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제프너 바르코스(2)
“알았다. 전군, 즉시 이동한다.”
척척척.
그런데 웃기지도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
에릭스가 이 어린놈의 훼방을 꾸짖기는커녕 전격 수용해 버린 것이다.
에릭스만이 아니었다.
에릭스 휘하의 라인하트 영지군은 한술 더 떴다.
그들은 에릭스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부터 이동 준비를 시작했다.
정확히는 어린놈의 훼방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였다.
그리하여 에릭스의 명령 하달과 휘하 병력의 명령 이행이 동시에 진행되는 기현상이 초래됐다.
그럼에도 라인하트 측의 누구 하나 의문이나 불만을 표하는 이가 없었고 말이다.
“자작님과 바르코스 기사단도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심지어 에릭스는 이 기현상의 적용 범위를 제프너와 기사들에게까지 넓히려 했다.
제프너의 의구심은 당연히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 어린놈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과민반응한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릭스 경, 대체 왜 이러시는 건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이유는 알아야 저도 뭔가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으로 머잖아 커다란 규모의 몬스터 떼가 몰려올 겁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징후도 없지 않습니까? 포착되는 게 전혀 없는데, 저 어린…… 아니, 저 친구 말만 믿고 무작정 움직이는 건…….”
“제게 비결을 묻지 않으셨습니까? 간단합니다. 바로 저 아이입니다. 라이오넬 라인하트, 저 아이의 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덕분에 사상자를 하나도 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제프너의 시선이 다시금 예의 그 어린놈, 이제는 정체를 알게 된 라이오넬 라인하트에게로 향했다.
그도 얼핏 들어 본 이름이기는 했다.
검에 매진한다는 라인하트 영지의 둘째, 딱 이 정도에 불과했지만.
바르코스 요새에서 전사한 전대 라인하트 자작과 에릭스에 대한 호감에서 파생된 관심이기에 이게 다였다.
그 이상은 따로 전해 들은 바도 없었다.
그런데, 딱히 알려진 바도 없고 어린 티까지 풀풀 풍기는 영주 동생이 비결이다?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작님. 라이오넬 라인하트라고 합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라이오넬이 제프너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해 왔다.
그러더니 제프너의 답례는 듣지도 않고 곧장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용건부터 밝히는 무례를 범합니다.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
“제가 못 미더우시거든 에릭스 경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에릭스 경이 허튼소리나 늘어놓을 분은 아니라는 거, 자작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제프너는 분명 에릭스에게 인간적인 호감, 그리고 호감에 기반한 신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식에 심히 어긋나는 상황에서조차 역정보다는 파악에 주력하는 것도 온전히 에릭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 에릭스 경께서 내리신 결정입니다. 그러니 자작님께서도 믿음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라이오넬의 강한 요청.
제프너가 다시 한번 에릭스를 바라봤다.
끄덕.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릭스.
라이오넬 못지않은 강한 바람과 확신이 느껴지는 끄덕임이었다.
이에 제프너가 결정을 내렸다.
“……에릭스 경을 믿겠습니다. 기사단 전원 라인하트 영지군과 보조를 맞춰 이동한다.”
라이오넬을 믿는 에릭스는 믿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동 준비는 짧게 끝났다.
어차피 행군 중에 만나 잠깐 멈춰 섰던 상황에 불과했으니까.
그리하여 다시금 바르코스 요새로 향하는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라인하트 영지군과 제프너 일행.
8명의 바르코스 기사들이 각각 4명씩 나뉘어 좌우에서 라인하트 영지군을 보호하는 형태로 행군이 이어졌다.
에릭스와 라이오넬, 그리고 제프너는 선두에서 행렬을 전체적으로 이끌었다.
덕분이라고 하기는 뭐했지만 어쨌든 제프너 입장에서는 비결에 대해 재차 물을 수 있을 기회를 얻은 셈.
“에릭스 경을 믿고 일단 따르는 중이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습니다. 대체 둘째 공자의 그 감이라는 게 뭐길래 이렇게까지 전적으로 신뢰하시는 겁니까?”
