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35화 (36/200)

18장: 인연(2)

아카데미 입성 첫날, 나는 땡을 잡았다.

그것도 장땡을.

심지어 내가 뭘 한 것도 아니었다.

입성 첫날이니만큼 짐 정리도 하고 좀 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다소 정신없이 대운 중의 대운을 맞이한 상황.

앞뒤 고려 않고 깊이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 정도로 베로카라는 이 아이는 대단했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토록 강렬하게 내 정령력을 자극하는 잠재력은 회귀 후 처음이었다.

물론 매튜와 데파이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매튜의 잠재력도 나를 자극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내가 온전한 정령력을 보유한 상태가 아니었다.

정령석 섭취 후에는 이미 매튜의 잠재력이 엄청난 속도로 꽃을 피워 가던 중이었고 말이다.

데파이 역시 비교가 어려웠다.

데파이의 잠재력은 대부분 개화를 마친 상태였다.

당연했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반열에 오른 그에게 아직도 원석 수준의 잠재력이 남아 있다면, 데파이를 인간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대장장이의 신이 기억을 잃고 인간계에서 수련 중인 것이라면 모를까.

따라서 말문을 잃게 만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원석 그대로 느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매튜처럼 상인 쪽? 아니야, 안 어울려.’

이런 베로카와 그녀의 잠재력을 보며 적합성을 판별하기 시작했다.

베로카의 잠재력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작업이었다.

‘마나와의 친밀도가 어이없을 정도로 높기는 한데…… 그렇다고 기사는 아니야. 직접 몸을 쓰는 쪽은 이 아이와 맞지 않아.’

본인은 모르겠지만, 베로카는 마나와 굉장한 친밀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냥 마나와 친구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

여기에 두뇌까지 명석한 수준을 뛰어넘었다.

두뇌 회전 속도 자체는 웬만한 학자의 그것에 비견될 만했다.

아직 제대로 개발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주무를 수 있는 압도적인 친화력, 쉬지 않고 팽팽 돌아가며 현상을 분석하고 결과를 도출해 내는 특출난 두뇌.

정답 도출은 더할 나위 없이 간단했다.

베로카가 걸어야 할 길은 사실상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음…… 그쪽이면 나로서는 좀 애매한데. 쉽지 않아.’

하지만 도출된 정답을 그대로 이행하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다른 길과 비교해 보면 그 어려움이 확연히 두드러졌다.

상인이나 기사 쪽이었다면 고민 자체가 필요 없었다.

상인이면 매튜와 실크로 상단에 맡겨 성장시키면 그만이고, 기사일 경우 내가 전담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설혹 재능이 검이 아닌 창이나 활 등 다른 무기에 특화돼 있다 해도 마찬가지.

어차피 몸 쓰는 일이라는 것이 종국에는 하나로 통했다.

물론 나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제 갓 시작하는 아이의 기초를 잡아 주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학자의 길이었다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

글만 제대로 뗄 수 있도록 가르친 뒤, 각종 서적을 구해다 읽히기만 하면 됐다.

마침 우리가 있는 곳은 왕도 아카데미.

온갖 서적이 다양하게 구비 된 곳이었다.

내 심부름을 명목으로 베로카가 직접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가지고 나오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베로카에게 정해진 길은 앞선 것들과 사정이 달랐다.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분야 자체가 지극히 폐쇄적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쉽사리 접근하기가 난감한 영역이었다.

‘당장은 그 방법밖에 없으려나? 시간 좀 걸리겠는데…….’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다는 것 역시 아니었다.

대강 떠올린 방안이 있기는 했다.

주먹구구식이기는 해도 정령석 섭취로 얻은 능력을 십분 활용한다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터.

다만, 이 방법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꽤 많이.

실행에 적잖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저, 공자님……?”

내가 넋을 놓고 베로카에게 빠져 있던 시간도 꽤 길었던 모양이다.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베로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아, 미안.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이에 나도 얼른 놓고 있던 정신을 다시 부여잡았다.

