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39화 (40/200)

20장: 발전

아카데미 사람들이 모두 숙면에 빠져들어 가고 있을 야심한 시각.

베로카는 라이오넬의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유야 당연히 라이오넬의 부름 때문.

그렇지 않고야 꼬실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는 베로카가 이 시간에 라이오넬의 침실로 향할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라이오넬은 대체 왜 이 시간에 침실로 그녀를 부른 것일까?

현재 베로카의 머릿속은 이 부분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사실 그간 라이오넬을 직접 모셔 온 경험만 놓고 봤을 때는 괜한 기우일 수도 있었다.

라이오넬이 하녀의 몸이나 탐하는 그런 음흉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름 신경을 곤두세우고 유심히 지켜본 뒤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사람 속은 모르는 법.

베로카가 본 라이오넬의 모습은 진짜 발톱을 드러내기 전의 그것일지도 몰랐다.

시중든 기간이 길지 않기에 어떤 쪽으로든 확신이 어려웠다.

더구나 라이오넬은 어린 나이에 트윈 슬레이어라는 칭호까지 얻은 굉장한 인재.

그런 능력자라면 고작 하녀 따위에게 제 음흉한 속내를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닐 수 있었다.

물론 베로카도 알고 있었다.

라이오넬이 정말 베로카의 몸을 탐냈다면 굳이 이렇게 질질 끌 필요 없었다는 것을.

라이오넬의 신분과 지위라면 손가락질 한 번이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로카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베로카를 이 시간에 불러들이며 라이오넬이 달았던 단서들 때문이었다.

라이오넬은 말했다.

아카데미 전체 소등 후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단,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해야 하는 일거리가 있거든 모두 미리 마쳐 두라고.

또, 앞으로 매일 반복될 테니 아예 처음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라고 말이다.

하녀 입장에서 이 말을 도대체 어떤 의도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열에 아홉은 현재 베로카의 염려와 마찬가지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아니, 솔직히 열에 열 모두라도 해도 무리 없을 터였다.

아마 이 상황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하녀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베로카의 동료 중에는 부럽다 못해 대놓고 시기하는 이들까지 나올 것이 분명했다.

남자 하나 잘 물어서 팔자 고치게 생겼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베로카는 추호도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베로카가 원하는 건 비서 같은 하녀이지, 연약한 첩실 따위가 결단코 아니었다.

그래서 라이오넬의 침실로 향하는 이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 없다는 것쯤은 베로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녀의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이런 베로카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의 흐름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약속한 시간이 다 됐으며, 이에 따라 베로카도 라이오넬의 방문 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더 이상 망설이고 고민할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공자님, 베로카입니다.”

“들어와.”

그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 안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매일 그녀가 쓸고 닦고 정리하는 방이었으니까.

굳이 꼽자면 차를 홀짝이며 그녀를 맞이하는 라이오넬과 그런 그의 옆에 쌓여 있는 책들 정도?

“이리 와 앉아, 베로카.”

자신의 옆에 와 앉으라고 그녀를 부르는 라이오넬.

이에 베로카는 일단 시키는 대로 그의 옆에 가 앉았다.

대신 긴장감만큼은 최대치로 끌어 올린 상태였다.

“자, 그럼 이제부터…….”

“고, 공자님!!”

이쯤 되면 사실상 결론은 모두 도출됐다고 봐야 했다.

베로카는 하녀였다.

이 방을 청소하고 관리하며 라이오넬이 시키는 허드렛일이나 하는 평범한 하녀.

그런 하녀를 야밤에 은밀히 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로 옆에 앉히기까지 했다.

베로카의 상식선에서 이 흐름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었다.

라이오넬이 음흉한 목적으로 그녀를 불러들였다는 것.

물론 그렇다 해도 베로카가 할 수 있는 바는 없었다.

그냥 얌전히 당해 주는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마지막 용기를 내보았다.

“꼬, 꼭 이러셔야 하나요? 도대체 저 같은 게 어디가 맘에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왜 굳이 저같이 예쁘지도 않은 것을 공자님같이 훌륭하신 분이 탐내시는 건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당할 때 당하더라도 최후의 시도는 해 보자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덜 억울하기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하여 일단 떠오르는 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필터링 없이 내뱉는 것이다 보니 횡설수설하는 느낌이 강했지만, 지금 베로카에게는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선 내뱉고 볼 뿐이었다.

“물론 저도 공자님을 굉장히 존경하고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하녀로서…….”

그래서였다.

눈을 질끈 감고 속사포처럼 뱉어 내는 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베로카가 라이오넬의 표정과 반응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은.

“저는 공자님의 첩실이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딱콩!

“아얏!”

그리고 이내 그 대가를 받게 됐다.

그녀의 머리로.

