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밉지 않은 놈
“그러니까 귀하의 상단에게 우리 몬스터 부산물을 전부 넘겨라, 이 말입니까?”
“말 좀 가려서 하지? 누가 들으면 우리가 강탈이라고 하는 줄 알겠군. 쯧, 이래서 근본 없는 상단이란…….”
“글쎄요, 근본 없게 행동하는 건 귀하의 발터우스 상단 같습니다만? 저 부산물들 최소로 잡아도 200골드가 넘는 양입니다. 그런 걸 오우거 하나 값도 안 되는 80골드에 가져가겠다는 게 강탈이 아니면 뭡니까? 이쯤 되면 상단이 아니라 도적단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뭐? 같은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반말을 …….”
실크로 상단의 책임자랍시고 나온 매튜라는 웬 어린놈 하나와 발터우스 상단의 행수인 신지드가 언성을 높여 갔다.
양상만 놓고 보면 매튜라는 놈은 여전히 차분하고 신지드 혼자 열을 내는 형국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형국이 어떠하든 어차피 천박한 것들끼리의 개싸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이 개싸움을 촉발한 장본인, 르로이 발터우스의 눈에는 그러했다.
상황의 시작점은 대략 10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올해 20살인 르로이는 아카데미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기 위해 왕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매년 그래 왔듯, 발터우스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지의 곡물을 한가득 실은 발터우스 상단을 이끌고 개선장군처럼 나아가는 길이었다.
발터우스 자작가의 정식 후계자인 그에게 이 정도야 숨 쉬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예전이었다.
이렇듯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을 있는 대로 누리며 순조롭게 진행 중이던 르로이의 왕도행.
그런데 이 행렬의 와중에 예년과 다른 특별한 상황 하나가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웬 상단의 상행이었다.
다 해서 30명가량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규모의 상행.
이 상단의 진행 방향이 발터우스의 그것과 겹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특별하다고 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길 위에서 상행끼리 진행 경로가 겹치는 것쯤이야 비일비재한 일.
지금껏 해 오던 대로 발터우스 상단이 먼저 나아가면 그만이었다.
규모도 작은 비루한 상단은 발터우스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한편에 찌그러져 조용히 기다리면 되는 것이고 말이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 비루한 상단의 특이점이 일의 당연한 진행을 방해하고 나섰다.
상단이 꾸린 짐이 문제였다.
상행의 크기와 꾸린 짐의 규모가 완전히 따로 놀았다.
짐의 부피가 마차를 꽉꽉 채우다 못해 밖으로 넘치려 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호위를 담당한 용병들조차 등에 한 짐씩 짊어지고 있을 정도.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눈길을 잡아끄는 광경이기는 해도 그저 한번 피식하고 웃어넘기면 그만인 수준.
눈길을 잡아끌다 못해 떼지도 못하도록 아예 못 박아 버리는 요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짐의 내용물.
몬스터 부산물이었다.
하나하나가 상당한 값어치를 지닌 각종 몬스터 부산물들이 마차와 등짐을 꽉꽉 채우다 못해 넘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오우거의 그것으로 보이는 부산물까지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대충 봐도 200골드 이상은 족히 받아 낼 수 있으리라는 신지드의 귀띔까지 더해졌다.
욕망이 불쑥 솟아오를 수밖에 없는 광경이랄까?
더구나 이런 르로이의 욕망이 활활 타오르도록 부채질하는 요소들까지 존재했다.
우선은 상단의 비루하기 짝이 없는 규모.
이미 인지했다시피 기껏해야 30명 남짓한 인원에 불과했다.
그중 전투원인 용병의 숫자는 고작 10명 정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약탈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뒤처리야 그냥 몬스터 아니면 도적 떼에게 몰살당한 것처럼 대충 꾸며두면 그만이고 말이다.
경로가 겹친 발터우스가 의심받기는 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명확한 물증만 남기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 될 것 없었다.
설령 실수로 남긴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비루한 상행이나 꾸리는 상단 따위가 감히 발터우스 자작가를 상대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재수가 없으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이어진 두 번째 요소가 이 간단하기 짝이 없던 일을 살짝 복잡하게 만들었다.
바로 상단의 정체였다.
이 역시 신지드의 귀띔으로 알게 됐다.
실크로 상단.
