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일단락
디카프리 델로나 후작.
슈라우드 왕국 전체를 통틀어 단둘밖에 없는 소드마스터 중 하나인 그는 현재 카르가디아 산맥에 들어서 있는 상태였다.
원래라면 그의 입산은 한나절, 정 안 되면 반나절이라도 뒤로 밀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불과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그가 있던 곳은 슈라우드의 남부 최전선인 이베리아 영지.
바이젠 왕국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베리아 지역에서 한창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한 달 전, 바르코스 후작으로부터 급하게 도움 요청이 들어왔고, 이에 남부의 일을 잠시 미뤄 둔 채 곧장 북부 바르코스 요새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즉, 남부 끝에서 북부 끝까지 왕국을 종으로 한 달 만에 가로지른 것이다.
아무리 디카프리가 초인인 소드마스터라 해도 피로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따라서 바르코스 요새 도착 후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임무를 위한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이것이 더 바람직했다.
그러나 그는 단 일 분도 쉬지 못했다.
아니, 아예 바르코스 요새에 발을 들여 보지조차 못했다.
요새를 채 30분도 남겨 두지 않은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 곧장 카르가디아 산맥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요새 사령관인 바르코스 후작의 부탁이 있었다.
트윈을 감시·견제하던 정찰대가 위기에 빠졌으며, 이들을 급히 구해야 한다는 것.
오랜 친우가 요새 밖까지 다급하게 뛰쳐나와 간곡하게 건네 오는 부탁이었다.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그리하여 산맥 내부를 빠른 속도로 헤쳐 온 참이었다.
다행히 정찰대를 찾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정찰대가 남겨둔 표식을 따라가니 트윈의 레어를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레어에서부터는 더 쉬웠다.
애초에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트윈의 무지막지한 흔적을 그대로 쫓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더욱이 흔적 주변으로는 몬스터들이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가 그 악명 높은 카르가디아 산맥 안이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빠르게 정찰대와 트윈의 전투 지점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급히 달려오면서도 디카프리는 내심 가망이 없다고 여겼다.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근 수십 년간 출현한 적이 없기에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그런 유니크한 괴물 말이다.
그리고 기록은 전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를 인간의 기준으로 따지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이상이라고.
소드마스터를 넘어서지는 못한다지만, 이미 이것만으로도 놈을 재앙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당장 소드 익스퍼트 상급 하나, 중급 하나, 4서클 마법사 하나, 그리고 오우거 슬레이어라고는 해도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어린 공자 하나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커다란 재앙.
그래서 정찰대 전원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그가 대신 트윈의 목을 베어 줌으로써 그들의 넋이라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심정이었다.
현재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두 눈에 직접 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음……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건 아니신 듯합니다, 각하. 각하께서 보고 계시는 광경이 제가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디카프리의 혼잣말에 그의 부관인 스콧 보리스가 답변을 주었다.
덕분에 확인할 수 있었다.
디카프리가 보고 있는 광경은 결코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4명 모두 숨을 쉬고 있습니다. 정찰대 전원 생명에는 이상 없습니다!”
때마침 정찰대원들의 상태를 확인한 부하들의 보고까지 더해졌다.
이로써 명료해졌다.
적잖은 부상들을 입기는 했으나 어쨌든 전원 생존한 정찰대.
그와 완벽한 대비를 이루며 심장에 검이 꽂힌 채로 숨을 거둔 트윈 헤드 오우거.
즉, 정찰대만의 힘으로 규격 외 괴물을 처치한 것이다.
그 어떤 희생도 없이.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따라서 여기까지만으로도 놀라 자빠지기에 충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카프리는 그러지 않았다.
“정말 헛것이 아니라는 건데, 그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저도 각하와 같은 심정입니다. 고작 16살이라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스콧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반응 또한 디카프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제대로 놀라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정찰대가 트윈을 잡았다는 사실조차 가벼운 해프닝으로 만들어 버리는 말도 안 되는 광경 때문이었다.
“라인하트 자작의 친동생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영지 둘째 공자라고 합니다.”
트윈의 사체 위, 정확히는 가슴팍 위에 널브러져 있는 한 청년.
