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제프너 바르코스
차캉~!
오크 우두머리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이게 오크 무리와 조우한 뒤 날리는 첫 일격이었다.
즉, 단독으로 오크 무리를 향해 돌진하자마자 곧장 우두머리와 일기토를 벌이게 된 것이다.
여타 오크들의 방해는 없었다.
인간의 기준을 적용하면 좀 어이없는 상황일 수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일단 우두머리를 구별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간단했다.
다른 오크들보다 월등한 떡대와 터질 듯 빵빵한 근육을 보면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카가각!
무엇보다 내 검격을 막고 선 커다란 도끼.
한눈에 보기에도 잘 정련된 도끼였다.
이런 퀄리티의 도끼를 오크들이 제련해 냈을 리 만무했다.
인간을 습격해서 노획한 것이 분명했다.
개중 가장 좋은 것을 우두머리가 차지한 것이고 말이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주위 오크들의 무기가 이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두머리 구별은 이처럼 일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상황 조성인데,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일기토 상황을 꾸미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오크의 습성 덕분이었다.
무식한 오크에게 우두머리 보호 따위의 개념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오크에게 우두머리란 전투 시 가장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돌격대장을 의미했으니까.
더욱이 자존심까지 하늘을 찔렀다.
우두머리가 찍은 사냥감을 다른 오크가 건드린다?
죽고 싶어 환장했다고 시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우두머리가 단독으로 돌진해 온 나를 자신의 사냥감으로 찍었고 말이다.
따라서 내 검격이 처음부터 우두머리를 향하게 된 것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콰가가가각~!
대신 강했다.
확실히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과 함께 오크 무리의 맨 앞에 설 자격이 있었다.
굉장한 완력이었다.
마나를 적잖이 실은 검이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밀릴 정도로.
끼릭.
물론 우두머리의 완력에 나 또한 힘으로 맞대응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된 참인데 그렇게 무식한 짓거리를 벌일 이유가 없었다.
그저 아주 약간의 비틀기면 충분했다.
우두머리의 도끼로 침투한 내 마나가 그 중심을 살짝 비틀었다.
삐걱.
“꾸엑?”
이 약간의 간섭이 초래한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 검과 사선으로 대치 중이던 우두머리의 도끼가 형편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우두머리의 당혹성은 덤이었다.
구우웅~
슈각!
나름 거창했던 시작과 달리 결말은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나 버렸다.
도끼를 밀어낸 내 검이 우두머리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찰나 지간 오러가 발산됐다 자취를 감추었다.
몸통에서 분리돼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통만을 남긴 채.
“뀌익……?”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식하고 호전적이며 동료애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오크들조차 잠시 얼을 탈 정도로.
즉, 오크 무리에 약간의 틈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 틈을 억지로 헤집어서라도 벌려줄 차례였다.
이 작은 틈이 커다란 혼란으로 번질 수 있도록 말이다.
덥석.
바닥에 굴러다니는 우두머리의 머리통을 집어 올렸다.
퍼석!
그리고 터뜨려 버렸다.
마나를 가득 담아 육편이 비산하도록.
움찔.
“꾸, 꾸르륵…….”
이 광경에 질린 오크들이 움찔하며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고,
“모조리 도륙하라!”
이 기회를 에릭스와 라인하트 영지군은 놓치지 않았다.
파죽지세로 오크들을 도륙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다.
쉬지 않고 전장을 헤집으며 강해 보이는 개체들의 멱을 따고 다녔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유리하게 시작했던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일방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
촤락!
“꾸에엑!!”
그렇게 마지막 남은 오크 참살을 끝으로 짧았던 전투가 끝이 났다.
차라리 학살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그런 전투였다.
당연히 가벼운 생채기 수준을 제외한다면 병력 손실 또한 전무했다.
대승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충분한 자격과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벅저벅.
그럼에도 난 그런 여유의 시간을 갖지 않았다.
마지막 오크를 참살하자마자 곧바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에릭스 경.”
에릭스를 향하는 잰걸음이었다.
이에 에릭스가 얕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또인 것이냐?”
끄덕끄덕.
그 물음에 난 확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주었고 말이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단독으로 돌격하는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나 역시 대형을 지키며 전체 병력과 보조를 맞추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바르코스 요새를 나흘가량 앞둔 시점부터는 그럴 수가 없어졌다.
피해 최소화를 위해서는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앞으로 나서야만 하게 됐다.
“이번에는 규모가 더 커요. 지금 당장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 알겠다.”
몬스터와 맞닥뜨리게 되는 횟수가 대폭 증가했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만 해도 이제 갓 정오를 지난 시점에 벌써 세 번째 전투였다.
심지어 요새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규모 또한 커져 갔다.
“휴식 없이 바로 출발한다. 모두 힘들겠지만 바르코스 요새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 주기 바란다.”
내가 몬스터 감지 능력을 가졌기에, 그리고 단기돌진하여 무리를 미리 헤집어 놓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금쯤 피해가 막심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이를 알기에 곧장 이동해야 한다는 나의 다소 무리한 건의에도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휴식을 배제한 이동이 결정됐고, 나 또한 잠시 다이너에게 맡겨 둔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대열로 복귀하려 했다.
“라이.”
한데 그런 나를 에릭스가 잠시 불러세웠다.
“사고 직후 네가 깨달음을 얻었고, 덕분에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또, 네 활약 덕분에 영지군의 피해가 전무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하지만 내게는 병사들 못지않게 네 안위 또한 중요해. 너 혼자 모든 위험을 짊어지려고 하지 말거라.”
내게 주의를 주기 위함이었다.
다만 꾸짖음의 의미가 아닌 걱정과 염려에 바탕을 둔 그런 주의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걸 일부러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현재로서는 저만 할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하고요.”