라이오넬이 베로카에게 꿀밤을 먹인 것이다.

뼈까지 시리게 만드는 고통이 머리를 파고들었고, 베로카의 횡설수설은 자연스레 중단됐다.

덕분에 베로카는 그제야 볼 수 있었다.

황당하고 어이없어하는 라이오넬의 표정을.

“어쩐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불안해하더라니, 이래서였던 거구만. 이거 참, 이런 상황은 또 신선하네.”

“그, 그럼……?”

딱콩!!

“아야!!”

“그럼은 무슨 그럼이야? 당연히 네 착각이지. 베로카 너는 대체 나를 뭘로 보고. 하아, 이거야 원.”

아니었다.

전부 베로카의 착각이었다.

실제로 라이오넬의 눈빛에서 음욕 같은 것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베로카가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미처 확인 못 했던 것일 뿐.

“으이그, 나이도 어린 녀석이 머릿속에 음란마귀만 가득 차서는. 이리 와, 한 대 더 맞아.”

“죄송합니다, 공자님. 너무 아파요. 용서해 주세요…….”

황당함이 아직 덜 풀렸는지 세 번째 꿀밤을 위해 올라가던 라이오넬의 손.

그것이 베로카의 빠른 사죄로 다시 내려갔다.

어이없다는 기색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쯤에서 봐줄 모양이었다.

“뭐, 네 오해에는 내 탓도 일정 부분 있는 것 같으니까 봐준다. 대신 앞으로는 그런 어이없는 착각 하면 안 돼. 알겠지?”

“네, 공자님…….”

그러고는 본론으로 넘어가는 라이오넬이었다.

오늘 그가 이 야심한 시각에 베로카를 부른 진짜 목적 말이다.

“베로카, 너 오늘부터 이 시간마다 나랑 공부하게 될 거야.”

“공부 말씀이십니까?”

“그래, 공부. 내가 수업 듣고 와서 정리한 내용을 네게 가르쳐 줄 테니까, 넌 밤마다 그걸 익히면 돼.”

라이오넬이 탁자 위의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를 공부시킬 것이라고.

이에 자연스레 베로카의 시선 또한 탁자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법 입문’이라고 쓰인 웬 두꺼운 교재와 기타 마법 관련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낮에도 동아리 방으로 와. 마법과 검술과 학문 연구회. 동아리 이름이 특이하니까 찾기 어렵지 않을 거야.”

오해는 풀렸다.

라이오넬이 베로카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품었던 오해와 완전히 상반된 것.

그럼에도 베로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진짜 이유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현실성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또, 이로 인해 베로카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삶과 미래가 완전히 뒤집히고 있다는 사실을.

* * *

최근 센트럼은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높아진 삶의 만족도 덕분이었다.

이 좋은 컨디션이 동아리 방으로 향하는 그의 가벼운 발걸음에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이, 센트럼.”

한창 좋은 센트럼의 기분을 단번에 잡치는 역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단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센트럼 앞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하필이면 생도의 통행이 적은 이 구석진 곳에서 뜬금없이.

아무래도 센트럼을 노리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기드…….”

센트럼을 불러세운 목소리의 주인은 기드.

마법 학부 2학년 일반 생도 중 가장 잘 나간다고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동기 중 가장 먼저 2서클에 오른 녀석이니 말이다.

동시에 센트럼과도 연이 굉장히 깊었다.

지금 센트럼의 등 뒤에서 퇴로를 막음과 동시에 망을 보는 두 놈, 조나스, 티안과 함께.

“요즘 얼굴 좋아 보인다? 걱정거리가 없는 모양이야. 아직 1서클 비기너도 못 벗어난 낙오자 주제에.”

악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센트럼의 아카데미 생활을 아예 나락까지 떨어뜨린 끔찍한 악연.

센트럼을 죽어라 괴롭히는 것이 이놈들의 낙이었다.

폭언과 폭력은 기본이고 아카데미 내 따돌림까지.

이제 갓 입학한 신입 생도들이 센트럼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던 것도 이들의 소행이었다.

특히 이 기드라는 놈이 주범이었다.

“마법 입문 수업까지 수강 중이라며? 너 같은 쓰레기는 어차피 해도 안 돼. 쓸데없이 우리 체면이나 깎아 먹지 말고 그냥 포기해. 그게 더 나아.”

“…….”

“하긴, 네가 그런 사리 분별이 되는 놈이었으면 아직도 그 꼬락서니일 리가 없겠지. 우리 동아리에서 나가는 머저리 같은 선택도 하지 않았을 테고.”

불과 얼마 전까지 같은 동아리 소속이기도 했다.

‘마학의 추종자’라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마법 동아리였다.

“남아서 쭉 내 수발이나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너희 그 공자님보다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 줬을까, 안 그래?”