지금은 고민이나 하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상황을 확인하고 일단 쐐기를 박아 둘 타이밍이었지.

“그런데 베로카, 네가 앞으로 3년 동안 나를 전담하는 거 맞지? 중간에 네가 빠진다거나 다른 하녀로 교체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는 거지?”

“예, 특별한 사정이 아닌 한 제가 계속 공자님을 모시게 될 겁니다. 다만, 공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저를 다른 하녀로 교체하실 수 있습니다.”

“좋아, 마음에 들어. 그리고 걱정할 필요 없어.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내가 너를 내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끝났다.

이로써 베로카는 내 사람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언급한 대로였다.

내가 베로카를 놔주는 불상사 같은 건 꿈에서인들 일어날 리 만무했다.

설령 베로카가 제발 좀 놔달라고 사정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베로카의 발목을 잡고 질질 늘어지며 사정할 작정이었으니까.

제발 좀 내 곁에 남아 달라고.

애처롭기 그지없게 말이다.

물론 이 방에 들어온 것도 베로카의 마음대로는 아니었겠지만, 나갈 때는 더더욱 아니었다.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럼 베로카, 앞으로 잘 부탁해.”

“예, 공자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나도 최선을 다하도록 할게. 우리 같이 정말 잘해 보자.”

“……?”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원래 이런 목적으로 아카데미에 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대박이 터졌다.

그것도 대박 중의 대박, 초대박이.

이렇게 되고 보니 양심이고 뭐고 없었다.

일단 날름 집어삼키고 볼 일이었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입가를 뚫고 나오는 만족감과 함께.

* * *

“우리 구면이죠?”

홀로 구석에 박혀 있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거침없이 다가가 곧바로 말을 걸었다.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사네 공자?”

“아, 라이오넬 공자.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앉으세요.”

사네 발터우스였다.

발터우스 자작가의 차남이자, 형인 르로이에게 멸시당하는 서자.

아카데미 첫 공식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들른 이곳에 그가 먼저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저 때문에 싫은 소리 많이 들으시던 것 같은데.”

“라이오넬 공자가 사과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정당한 대결의 결과였을 뿐인데. 무엇보다 전 오히려 감사한 마음입니다. 공자 배려 덕분에 오랜만에 통쾌했거든요.”

사네는 제 형과 다르게 경우가 있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발터우스 영지가 먼저 억지를 부렸던 점까지 빼먹지 않고 사과하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우리 동갑에 동기인데, 편하게 지내는 게 어때? 괜찮다면 라이라고 불러.”

“그래, 그러자. 반갑다, 라이.”

덕분에 금세 말을 놓고 친구 관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확신이 짙어졌다.

사네는 난놈이었다.

현재 그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영지 내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을 게 빤한 서자였고,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무려 18년이었다.

어둡고 어눌한 구석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성장환경인 것이다.

한데 그런 것들이 조금도 겉으로 내비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밝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나와의 대화를 주도해 가는 사네였다.

비록 처지가 처지인지라 어쩔 수 없지 죽어지내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놓치지 않고 꽉 움켜쥘 것이 분명했다.

이미 전생의 업적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존재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라이, 너 생도회에 들어갈 거야?”

그렇게 담소를 이어 가던 중 사네가 질문을 하나 던져왔다.

지금 우리가 소화 중인 첫 공식 일정과 관련된 질문이기도 했다.

나와 사네는 수업을 듣고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웬 친목 모임 같은 것에 참석하고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친목 모임 따위가 아카데미의 첫 공식 일정이라는 사실이.

그러나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로 이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임의 구성원 때문이었다.

친목 모임은 친목 모임이되, 그 구성원의 면면이 화려했다.

아니, 정확히는 면면보다 출신이라고 해야 했다.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보다는 출신 가문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랬다.

이 자리는 아카데미 신입 귀족 생도들을 위한 회합의 자리였다.

심지어 그냥 귀족도 아니었다.

