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인연(4)
그러나 일단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회귀 전 나와 브로든의 관계.
나와 브로든은 악연으로 얽힌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완전히 그 반대, 지극한 선연이라고 봐야 했다.
전생의 난 브로든을 에릭스에 이은 두 번째 스승으로 여겼다.
어쩌면 내 검술 경지에 있어서만큼은 에릭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난 소드 유저 최상급에서 익스퍼트의 경지를 넘보던 때였다.
즉, 경지 도약을 위해서는 스승의 조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던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스승인 에릭스는 2년 전에 벌써 운명을 달리한 상태.
자칫 성장의 때를 놓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위기의 순간에서 나를 바른길로 인도해 준 사람이 바로 브로든이었다.
물론 끝까지 교수와 생도의 관계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가 툭툭 던져 주는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덕분에 소드 익스퍼트로서의 도약과 함께 폭발적인 실력 향상을 이어 갈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만큼은 브로든이 두 번째 스승이었다.
그리고 이런 관계 덕에 내가 아주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그 부분이란 바로 브로든의 내밀한 과거사, 그리고 여기에서 기인한 그의 성격.
한마디로 나는 브로든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것이다.
방금 나에게 재수 없으니 꺼지라고 아주 대놓고 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브로든은 거침이 없었다.
웬만한 상대가 아니고는 눈치 자체를 보지 않았다.
나아가 웬만한 상대에게도 남들보다 훨씬 덜 보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가 골고루 작용한 결과물이랄까?
아카데미의 교수로 부임하기 전, 브로든은 용병이었다.
단, 그냥 어중이떠중이 용병이 아니었다.
용병왕 지크프리트와 함께 용병계를 휩쓸던 전설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 시절을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게 보냈으며, 그 여파가 아카데미 교수인 현재까지 짙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거의 여파를 탄탄한 현재가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우선 실력.
브로든의 실력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이 한마디면 족했다.
단순히 이 한마디만으로도 왕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극강의 실력자라는 점이 증명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지위.
그는 국왕에게 직접 남작위를 하사받은 정식 귀족이었다.
영지의 후계자니 뭐니 해도 결국은 아직 정신 작위조차 없는 생도가 대부분인 아카데미.
이런 아카데미에서 공식적으로 브로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심지어 출신 또한 확실했다.
브로든은 태생이 귀족이었다.
물론 몰락 귀족 집안이기에 평민의 그것과 성장 배경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만, 하여 소년 가장으로서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자 어린 나이부터 용병계를 떠돌았지만, 어쨌든 출신만큼은 분명한 귀족.
따라서 누구도 그의 지위에 대해 토를 달지 못했다.
이렇듯 브로든은 출신 성분이 확실한 데다 압도적인 실력까지 갖춘 잘 나가는 귀족이었다.
권력이나 명예, 출세 같은 것에 관심만 두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본인 내키는 대로 살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실제로 브로든은 그따위 것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말이다.
당연히 트윈 슬레이어 같은 칭호도 그를 주저하게 만들 수 없었다.
오히려 자극했다.
어린놈이 실력 약간 갖췄다고 본인 수업에서 되도 않는 잘난 척이나 늘어놓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쪽으로.
나는 이런 브로든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었다.
“저도 남아 있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교수님? 변칙적인 검술에서 일가를 이루셨다는 교수님 수업을 꼭 한번 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런 변칙성에 취약해서요. 이 수업을 통해 제 약점을 보완해 나가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어? 어…… 그래, 뭐 그렇다면야. 미안하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취소하마. 남아 있도록.”
“감사합니다, 교수님.”
동시에 그를 다루는 법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브로든은 배움을 열망하는 이에게 약했다.
해서 지금 내가 한 것처럼 배움에 대한 열의를 드러낸다면 얼마든지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역시 그의 과거에 기인하는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는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다.
용병 일을 통해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한두 수씩 조각난 가르침을 받아 온 것이 전부.
비록 이 고난을 극복하고 끝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다다랐다고는 하나, 어린 시절의 결핍과 갈망은 그에게 여전히 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배움을 청해 오는 이에게는 심히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다.
여기에 배움을 청하는 자세로서 예의와 공손함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
나는 방금 이런 브로든의 성향을 그대로 저격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브로든과의 두 번째 인연도 순조롭게 시작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밝혀 둘 사항이 있다. 내 수업은 소드 유저 하급 이상은 된다는 걸 전제로 진행된다. 혹시라도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면 수강 변경을 권유한다. 그냥 들어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따라오기 힘들 테니까.”
그렇게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 브로든이 마지막 공지를 전했다.
이 수업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웬만하면 소드 유저 하급 이상이 수강하라는 것.
따지고 보면 당연한 전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은 일반 생도 기준으로 4학년의 커리큘럼에 해당했다.
그리고 기사 학부의 일반 생도 4학년이면 기본적으로 소드 유저 하급은 달성한 수준.
수업 난이도 또한 이 수준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중간에 편입하는 영지 귀족 생도가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카데미에 와서 검술 수업을 듣는다는 건 영지에서부터 수련을 해 왔다는 의미.
따라서 수업의 기준을 오히려 초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지에서 기사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아 왔을 테니 말이다.
일반 생도들과는 출발선 자체가 달랐다.
“정말 괜찮겠어?”
끄덕.
그러나 이 교실에는 예외가 존재했다.
괜찮겠냐는 내 물음에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사네.
상당히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바로 예외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사네는 이 기준에 미친다고 보기 어려웠다.
소드 유저란 체내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경지라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소드 유저 하급이라면 체내의 마나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수발이 가능해야 했다.
하나, 사네는 아직도 그게 잘 안 됐다.
