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30화 (31/200)

15장: 밉지 않은 놈(3)

“내 정체가 그리 궁금하거든, 실력으로 한번 밝혀 보든가.”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구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고작 말 한마디, 통상적인 도발에 불과했으나 그 효과는 지대했다.

로우나라는 놈의 전신에서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굳이 정령력의 힘을 빌릴 필요조차 없었다.

표정 변화부터가 어찌나 다이내믹한지, 도저히 모를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오냐, 정 소원이라면 죽여 주마. 그 바이저도 네놈의 목을 잘라 내가 직접 벗겨 주도록 하지.”

덕분에 나도 귀찮음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다.

예의 따위를 차려 가며 쓸데없이 정체 밝히느니 마니로 입씨름할 필요가 없어진 것.

사실상의 첫 번째 주자로 이런 놈이 나와 주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타앗!

그렇게 극도로 흥분한 로우나가 짓쳐 들었다.

간 보기 같은 것은 생략된 채였다.

초장부터 오러를 줄줄 흘려 가며 거침없이 뻗어져 나오는 놈의 검.

단칼에 나를 끝장내 버릴 기세였다.

콰앙!!

그러나 기세는 어디까지나 기세일 뿐, 현실은 냉혹했다.

짓쳐 들어오던 속도 그대로 속절없이 뒷걸음질 치는 로우나.

“쿨럭, 쿨럭!”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분수는 덤이었다.

단 한 방에 내부가 완전히 진탕돼 버린 것이다.

저벅, 저벅.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연신 피를 토하는 로우나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승부의 향방 자체야 이미 확연하게 갈린 상황.

누가 보더라도 나와 놈 사이의 격차는 뚜렷했다.

하지만 확정은 아직이었다.

결과를 확정 짓는 어떠한 징표도 아직 표출된 바가 없었다.

비록 피를 토하고 있다고 하나 로우나는 아직 기절한 것도, 본인의 입으로 항복 의사를 표시한 것도, 그렇다고 검을 손에서 놓은 것도 아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놈은 아직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상태.

따라서 결투는 아직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앞선 사네 때와는 경우가 분명히 달랐다.

“쿨럭! 자, 잠깐……!”

물론 검을 쥐고 있는 것이 결코 자의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검사로서의 무의식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내부가 완전히 진탕된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검을 쥘 힘은 남아 있는 상태.

그렇다면 검사로서의 본능 혹은 무의식이 내릴 결정은 한 가지뿐이었다.

쥘 수 있을 때까지 쥐고 있는 것.

의식적으로 놓아야겠다는 마음이라도 먹지 않는 한은 말이다.

좁혀지는 나와의 거리에 심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방증.

내 행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로우나에게 마음먹을 시간 같은 것을 주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의도한 상황이었으니까.

놈에게 가해지는 충격을 검과 팔이 아닌 몸 전체로 퍼뜨린 것은 어디까지나 내 의지였다.

기껏해야 소드 익스퍼트 하급과 중급 사이에 불과한 로우나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적이라는 단어가 본연의 뜻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펼쳐지는 중이었지만.

사아악~

무의식적으로 검을 쥐고 있는 로우나의 기적 같은 순간을 향해 내 검이 떨어져 내렸다.

로우나를 비롯하여 관전자 모두의 눈에 보일 만큼 느릿느릿한 속도로,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낄 수 없이 무심하고 단호하게.

쾅! 쾅! 쾅! 쾅!

심지어 반복적으로.

검은 쉬지 않고 떨어져 내렸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이쯤 되면 놓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쥐어져 있는 로우나의 검을 향해서.

“그르르륵…….”

이제는 기침조차 뱉지 못한 채 피 끓는 가래 소리만 내는 로우나.

굳이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어딘가 크게 잘못된 것이, 그리고 아직도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르르륵, 하, 항…….”

그럼에도 여전히 의식은 멀쩡한 로우나.

놈이 최후의 의지를 이끌어 내 어떤 단어를 읊으려 했다.

‘항’으로 시작되는 어떤 단어.

흘러가는 상황과 로우나의 상태 등을 고려할 때 ‘복’으로 끝날 것이 분명한 그 단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가 끝내 완성되도록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 커다란 자비를 베풀기에 로우나는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뒤였다.

어차피 놔둬 봤자 사네의 앞길에 훼방만 놓을 것이 빤한 암적인 존재.

기회가 주어졌을 때 확실히 마무리해 두는 편이 바람직했다.

스아악~

콰광!!

챙강!

