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다만, 기드가 나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카르사노가 알아서 정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편이 답변의 신뢰도도 훨씬 높았다.
카르사노는 바이퍼 가문의 후계자인 동시에 3서클 마법사이기도 했으니까.
“염려 접어 두셔도 됩니다, 부회장. 일대일 대결에서 써먹을 수 있을 만큼의 캐스팅 속도 확보는 자기 서클보다 두 단계 이상 낮은 마법에서나 가능하니까요.”
카르사노의 말이 백번 옳았다.
센트럼은 이제 갓 2서클에 들어섰다.
기드에게조차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주제에 현장 캐스팅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센트럼, 그 찌질한 놈이 단계를 건너뛰어 3서클에라도 오르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이런 확신 덕분이었다.
기드가 대결에서의 필승을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순간 눈에 들어왔던 센트럼의 기묘한 스파크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것 역시도.
* * *
“말도 안 돼…….”
그래서는 안 됐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결과가 지금 기드의 눈 앞에 펼쳐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으니까.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할 광경이기도 했다.
그러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조나스와 티안이 사이좋게 피떡이 되어 버릴 거라고는.
3대1의 마법 대결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한 달가량 흐른 시점인 오늘에서야 펼쳐졌다.
3대1에서 3중의 하나인 조나스에게 회복 시간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무엇보다 사건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조나스가 강력히 요구한 부분이었다.
조나스 본인의 손으로 직접 센트럼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것이다.
처절하고 끔찍한 피의 복수를.
하여 오늘 대결에서도 첫 번째 순서로 나간 조나스였다.
조나스는 깨어난 직후부터 대결 직전까지 호언장담해 왔다.
센트럼의 비열한 기습에 당한 것일 뿐이며, 이번 대결에서 놈을 피떡으로 만들어 보임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그러니 기드와 티안은 몸을 풀 필요조차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연무장으로 나섰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호언장담과는 정반대로, 조나스 본인이 피떡이 되어서.
대결 양상은 간단했다.
조나스는 대결 시작 후 센트럼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메모라이즈 해 둔 헤이스트 마법을 사용한 채로 달려들었다.
하나, 똑같이 헤이스트 마법으로 대응한 센트럼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 그대로 졸도했다.
호기롭게 나갔다가 꼴사납게 패배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눈살 찌푸려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정 범위 내였다.
센트럼에게도 당연히 메모라이즈 해 둔 마법이 있을 터.
첫 대결에서 이를 사용할 것이고, 따라서 조나스의 패배도 계산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계산이 결과로 도출된 것이다.
낮은 확률의 결과이기는 하나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계산대로 다음 수를 내면 될 뿐이었다.
더불어 장담할 수 있었다.
다음 수는 절대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무조건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계산의 다음 수이자 대결의 두 번째 순서인 티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필승을 장담하며 부담이라고는 전혀 느껴 볼 수 없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연무장에 올랐다.
이번만큼은 지려야 질 수가 없었다.
무대 위의 티안도, 지켜보는 기드도, 이 판을 짠 카르사노도 그리 여겼다.
하지만 이 장담과 여유는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처참하게 무너졌다.
끔찍하게 뭉개진 티안의 코뼈와 함께.
양상 자체는 이번에도 간단했다.
대결 시작 후 조나스의 복수를 대신 해 주겠다며 몇 마디 늘어놓은 티안은 스트렝스 마법을 사용했다.
어차피 센트럼은 피할 수 없으니 확실한 힘으로 그를 짓뭉개 버리겠다는 의도.
그러고는 역으로 끔찍하게 짓뭉개졌다.
역시나 스트렝스 마법으로 맞대응한 센트럼에게.
이 지점이었다.
두 번째 대결임에도 센트럼이 스트렝스 마법 캐스팅을 빠른 속도로 끝마친 그 순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계산이 완벽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계산대로라면 이런 흐름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절대로 티안이 패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센트럼은 이런 빠른 캐스팅을 할 수 없어야 했다.
메모라이즈 해 둔 마법은 첫 대결에서 사용했을 터.
하면 두 번째 대결에서는 마법 캐스팅 도중 티안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것이 맞았다.
계산대로라면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계산은 보기 좋게 어긋났고, 따라서 기드는 고민하고 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계산이 잘못된 것인지.
‘뭔가 수작을 부렸나? 아니야, 그건 불가능해. 카르사노 공자님 입회하에 몸수색도 거쳤어. 그럼 뭔데? 대체 어떻게……?’
다만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카르사노가 짜 둔 판에 따라 기드는 곧바로 대결에 나서야만 했다.
하여 연무장에 올라 센트럼 앞에 마주 서 대결을 준비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기드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과장 좀 보태면 기드 본인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아!!”
그래서였을까?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엄청난 속도의 두뇌 회전 덕분인지 그럴듯한 추론이 기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매우 그럴듯해서 확신을 품을 수밖에 없는 추론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현시점에서는 더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런 추론.
“센트럼, 너 이 비열한 새끼. 2서클 마스터에 올라 놓고 일부러 숨겼구나. 우리를 엿 먹이려고.”
센트럼이 2서클 마스터에 오른 것이다.
이러면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2서클을 마스터했으니 두 개의 마법을 메모라이즈 해 둘 수 있던 것일 터.
조나스에 이어 티안에게까지 맞대응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동시에 이 추론대로라면 주도권은 아직 기드에게 있었다.
“그래도 더는 어쩔 수 없을 거다. 이번에야말로 메모라이즈 해 둔 게 다 떨어졌을 테니까. 내 말이 맞지?”
설령 센트럼의 경지가 기드보다 높다 한들 여기까지였다.
2서클 마스터라 해도 메모라이즈는 두 개가 한계.
그렇다고 1서클 마법을 빠른 속도로 캐스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고 말이다.
따라서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승기는 여전히 기드에게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기드는 눈곱만큼도 방심할 생각이 없었다.
저장해 둔 헤이스트 마법으로 지체 없이 대결을 끝낼 작정이었다.
이것이 짧은 시간 동안 기드가 내린 결론이자 새로운 계산이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반병신을 만들어 버릴 거니까. 헤이스…….”
“라이트닝.”
“……트?”
하지만 착각이었다.
행복 회로를 극한으로 돌려 만들어 낸 그만의 커다란 착각.
그리고 그 착각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2서클 마법 라이트닝의 등장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