본인 말마따나 검을 휘두른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의지대로 마나를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브로든의 수업을 듣기에는 아무래도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사네는 수강을 변경할 생각이 없었다.
영지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한 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영지 귀족은 일반 생도들과 기본 환경부터가 다르다.
따라서 아예 검을 쥐지 않았다면 모르되, 한번 쥔 이상 일반 생도의 실력쯤은 가뿐히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인식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수업을 변경한다는 건 이 인식에 반한다는 의미.
본인은 물론이고 출신 가문의 체면을 뭉텅이로 깎아 버리는 일이었다.
물론 사네가 체면 손상 같은 것에 심리적 타격을 받을 만큼 물렁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이다음, 즉 체면 손상에 대한 가문의 반응이었다.
사네와 다르게 발터우스 가문은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터.
최악의 경우 입학을 무르고 그를 곧장 영지로 불러들일지도 몰랐다.
사네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최악의 경우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렇다고 검술 수강 자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 역시도 기사 가문을 추구하는 발터우스로서는 절대 용납 못 할 이적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즉, 아래 단계의 커리큘럼으로 변경도 못 하고, 검술 수강 포기도 불가능했다.
결국, 현재 사네에게는 수준에 벅차더라도 그냥 듣는 방법밖에 없었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끄덕여지는 사네의 고개는 이런 복잡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설마 그런 덜떨어진 놈이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프라우닉스 남작님.”
한데 이 씁쓸함을 굳이 들추어내 후벼 파려는 놈이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 그거 좋지. 그래서, 넌 이름이?”
“드레이크 백작가의 장남 겔포이 드레이크입니다, 남작님.”
겔포이였다.
놈이 제 딴에는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그러나 내 눈에는 지극히 비열해 보이는 표정으로 제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놈의 입가에 서린 썩은 미소를 함께 목도한 사네가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 인간한테 나에 대해서 벌써 들은 모양이네.”
“르로이?”
끄덕.
썩은 미소가 어떤 구린내를 품었는지 짐작한 것이다.
그리 어려운 짐작은 아니었다.
생도회 활동은 시작된 지 이미 며칠이 지났고, 겔포이는 1년 차 부장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생도회장이 현재 자리를 비우고 있어 임명이 미뤄지는 상태이기는 하나, 사실상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사네의 형인 르로이 역시 생도회 주요 간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따라서 둘이 벌써 쿵짝을 맞췄으리라는 것쯤은 안 봐도 훤했다.
이 쿵짝이 사네에 대한 비방과 험담으로 주를 이뤘으리라는 점 또한 자명했다.
실제로 겔포이의 썩은 미소와 시선은 사네를 향하고 있었다.
“소드 유저 하급도 안 되는 ‘저능아’라니, 그런 ‘저급한’ 놈이 고귀한 혈통에서 나올 수 있을 리 없지요. 천박한 피가 흐르는 놈이라면 모를까. 안 그렇습니까, 남작님?”
동시에 나를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며칠 전 모임에서 내가 줬던 모욕, 겔포이 놈은 그걸 비꼬아 내게 되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저능아’, ‘저급한’ 따위에 과도한 악센트를 주는 것만 봐도 할 수 있었다.
놈 입장에서는 사네와 나를 한꺼번에 노리는 일타이피의 노림수.
여기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나름 유효한 수로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겔포이의 저격에 사네는 미세하게나마 인상을 찌푸렸고, 나 또한 이렇다 할 반격을 가하지 않았으니까.
“어, 안 그래.”
하지만 아니었다.
난 말 그대로 반격을 가하지 않은 것뿐이다.
못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왜?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드레이크 백작가 꼬맹이, 너 혹시 소드 익스퍼트급은 되나?”
“예?”
“아니지? 말하는 꼬락서니 보아하니 소드 유저 중급이나 잘하면 상급쯤 되는 모양인데, 넌 왜 그 고귀한 혈통 타고 나서 아직도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거지?”
“그야 아직 나이가…….”
“나이 핑계 같은 건 대면 안 되지. 방금 네가 꼬나본 쪽에 나이는 문제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잖아.”
브로든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혈통, 천박한 피 따위의 단어와 사상, 브로든은 극도로 혐오했다.
당연했다.
출신은 귀족이지만,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곳은 용병계였으니까.
하지만 겔포이는 브로든의 성향을 알지 못했고, 그 앞에서 이 단어들을 내뱉는 우를 범한 것이다.
심지어 나라는 명백한 비교 대상을 앞에 두고서.
“라인하트는 자작가고, 드레이크는 백작가잖아. 그럼 더 고귀한 드레이크에서도 트윈 슬레이어 급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넌 왜 아직 소드 익스퍼트조차 못 됐지?”
나를 통해 이미 증명됐듯 브로든은 눈치 따위 웬만해서는 보지 않았다.
왕족에게조차 할 말은 하고 사는 성격인데, 하물며 백작가 애송이쯤이야.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니 내 수업에서 혈통 따위 운운하는 건 금지다. 이게 아니꼬우면 내 수업에 안 들어오면 되는 거고.”
“남작님, 이건…….”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아카데미 내에서만큼은 난 남작이 아니라 생도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따라서 날 남작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금지한다. 알아들었나, 겔포이 생도?”
역시나 브로든은 회귀 후에도 브로든이었다.
여전히 거침없고 저돌적인, 속된 말로 막 나가는 사람.
그리고, 그래서 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비록 이 성격으로 인해 회귀 전에는 말년이 그리 평탄치 못했고, 이번에도 성격 자체는 그대로지만, 상관없었다.
이 막 나가는 성격, 끝까지 유지해도 괜찮았다.
내가 말년까지 평탄하게 만들어 줄 작정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브로든이 역시 내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며, 그와의 재회 첫날을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