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인연
올해로 16살의 베로카.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와도 같은 나이의 그녀는 현재 기분이 매우 좋았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음꽃이 만개할 감수성 풍부한 나이라서?
지나가던 개가 웃을 헛소리였다.
주변에 떨어지는 낙엽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런 게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풍부한 감수성 같은 것이 베로카 사전에 존재할 리 만무했다.
지독한 허영이고 사치에 불과했으니까.
적어도 베로카의 처지에서는 그러했다.
그래도 아직 어리고 한창 세상을 배워 갈 나이인데 너무 삭막한 것 아니냐고?
이리 말하는 이들에게 베로카는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그럼 한번 16살의 나이에 생업 최전선에 뛰어들어 보라고.
그때도 감수성의 풍부함이니, 세상을 한창 배워 갈 나이이니 따위의 배부른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한번 보게.
심지어 그녀가 뛰어든 생업이라는 것이 그저 그런 생업도 아니었다.
언제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해야 하는, 마치 살얼음판과도 같은 생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살짝이라도 긴장을 놓았다가는 언제 어떻게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될지 몰랐으니까.
하녀라는 직종, 그중에서도 슈라우드 왕도 아카데미의 하녀라는 특수 직종은 특히 더했다.
눈 한번 잘못 깜박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개죽음을 당할 수 있었다.
귀족을 시중드는 일이라는 것이 그러했다.
영지를 보유한 소위 ‘진짜’ 귀족들에게 하녀는 어떤 면에서 벌레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일 수 있었다.
고귀한 그들의 안락과 편의, 즐거움 따위를 위해 온몸을 다 불사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아니면 정말로 끔찍하게 죽어 나갈 터.
이외의 것들은 굳이 말로 할 필요조차 없었다.
뭐, 그녀의 메마른 감수성을 지적하는 것은 좋았다.
대신 그 전에 최소한 이 절반이라도 되는 조건을 먼저 겪어 보고 나서 하라는 것이다.
하면 감수성 같은 건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테니까.
베로카는 장담할 수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해 다른 하녀를 예시로 들며 반박을 가해 올지도 몰랐다.
베로카와 비슷한 나이 대의 하녀 중에는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이들도 많지 않냐는 것.
그리고 이 예시 겸 반박에 대해서는 베로카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바였다.
귀족과의 불타는 로맨스, 뒤이어지는 극적인 신분 상승을 노리는 하녀도 적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런 골 빈 것들이.
베로카로서는 골이 비어도 텅텅 비어서 그렇다고밖에 해 줄 말이 없었다.
목 위의 장식품을 조금만 굴려 봐도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망상인지 곧바로 도출 가능했다.
우선 사랑이 싹튼다는 것부터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귀족이 뭐가 아쉬워서 하찮은 하녀 따위에 사랑이라는 난해한 감정을 품는단 말인가?
관리란 관리는 다 받고 자라 백옥같은 피부를 자랑하는 귀족 아가씨들을 놔두고서.
하녀는 그저 하룻밤 욕정 해소의 대상이면 충분했다.
물론, 타고난 미모로 이 험로를 헤쳐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기는 했다.
그러니 멋모르는 어린 하녀들이 헛된 망상을 품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망상을 품기 전에 미모 앞에 붙은 수식어를 먼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었다.
‘타고난’이라는 수식어는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미모란 말 그대로 타고 나야 하는 영역.
즉, 천운이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철저한 관리와 전문적인 분칠 없이도 남자를 본능적으로 꼬여 낼 수 있을 만큼의 압도적 미모라는 천운이.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이 천운을 타고날 확률은 지독하리만치 낮았다.
영지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미인 한두 명씩은 있지 않냐고?
맞다.
있다, 그런 미인.
하지만 그게 본인을 비롯한 본인의 주변 지인일 확률은 여전히 낮았다.
0에 수렴하다 보니 차라리 잔혹할 지경.
그래도 이 잔혹한 현실에서 한 줄기 서광이 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가끔가다, 이 극악의 확률에 당첨되는 경우가 정말 간혹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 확률에 당첨된다고 해서 곧바로 인생이 피는 것일까?
베로카의 대답은 아니올시다였다.
한번 가정을 해 보자.