영지를 보유한 가문 출신, 그렇기에 아카데미 운영자금을 댄다고 할 수 있는 ‘진짜’ 귀족의 모임이었다.

스스로를 아카데미의 주인이라 여기는 특권층의 모임인 것이다.

당연히 참석 자격을 갖춘 인원은 극소수였다.

올해 아카데미에 입학한 귀족 생도 70여 명 중 고작 8명에 불과했다.

그 안에는 라인하트 영지의 차남인 나와 발터우스 영지의 차남인 사네 또한 포함돼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오늘 이 모임을 통해 중대한 사항이 한 가지 결정될 예정이었다.

사네가 내게 질문을 던진 생도회 가입 여부가 바로 그것.

생도회란 스스로 주인이라 칭하는 영지 귀족들의 모임으로써, 학장, 교수진과 함께 아카데미를 삼분하는 권력 기구이기도 했다.

사실상 생도회가 아카데미를 이끌어 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따라서 영지 귀족 출신 생도들은 이 생도회 가입을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여겼다.

생도회 가입은 이들에게 필수 과목 이행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게 가입 여부를 묻는 사네의 질문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도회? 당연히…….”

그런 사네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주려던 참이었다.

“모두 모인 모양이군. 그럼 시작하지.”

하지만 내 의중을 담은 답변은 중간에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팅룸의 문을 열고 들어선 새로운 인물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입장과 함께 오늘 모임이 공식적인 시작을 알렸다.

“반갑다. 나는 생도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나로움 후작가의 장남 클리앙 나로움이라고 한다.”

클리앙 나로움.

올해로 아카데미 3년 차이자, 스스로 밝혔다시피 나로움 후작가의 장남이었다.

나로움 후작가는 왕국 동부의 좌장으로서, 북부 바르코스 후작가처럼 동부 수호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실제 하는 일은 바르코스 후작가의 그것과 천지 차이였다.

나로움 후작가가 담당한 동부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동부는 로만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

원칙상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것이 나로움 후작가의 임무였다.

그러나 슈라우드 왕국이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들 거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국과의 군사적 충돌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 보니 나로움 후작가의 군사 임무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대신 반대로 외교 및 정치 임무가 증대됐다.

그 결과, 현재는 군인 가문이라기보다는 정치인 가문에 가깝게 변모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쪽은 생도회 주니어 부장이자 바이퍼 백작가의 후계자 카르사노 바이퍼다. 다들 바이퍼 가문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봤겠지?”

클리앙과 함께 들어온 인물은 아카데미 2년 차이자 생도회 2년 차의 부장이기도 한 카르사노 바이퍼.

클리앙의 말마따나 바이퍼 백작가 역시 유명한 가문이었다.

가문이 지닌 특징 덕분이었다.

바이퍼 백작가는 마탑에서 제작한 아티팩트의 판매를 대행하는 가문.

이 권리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가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부의 크기만큼이나 중앙 정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입학을 환영한다. 너희야말로 이 슈라우드 왕도 아카데미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점을 …… 언제나 책임의식을 가지고 생도들을 이끌어…….”

환영사를 읊는 클리앙과 그 옆에 거만하게 서 있는 카르사노.

나는 환영사가 이어지는 내내 그런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클리앙의 환영사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내가 권위의식으로 가득 찬 환영사 따위에 감격을 느낄 만큼 세태에 찌들지는 않았다.

단지 자꾸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와 연관이 깊다면 나름 깊을 수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이들과 연관된 어떤 인연에 대한 상념이 내 눈길을 자꾸만 이들에게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두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인 듯했다.

신입 귀족 생도들을 향한 환영사와 당부의 말 따위를 마친 두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그러고는 클리앙의 입으로 건네 왔다.

그 인연이 내게 전하는 어떤 끈과도 같은 것을.

“크리스토퍼 1왕자님께서 조만간 널 보고자 하신다. 미리 준비하고 있도록.”

질긴 끈이었다.

회귀에도 불구하고 절대 끊어지지 않는,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가는 질기디질긴 악연의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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