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증명과 실험, 확인
“이제 그 기행은 끝난 거야?”
이드리스의 부름에 영주 집무실로 온 나.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드리스가 다짜고짜 물어 왔다.
“기행이라니? 누누이 얘기했잖아, 엄연히 수련이라고.”
“어쨌든 그 이상한 수련인지 뭔지는 이제 더 안 하는 거야? 요 며칠 안 돌아다니고 성에만 붙어 있던데.”
내가 수련하겠다고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않으니 던진 질문이었다.
실제로 난 닷새 전부터 성안에 콕 박혀 있는 상태였다.
“응, 대충 끝났어.”
목표한 바를 전부 이뤘기 때문이다.
트윈으로부터 흡수한 마나를 전부 내 것으로 만들었고, 장장 1년에 걸친 노가다 끝에 정령석도 손에 쥐었다.
비록 쥐자마자 섭취해 버리는 바람에 곧장 사라지기는 했지만.
이 외에 생각지 못했던 부수적인 소득까지 얻었다.
더는 밖으로 나돌 필요가 없었다.
해서 성안에 틀어박혀 내 몸 안에 새로이 자리 잡은 정령력을 관조 중이었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언제쯤 얘기하는 게 좋으려나 타이밍만 보고 있었는데.”
“무슨 얘기?”
“라이, 너 이제 왕도 아카데미에 갈 나이인 건 알고 있지?”
에펜시아 대륙의 각국은 대개 자국 수도에 왕립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슈라우드 왕국도 이 일반적인 경우에 속해 있었다.
이에 따라 슈라우드 왕국의 영지 귀족들은 18살부터 3년간 왕도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필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한 사정이 아닌 한 가능하면 과정을 이수하는 편이었다.
귀족가 자제들이 대거 모이는 만큼 인맥 쌓기에 이보다 좋은 시간과 공간은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귀족으로서 사교계에 진출하는 첫걸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또, 인재들을 스카웃해 가기에도 최상의 조건이었다.
영지를 보유하지 못한 일반 귀족가 자제나 평민들은 아카데미에서 장장 6년을 수학한다.
더욱이 아카데미의 교수진은 왕국 전체를 통틀어 각 분야에서 유능함을 인정받은 이들로 구성돼 있으며, 교육 커리큘럼은 오랜 세월을 거쳐 체계화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의 6년 커리큘럼을 거쳐 무사히 졸업하는 인재라면 최소한 평균 이상은 해 준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유력 귀족가 자제들이야 집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을 테지만,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3년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드리스 또한 영지의 후계자로서 왕도 아카데미에 입학했었다.
단지 중간에 급작스레 영주 직위를 계승하게 되며 졸업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카데미라, 하긴 나도 갈 나이가 되긴 했지.”
회귀 전의 나도 아카데미를 다녔었다.
그리고 형인 이드리스와는 다르게 졸업까지 마쳤다.
이드리스처럼 중도에 그만둬야 할 사정이 없기도 했거니와, 설령 있었다 해도 내가 절대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카데미가 내 검술 실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회귀 전, 트윈이 출현한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에릭스가 유명을 달리했다.
이는 영지 전체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나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상실을 의미했다.
내 검술을 이끌어 줄 스승이 사라진 것이다.
한창 성장을 거듭할 시기에 스승의 부재는 실력의 정체를 넘어 퇴보까지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대안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카데미가 그 대안이 되어 주었다.
자칫 심각해질지도 몰랐던 시기에 아카데미 교수진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해졌다.
하여 아카데미는 나에게 좋은 추억을 선사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내가 가진 아카데미에 대한 이미지 역시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그래, 너도 이제 18살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야?”
“형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단,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이미지에 불과했다.
회귀와 함께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실력 향상 측면만 놓고 봤을 때, 이제는 아카데미가 나에게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차라리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지에서 수련하고, 겨울마다 바르코스 요새로 가 몬스터와 드잡이질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교수진보다도 내 경험이 더 풍부하고, 실력 또한 윗줄에 있으니 말이다.
“나야 네가 갔으면 싶지. 물론 네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꼭 검술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잖아. 가서 네가 견문도 넓히고 인맥도 쌓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단 말이지.”
“물론 어디까지나 선택은 네 몫이야. 나나 에일린은 네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고. 원래는 개인 수련 시간이 더 필요할까 봐 얘기를 꺼내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지 고민했는데, 때마침 끝났다니까 한번 물어보는 거야.”