단기 돌진이 그리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지난 세 달간 최대한 끌어 올렸다지만, 내 경지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절대적인 마나량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만 오러를 짧게 발산하는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에릭스와 다른 기사들은 병력 전체를 통솔해야 했다.
나처럼 프리롤로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에릭스가 정도가 아니면 확실한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따라서 피해 최소화를 위해서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우리는 하나다.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다 같이 나눠서 져야지, 너에게 홀로 짊어지게 하는 것은 옳지 않아. 더구나 이번 웨이브는 뭔가 꺼림칙하구나. 요새로 가는 길에서부터 이렇게 수도 없이 전투를 벌이는 건 처음이야. 혹시 모르니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어.”
이쯤 되니 에릭스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번 웨이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비단 에릭스 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예년과 확실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모두의 불안감은 그에 상응하는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
올해 웨이브는 특별할 것이다.
특별한 괴물, 규격 외의 몬스터가 관련되어 있으니까.
이로 인해 웨이브의 위험도가 족히 수십 배는 격상하게 된다.
영지군 전체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더욱이 이 걱정의 대상에는 에릭스 역시 포함된다.
내가 아는 미래는 분명 그러했다.
현재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그 미래를 뒤틀기 위함이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자제하겠습니다. 또, 위험하다 싶으면 체면 따지지 않고 곧장 물러날 작정이니까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물론 이런 내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에릭센의 염려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일단 약속을 했다.
비록 이것이 언제까지 지켜질지, 아니 애초에 지켜질 수 있는 약속인지는 나로서도 장담 못 하겠지만.
* * *
“자작님, 좌측 전방에 부대가 보입니다.”
오로지 기사로만 구성된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있는 제프너 바르코스 자작.
그는 부대 발견을 알리는 부하의 보고를 듣자마자 반색하며 되물었다.
“소속은?”
“라인하트 가문의 깃발이 내걸려 있습니다. 라인하트 영지군입니다.”
“에릭스 경께서 오셨구나! 가자.”
부대의 정체는 라인하트 영지군.
이에 브라이튼 바르코스 후작의 장남이자, 후작령의 후계자인 제프너가 힘차게 말의 박차를 가했다.
한시라도 빨리 에릭스와 라인하트 영지군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에릭스에 대한 제프너의 개인적인 반가움이 일정 부분 작용했다.
에릭스 브란부르크는 환대받을 자격이 넘쳐흐르는 인물이었다.
일단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라는 점이 그러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은 그 자체만으로도 검사로서 존경받기에 충분한 경지였으니까.
더구나 에릭스는 실력만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 실력에 걸맞은 훌륭한 인품까지 지니고 있었다.
라인하트 가문과의 신의를 지키고자 드높은 경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준남작의 작위를 유지 중인 것이 그 증거였다.
이런 이유로 제프너는 에릭스에 대해 인간적인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호감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이유가 작용 중이었다.
그 이유란 바로 제프너가 맡은 임무, 그리고 그 임무의 시급함.
제프너는 현재 픽업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정확히는 후작의 소집령에 따라 바르코스 요새로 집결 중인 북부 각지의 영지군 픽업.
단, 이것이 환영 및 길 안내 차원의 간단한 임무는 결코 아니었다.
간단하기는커녕 목숨을 걸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요새로 향하는 길목에 수두룩하게 깔린 몬스터를 뚫고 영지군들을 무사히 들여보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급하기까지 한 상황.
한시라도 빨리 영지군들을 픽업해야만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지의 영지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요새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전멸한 영지군도 심심찮게 확인됐다.
따라서 한가롭게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이것이 제프너가 박차를 가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에릭스 경!”
급히 말을 달렸으니만큼 라인하트 영지군과 직접 조우하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제프너가 개인적 호감을 지닌 에릭스와의 만남도 금세 이루어졌고 말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작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작년 웨이브 때 뵙고 못 뵀으니 1년 만이군요. 정말 잘 와주셨습니다. 후작령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그렇게 짧지만 알찬 인사를 나눈 뒤, 제프너는 곧바로 인상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을 이어 갔다.
라인하트 영지군의 상태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직후 제프너는 감탄을 금치 못한 참이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에릭스 경. 요새로 향하는 영지군 보호 임무를 맡은 뒤로 이처럼 멀쩡한 부대는 처음 봅니다.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당초 라인하트 영지에서 후작령에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영지를 출발한 병력은 총 300명이었다.
그리고 바르코스 요새까지 채 반나절도 남지 않은 시점인 현재의 병력도 얼추 300명 정도.
일일이 세어 본 것은 아니지만 제프너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이는 현 상황을 고려할 때,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이미 밝혔다시피 요새로 향하는 길목에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소실한 영지군이 부지기수였다.
아예 괴멸한 부대도 심심찮게 확인됐다.
한데 라인하트 영지군은 병력이 당초 그대로인 것이다.
물론 소드마스터 같은 초인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상자가 전무할 리 있겠느냐마는,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여유가 부족한 상황에서조차 도저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하여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 비결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에릭스 경께서 본인 자랑을 꺼리는 성격이라는 건 알지만, 이 일은 그런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습니다. 이건 오히려 겸손이 부덕이지요. 그러니 빼지 말고 말씀 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릭스는 제프너가 아는 그의 성격대로 겸양의 미덕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제프너는 비결에 대해 꼭 듣고 싶었다.
이는 요새로 향하는 길의 안전 확보에도 중요한 부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정말 제 공이 아닙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저기 있는…….”
“에릭스 경, 시간이 없어요. 당장 이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웬 놈이 하나 끼어들어 그것을 훼방 놓았다.
10대 후반이나 됐을까?
체격은 탄탄하지만, 얼굴은 아직 소년의 앳됨을 간직한 웬 어린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