이것이 저 초라하고 비루한 상단이 달고 다니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르로이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굉장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재수 없다 못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라인하트 자작가와 관련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개자식, 마땅히 그가 가졌어야 할 모든 영광을 가로채 간 도적놈, 라이오넬 라인하트가 영지의 둘째 공자인 바로 그곳 말이다.
실크로 상단은 현재 라인하트 자작가의 직속이나 다름없는 상단.
막무가내로 건드렸다가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지도 몰랐다.
행동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르로이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신지드를 통해 알게 된 상단의 정체가 그의 욕망에 오히려 기름을 부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욕망은 단순히 금전적인 부분에 한정되지 않았다.
되려 금전적인 부분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저 상단에 손해를 입히고 싶었다.
그리하여 라인하트 영지에, 라이오넬 라인하트에게 타격을 주고 싶었다.
이것이 신지드로 하여금 실크로 상단에 수작질을 걸게 만든 욕망의 본질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십시오, 형님. 뒷일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이건 너무 무모해요.”
태클이 없지는 않았다.
르로이의 욕망 추구를 말리는 이가 발터우스 내에도 존재했다.
뒷일은 생각지 않는 무모한 짓이라는 것.
그의 동생이었다.
사네 발터우스.
발터우스 자작가의 차남이자, 르로이의 배다른 형제가 그에게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내가 네깟 놈에게 입을 열어도 좋다고 허락해 줬던가? 난 그랬던 기억이 없다만?”
“하지만 형님, 자칫 영지전까지 비화 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신중하셔야…….”
“역시 더러운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군. 더러운 제 어미를 닮아 비열하기 짝이 없어. 라인하트 따위에 겁이나 집어먹고, 꽁무니부터 빼는 꼴이라니, 쯧. 가문의 수치가 따로 없구나.”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디 더러운 서자 따위가 가문의 장자이자 공식 후계자의 결정에 토를 단다는 말인가?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착각하지 마라.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준다고 해서 네놈 따위를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네놈은 여전히 가문의 치부고 수치다. 내 앞에서 입을 열 자격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어차피 르로이는 사네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발터우스의 성을 허락해 줬다 하여, 하녀 출신 어미의 더러운 피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놈의 반대 의견 따위가 르로이의 귓등에라도 닿을 리 만무했다.
되려 그의 실행 의지만 더 타오르게 만드는 불쏘시개로 작용한다면 모를까.
“……알겠습니다, 형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대신 이번 한 번만 재고 부탁드립니다. 병력 규모 자체야 우리 발터우스가 크다고 하지만, 실력자 측면에서 많이 밀리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분명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네깟 놈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간단한 문제를 내가 고려하지 않았을 것 같으냐? 우리 뒤에는 크리스토퍼 1왕자님께서 계신다. 내가 그분의 최측근이야. 고작 라인하트 따위에 겁이나 집어먹을 계제가 아니란 말이다.”
사네의 문제 제기가 아예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라인하트 영지에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인 에릭스 브란부르트가 있었다.
그리고 꼴사납게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라이오넬 라인하트의 존재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놈이 오우거를 죽인 것은 르로이조차 부정 못 하는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병력의 양적인 측면에서는 앞설지 몰라도, 기사단 차원에서는 라인하트 영지에 밀린다는 사실 역시도.
그러나 르로이는 자신감이 넘쳤다.
사네에게 밝힌 대로였다.
르로이는 현재 왕국에서 다음 대 국왕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자, 크리스토퍼 1왕자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생활 덕분이었다.
르로이와 크리스토퍼 왕자 둘 다 올해로 20살, 즉 아카데미 동기인 것이다.
여기에 몇몇 조건과 상황들이 운 좋게 맞아 들어가며, 르로이는 크리스토퍼의 바로 옆에 설 수 있게 됐다.
따라서 무서울 것이 없었다.
여차하면 1왕자에게 지원을 요청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라인하트 따위에 겁먹을 이유가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제넘게 나대지 말고 입 닥치거라. 이게 네놈에게 해 주는 마지막 경고이니.”
그렇게 사네의 천하고 더러운 입 구멍을 강제로 닫아 버렸다.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르로이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개싸움 중인 아랫것들에게로 향했다.
양상은 여전했다.
상인으로서 나름 잔뼈가 굵은 줄 알았던 신지드가 성인도 안 된 어린놈에게 계속해서 열을 내는 형국.
