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발전(2)
라이오넬의 등장에 기드 패거리는 기겁했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본 채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구석진 장소에 홀로 남겨진 센트럼.
그는 끝내 아무것도 못 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과 함께 라이오넬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라이오넬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인물이 센트럼의 앞에 와 마주 섰다.
“베로카 양?”
베로카였다.
아카데미에서 라이오넬에게 배정해 준 하녀.
라이오넬의 등장을 알리던 가녀린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베로카였던 것이다.
“여긴 어떻게?”
“동아리 방으로 가던 길이였습니다. 우연히 보게 됐어요.”
라이오넬이 말했던 한 명의 추가 인원은 베로카였다.
라이오넬은 그녀를 동아리 방으로 불러들였고, 모두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당연히 센트럼과도 서로 아는 사이였다.
비단 그냥 아는 사이 정도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그 이상이었다.
동아리 방에 있는 동안은 센트럼이 베로카에게 사실상 선생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베로카는 라이오넬의 인도에 따라 이제 막 마법의 길에 들어선 참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론만큼은 누구보다 빠삭하게 꿰고 있는 센트럼이었다.
이보다 시너지가 좋은 조합은 부러 찾으려 해도 찾기 힘들 정도.
센트럼과 베로카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현재도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제 모습도…… 보셨겠군요.”
“네, 봤습니다. 그래서 공자님 성함을 부른 것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았으니까.”
라이오넬의 이름을 부른 것은 베로카의 기지였다.
기드 패거리는 그런 베로카의 기지에 완벽하게 낚인 것이고 말이다.
“그간 고생 많이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센트럼 생도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녀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생도님을 내심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포기하지 않고 버텨 내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센트럼은 베로카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었고, 베로카는 그런 센트럼이 위기에 처하자 기지를 발휘해 구해 주었다.
이렇듯 두 사람의 관계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제 평가가 잘못됐던 모양이군요. 다른 것들은 생도님의 상황을 고려해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에 관한 것만큼은 그럴 수가 없네요.”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상황에서 센트럼이 보인 행태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공자님이 모욕당하셨을 때만큼은 나섰어야 합니다. 그게 커다란 은혜를 베푸신 공자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요. 그런데 생도님은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더군요.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센트럼은 차마 고개조차 들 수가 없었다.
베로카의 지적에는 틀린 구석이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맞는 말뿐이었다.
아예 반박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떠나는 베로카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붙잡아 봤자 센트럼이 할 수 있는 변명 따위 단 한마디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괴감만 키워 갈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 했던 자신에 대한 미움, 분노, 한심함, 그리고 비참함 따위의 감정들로, 아주 가득하게.
* * *
부정적 감정들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교정 잔디밭에 처량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센트럼의 뒷모습에서 말이다.
동아리 방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센트럼과 베로카 사이에 평소와 사뭇 다른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원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센트럼에게 있었다.
부정적 기운을 저리도 팍팍 풍겨대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해서 곧장 센트럼의 뒤를 따라왔다.
“센트럼.”
“아, 공자님.”
“말해 봐, 무슨 일인지.”
그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건 뭐 기다려 주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 센트럼이 뿜어내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당장의 해결이 필요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저 같은 것 때문에 괜히 공자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같은 거 없으니까, 얼른 털어놓기나 해. 나한테는 네가 이러고 있는 게 더 신경 쓰여.”
“정말 아무 일도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안 되겠다. 이거 명령이야, 센트럼. 무슨 일 있었는지 빨리 이실직고해.”
센트럼은 숨기려 했다.
하지만 그런 게 될 리 없었다.
내가 눈 감고 기다려 주기로 했으면 모르되, 알아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말했지, 명령이라고. 자, 얘기해.”
“그게…… 하아, 그게 동아리 방으로 오는 길에…….”
그리하여 시작된 센트럼의 이야기.
중간중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고, 특히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지라 진행이 상당히 더뎠지만,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았다.
센트럼이 털어놓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줄 뿐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었는지 센트럼은 천천히, 그러나 숨김없이 그의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다.
덕분에 대충 짐작은 했으나 자세히는 알지 못했던 그의 과거까지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동시에 부가적인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카르사노 바이퍼, 그리고 나아가 생도회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로서 또렷한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생도회에 가입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독자적인 동아리까지 만들었다.
아직 확신은 이르지만 적어도 내가 삐딱 선을 타고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한 상황.
그들로서는 생도회장 복귀 전까지는 내 의도를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고, 하여 카르사노가 투입된 것이다.
오늘 기드 패거리가 보인 행동이 그 증거였다.
센트럼이 나와 연결되자마자 그들은 1년 넘게 이어 오던 괴롭힘을 뚝 끊었다.
내가 무서웠던 것일 터.
그런데 오늘 갑자기 놈들이 행동을 재개했다.
딱히 달라진 것도 없는데 말이다.
심지어 나와 내 가문을 직접 모욕하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채야 했다.
카르사노가 이들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것이 생도회의 간 보기라는 사실까지도.
여기서 내가 하는 선택에 따라 그들은 나에 대한 입장을 어느 정도 정리할 것이다.
기드 패거리에게 다이렉트로 나에 대한 모욕죄를 묻는다면 반목으로.
그게 아니고 일단 그들과 대화를 시도한다면 좀 더 지켜보는 쪽으로.
그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진 것이고, 그렇다면 이제 내가 답을 줄 차례였다.
그리고 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방향 자체는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단, 그 방식에 있어 약간의 변주를 가미할 생각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마친 센트럼에게 물었다.