사실 아직 청년이라기에는 앳돼 보이는 그가 원인이었다.
라인하트 영지의 둘째 공자라는 그가 저곳에 널브러져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트윈의 심장에 꽂힌 검 바로 옆에.
심지어 성년도 되지 못한 16살의 어린 나이로.
이래서야 16살짜리 애송이가 트윈 헤드 오우거를 마무리했다는 의미로밖에 해석이 안 되지 않는가?
물론 전투 과정에서 정찰대의 다른 이가 지대한 공을 세웠고, 라인하트 자작의 친동생은 운 좋게 마무리 일격으로 숟가락만 얹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나, 설령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트윈에게 마무리 일격을 날릴 수 있다는 것,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말문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어떤 상황이 됐든 애송이 공자가 트윈 헤드 오우거를 마무리했다는 결과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또, 어떤 과정을 거쳤다 해도 이 결과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디카프리와 스콧 모두 현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너무나도 현실성 떨어지는 광경이고 결과였기 때문이다.
“라이오넬, 라이오넬 라인하트라…….”
대신 나직이 읊조릴 뿐이었다.
이 신화와도 같은 광경을, 결과를 만들어 낸 주인공의 이름을.
* * *
사실상 웨이브가 끝났다.
물론 소규모로 한 번씩 전투가 펼쳐지고는 있으나, 이 정도는 웨이브 이외의 시기에도 심심찮게 있는 일.
바르코스 후작령 단독 전력으로도 얼마든지 처리 가능한 수준에 불과했다.
따라서 웨이브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전후 처리 및 논공행상을 할 차례.
그 어느 때보다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몬스터 웨이브였다.
전투로 희생된 병력이 상당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몬스터 사체 또한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
여기서 쏟아져 나올 몬스터 부산물의 양과 액수는 대충 어림짐작만으로도 천문학적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전후 처리와 논공행상을 논의하는 자리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는 것 역시 너무나도 당연했다.
르로이 발터우스는 현재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발터우스 자작가의 후계자로서 그간의 주요 회의에도 참석해 왔던 만큼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발언권도 나름 약하지 않은 편.
다만 그동안은 스스로 발언을 자제해 왔다.
나이 때문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18살에 불과하기는 하나, 자작가 후계자의 지위라면 나이 따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영주나 영지의 후계자가 직접 요새까지 온 경우는 드물었고, 그런 만큼 르로이와 발터우스 영지는 희소성을 확보한 셈이었으니까.
이유는 한 가지였다.
무서워서.
분별없이 나대다가 쓸데없이 위험한 임무라도 맡게 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해서 주요 회의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혜안에 스스로 감탄을 금치 못하던 참이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덕분이었다.
알량한 실력만 믿고 쓸데없이 나대다가 꼴 좋게 정찰대 임무에 투입된 그 멍청한 놈.
죽을 자리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간 라이오넬, 그 천치 놈을 떠올릴 때마다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상쾌해지던 르로이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 각하?”
어차피 오늘 회의에서는 입을 열 작정이었다.
웨이브도 끝났겠다, 목숨이 간당간당 한 임무에 투입될 가능성은 전부 사라진 상황.
무엇보다 몬스터 부산물에 대한 권리를 배분하는 자리였다.
가죽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는 영지 후계자인 자신이 직접 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강조에 있어 당사자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안은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반드시 입을 열 생각이었고, 지금 막 그렇게 한 참이었다.
문제는 그 방식과 내용 모두 르로이가 원하고 계획했던 방향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었지만.
“무슨 말이냐니, 르로이 공자? 내 말이 어려웠나? 몬스터 부산물 배분과 관련해 공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겠다는 것뿐인데.”
“아무리 공적을 반영한다 해도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지나치게 과합니다. 대형 몬스터 부산물 소유권 1/3로도 모자라 그 종류 선택권까지 최우선 보장이라니요? 라인하트 영지의 공적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과합니다.”
원래 계획은 강조였다.
후계자인 자신까지 직접 참여한 발터우스 영지의 특수성 강조.
그리고 이를 통한 최대한의 부산물 권리 확보.
그런데 실제 그가 낸 목소리는 시작부터 의문과 부정의 뜻을 담고 말았다.