이윽고 로우나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내렸다.

물론 이 또한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본능이나 무의식조차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뼈가 완전히 바스러졌다.

검을 쥔 손은 물론이고 오른팔 전체가.

이 지경에는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그랜드 소드마스터가 온다 해도 검을 쥘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당장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영원히 쥘 수 없을 터.

그렇게 두 번째 대전사 결투가 종결되었다.

끝나버린 로우나의 검사 인생과 함께.

앞선 사네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철컥.

로우나와의 결투를 종결지은 뒤, 투구 바이저를 살짝 들어 올렸다.

딱 내 입가만 드러날 정도.

그 상태로 남은 발터우스 측 전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보여 주었다.

씨익 말려 올라간 나의 입꼬리를.

* * *

“그르르르륵……!”

발터우스의 기사 델포이라는 자가 의식을 잃었다.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의 그 또한 로우나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비정상적으로 끓어오르는 가래 소리와 입가를 타고 줄줄 흐르는 피.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상태라는 점은 로우나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무리에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로우나와 달리 그에게는 최후의 일격이 가해지지 않았다.

팔뼈 전체를 바스러뜨린 그 일격 말이다.

델포이에게는 그 일격이 내리쳐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는 뒤집힌 속만을 끌어안은 채로 기절할 수 있었다.

검을 쥐는 팔 자체는 무사한 것이다.

물론 현 상태만으로도 위중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은 대동소이했지만.

다시 검을 쥐기 위해서는 최소 1년 이상의 정양과 그 배의 재활 기간이 필요했다.

평범한 정신력으로는 딱 폐인 되기 십상이랄까?

그리고 르로이와 어울리는 시점에서 이미 평범 이상의 정신력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봐야 했다.

어쨌든 끊어진 델포이의 의식과 함께 대전사 결투도 종장에 다다랐다.

델포이가 발터우스 측의 네 번째 대전사였다.

이 말인즉슨 간단했다.

발터우스의 전사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남은 하나가 이 모든 상황의 발단, 르로이 발터우스라는 것.

그렇게 마지막 주자이자 최후의 일인이 된 르로이.

델포이의 기절 직후 잠시 멍한 상태에 빠져 있던 그가 갑자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음모다! 이건 나와 발터우스 영지를 노린 음모야!!”

무대로 나서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 뒤로 뺀 상태의 르로이.

그가 나를 향한 삿대질과 함께 고함을 이어 갔다.

“네, 네놈! 네놈의 정체를 밝혀라!”

“정 그렇게 알고 싶거든 실력으로 밝혀 보라고 했을 텐데?”

“웃기지 마!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날 노리고 꾸며진 치밀한 계략이었어. 그렇지 않고야 이건 말이 안 돼. 발터우스 자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의 이름으로 명한다. 이 일을 꾸민 네놈의 정체를 드러내라, 어서!!”

지금의 르로이에게는 논리고 이성이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발터우스 자작가라는 이름, 장남이자 후계자라는 타고난 지위뿐이었다.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실력?

작금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해 봐야 이제 고작 1년.

여전히 최하급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하급 이상은 됐던 앞선 기사들보다 모자란 실력인 것이다.

이런 그가 올라와 대역전극을 이끌어 낸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발터우스 기사들 꼴이나 안 나면 천만다행인 상황.

이런 벼랑 끝 상황에 그가 기댈 수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발터우스 자작가의 이름값뿐이었다.

“그래, 정 그게 소원이라면.”

철컥.

이에 내려가 있던 투구 바이저를 다시금 걷어 올려 주었다.

이번에는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끝까지.

내 얼굴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너, 너……!!”

르로이가 대경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큼은 드러난 얼굴로부터 내 정체를 또렷이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어찌 몰라볼 수 있겠는가?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 정체를.

르로이에게는 내 얼굴이 꿈에선들 잊힐 리 만무했다.

“오랜만이야, 르로이. 바르코스 요새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처음이니까, 대충 1년 만인가?”

“역시 맞았어! 라이오넬 라인하트, 네놈의 음모였던 거야.”

내 정체를 확인한 르로이는 확신을 굳혔다.

이 모든 게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라는 스스로의 생각에 대한 확신.

놈의 의심은 비단 나에서 그치지 않았다.

영지 간의 문제로까지 발전해갔다.

“아니, 우리 발터우스를 노린 라인하트의 수작질이겠구나. 그래, 아무것도 아닌 일개 차남 따위가 감히 발터우스의 후계자인 나에게 단독으로 음모를 꾸밀 수 있을 리 없지. 라인하트 자작이 시키더냐? 다음 대 발터우스 자작인 나를 노리라고?”