“뭘 또 그런 걸로 고민까지 하고 그래? 그냥 물어보면 되지. 알았어, 갈게. 어차피 나도 갈 생각이었어.”
그럼에도 난 한 번 더 아카데미에 가기로 했다.
단순히 검술 실력만 따졌을 때는 갈 필요가 없었다.
되려 수련에 방해만 될 테니까.
아마 회귀 전의 검에 미쳐 살던 나라면 절대 가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 가치관이 바뀌었다.
내가 아닌 내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내 사람의 범주에는 회귀 전의 인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회귀 전의 나는 라인하트 영지에서만 활동했던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아카데미를 통해 연이 닿게 되는 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과 다시 연을 맺기 위해, 그리하여 이들을 내 바운더리 안에 들이기 위해서는 아카데미로 가야만 했다.
그럴 리 없었지만, 설령 이드리스가 영지 일을 도와달라며 붙잡았다 해도 억지로라도 갔을 것이다.
“잘됐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이것저것 준비 좀 해야겠다.”
“준비? 따로 준비할 게 있어?”
“당연하지. 아카데미에서 네 시중을 들 하인이나 왕도까지 가는 데 필요한 호위 병력 같은 것들. 은근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아.”
내가 예상보다 순순히 응해서일까?
나보다 이드리스가 더 신난 모습이었다.
아직 여유가 좀 있음에도 벌써 준비를 시작하려는 그였다.
“아냐, 형. 준비 안 해도 돼. 둘 다 필요 없어.”
하지만 나와 이드리스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딱 입학까지였다.
그 이외의 부분들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난 이런 부분에서 내 고집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시종이 뭐가 필요해? 아카데미에서 알아서 붙여 주는데. 그래서 아카데미에서도 하인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잖아, 이래저래 복잡해진다고.”
“그래도 귀족들은 보통 몇 명씩 데리고 가잖아?”
“귀하게 자란 귀족가 자제들이나 그렇지. 따지고 보면 내가 영지 귀족이기는 해도 그리 귀하게 자랐다고 보기는 어렵잖아. 그러니까 하인 안 붙여 줘도 괜찮아.”
영지에서 하인을 데리고 가면 은근히 신경 써 줘야 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기는 하나, 회귀 후의 내 성격상 무심하게 내버려 두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차라리 귀찮아질지도 모르는 요소는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편이 나았다.
“음…… 그럼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호위 병력도 필요 없다는 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날 호위하는 데에 병력 쓸 필요 없어. 그거 다 쓸데없는 인력 낭비에 돈 낭비야.”
“전혀 쓸데없지 않아. 당연한 거라고.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거기까지 너 혼자 가겠다는 게 말이 돼?”
“안 될 것도 없지. 솔직히 말해서 나 혼자 가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해. 형, 나 몰라? 나 이래 봬도 트윈 슬레이어라니까?”
“네가 실력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건 안 돼. 한 달 넘게 걸릴 여정은 단순히 검술 실력만으로 커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에릭스 경 정도 되는 실력자도 웬만해서는 혼자 다니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너를 혼자 보내? 절대 허락 못 해.”
사실 호위 병력 관련해서는 이드리스의 주장이 더 타당했다.
이름난 기사들조차 장거리 이동 시에는 호위를 달고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트윈을 잡은 이력이 있다고 하나, 대외적인 경험 측면에서는 아직 초짜를 벗어나지 못한 내가 왕도까지 혼자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드리스의 반대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난 여기서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왕도까지 가는 여정 중에 확인하고 또 실험해 봐야 할 것들이 있었다.
바로 새로 얻은 힘, 정령력에 관한 것이었다.
정령력은 회귀 전후를 통틀어 나 또한 처음 다뤄보는 이능.
현재 내가 지닌 다른 힘이나 경험, 능력들과 달리 정령력에 있어서만큼은 진정한 의미의 초짜라고 봐야 했다.
따라서 이 힘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과정은 라인하트 영지 내에서 이행하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또,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영지 병력과 함께 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호위 병력을 떨구고 가려 하는 것이다.
이드리스가 지적하는 검술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드리스를 설득해야 했다.
그가 내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도록.
다만, 말로는 힘들었다.
명분이나 타당성 같은 것들은 이드리스 쪽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증명하면 되겠네. 이렇게 하는 거 어때?”