하여 앞서가는 라이오넬의 등을 바라보며 에릭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비결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인지 등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가이드라인을 확보한 상태였다.
따라서 질문의 방향도 좀 더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사실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거라고는 최근 라이가 수련 중 마나 폭주를 겪어 죽다 살아났다는 점, 그 뒤로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점과 몬스터의 접근을 미리 알아채는 감각이 생겼다는 점뿐입니다.”
“그게 전부인 겁니까?”
“자작님께는 죄송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저 역시 이전까지는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인지라 말로 설명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자작님께서도 직접 겪어 보셔야 이해 가능하시리라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흐음…….”
그러나 명확해진 것은 없었다.
있다면 라이오넬이 감을 얻은 경위 정도?
하나 그마저도 지독한 우연의 산물이었기에 비결을 파악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 경로로 쭉 가다 보면 놀 떼가 출현할 겁니다.”
“경로를 틀어야 하는 것이냐?”
“아니요, 다른 경로도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놀 떼와 조우하는 현 경로를 유지하는 게 나아요.”
비결 파악의 기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라이오넬이 놀 떼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제프너의 시야나 기감에는 무엇 하나 잡히는 게 없었다.
하면 이보다 적합한 확인의 장은 또 없을 터.
더구나 라이오넬은 단순 예고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신 전투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을 끌다가는 자칫 여타 무리까지 불러들여 포위당하기 십상이에요. 종심돌파 해야 합니다.”
행군의 경로뿐 아니라 구체적인 작전까지 설정해 가고 있었다.
“해서 자작님께 요청드립니다. 현재 좌우로 펼쳐져 있는 기사들을 한 곳으로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돌파 대형을 구성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는 행로의 결정보다도 한 차원 더 나아간 문제였다.
여기서 라이오넬의 작전을 수락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감만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뿐만 아니라 그에 기반한 총체적인 판단력까지, 한마디로 라이오넬이라는 인간 자체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하여 제프너는 다시 한번 에릭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묻기 위함이었다.
정말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겨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끄덕!
에릭스의 고개 또한 다시 한번 끄덕여졌다.
앞선 그것보다 더 확실하게.
“기사단 전원 선두로 집결! 돌파 대형을 짠다.”
제프너는 이번에도 따라 주기로 했다.
지휘권까지 내주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어차피 금세 진위가 가려질 테니까.
끝내 라이오넬의 예고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되찾아 오면 되는 일이었다.
더불어 라인하트 영지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함께.
안타깝지만 그때는 에릭스의 판단력까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제프너의 명령에 따라 퍼져 있던 기사들이 빠르게 집결했다.
그리고 라이오넬의 등 뒤에서 돌파 대형을 형성했다.
일종의 선언 혹은 압박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라이오넬에게 뒤는 없다는 뭐 그런 종류의.
그렇게 대형이 만들어진 채 행군이 이어졌다.
“…….”
한데 이 행군의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돌파 대형이 완성된 뒤로 벌써 3분가량 흘렀다.
아무런 충돌도 없는 상태로 말이다.
라이오넬이 예고했던 놀은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에릭스 경.”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비정상을 정상으로 환원시킬 때라는 것이 제프너의 판단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그만…….”
“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저 멀리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한 몬스터의 실루엣이 판단의 오류를 증명하고 있었다.
“……정말이었군.”
시시각각 가까워짐에 따라 100% 확실해졌다.
실루엣의 정체는 놀.
라이오넬이 예고한 그대로였다.
따라서 이제는 완벽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트 영지군의 비결은 영지의 차남, 라이오넬 라인하트라는 사실을.
“의심했던 것을 사과하겠네, 라이오넬 공자. 미안하네. 에릭스 경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 있어 제프너는 나름 쿨하다 자부하는 편이었다.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확실히 인정하고 곧바로 사과하는 것.
이것이 아버지 바르코스 후작의 가르침이자, 제프너 본인이 생각하는 남자다움이었다.
제프너는 이 남자다움을 추구했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뒤로 물러나게. 여기서부터는 나와 바르코스 기사단이 맡지.”
