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밉지 않은 놈(2)
“인원은 5명이고, 승자연전 방식으로 진행한다.”
결투 방식에 대한 합의는 쉽사리 도출됐다.
각각 5명의 전사를 뽑아 순서를 정한다.
그리고 첫 번째 전사를 내보내 상대측 전사와 일대일 대결을 벌이게 한다.
여기서 이기는 쪽은 내려가지 않고 무대에 남아 상대측 다음 순번과 대결을 계속한다.
질 때까지 승부를 이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상대의 전사들을 전부 쓰러뜨린 쪽이 승리하게 된다.
양측의 합의 결과 도출된 것은 이런 승자연전 방식이었다.
사실 합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르로이가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실크로 상단 측에서는 그대로 수용했을 뿐이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대전사 결투의 방식에 부합하기도 했거니와, 매튜가 내건 조건을 르로이가 수락해 준 뒤였기 때문이다.
이 조건의 내용이란 것이 꽤 흥미로웠다.
매튜가 내건 조건은 대가성이 상당했다.
패배 시 몬스터 부산물 전면 몰수를 수용한 매튜는 르로이에게도 마찬가지 대가를 요구했다.
자신들의 승리 대가로 발터우스 상단이 이송 중인 곡물 전부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르로이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 조건을 수락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질 자신이 없었으니까.
현재 발터우스의 전력은 실크로 상단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강력했다.
발터우스 기사단 소속의 정식 기사만 셋에,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지 1년째인 르로이 본인까지.
웬 정체 모를 놈 하나 빼면 전부 용병 나부랭이에 불과한 실크로 상단 측과는 비교 자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투구 바이저로 얼굴을 가린 놈도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아무리 봐도 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락했다.
라이오넬과 연관된 놈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절망을 선사하기 위해서.
지금쯤 실낱같은 승리 확률과 그 대가를 곱씹으며 억지로라도 희망과 전의를 끌어 올리고 있을 터.
하나,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모두 부질없는 허망한 짓거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더 큰 절망과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부수적으로 추후 라인하트 영지에서 문제 제기 시, 반박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르로이가 매튜의 조건 수락을 통해 그린 그림은 이러했다.
단, 이게 다가 아니었다.
르로이의 노림수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네가 첫 번째 전사로 나간다, 사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많이 과분하기는 하다만, 어쨌든 너도 발터우스 성을 쓰는 사내 아니냐? 발터우스를 위하는 일에 응당 앞장서야지. 그래서 특별히 네놈에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다.”
급격하게 굳어지는 사네의 안색.
이것만으로도 르로이의 추가적인 노림수는 벌써 반 이상 먹혀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노림수란 결국 더러운 종자인 사네에게 공개적인 망신과 모욕감을 선사하는 것이었으니까.
“왜, 싫은 것이냐? 그렇다면 말해라. 아직 마나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네 처지를 한 번쯤은 고려해 줄 테니.”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진 사네의 표정을 보며 르로이가 이죽댔다.
사네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고 말이다.
현실이 그러했다.
발터우스 자작가는 태생이 기사 가문.
그런 만큼 영주의 직계가족이라 할지라도 검술 실력을 최우선적인 평가의 잣대로 들이밀었다.
한데 사네는 검술에 대한 재능이 처참할 정도로 모자랐다.
18살이 된 현재까지도 소드 유저조차 제대로 올랐다고 보기 힘든 상태.
그렇지 않아도 서자 출신인 그에게 가문 내부의 대우가 어떠할지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닙니다. 나가겠습니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구나.”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기는 하나, 사네는 끝내 거절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나가봤자 망신만 당할 게 뻔한 대결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되려 이런 점이 르로이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생각한답시고 해 준 나름의 배려가 거절당해서?
아니었다.
르로이는 처음부터 사네를 배려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설령 사네가 거절 의사를 표한다 했어도 강제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처지를 한 번쯤 고려해 주겠다는 제안은 일종의 함정 같은 거였다.
사네가 나가지 않겠다고 했을 시, 비열하고 배알도 없다는 등의 욕설을 한 번이라도 더 먹여주기 위해 설치해 둔 쥐덫 같은 것.
하지만 사네는 끝내 피해 갔다.
예전부터 그래 왔다.
르로이의 속내를 간파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최후의 덫에는 꼭 걸리지 않고 빠져나가는 사네였다.
르로이는 이 점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그럼 첫 번째 전사는 결정됐고, 마지막은 내가 나갈 작정이오. 남은 순서를 어떻게 짜는 게 좋겠소? 아무래도 두 번째가 가장 중요한 자리가 될 듯한데.”
물론 지금은 기분 상할 이유가 없는 상황.
비록 마지막 덫이야 피해 갔지만, 사네는 어차피 수렁에 빠진 뒤였다.
