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증명과 확인, 실험(3)
용병계에는 전해 내려오는 고언이 있다.
오우거를 마주친다면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붙잡히기 전에 자결해야 하니까.
마주치자마자 자결해야 그나마 편하게 죽을 수 있었다.
오우거에게 붙잡히는 순간 지옥이 시작된다.
오우거는 보통 사냥감을 단번에 죽이지 않는다.
사지를 하나씩 찢어 가며 천천히 씹어먹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음은 기정사실.
그렇다면 최대한 고통 없이 죽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오우거는 그런 존재였다.
용병들에게는 자연재해와도 같은 언터쳐블의 괴물.
그런 괴물을 만난 참이었다.
분명 겁이 나야 했다.
놈의 피어에 질려 오줌이라도 질질 싸 주는 것이 용병계의 고언과 상식에 부합하는 반응이었다.
“……일단 모인다. 모여서 놈의 돌진에 대비해.”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겁이 나지 않았다.
감당 못 할 상황에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상황 자체에 대한 긴장감은 더할 나위 없이 팽팽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크로나가 전투 준비를 지시한 것도 이런 현실 인식과 긴장감 덕분이었다.
그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였다.
“크롸롸라라~!”
크로나와 용병대원들의 침착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한 것일까?
오우거가 갑자기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있는 대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 포효를 타고 놈이 내뿜는 포식자로서의 피어 또한 더욱 진하게 전달됐다.
한층 더 치솟아 오르는 긴장감.
하지만 그뿐이었다.
역시 뒤따라야 할 견딜 수 없는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배제됐다.
어째서일까?
대체 어떻게 이리도 겁을 상실하게 된 것인가?
이런 종류의 의문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그때였다.
크로나와 용병대의 뒤편에서 웬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흐음, 역시 오우거까지는 무리인 건가?”
아는 인물이었다.
실크로 상단의 매튜가 라이 경이라고 부르는 한 기사.
다만 이게 다였다.
이름만 알 뿐 어디 영지 출신인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말 기사가 맞기는 한 건지 따위의 세부 정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했다.
딱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태까지 존재감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운 조용하디조용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그 조용하던 인물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중얼거림만이 아니었다.
그는 크로나의 귀뿐만 아니라 시선까지 잡아끌었다.
그가 뜬금없이 용병대의 앞으로 나선 것이다.
지금껏 검집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자신의 검을 빼 든 상태로.
그러고는.
파앗!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이제 포효를 끝내고 막 돌진을 위해 발을 구르려던 오우거를 향해서.
슈각!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상황은 눈 깜박할 새에 종료됐다.
오우거가 발을 구르는 소리도, 돌진으로 인한 진동 같은 것도 전해지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몸통에서 분리된 오우거의 머리통이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 * *
“라이 경이시죠, 지금 이 비정상적인 상황?”
매튜가 내게 질문을 던져 왔다.
다 알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눈빛과 함께.
“왜 그렇게 생각해?”
“몬스터 출현이 이렇게 빈번한 것만으로도 이상한데, 그때마다 라이 경께서 왠지 내심 미소지으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 내 표정이 그렇게 노골적이었나?”
“아니요,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저도 라이 경께 신경 쓰고 있지 않았으면 전혀 몰랐을 거거든요.”
매튜는 확실히 눈치가 빠르고 상황판단이 좋았다.
왕도로 향하는 길에 하루가 멀다고 몬스터가 출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웬만해서는 만나기 힘든 오우거까지 등장한 상황.
이 전례 없는 특이 사태의 주범이 나라는 걸, 내가 몬스터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걸 곧바로 알아챈 매튜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혹시 내가 상행에 손해를 끼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손해는커녕 되려 대박을 안겨 주셨죠. 저 이번 상행 마치고 나면 라이 경 덕분에 또 승진할 것 같은걸요?”
굳이 라인하트 영지군의 호위를 물리치고 매튜와 실크로 상단의 상행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바로 이 실험 때문이었다.
영지를 떠나기 전부터 이번 왕도 행에서 어둠의 정령력을 이용, 몬스터를 불러들이고 위압하는 등의 실험을 계획했었다.
그리고 실험 결과는 보이는 바와 같이 대성공.
몬스터와 관련된 어둠의 정령력 활용방안이 이로써 어느 정도 확립될 수 있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물.
그러나 여기서 끝내기에는 사소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분명 사소하기는 한데 굉장히 귀찮은,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는 사소하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는 그런 문제.