이쯤 되니 르로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랫것들의 개싸움이든 뭐든 신지드로는 안 된다는 것을.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주아주 특별한 결정을 내렸다.
무려 르로이 본인이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원래라면 이런 아랫것들 싸움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고귀한 그가 말이다.
상대가 실크로 상단이었기 때문이다.
라인하트 영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
그런 곳이니만큼 르로이 본인의 손으로 직접 수렁에 빠뜨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라이오넬, 그 빌어먹을 놈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히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직접 나섰다.
“저 오우거, 너희들 것이 맞나?”
물론 그렇다고 하여 예의 따위를 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평민 따위에게 차릴 예의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또,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 역시 하등 중요치 않았다.
그저 본인 할 말만 뱉어가며, 강탈을 위한 약간의 명분 쌓기면 충분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우거가 네놈들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저희 것이 맞습니다. 분명한 실크로 상단의 소유물이니까요.”
“네놈들 따위가 저것을 어떻게 잡았지?”
마침 적당한 핑곗거리도 마련돼 있었다.
오우거라는 핑곗거리.
현재 실크로 상단이 보유한 전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오우거를 잡을 수 없었다.
딱 봐도 별거 아닌 평범한 용병 10명과 꼴에 기사 비스무리한 것인지 투구 바이저를 내리고 있는 웬 정체 모를 놈 하나.
기껏해야 이런 허접한 전력으로 오우거를?
지나가던 개가 웃을 헛소리였다.
사실 굳이 오우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마차에 실려 있는 놀과 오크 등 중형 몬스터 부산물만 예시로 들어도 충분했다.
저 전력으로는 절대 사냥 불가능한 숫자인 것이다.
“저희 실크로 상단은 라인하트 자작가의 거래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부산물들은 라인하트 자작가와 관련된 것이다?”
“그렇습니다.”
물론 사냥을 꼭 직접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라인하트 영지에서 잡고 거래만 실크로 상단에 맡긴 것이라면 문제 될 일 없는 상황.
“못 믿겠다면?”
“……??”
“최근 북부에 오우거가 출현했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다. 또, 정말 라인하트 자작가가 잡았다면, 이렇게 초라한 상행을 허락했을 리가 없지. 길 위에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하지만 르로이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영지를 보유한 귀족 가문의 정통 후계자.
이런 그가 트집을 잡고자 하면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 있어 사실 여부는 하등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 증명하도록. 저 부산물들이 정당한 네놈들 소유라는 것을.”
매튜라는 어린놈이 어떤 반박을 하더라도 소용없었다.
르로이가 마음먹은 이상, 결국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진정한 귀족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니까.
“증명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저 물건들을 장물로 간주하고 모두 압수한다. 동시에 네놈들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
결국 이것이었다.
르로이가 원하는 그림, 그리고 이제부터 실제로 펼쳐질 상황은.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튜라는 놈은 상황판단이 나름 빠른 편이었다.
잠시간 침묵에 빠져 있던 놈이 이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수용이었다.
물론 이것 말고 다른 길이 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빠른 수용 덕분에 결론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 점이 약간이지만 마음에 드는 르로이였다.
“방법이야 어차피 하나밖에 더 있나? 대전사 결투뿐이지. 그것으로 너희의 실력과 결백을 증명해라.”
이런 경우, 증명 수단 역시 하나뿐이었다.
바로 대전사 결투.
에펜시아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힘의 논리가 아주 짙게 밴,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만큼 깔끔한 방법.
결투를 벌여 승리한 자가 전부를 취하는 것이다.
결백이라는 명분은 물론이고, 물질적 대가라는 실리까지 남김없이 모조리.
“……알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매튜라는 놈은 이번에도 수용했다.
잔뜩 울상이 되어서는 억울해 죽겠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기색을 팍팍 풍겨 대기는 했으나, 결국 결론은 수용이었다.
불손한 태도로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르로이 입장에서도 너그러이 넘겨 줄 수 있었다.
라인하트 영지에 한 방 먹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좀 더 발악을 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야 철저히 짓밟을 때의 쾌감을 더 강렬하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재수 없는 라이오넬의 얼굴을 떠올리면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대신 저희도 조건을 하나 걸어도 되겠습니까?”
이런 르로이의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이 어린놈이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결투에 어떤 조건을 걸어 온 것이다.
조건을 다 들은 뒤, 르로이는 이를 내심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