따라서 나도 말로 할 생각은 버렸다.
대신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수락을 얻어 낼 작정이었다.
마침 그 수단도 이드리스가 알맞게 제시해 준 참이었다.
* * *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네 증명의 수단인 것이구나.”
에릭스.
현재 나와 연무장에 마주 서 있는 에릭스가 바로 그 수단이었다.
이드리스는 분명 제 입으로 말했다.
에릭스 정도 되는 실력자도 웬만해서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고.
이 말은 에릭스 이상 가는 실력자라면 웬만하지 않은 경우 혼자 다니는 것을 허락해 줄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했다.
물론 이드리스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겠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또, 어떤 의도였든 이드리스 본인이 내뱉은 말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곧장 업무 중인 에릭스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그를 영주 전용 연무장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방금 막 자초지종을 설명한 참이었다.
어느 정도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핵심은 에릭스가 인식한 그대로였다.
그가 내 증명의 수단이었다.
대련의 유일한 관전자가 될 이드리스에게 에릭스 이상 가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내가 한 요청의 수락을 얻어 내겠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신 이 방식은 기저에 한 가지 전제를 깔고 있었다.
바로 자신감.
내가 에릭스보다 강하다는, 혹은 최소한지지 않을 수는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에릭스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에릭스 경께서도 제 정확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셨잖아요. 서로에게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고 벌인 판이었다.
그리고 에릭스의 실제 반응은 나의 이런 짐작에 부합했다.
그는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스르릉~
내 말에 지어지는 가벼운 미소, 지체 없이 뽑혀 나오는 그의 검이 그 증거였다.
나를 향해 똑바로 겨눠지는 검첨 역시도.
그럴 만했다.
내심 상당히 궁금했을 테니까.
에릭스가 추정하던 내 실력은 기준이 불명확하지만 소드 익스퍼트 중급을 넘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차례 나와 진한 대련을 펼쳐 봤던 그이기에 가능한 추정.
그리고 이 추정은 실제로도 거의 들어맞았었다.
한데, 그런 내가 트윈을 처치했다.
기절 직전까지 함께 트윈에게 이런저런 상처들을 남겼다지만, 다른 이는 몰라도 에릭스는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트윈의 상처가 심각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따라서 트윈은 나 혼자 쓰러뜨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의문을 품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정답의 키를 쥐고 있는 나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대충 얼버무릴 뿐이었다.
더구나 트윈의 마나를 흡수하며 정기신이 불안정해진 상태이기까지 했다.
가장 확실한 수단인 직접 대련도 사용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렇다고 에릭스가 이런 것으로 나를 재촉할 성정이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에릭스는 그럴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저 내가 답을 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뿐.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토록 기다리던 의문 해소의 기회가 찾아왔다.
에릭스 입장에서도 기분 나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조건이 걸렸다는 사실?
이 또한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이 없었다.
조건이 걸린 만큼 내가 더더욱 이 대결에 진심을 실을 테니까.
“그럴지도.”
이렇게 에릭스의 명시적인 동의와 함께 우리의 대련이 성사되었다.
근 1년 반 만에 펼쳐지는 사제지간의 재대결.
“대신 조심하거라. 이번에는 나도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것이니.”
그리고 이 2차 대결에서 에릭스는 대놓고 전력투구를 선언했다.
1차 대결의 승패, 그 이후에 펼쳐진 다이내믹한 상황 등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
비단 선언만이 아니었다.
구우우우웅~
실제 행동이 곧바로 뒤따랐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아니 이제는 그 위를 넘보는 중인 오러가 에릭스의 검을 둘러싼 것이다.
더욱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가 마주하여 자세를 잡은 직후,
파앗!
슈아악~!
먼저 짓쳐 들며 선공을 취하는 에릭스였다.
그렇게 대결이 시작되었다.
* * *
“너…….”
대결이 끝났다.
이번에도 승패는 명확했다.
여전히 검을 쥐고 있는 나와 빈손인 에릭스.
결과 또한 1차 대결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에릭스의 반응.
1차 대결 때도 놀란 반응을 보이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라이, 너 설마……?”
에릭스가 품게 된 어떤 추정.
1차 대결과 달리 압도적인 격차가 불러온 내 경지에 대한 어떤 추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에릭스의 반응에 나는 화답을 주었다.
입가에 작은 호선을 그림으로써.
“……!!!”
그의 추정을 바꿔 준 것이다.
완전한 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