하나, 이 과거는 센트럼의 자의가 아니었다.

마학의 추종자 가입은 명백한 타의였다.

기드와 그 떨거지들이 수업 종료 뒤에도 센트럼을 괴롭히고 부려먹기 위해 억지로 가입시킨 것이다.

그 결과 지난 1년간 센트럼은 일과 후에조차 기드 일행에게 극심하게 시달려왔고 말이다.

따라서 센트럼에게 이전 동아리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잊고 싶은 끔찍한 기억뿐이었다.

“……라이오넬 공자님께서 정말 잘 해 주셔.”

“쯧, 이래서 멍청한 놈은 안 되는 거라니까.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이 머저리야. 마학의 추종자가 어디 그냥 동아리냐? 무려 카르사노 공자님과 바이퍼 가문이 후원하는 곳이야. 마법사에게는 어떤 곳이 유리할지, 그 쉬운 것조차 판단이 안 돼?”

물론 기드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다.

마탑의 아티팩트 판매를 대행하는 바이퍼 백작가.

백작가는 이를 기반으로 왕국 마법계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문 자체적으로 상당한 숫자의 마법사를 배출해 내기도 했고 말이다.

당장 후계자인 카르사노 역시 3서클의 마법사였다.

그러므로 마법사로서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기사 가문 출신인 라이오넬보다 카르사노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했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마법 생도의 입장.

센트럼에게는 해당 안 되는 이야기였다.

센트럼 같이 뒤처진 생도를 바이퍼 가문이 후원해 줄 리 만무했다.

또, 그 안에서 센트럼이 빛날 기회 자체가 주어질 리도 없었다.

사전에 기드가 죄다 차단해 버릴 테니까.

인간적인 면도 그렇지만, 객관적으로도 센트럼에게는 라이오넬이 백 배, 천 배 옳은 선택이었다.

“…….”

문제는 센트럼이 이 사실을 조리 있게 따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기드와 그 떨거지들 앞에만 서면 저도 모르게 자꾸 위축됐다.

잘못됐다는 걸 알아도 반박하거나 시정을 요구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처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끔찍했던 지난 1년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라인하트 자작가가 바이퍼 백작가에 비벼 볼 깜냥이나 돼? 어디 시골 촌뜨기 영지 주제에 가당키가 하겠느냐고. 그 너희 공자님인지도 마찬가지야. 촌뜨기 출신 주제에 트윈 슬레이어니 뭐니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서는, 쯧쯧. 꼴불견이 따로 없잖아?”

“뭐?”

“못 들은 모양이네. 발터우스 자작가의 르로이 공자님께서 이미 다 까발리셨어. 트윈 슬레이어라는 그 칭호, 완전히 부풀려진 거라고. 숟가락만 얹은 주제에 자기 공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거라더라. 역시 촌뜨기 출신이란.”

한데 이건 이상했다.

가도 너무 갔다.

아무리 듣는 귀가 없다지만 귀족과 귀족 가문에 대한 이런 직설적인 모욕은 위험했다.

당장에 참수될지도 모르는 중범죄에 해당했으니까.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기드였다.

그런데도 거침없이 라이오넬과 라인하트 자작가에 대한 모욕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 그 말 당장…….”

동시에 센트럼을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센트럼은 라이오넬이 진심으로 좋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또 한없이 존경했다.

센트럼에게 라이오넬은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지옥 같은 아카데미 생활의 한 줄기 빛이었으니까.

기드는 지금 그런 분과 그분의 가문을 모욕한 것이다.

분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장? 당장 뭐? 아, 당장 취소하라고? 못 하겠다면? 내가 못 하겠다면 네가 어쩔 건데?”

“너…….”

“한 대 치기라고 할 기세다? 그래, 어디 한번 쳐 봐. 한번 보자, 머저리 낙오자 센트럼이 감히 나를 칠 수 있는지. 한번 해 보라니까?”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센트럼은 주먹을 뻗을 수가 없었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고양이 앞의 쥐가 이러할까?

센트럼은 기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밉고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안 됐다.

“역시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야. 기회를 줘도 못 먹잖아? 안 되겠다. 오늘 너 제대로 교육 좀 받자. 요 근래 잊고 다니던 네 본분이 뭔지 내가 확실히 일깨워 줘야겠다.”

그러자 역으로 기드가 주먹을 쳐들었다.

센트럼의 안면을 정면으로 가격하려는 모양새.

센트럼이 마검학연에 들어간 이후 잠시 사라졌던 구타가 지금 막 다시 시작되려는 것이다.

이에 센트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라이오넬 공자님!”

기드 일행과 센트럼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여겼던 구석진 장소.

그곳에 웬 하이톤의 가녀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이오넬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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