하늘이 부여한 미모를 타고나 귀족을 꼬시는 데 성공하고, 끝내 그의 여자가 됐다.
귀족의 부인이 되고, 해당 귀족 가문의 사람이 됨으로써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루어 낸 것이다.
하나, 그래 봐야 첩이었다.
정실부인의 질투와 구박을 바가지째로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첩실 말이다.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천한 하녀 출신 따위가 감히 태생부터 귀족인 정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견뎌 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기까지는 그래도 견딜 수 있을지 몰랐다.
본인이 자청해서 찾아온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구박과 천대는 본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식이 있었다.
자식이 서자로서 받게 될 설움도 고려해야 했다.
이번에는 비단 정실부인만이 아니었다.
그 정실부인의 자식들, 즉 적자들까지 존재했다.
적자가 서자에게 가해 올 모욕과 멸시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정리하면, 설령 귀족과의 로맨스를 성사시킨다 해도 그 앞에 펼쳐진 미래는 가시밭길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가시밭길조차 좋다고 달려드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베로카는 아니었다.
따라서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골이 비지 않았다는 최소한의 전제를 깔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전제를 바탕으로 할 때, 감수성이 메말랐다는 지적은 여전히 베로카를 흔들지 못했다.
단, 그렇다고 해서 착각은 금물이었다.
베로카는 아카데미 하녀라는 직종을 절대 귀족 첩실보다 낫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부정적으로 봤다.
최대한 빨리 이 직종에서의 탈피를 바라며, 실제 그럴 계획을 세워 두고 있을 만큼.
불확실성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커리큘럼상 하녀들이 모시는 귀족은 3년마다 한 번씩 바뀌게 되어있다.
이 말인즉슨 3년마다 한 번씩 인생의 중대한 분기점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하녀의 운명은 시중드는 귀족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성 좋은 귀족이 걸리면 인생이 한없이 잘 풀리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상상조차 끔찍했다.
개차반 같은 쓰레기 귀족이 걸리면 인생 조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아카데미 하녀라는 직종은 이 운명이 3년마다 한 번씩 뒤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영지 귀족이란 대체로 권위의식에 찌들 대로 찌든 종자들.
좋은 인간일 확률 자체가 낮았다.
낮은 확률끼리 곱해지면 곱해질수록 그 수치가 더 낮아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말이다.
이렇듯 귀족과의 로맨스도, 그렇다고 직종의 유지도 모두 바람직하지 못했다.
양쪽 모두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베로카의 판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로카는 여전히 이 일을 놓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자타공인 똘똘한 그녀의 머리를 십분 활용, 아카데미 내에서 가장 일을 잘한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었다.
왜?
베로카가 생각하는 그녀 인생 최고의 루트 또한 이 아카데미에 있었기 때문이다.
베로카의 계획은 야심 찼다.
그녀 또한 시중드는 귀족의 마음에 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귀족의 졸업과 함께 해당 가문에 입성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단, 이성으로서가 아니었다.
철저히 하녀로서, 깔끔하고 스마트한 서포터로서 귀족의 마음에 들고자 했다.
너무나도 완벽한 시중에 도저히 그녀를 영지로 스카우트해 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
이것이 가난한 평민 출신의 그녀가 인생을 풍족하고 순탄하게 꾸려 갈 수 있는 최고의 루트였다.
베로카가 가진 기본 조건도 이런 그녀의 계획에 부합했다.
우선 베로카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나름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편이었다.
짧긴 해도 치열하게 살아온 16년의 인생과 이 과정에서 획득한 주변의 높은 평가가 그 증거였다.
적어도 시중드는 일만큼은 최고로 해낼 자신이 있었다.
외모 또한 평범했다.
꾸미면 적당히 예쁘장해 보일 수 있는, 그렇지만 꾸밀 여유도, 생각도 없는 극도의 평범함.
보통 여자라면 이에 대해 낳아 준 부모를 원망할 터.
하지만 베로카는 그 보통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본인의 외모를 장점으로 인식했다.
하녀로서는 이보다 완벽한 외모가 또 없었다.
정말 웬만큼 거지발싸개 같은 귀족 놈이 아니고야 희롱당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귀족쯤 되면 주위에 예쁜 여자도 많을 테니 굳이 그녀를 건드릴 확률이 현저히 낮아지는 것이다.