남자다움을 보여 줬다면 이제는 기사다움을 보여 줄 차례.
하여 라이오넬에게 물러날 것을 권했다.
얼굴의 앳됨에서 드러나듯, 라이오넬은 많이 쳐줘야 10대 후반에 불과했다.
아무리 실력의 비약적인 향상을 경험했다 해도 아직은 모자랄 수밖에 없는 나이.
여태까지 한 것만으로도 가능성은 충분히 드러냈다.
이미 라이오넬이라는 원석이 제프너의 뇌리에 각인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나 부족했던 것일까?
“아닙니다. 이대로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라이오넬이 제프너의 권유를 거절했다.
동시에 선두에 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자네를 오판했던 것은 사과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모하게 위험을 자초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자네는 이미 충분히 능력을 증명했어.”
“제 능력이나 뽐내자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려는 건 단순한 몬스터 섬멸이 아니라 종심 돌파와 함께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무리와의 조우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수시로 경로를 틀어 줘야 하는 만큼 제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실시간 경로 설정을 위해서는 지금까지처럼 라이오넬 선두가 가장 바람직했다.
하지만 돌파 대형에서 선두는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꽉 막힌 길을 억지로 뚫어 낼 수 있을 만큼 막강한 돌파력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 돌파력이란 당연히 일신의 실력과 경지에 기반한 것이고 말이다.
나이 어린 라이오넬이 호기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제프너는 강제로라도 라이오넬을 뒤로 물릴 생각이었다.
이제 충돌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니만큼 최대한 빨리.
“공자, 지금 당장…….”
“또, 염려하시는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그러나 늦고 말았다.
제프너가 후작가의 정통 후계자이자 자작의 권위로 강제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라이오넬이 선수를 친 것이다.
먼저 가겠다는 말을 남긴 라이오넬이 한층 더 속도를 높여 앞으로 튀어 나갔다.
가까워지다 못해 노린내까지 풀풀 풍기는 놀 떼를 향해서.
“공자!!!”
제프너 입장에서는 살짝 기분마저 상할 지경이었다.
남자다운 인정과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려가 깡그리 무시당한 꼴이었으니까.
슈각!
그런데 아니었다.
“……!!!!”
제프너의 배려는 배려가 아니었다.
오판이었다.
라이오넬의 실력에 대한 완전한 오판.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제프너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라이오넬이 일격에 놀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버리는 모습을.
물론 이 자체로는 놀랍긴 해도 특별히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당장 소드 익스퍼트 중급인 제프너 역시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결과였다.
라이오넬의 어린 나이를 고려한다 해도 마찬가지.
저 나이 대에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르는 천재들이 드물긴 해도 종종 하나씩 존재했다.
라이오넬 역시 그 경우라 여긴다면 제프너가 이리 경악을 금치 못하는 지경까지 이를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제프너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참격의 순간 라이오넬의 검에서 순식간에 오러가 뿜어졌다가 사라지는 장면을.
이건 단순히 익스퍼트에 오른다고 해서 흉내 낼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당장 제프너만 해도 저리 완벽에 가까운 오러 수발은 자신이 없었다.
혹시나 그의 눈에 문제가 있어 착각했을 가능성?
전무했다.
슈각! 슈각!
일격필살.
라이오넬이 예의 그 참격을 쉼 없이 펼쳐 내는 중이었으니까.
어안이 벙벙했다.
현재 그가 듣고 보고 겪는 모든 것들이 그의 상식선에서는 이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저 살짝 멍한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앞에 보이는 라이오넬의 등만을 따를 뿐이었다.
의문이고 뭐고 다른 잡생각은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
그만큼 눈앞에서 펼쳐지는 라이오넬의 신위는 강렬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라인하트 영지군이 바르코스 요새에 도착했다.
총원 300, 결원 0, 현재원 300이라는 경이로운 기록과 함께.
안내 및 경호를 맡았던 제프너와 기사들의 라이오넬을 향한 부담스러운 눈빛은 덤이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