“소설은 적당히 써. 벌써 잊은 건지 아니면 잊은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먼저 시비를 걸어 온 쪽은 분명 너와 발터우스였다.”

물론 착각도 이런 착각이 또 없었다.

매튜가 판을 짜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르로이의 정체를 확인한 직후의 이야기.

그전에는 이런 일이 펼쳐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발터우스의 행렬과 조우한 것부터가 완벽한 우연의 산물인데, 계략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계략이란 말인가?

설령 마주침이 우리의 계략이었다 해도 마찬가지.

먼저 시비를 걸어 온 쪽은 결국 르로이와 발터우스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한 책임소재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니까 괜한 억지 그만 부리고 조용히 가던 길이나 가. 아, 물론 저 마차들은 모두 그대로 두고 몸만 가야겠지?”

더구나 빼도 박도 못할 물증까지 있는 상태였다.

대전사 결투의 방식과 조건 등을 명문화한 문서.

르로이의 인장까지 찍힌 이 문서를 매튜로부터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르로이의 눈앞에 대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 흔들림에 맞춰 르로이의 동공 역시 떨림을 멈추지 못했고 말이다.

다만, 르로이는 아직 그의 앞에 주어진 냉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다.

그가 최후의 발악을 시전했다.

“이건 사기야! 처음부터 네놈이 얼굴을 드러내고 정체를 밝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네놈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시끄럽고.”

그러나 더는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귀찮았다.

어차피 한번 우기고 억지 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일.

그냥 가볍게 씹어 주는 게 상책이었다.

이 이상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으니까.

“지금 너한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네 기사들처럼 나랑 싸우는 노력이라도 해 보든가, 아니면 곡식은 내려 두고 몸이라도 성히 아카데미로 가든가.”

스륵~

굳이 더 말로 할 필요 없었다.

해서 르로이의 목덜미에 가볍게 검을 들이밀었다.

발터우스 영지를 들먹이는 르로이에게 내 얼굴을 드러낸 것?

물론 뒷일을 생각한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일개 평기사들을 박살 내는 것과 정식 후계자를 그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르로이를 기사들처럼 박살 내 놓을 시 문제가 커지는 것은 기정사실.

이를 피하고자 하는 생각도 분명 어느 정도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단, 그 정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귀찮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로 영지전까지 비화된다?

귀찮기는 해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발터우스 자작가 따위에 패배한다는 것은 농담조차 성립되지 않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에릭스와 영지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초토화시킬 수 있었으니까.

만약 르로이가 지금 자신의 목에 겨눠진 검을 무시하고 끝까지 저항한다면, 결말은 분명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확신할 수 있었다.

르로이는 절대 저항할 리 없었다.

“……알겠다.”

확신은 역시나 현실이 됐다.

르로이는 제 목에 겨눠진 검에 굴복했다.

저항?

그런 건 쥐똥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검이 겨눠진 그 순간, 르로이의 눈에서는 모든 의지가 소멸됐다.

몸 성히 아카데미로 가겠다는 단 하나의 의지만을 제외하고.

스르릉~

나 또한 르로이의 항복을 두말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항복조차 못 하고 기절한 발터우스의 기사들과는 경우가 또 달랐다.

이미 밝혔다시피, 문제가 비화됐을 시의 귀찮음도 한몫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존재했다.

나는 왠지 르로이가 밉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같잖기는 해도 크게 미울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바르코스 요새에서는 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룸으로써 나를 한껏 돋보이게 해 주었다.

나아가 오늘은 사네와의 연결고리까지 만들어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려 준 대가를 이리도 착실하게 지불한 것이다.

부가적으로 상당한 양의 곡물까지 넘겨주었다.

매튜라면 이를 단발적 이익에서 끝내지 않을 터.

즉, 라인하트 영지와 실크로 상단의 발전에 밑거름까지 뿌려 준 셈이었다.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 하는데,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짓이 저급해 좋아하기까지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덮어 놓고 미워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르로이, 네가 올해로 아카데미 3년 차지?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마주치겠네. 그럼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잘 지내 보자. 아니, 잘 지내 봅시다, 르로이 선배.”

그런 르로이에게 작별 인사도 잊지 않고 전했다.

아카데미 선배에 대한 예우로 가득 찬, 동시에 후배로서의 수줍음을 그득하게 담은 그런 정겨운 인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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