바로 뒤처리였다.
몬스터를 불러들이는 곳이 왕도로 향하는 가도 위이거나, 혹은 그 근처였다.
귀찮다고 그냥 모른 척했다가는 괜한 인명 피해를 초래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따라서 불러들인 놈들의 뒤처리는 필수.
상당히 귀찮은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내게 실전 수련이 필요한 상태도 아니니만큼 의미 없는 시간과 심력 낭비에 불과했다.
하여 나를 대신할 뒤처리 작업반이 필요했다.
단, 라인하트 영지군은 곤란했다.
몬스터를 불러들이는 것은 자칫 쓸데없는 오해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이능.
굳이 말이 돌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라인하트 영지군이 이 상황에 놓인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나를 떠올릴 것이고 말이다.
그들은 몬스터 감지와 관련된 나의 감각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보여 준 것은 감지와 회피 능력뿐이라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나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가 혹여라도 레몬드가 알게 된다면?
왠지 두통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가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대안을 선택했다.
마침 매튜와 실크로 상단이라는, 영지군에 버금가는 대안이 준비된 상태.
선택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상당한 양의 부산물을 안겨 줌으로써 매튜와 상단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도 가능한 옵션.
부산물 추출 후 이송과 거래 작업까지 고려하면 영지군보다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능에 대한 비밀유지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매튜에게 들키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매튜 개인의 눈치와 판단력이 만들어 낸 결과.
다른 이들에게 발각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더욱이 매튜가 이런 걸 떠벌리고 다닐 녀석도 아니고 말이다.
딱히 걱정할 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 잘 해 봐. 자주는 아니겠지만 한 번씩 장거리 이동할 일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널 부를 테니까.”
내 자그마한 약속에 기쁨과 감사를 표하는 매튜.
이렇듯 실험과 선택의 결과는 확실히 만족스러웠다.
이에 더할 나위 없는 흡족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저,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라이 경?”
그때 제3의 인물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 왔다.
“아주 맛있소. 고맙소, 대장.”
상행 호위를 맡은 크로나 용병대의 대장 크로나였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거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구해 드리겠습니다.”
오우거를 처리한 직후부터였다.
크로나가 내게 조금씩 말을 걸어 오기 시작한 것은.
특히 식사 때마다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내게 대접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다.
두어 번 그렇게 간을 보더니 이번에는 은근슬쩍 내 옆에 자리를 깔고 앉는 그였다.
딱히 불쾌감이 든다거나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나에 대한 경외가 엿보였으니까.
“지금도 충분하오.”
“그래도 저와 제 부하들의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시니 저희로서는 뭐라도 더 해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여 별다른 위화감 없이 가벼운 대화를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그렇게 대화가 조금 편해졌다 싶을 때쯤이었다.
크로나가 살짝 쭈뼛쭈뼛 대며 종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라이 경,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여쭤봐도 괜찮을지요?”
“괜찮소. 무엇이오?”
“제가 라이 경에 대해서 짐작한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나에 대해 묻기 위함이었다.
정확히는 나에 대해 그가 추측한 바가 맞는지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우거를 단칼에 베어 버리시는 걸 보고 이래저래 추려 봤습니다. 칼 밥을 오래 먹다 보니 생긴 직업병 같은 것이긴 한데, 어쨌든 그 결과, 슈라우드 북부에서 라이 경과 같은 신위를 갖추신 분들은 몇 되지 않았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분들은 브라이튼 바르코스 후작 각하와 에릭스 브란부르트 경 정도뿐이었지요.”
크로나가 확인 작업을 거치듯 내 얼굴을 한번 훑었다.
“하지만 그분들과 연관 짓기에는 라이 경께서 지나치게 어려 보이시더군요. 그러다가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최근 북부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신 신성과도 같은 분을요. 마침 라이 경의 연령대도 제가 떠올린 그분과 비슷하신 듯하여…….”
마지막으로 뜸을 들이는 크로나.
이내 본인인 추측한 내 정체를 밝히는 그였다.
“혹시 라인하트 자작가의 라이오넬 라인하트 공자님이 아니신지……?”
추측은 정확했다.
크로나는 내 정체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끄덕.
그리고 나 또한 애써 그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 와 부정한다고 해서 먹혀들 리 만무할뿐더러, 애초에 굳이 부정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든 정체를 숨길 생각이었다면 매튜에게 나를 라이 경이라고 부르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이와 라이오넬.
