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인연(3)
“라이, 역시 넌 생도회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거지?”
모임이 파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네가 재차 질문을 던져 왔다.
앞서 던졌던 질문의 반복.
다만, 이번에는 질문에 그만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티가 나? 딱히 티는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클리앙이 건네 온 1왕자의 전언에 대해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알겠다는 긍정의 답변만 주었을 뿐.
그 뒤에 이어진 짧은 대화에서도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낸 바는 없었다.
덕분에 클리앙, 카르사노와의 회귀 후 첫 만남은 특기할 만한 사안 없이 밋밋하게 마무리됐다.
단,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1왕자의 측근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래 봐야 아무런 이득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저들은 크리스토퍼 왕자의 심복 중 심복.
특히 클리앙은 아예 일심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왕자와 나로움 후작가의 관계가 그 근거였다.
나로움 후작가는 1왕자의 외가.
즉, 현 가주인 슬런트 나로움 후작이 1왕자의 외삼촌인 것이다.
자연스레 후작의 장남인 클리앙은 1왕자와 외사촌 관계가 됐다.
따라서 이들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과도 같은 관계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가능성 희박한 부분에 굳이 심력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쓸데없이 말씨름하는 게 귀찮았을 뿐이다.
어차피 1왕자를 한 번은 볼 생각이었다.
왕실 내부 일정 때문에 다소 지체되기는 하겠지만, 언제가 될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를 봐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왠지 한 번 직접 눈에 담고 싶을 뿐이었다.
또, 앞으로의 행보를 통해 내 스탠스는 자연스럽게 드러날 터.
클리앙 등과 얼굴 마주 보고 설왕설래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대충 고개 몇 번 끄덕여 주고 조용히 돌려보낸 것이다.
“뭐, 그냥.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내가 본 네 성향은 왠지 그런 듯해서. 더구나 겔포이 드레이크와 처음부터 척을 진 것도 그렇고.”
클리앙과 카르사노가 퇴장하며 모임이 종료된 직후였다.
오늘 모인 신입 귀족 생도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거들먹거리던 놈이 나에게 다가왔다.
드레이크 백작가의 장남 겔포이 드레이크라는 놈이었다.
그리고 이 겔포이라는 놈 역시 그만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내 의향을 묻기 위함.
단, 사네의 그것과는 방향이 180도 달랐다.
놈이 물은 것은 나의 임원 희망 여부였다.
생도회는 각 연차별로 부장을 선임한다.
3년 차 시니어의 부장은 부회장인 클리앙이 겸임했고, 2년 차 주니어의 부장은 카르사노였다.
그리고 이제 1년 차 프레시의 부장을 새로 뽑을 차례.
겔포이는 이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런 놈의 계획에 내가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 중이었다.
원래라면 드레이크 백작가의 장남인 그가 아무런 삐걱거림 없이 부장에 선임됐어야 했다.
드레이크 백작가는 중앙에서 방귀 좀 뀌는 가문이었고, 올해 신입생도 중에는 드레이크 백작가 이상 가는 가문 출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떡하니 내가 등장했다.
무려 트윈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보유한 내가.
비록 출신 면에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들었지만, 그런 것쯤은 칭호가 잘근잘근 씹어먹고도 남았다.
내가 노리기만 한다면 부장 자리는 내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러니 겔포이의 똥줄이 타들어 간 것이다.
내 앞에서야 짐짓 의연한 척하려 했지만, 훤히 다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며 초조함을 금치 못하고 손끝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그래도 겔포이는 운이 좋았다.
나에게는 임원은커녕 생도회에 들어갈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하여 관심 없다는 답을 주었고, 이에 겔포이는 몇 번이나 되물으며 반복 확인을 거친 뒤 끝내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대놓고 안심하며 기뻐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그였다.
뭐, 그렇다 해도 별 상관없었다.
별로 친해지고 싶은 스타일도 아니었을뿐더러, 어차피 곧 1왕자의 측근이 될 놈이었으니까.
빤히 속 보이는 짓을 하든 말든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놈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겔포이가 갑자기 친한 척을 해 오기 시작했다.
주된 목적이 해결됐으니, 부수적으로 트윈 슬레이어와 친분을 쌓겠다는 것.