계획이 초장부터 완전히 꼬여 버린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기는 했다.
라인하트 영지가 이번 웨이브에서 상당한 공을 세웠다는 건 아무리 억지 부린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라이오넬을 떠올릴 때마다 상쾌해지던 기분이 다시 시궁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르로이의 관점에서 후작이 선언한 보상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과하다? 대체 어떤 면에서 과하다는 건가? 난 오히려 이것도 세운 공에 비해 많이 모자라다 생각했는데?”
“라인하트 영지가 적잖이 활약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번 웨이브를 라인하트 영지 혼자 막아 낸 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실질적인 병력 피해도 라인하트 영지가 가장 적고요.”
“그야 라이오넬 공자가 활약한 덕분 아닌가? 그게 불만이라면 자네도 라이오넬 공자처럼 솔선수범했으면 될 일. 딴지 걸 만한 요소는 아니라고 보이네만?”
“그, 그렇다 해도 목숨값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저희 발터우스를 비롯한 북부 영지들 모두 요새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공적도 공적이지만 이곳에서 희생한 목숨의 값어치 역시 고려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평성 차원에서라도요.”
“자네는 아무래도 말로만 라인하트 영지의 활약을 인정하는 모양이군. 실제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어. 공적도 공적 나름이어야 형평성을 따지든 말든 할 거 아닌가? 라인하트 영지가 세운 공은 이미 그런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어.”
하지만 과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르로이의 관점에 불과했다.
바르코스 후작의 관점은 르로이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라인하트 영지에서는 둘이나 목숨을 걸고 정찰대 임무에 나섰네. 심지어 그 둘은 영지 기사단장과 영주의 친동생이고. 영지의 현재와 미래를 전부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데도 목숨값 같은 걸 운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아가 후작은 르로이의 관점을 못마땅해하는 기색까지 역력했다.
르로이를 쏘아붙이는 말투에서 그것이 대놓고 드러났다.
“어디 그뿐인가? 이번 웨이브의 원흉인 트윈 헤드 오우거까지 처리했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아 소드마스터까지 불러오게 만든 그 무지막지한 놈을. 사실상 이번 웨이브를 라인하트 영지 홀로 마무리 지었다고 봐야 할 지경이야. 솔직히 공적만 따지면 배를 더 얹어 줘도 모자라지만, 자네가 말한 그 형평성을 고려해 이 정도에서 멈춘 것일세.”
후작만이 아니었다.
회의에 참석한 주요 인사 중 대다수가 르로이의 관점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야 상당한 물질적 이득이 걸린 문제에 이처럼 입만 꾹 다물고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이라고 욕심이 없을 리 만무했다.
다만 라인하트 영지의 공적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이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기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어차피 그 두 사람만 활약해서 잡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찰대 전체가 힘을 합쳐서…….”
“자네가 말하는 그 정찰대가 다 해서 한 100명쯤 됐던 모양이지?”
이에 당황한 르로이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스스로 말을 던져 놓고도 아차 싶은 자충수를.
“아니, 고작 4명이었네. 요새 내 모든 인원에게 기회를 줬음에도 고작 4명이었어. 더구나 먼저 깨어난 제프너와 게인 프루다 남작이 증언까지 하지 않았나? 트윈을 잡은 건 사실상 라인하트 영지의 두 사람이라고. 본인들은 전투 초반에 기절해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고 말이야. 이런데도 내 처사가 과하다고 생각하나, 르로이 공자?”
“…….”
아무리 르로이의 낯짝이 두껍다 해도 이건 반박이 불가했다.
하여 그조차도 결국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라인하트 영지에 대한 보상에 불만 있는 사람 또 있나? 있다면 지금 얘기하도록. 오늘 이후로 더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없을 테니까.”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지 못했다.
“없나 보군. 그럼 라인하트 영지 건은 이렇게 확정 짓고 넘어가는 것으로 하지.”
이리하여 보상 문제는 완전히 결론 나고야 말았다.
라인하트 영지에 눈이 휘둥그레질 수준의 부산물이 배정되는 것으로.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시궁창 같던 르로이의 기분을 아예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