놈에게 가해질 공개적 망신과 모욕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괜한 찝찝함은 훌훌 털어 버리고 마음 편히 두 번째 전사나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공자님!”
“아닙니다, 저 로우나가 적격입니다. 공자님께서 손 쓰실 일 없도록 제가 알아서 깨끗이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저를 내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 델포이 공자님을 위해…….”
이 두 번째 순서가 중요한 자리였다.
모두가 빤히 알고 있었다.
사네의 실력으로는 상대가 용병이라 할지라도 힘들다는 것을.
그렇기에 두 번째가 사실상 선봉이나 다름없었다.
기껏해야 용병 나부랭이 다섯쯤 찜쪄먹지 못할 기사는 이 자리에 없었고 말이다.
한마디로 공을 독식할 수 있는 기회.
셋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에는 로우나 경이 하도록 합시다. 아무래도 저놈들에게는 확실한 교육이 필요할 듯하니.”
르로이는 셋 중에서 기사 로우나를 선택했다.
실력 때문은 아니었다.
실력이야 셋 다 고만고만했다.
선택의 기준은 성격이었다.
평소 성격의 더러운 정도와 손속의 잔혹함.
라인하트에 타격을 입히는 일이니만큼 이런 것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선택된 로우나는 그런 르로이의 기대를 확실히 만족시켜 줄 것으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말씀하신 대로 확실히 개조시켜 놓고 오겠습니다. 정신뿐 아니라 육체까지 전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역시 믿음직스럽구려, 로우나 경. 그럼 기다리고 있겠소.”
벌써부터 잔인한 미소와 함께 그 잔혹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로우나.
르로이는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이에 화답했다.
이로써 르로이가 그리는 그림의 스케치가 마무리됐다.
이제 화려한 채색 작업만이 그의 앞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 * *
“잘했어, 매튜. 연기력 장난 아니던데? 모르고 보면 정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것처럼 보이더라.”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매튜의 활약을 극찬했다.
사실 극찬도 모자랐다.
대전사 결투에 우리의 승리 조건을 추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 내용을 문서로 명문화시키기까지 했다.
발터우스 자작가 후계자가 쓰는 공식 인장이 떡하니 찍혀 있는 문서로 말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벽한 판 짜기.
오롯이 매튜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사전 언질 정도밖에 없었다.
접근해 오는 행렬이 발터우스 상단의 상행이고, 그 안에 르로이 발터우스가 포함돼 있다는 것.
먼저 확인한 사실의 단순 전달.
이게 다였다.
무언가를 나서서 더 해 줄 시간도 없었다.
그러자 매튜는 알아서 판 짜기에 들어갔다.
우선 녀석의 요청에 따라 나는 투구 바이저로 얼굴을 가렸다.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그러고는 이번 상행의 행수에게 간 매튜.
잠시 동안 본인이 행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말을 맞췄다.
그렇게 밑 작업을 마치자마자 발터우스 상단의 신지드라는 자가 수작을 걸어 오기 시작했다.
되려 자신들이 덫에 걸려든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리하여 만들어 온 결과가 지금부터 펼쳐질 대전사 결투와 이를 명문화한 증명문서.
극찬조차 모자라다는 것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돈이 걸린 일이니까요. 별거 아니에요, 라이 경. 이 정도도 못 해서야 라이 경 옆에 서겠다는 다짐은 입 밖으로 꺼내지조차 말았어야죠.”
“별거 아닌 게 전혀 아닌데? 어쨌든 고생했어, 매튜. 여기서부터는 나한테 맡겨. 확실하게 벌어다 줄 테니까.”
“예, 라이 경. 부탁드려요.”
왠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은 현실이 됐다.
그렇다면 이제 그 현실을 한층 더 신나게 만들어 갈 차례.
그를 위한 제반 조건 마련도 어려울 것 없었다.
“대장, 대장과 대원들의 이름이 좀 필요할 것 같소. 물론 걱정은 말고. 이름만 빌리는 것일 뿐, 실제로 대장이나 대원들이 나설 일은 없을 테니까.”
나를 제외하고 전사 명단에 올릴 4명의 이름이 필요했다.
단, 말 그대로 이름뿐이었다.
어차피 나머지 4명이 무대에 오를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당연히 걱정 안 합니다.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라이 경께서 직접 나서시는데 제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영광이지요.”
“고맙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추후 사례하겠소.”
그리하여 크로나와 그가 지목한 세 명의 대원들이 내 뒤에 섰다.
제반 작업까지 마무리된 것이다.
발터우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금세 명단과 순서를 정하고는 우리 앞으로 와 섰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제 결투뿐.
우리 측에서는 당연히 내가 첫 번째 주자로 나섰다.
그리고 발터우스 측에서도 첫 번째가 앞으로 나섰다.
“음, 긴장을 좀 하신 듯한데…….”