여기까지도 그러려니 했다.
대충 무시하다 보면 알아서 제풀에 나가떨어질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겔포이 놈이 선을 넘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생도회에 들어갈 생각 없어. 쥐뿔도 없는 주제에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건 나랑 잘 안 맞거든. 겔포이가 하던 짓을 봐. 구역질 나잖아.”
놈이 내 옆에 있던 사네를 걸고넘어졌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지도 모른 채, 친구가 된 김에 진지한 충고를 하나 해 주겠다던 겔포이.
미래를 생각한다면 천박한 서자 나부랭이는 멀리하는 게 좋을 거라나 뭐라나.
사네를 향해 슬쩍 고갯짓까지 해 가며 말이다.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가문이 아니면 정작 사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놈이 이런 헛소리를 지껄인다는 게.
가문의 힘만 믿고 분별없이 나대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도저히 구역질을 참기 어려울 만큼.
“그래도 그렇지, 익스퍼트도 안 되는 저능아는 입도 벙끗 말라니? 라이, 네 앞에서는 나도 입 다물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대놓고 웃는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안 웃어? 다시 생각해 봐도 이렇게 통쾌한데. 이번에도 고맙다, 라이.”
“친구끼리 별말씀을.”
그래서 참지 않았다.
비록 진짜 토사물을 게워 내지는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더러움을 선사했다.
소드 익스퍼트조차 안 되는 저능아 나부랭이는 제발 입 좀 다물라고.
저급함이 옮을지도 모르니까.
이에 겔포이는 말문을 잃었다.
치욕스럽기 그지없겠으나 반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놈은 소드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정령력으로 파악한 놈의 수준은 소드 유저 상급 정도.
또래 기준으로는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이나,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트윈 슬레이어의 눈에는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니까.
트윈 슬레이어가 저급하다면 저급한 것이다.
반박 불가의 명백한 사실이었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얼굴만 시뻘겋게 붉힌 채로 어버버 댈 수밖에 없는 겔포이였다.
이다음 상황은 굳이 구체적인 묘사조차 필요 없었다.
분에 못 이겨 부들대다가 두고 보자는 빤한 멘트를 남긴 채 쌩하니 돌아서 가 버리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였기 때문이다.
불과 5분여 전까지 나와 사네 앞에 펼쳐졌던 그림은 이러했다.
악연의 끈부터 진부한 클리셰까지, 짧은 시간 동안 잡다한 것들이 은근 많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네, 너는?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나도 너랑 마찬가지야. 안 들어. 무엇보다 나는 들면 오히려 손해거든. 오늘은 네가 있어서 안 온 듯하지만, 우리 장자가 생도회 내에서 나름 목소리 좀 내는 모양이더라고.”
사네 역시 나처럼 생도회를 거를 생각이었다.
그의 형인 르로이 발터우스 때문이었다.
사네의 말에 따르면 르로이는 현재 아카데미 3년 차이자 생도회의 일원으로서 목에 상당히 힘을 주고 다니는 중이라고 한다.
클리앙이나 카르사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1왕자의 측근 중 하나로 인정받은 덕분.
사네 입장에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바보도 아니고 그런 곳에 발을 들이는 멍청한 선택을 할 리 만무했다.
“그래, 아웃사이더도 하나보다는 둘이 낫지.”
이로써 생도회 건은 나와 사네 모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으로 정리됐다.
아카데미 생활의 기본 방향성은 정해진 셈.
하면 이제부터는 생활의 구체적인 방식을 논의할 차례였다.
“그나저나 수업 계획은 어떻게 짰어?”
“여기.”
그 방식을 묻는 내 질문에 사네가 행동으로 답해 왔다.
그가 짠 시간표를 내게 건네온 것이다.
“검보다는 정치나 행정 분야에 관심이 많구나.”
“난 그쪽이 맞아. 무관보다는 문관 쪽. 10년 넘게 휘둘러 왔지만, 역시 검은 내 길이 아니야.”
사네가 짠 커리큘럼은 정치와 행정에 집중돼 있었다.
여기에 경제까지, 그것도 아주 빽빽하게.