호칭부터가 내 본명을 연상하기에 딱 알맞았으니까.
처음에야 정령력 실험 과정에서 혹시 모르니 숨긴 측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계획해 두었던 실험도 모두 마무리한 뒤였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자 했던 약간의 이유마저 해소된 상황.
밝혀진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저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하면 될 뿐.
“역시 그러셨군요! 그럼 라이 경께서 바로 그 트윈 슬레…… 헙! 크흠.”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제 짐작이 맞았다는 사실에 환한 표정을 짓던 크로나.
북부를 떨친 내 칭호까지 읊는 그였다.
단, 그의 반응에는 지속성이 부족했다.
내 칭호를 읊다 말고 크로나가 갑자기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듯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이내 헛기침으로 마무리했다.
“밝히지 않고 계시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실 테지요.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해지실 뻔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솔직히 귀찮음을 감수한다는 게 조금 귀찮기는 했다.
한데 알아서 입을 다물어 주겠다 하니, 나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이런 성격과 눈치라면 제 휘하 용병들도 알아서 단속해 줄 것으로 예상됐다.
“그래 주면 고맙겠소, 대장.”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비밀 지키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생명의 은인이자 북부의 영웅이신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내 정체가 확실해지자 대화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나에 대한 존경과 찬양, 뭐 이런 간지러운 것들과 나를 둘러싼 소문으로.
“직접 뵙고 보니 알겠군요. 소문은 오히려 축소돼 있었습니다.”
“소문?”
“실제로는 라이 경보다 에릭스 경의 공이 더 크다는 소문 같은 것이 살짝 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라이 경께서 워낙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쓰셔서 그런 듯한데, 이제 깨달았습니다. 전부 헛소문이었다는 것을요.”
듣고 보니 나도 대충 아는 내용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소문이기도 했다.
16살짜리가 무려 트윈 헤드 오우거를 참살했다는데 누군들 쉬이 믿을 수 있겠는가?
에릭스가 다 차린 밥상을 숟가락만 얹은 내가 날름했다고 보는 편이 아무래도 더 자연스러웠다.
당시 바르코스 요새에 있던 몇몇, 예를 들면 르로이 발터우스 같은 녀석들의 시기 어린 입김이 더해진 측면도 분명 존재할 것이고 말이다.
다만 이 또한 굳이 바로 잡을 생각이 없어 가만히 두고 보는 중이었다.
어차피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면 자연스레 사그라질 시한부 소문에 불과했다.
그런 것에 시간과 돈, 심력 따위를 낭비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내 진짜 실력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천연 위장막을 스스로 걷어 내는 꼴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꼭 헛소문이라고는 할 수 없소. 에릭스 경은 물론이고 제프너 자작님과 게인 남작님의 활약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만, 이번에 뵙고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런 헛소문과 달리, 라이 경께서 지니신 신위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짜라는 것을요. 비록 제가 실력은 부족하지만 보는 눈만큼은 나름 정확하다고 자부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영광입니다. 이렇게 진짜 영웅을 모시게 된 셈이니까요.”
“…….”
이어지는 대화에서 부담스러움은 덤이었다.
내 실력을 일부분이나마 직접 확인한 크로나의 눈은 경외와 우러름을 있는 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한 채로 이러는 것은 회귀 전 경험을 보유한 나로서도 받아넘기기 쉽지 않은 일.
여기에 마치 제 칭찬이라도 되는 양 본인이 더 기뻐하는 매튜의 환한 웃음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음?”
그런데 이런 민망함 가득한 순간에서 나를 끄집어 올려 주는 의외의 변수가 등장했다.
“매튜, 여기서 잡담 그만하고 네 자리고 돌아가. 대장도 마찬가지요. 자리로 가서 준비하시오. 누가 오고 있소.”
“……??”
내 갑작스러운 말에 갸우뚱하는 두 사람.
그러나 내 말은 이내 진실로 밝혀졌다.
저 멀리서 짐을 잔뜩 실은 대규모 마차 행렬이 점점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매튜도, 크로나도 내 옆을 떠나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어?”
그렇게 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행렬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놀라움의 감탄사를 뱉어냈다.
어째 행렬의 정체를 내가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저거……?”
아니, 아는 행렬이었다.
확실했다.
그리고 덕분에 왠지 모를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분 좋은 예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