한데, 이 첫 번째의 상태가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지나치게 경직돼 있었다.
물론 목숨이 오가기도 하는 대전사 결투이니만큼 긴장을 완전히 내려놓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발터우스의 첫 번째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려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나친 긴장은 독이었고, 이걸 어느 정도는 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럴 의무도 있었다.
“혹시 귀하가 발터우스 자작가의 사네 발터우스 공자입니까?”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네 발터우스였기 때문이다.
발터우스 영지의 차남이자 멸시당하는 서자, 그리고 나와 깊이 연관된 바로 그 인물.
“날 아시는지……?”
어디 알다 뿐이겠는가?
아는 것은 당연하고, 현재 그가 겪는 고난의 한 축을 내가 담당하기까지 했다.
원래라면 사네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1년 전 몬스터 웨이브에서 가문의 장자인 르로이가 비명횡사해야 했고, 사네는 그 자리를 대신하느라 한창 바빠야 했다.
이로 인해 회귀 전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원래라면 그래야 했을 사네의 운명은 180도 뒤바뀐 상태.
르로이는 아직도 살아서 떵떵거렸고, 사네는 구박데기 서자의 처지를 면치 못했으며, 그 연장 선상에서 아카데미로 향하고 있었다.
나의 회귀와 개입이 만들어 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이번 생에서 사네를 케어할 의무가 존재했다.
“아,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닙니다. 그저 소문으로 듣던 분을 직접 뵈니 반가워서 그렇습니다. 발터우스의 둘째 공자가 굉장히 영리한 분이라고 여러 차례 들었거든요.”
물론 이 의무를 당장 이행하기는 어려웠다.
생판 처음 보는 놈이 갑자기 너를 책임지겠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옳다구나 덥석 받아들이겠는가?
심지어 대전사 결투의 적으로 만난 상황에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다가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카데미 동기 생활이 예정되어 있으니 급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상황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대체 누구시길래…….”
“그건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일단은 주어진 상황부터 해결하도록 하죠.”
난 정말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최선을 다해 사네가 다치는 일 없이 안전하게, 패배의 과정에서 망신당하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이 대결을 끝낼 생각이었다.
마침 대결을 준비하며 서로 검도 빼 든 상황.
그렇다면 굳이 시간 끌 필요 없었다.
“그럼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팟!
스악~
챙강!
사네가 당혹성을 뱉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짓쳐 들어가서는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고, 사네를 빈손으로 만듦으로써 순식간에 상황을 종결지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첫 번째 결투가 끝난 것이다.
“…….”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사네.
기계적으로 검을 주워 뒤로 물러나는 순간까지 그는 다소 얼빠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럴 법했다.
처음 긴장했던 모양새로 보건대 패배 자체는 예감하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 과정에 수반되는 적잖은 육체적·정신적 고통까지도.
그런데 이건 뭐 그런 걸 느껴 볼 새도 없었을 터.
뭘 해보기도 전해 끝나 버렸으니까.
발터우스 진영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이게 맞는 건가 하는 반응이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패배 직후 사네에게 쏠렸어야 할 관심이 상당히 분산된 것으로 보였다.
의도가 먹힌 것이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 검술 면에서 부족한 사네를, 그것도 선봉으로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망신 주기 위한 것.
한데 대결을 순식간에, 그것도 완전히 허무하게 끝냄으로써 상당 부분 김이 새게 만들어 버렸다.
이로써 사네에게 쏟아질 예정이었던 멸시의 시선과 공개적인 구박의 강도는 대폭 경감됐고 말이다.
“모자란 놈! 어떻게 한 합조차 버티지 못하고…… 이래서 더러운 피가 섞인 놈은…….”
물론 많이 경감됐다는 것이지, 아예 소멸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 타이밍 늦춰지기는 했으나, 결국 르로이의 구박과 모욕은 사네에게로 쏟아졌다.
르로이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전사로 출전한 기사들은 물론이고, 매튜에게 열을 내던 신지드라는 놈을 비롯하여 상단 인원 중 일부마저 대놓고 멸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 전사인 발터우스 기사단 소속 로우나라고 한다. 나는 앞의 모자라고 허접한 전사와는 확연히 다를 테니 안심해라. 그럼 우선 정체부터 밝히도록 하지?”
특히 이 두 번째 전사라며 자신을 소개한 놈이 제일 심했다.
르로이를 제외하면 사네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멸시와 조롱을 내비치는 중이었다.
“내 정체라……. 하여간에 주인이나 개나 첫 만남부터 하는 짓거리가 완전히 판박이네, 판박이야.”
그래서 이 로우나라는 놈의 말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발터우스 놈들은 지금부터 그들이 멸시하고 조롱하는 첫 번째 전사와 확연히 다른 처지가 될 것이다.
차라리 사네가 백만 배쯤 나았다 싶을 그런 처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