물론 검술도 포함돼 있기는 하나, 빈약한 분포도로 볼 때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영지에서야 아버지와 가신들의 눈이 있으니 억지로 쥐고 있었지만, 여기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그렇다고 검술 수업을 아예 안 듣는 것도 아니니까, 이만하면 면피할 수준은 돼.”
애초에 영지 귀족들이 사네처럼 시간표를 빡빡하게 짜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다들 인맥 다지기에만 혈안일 뿐이었으니까.
따라서 절대적인 수업 시간으로 따지면 변명거리 정도는 된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우리 가문이 이해가 안 돼. 북부 제일의 곡창지대라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도 대체 왜, 무조건 기사 가문만을 고집하는 건지가. 그러니 가문과 영지에 발전이 없잖아, 발전이. 미래를 생각한다면 나라도 눈을 돌려서…….”
사네는 답답하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꽉 막힌 발터우스 자작가의 과거와 현재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부분인 듯 가문과 영지를 향한 사네의 아쉬움은 깊고 구체적이었다.
복잡한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자제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살짝만 건드려 줘도 그가 구상한 영지 발전 방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리라는 것을.
모르긴 몰라도 하룻밤으로는 모자랄 것이 분명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로 꼴딱 밤새지 않으려거든 봇물이 터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번에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흠흠,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지? 가끔가다 한 번씩 이렇게 답답함이 터져 나올 때가 있어서……. 그래서, 너는? 라이, 너는 어떤 수업 듣는데?”
혹시 몰라 얼른 내가 짠 시간표도 건네주었다.
이것으로 또다시 터져 나오는 일이 없도록 사네의 주의를 묶어 둘 수 있었다.
“너는 여유 있게 짰구나. 하긴, 네 실력으로 굳이 수업에 얽매일 필요는 없…… 어? 어어?”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꽁꽁 묶어둘 수 있었다.
“네가 이 수업을 듣는다고? 라이, 네가? 왜?”
내가 수강하기로 한 어떤 수업과 나의 관련성.
그에 대한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으로 말이다.
* * *
“대부분이 나를 알고 있을 테지만, 오늘 처음 보는 귀하신 얼굴들도 몇 있으니 간략하게 소개하마. 너희에게 검술의 변칙적인 활용에 대해 가르칠 브로든 프라우닉스다. 일단은 반갑다.”
아카데미의 학기가 시작됐다.
이는 곧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훌륭한 교수진이 그들의 지식과 깨달음을 베풀기 시작했다는 의미.
2회차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생도인 나 또한 이 베풂의 장에 참석해 있는 상태였다.
친구가 된 사네 또한 내 옆자리에서 함께.
비단 나와 사네뿐만이 아니었다.
겔포이 드레이크를 비롯하여 모임에서 안면을 익힌 이들 중 일부도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교수 브로든이 언급한 처음 보는 귀하신 얼굴들이란 우리 영지 귀족 출신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신분에 따른 커리큘럼 차이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크게 두 집단으로 분류 가능했다.
나와 사네가 속한 영지 귀족 생도,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일반 생도.
여기서 전자는 커리큘럼이 3년에 불과한 반면, 후자는 무려 6년에 달하는 커리큘럼을 이수했다.
즉, 후자의 커리큘럼 이수가 한창인 와중에 전자가 편입하는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브로든이 우리를 처음 보는 얼굴이라 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단, 이는 브로든의 일방적인 입장에 불과했다.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구면이었으니까.
물론 회귀 전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와 브로든 역시 질기디질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관계였다.
해서 나는 브로든을 내 눈에 한가득 담았다.
클리앙과 카르사노를 빤히 쳐다봤던 그때처럼.
“뭐, 일단 그렇기는 한데,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단 말이지.”
그런데 이 끈이란 것이 이번에도 신묘하게 작용한 것일까?
“라이오넬 라인하트, 너 칭호가 트윈 슬레이어라며?”
브로든의 시선 또한 30명가량 되는 생도 중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떤 분명한 의도를 담고서.
“그럼 내 수업에서 웬만하면 나가 주지? 솔직히 좀 재수 없을 것 같으니까.”
또렷하고 선명한 배척의 의도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