“당장 가서 모욕죄를 물어 줄까?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수 있어.”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단, 생도회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센트럼에게 대신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센트럼은 이 판에 깔린 복잡한 생리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그, 그건…….”
“왜, 마음에 걸려? 그럴 것 없어. 놈들은 나에게 명백히 잘못을 저질렀고, 난 그 죄를 물을 권한이 있어. 당연히 힘도 있고. 나한테는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이야.”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물론 그놈들에게 모든 죄를 다 묻고 싶습니다. 제가 고통받았던 시간까지 전부 얹어서요. 다만…….”
“다만?”
“다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명확히 말씀은 못 드리겠는데, 왠지 그러면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게 될 것 같아요. 그놈들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내가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센트럼의 의지.
그리고 센트럼은 올바른 답을 내놓았다.
물론 내 힘을 빌려 기드 패거리를 징치하는 게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괴롭힘과 따돌림을 일삼는 놈들에게는 할 수만 있다면 내 힘이 아니라 국왕, 더 나아가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일벌백계하는 것이 맞았다.
스스로 하지 못했다 하여 창피함이나 부끄러움 따위의 감정을 품을 일이 결코 아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센트럼에게는 이것이 올바른 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가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은 지고한 깨달음의 학문.
경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깨달음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사인 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방향은 정반대나 깨달음이라는 한 길을 공유한 것이 마법과 검술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깨달음의 길에서 트라우마는 치명적이었다.
트라우마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위 경지로의 길은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
따라서 검사와 마법사라면 절대적으로 기피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트라우마였다.
생긴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말이다.
기드 패거리는 현재 센트럼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내가 여기서 이들을 대신 처리해 준다면, 센트럼은 트라우마 극복의 기회 자체를 날려 버리는 것이다.
마법사로서의 대성을 바란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었다.
다행히 이 점을 센트럼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나아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좋아, 네 뜻은 잘 알겠어.”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 그 말 이제 사절이야.”
“예? 아, 예…….”
“그럼 죽을상 그만하고 따라와. 아예 죄송할 일 자체를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
의지에 부합하는 힘을 키워 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 * *
“괜찮을까요, 공자님?”
“센트럼, 나 못 믿어?”
“아닙니다. 전적으로 믿습니다. 저 자신보다도 더.”
“그럼 나 믿고 라이트닝 한번 써 봐. 얘기했다시피, 센트럼 네 경지에서는 잘못되는 게 더 힘들어. 더구나 나한테는 이미 경험도 있고.”
의지에 부합하는 힘을 키워 주는 데에는 안전하고 밀폐된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센트럼을 데리고 곧장 내 방으로 왔다.
그리고 센트럼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라이트닝 마법을 시전해 보라고.
맨 처음 이 지시를 접했을 때 센트럼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라이트닝은 2서클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1서클에서 답을 찾지 못한 센트럼은 상위 서클 마법까지 이론적으로 파고들었으니까.
그러나 서클 구분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리하게 상위 서클 마법을 시전 시 마나가 폭주한다는 건 기본상식.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센트럼은 1서클 비기너였고 말이다.
“예, 공자님. 하겠습니다.”
하지만 설득했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센트럼의 경지가 극도로 낮았다.
이 경지에서는 마나가 폭주한다 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물론 폭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전자를 폐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옆에 내가 있었다.
1서클 비기너의 폭주하는 마나쯤이야 얼마든지 컨트롤 가능했다.
여기에 나의 실전 경험까지 더해졌다.
나는 이미 마나 폭주를 내 몸으로 경험한 바 있었다.
누구보다도 이 분야에 정통한 셈.
무엇보다 센트럼은 더없이 절박했다.
정체와 좌절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오늘은 심각한 수준의 자괴감까지 더해진 상황.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지푸라기를 제공한 참이었고 말이다.
“그럼 시작합니다.”
우우우웅~
이윽고 센트럼이 라이트닝 마법 캐스팅에 들어갔다.
부족한 서클의 개수는 기존 서클에 과부하를 거는 방식으로 대신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도.
꿈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센트럼에게는 이게 정답이었다.
꿈틀거리는 센트럼의 내부가 그 증거였다.
지직.
폭주의 전조 같은 게 아니었다.
깨어남, 그리고 약동의 전조였다.
잠들어 있던 센트럼의 잠재력이 깨어났다.
그리고 약동하기 시작했다.
껍질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파직, 파지직.
그 움직임이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러고는 조금씩 제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뇌전.
모든 원소를 통틀어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이것이 잠재력의 본질이었다.
센트럼의 잠재력은 오로지 뇌전을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전생의 센트럼이 어떤 방식으로 한계를 뛰어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했다.
센트럼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정령력으로 관조하고 또 관조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센트럼에게 부족한 것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나 깨달음이 아니었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미 그보다 상위 서클 보유자들 못지않았다.
모자란 것은 스스로에 대한 이해였다.
센트럼의 잠재력은 오직 뇌전을 향해 일편단심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직.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딱히 뭘 해 준 건 없었다.
그저 라이트닝 한번 써 보라고 조언 한마디 해 준 게 다였다.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스파크와 내부를 휩쓰는 강력한 뇌전의 폭풍은 전부 센트럼 홀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심장으로 몰려들어 두 번째 원을 그려나가는 파괴적인 마나 흐름 역시도.
파지지직.
물론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작정은 아니었다.
센트럼을 날름 집어먹으며 결심한 바 있었다.
집어먹되 더 크게 키워 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