이렇듯 지닌 바 조건에 대한 합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최고의 인생 플랜을 마련해 둔 베로카.
오늘 그녀의 기분이 좋은 이유도 바로 이 계획과 연관돼 있었다.
어쩌면 오늘, 베로카가 세워 둔 원대한 플랜이 첫 삽을 뜨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오늘부로 그녀가 모시게 된 귀족에 대한 소문과 정보가 그 근거였다.
베로카가 배정받은, 아니 정확히는 하녀들 간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고 거머쥔 귀족의 이름은 라이오넬 라인하트.
올해 18살이 되어 아카데미에 입학한 북부 라인하트 영지의 둘째 공자였다.
그 또한 영지를 보유한 귀족 가문의 직계이니만큼 베로카와 같은 전속 하녀가 배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나 출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라이오넬이 지닌 칭호와 소문, 그리고 실제 성향이었다.
라이오넬은 입학이 결정된 직후부터 아카데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가 트윈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오우거를 때려잡은 사실만으로도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을 터인데, 무려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그런 괴물을 참살한 이상 모든 관심과 이목의 집중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
따라서 차남이기는 해도 장남인 라인하트 자작 이상 가는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소문까지 최상이었다.
바르코스 요새의 병사들이 그를 흠모하고 경외한다는 소문이 이곳 왕도까지 파다했다.
고귀한 출신과 눈부신 실력으로도 모자라 병사들의 목숨을 위하는 훌륭한 인품까지 갖췄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이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소문의 근원이 되는 본바탕은 존재할 터.
아랫사람인 병사의 생명을 존중하는 이라면 하녀도 존중해 줄 가능성이 컸다.
칭호와 소문만 따지면 좋은 주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이 충만한 것이다.
여기까지만으로도 확률은 상당히 높아진 상태.
그런데 이 확률에 거의 쐐기를 박는다고 해도 좋은 실제 정보가 추가됐다.
라이오넬은 아카데미에 시종을 달고 오지 않았다.
물론 시종의 동행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 아카데미의 권고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권고를 따르는 영지 귀족들은 매우 드물었다.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들 각자의 영지에서 서넛씩은 데리고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데 라이오넬은 단 한 명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다.
라인하트 영지에서 왕도까지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그럼에도 하인을 달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라이오넬의 성격이 귀족치고는 까다롭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훌륭한 인품을 갖췄다는 소문의 신빙성이 대폭 향상되는 것이다.
최소한 거지발싸개 같은 성격은 아닐 것이 거의 확실했다.
이렇듯 현재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는 베로카가 세운 원대한 계획의 시동까지 딱 한 걸음만이 남은 상황.
베로카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깊은 심호흡으로 최대한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자신 있게 그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오늘부터 공자님을 모시게 된 하녀 베로카라고 합니다. 앞으로 공자님께서 단 한치의 불편함도 느끼시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그렇게 라이오넬에게 첫인사 겸 자기소개를 올리는 베로카였다.
여기에 확신으로 가득 찬 베로카의 당찬 포부까지.
이것은 사실상 플랜을 가동하는 그녀의 첫 삽질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 베로카? 네가 정말 내 하녀라고?”
그런데 어디서부터일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플랜은 첫 삽질부터 삐거덕거리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심하게 어그러져 가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예, 공자님.”
라이오넬의 눈빛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심유해지는 그의 눈빛은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나쁜 의도를 품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베로카도 음흉함이나 폭력성쯤은 구별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쪽은 아니었다.
단지 뭐랄까, 베로카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랄까?
물론 확신은 불가했다.
그저 느낌이 그렇다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베로카의 플랜은 첫 삽질부터 말 그대로 진짜 삽질이 되어 버렸다는 것 말이다.
한없이 복잡해져만 가는 그녀의 심란한 마음과 함께.
* * *
“어…… 베로카? 네가 정말 내 담당이라고?”
“……예, 공자님.”
내 하녀로 배정됐다며 한 여자아이가 찾아와 인사를 올렸다.
아이의 이름은 베로카.
그리고 나는 베로카를 보는 순간 확신했다.
‘땡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