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8화 (9/200)

5장: 바르코스로 가는 길(2)

“바비, 병사 두어 명만 추려 봐.”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확인해 봐야 할 게 생겼거든.”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아니, 직접 확인해야 할 일이야. 그럼 먼저 갈 테니까, 얼른 추려서 따라와.”

바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당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즉각적인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현재 바비와 병사들에게는 나에 대한 신뢰가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방금까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보듯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병사들이다.

한데 그런 내가 갑작스레 돌발행동을 벌이려 한다?

당연히 기를 쓰고 말리려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그 책임을 지게 되는 건 바비와 병사들 본인이라 여길 테니 말이다.

저들은 내가 원래 하려던 대로 가만히 앉아 떠먹여 주는 수프나 얌전하게 받아먹어 주기를 간절히 바랄 터.

그리고 이런 바비와 병사들의 입장을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초짜 지휘관이 눈앞에 도사리는 적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점은 나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따라서 바비의 태도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냥 일단 움직였다.

아무리 병사들의 입장을 이해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조차 맘대로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내가 움직이면 알아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입장들이기도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응이야 차차 얻어 가면 될 일이었다.

“추려 왔습니다, 공자님. 같이, 저희와 같이 가시죠.”

역시 신분과 계급만 한 깡패가 또 없었다.

예상대로 두 명의 병사들을 추려 재빨리 내 뒤에 따라붙는 바비였다.

그렇게 바비와 두 명의 병사를 대동한 채로 감각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바비에게 말한 대로 직접 확인해 보고픈 것이 있었다.

야영지 경계 범위 바깥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눅눅한 공기와 묘한 느낌의 정체, 그리고 이것이 내가 추측하는 바가 맞는지에 대해서.

이미 반 이상 확신 중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한 번은 육안을 통한 확인이 필요했다.

마나량 부족으로 인해 형편없이 줄어든 기감을 새로운 감각으로 대체 가능한지 여부가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거침없이 야영지 밖으로 벗어났다.

도중에 경계를 서던 병사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간단히 통과했다.

가뿐히 씹어 주고 내 갈 길 간 것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곳은 야영지 근처의 울창한 풀숲.

“공자님, 야영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더 이상의 단독행동은 정말 위험합니다. 여기서 그만…….”

이윽고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감각이 일정 부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저 스스로 말끝을 흐린 바비가 그 증거였다.

그리고,

슈각!

순식간에 휘둘러진 내 검은 확인 사살이었다.

그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람 허벅지만 한 머리통 역시도.

“끽끼긱 끼기기끽!”

“고, 고블린!!!”

덕분이었다.

끽끽거리며 듣기 싫은 소음을 발산하는 고블린 떼를 앞에 두고도 내가 환히 미소지을 수 있었던 것은.

* * *

“이상해. 석연치가 않아.”

라인하트 영지의 십인장 중 하나인 바비.

올해 바르코스행에서 라이오넬의 부관으로 배정된 그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었다.

이상하다는 중얼거림과 함께.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건데?”

이에 바비와 같은 십인장이자 이번에 함께 라이오넬의 부관이 된 레몬드가 질문을 던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이상하냐는 것이다.

“라이오넬 공자님 말이야. 아무리 봐도 뭔가 석연치 않아.”

바비가 품은 의문의 대상은 바로 라이오넬.

그와 레몬드의 현 직속 상관이자, 지금 야전식으로 끓여진 잡탕 스튜를 아주 맛나게 흡입 중인 인물이었다.

“그렇잖아. 이번이 공자님 생애 첫 출전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저리 여유로우실 수가 있는 거지? 도저히 처음이라고는 안 믿겨지는데…….”

라이오넬은 여유로워도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그는 무려 영주의 친동생이다.

설령 기사 수련을 혹독하게 받는다 해도 기본적으로 귀하게 자랄 수밖에 없는 조건인 것이다.

한데 그런 귀하게 자랐을 도련님이 야영지에서 끓인 스튜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심지어 보는 사람이 배고파질 정도로 정말 먹음직스럽게.

라인하트 영지병들의 야전 조리 숙련도가 타 영지병들에 비해 수준급이기는 했다.

에릭스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평시 훈련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영주성 요리사에게는 감히 비벼 볼 수조차 없었다.

그건 요리사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

한데 귀족가 공자님이 저러고 있으니 지금 바비 본인의 손에 들려 있는 스튜가 영주성 요리급인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물론 한 입 들이켜는 순간 와장창 깨져 버린, 단어가 지닌 뜻 그대로의 턱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지만.

“또, 또 쓸데없이 심각해진다. 잊었어? 영주님과 에일린 아가씨께서 출발 전에 우리한테 뭐라고 하셨는지? 공자님이 첫 출전이라 걱정되니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셨잖아. 설마 가족들이 잘못 알고 있으려고? 처음 맞아.”

“그런데 저렇게 잘 드신다고? 저 피 칠갑을 한 상태로?”

뭐, 음식이야 잘 먹을 수도 있었다.

성격 자체가 수더분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수더분하다 해도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에서는 아니었다.

야영지 인근 풀숲에 숨어 있던 고블린 떼.

방금 막 그것들을 몰살시킨 참이었다.

아직 몸에 튄 고블린의 초록색 피가 마르지 않은 채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역겨운 온기에 구역질 나는 비린내, 선혈 특유의 찝찝한 끈적끈적함이 온몸에 가득한 것이다.

특히 라이오넬은 그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야영지에서 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사실상 라이오넬 혼자서 고블린을 상대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짧은 시간 동안 절반에 가까운 목을 따 버렸으니 말이다.

그냥 혼자 다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피를 가장 많이 뒤집어썼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라이오넬이 고블린 처리를 끝내고 복귀하자마자 배고프다며 스튜 그릇에 코를 박고 있는 것이다.

고블린의 살 조각과 핏덩이를 주렁주렁 몸에 매단 채로.

경험 많은 병사들조차 대충이라도 씻고 스튜를 다시 끓여야 하나 고민 중이던 상황에 말이다.

“또, 검술 실력이 수준급이신 거야 그렇다 쳐. 검에 미쳐 사는 분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니까. 그런데 레몬드 너도 아까 직접 봤잖아. 병력 지휘까지 완벽하신 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바비의 눈에 심히 부자연스러운 것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라이오넬의 지휘 능력.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병력은 라이오넬 밑으로 배정된 20명이었다.

라이오넬이 돌발행동을 보인 시점부터 혹시 몰라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마쳐 둔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고블린 목 따는 페이스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펼쳐지는 라이오넬의 유려한 지휘 능력을.

마치 에릭스를 떠올리게 하는 백전노장의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라이오넬을 어린아이 취급했던 바비 본인의 태도가 심히 부끄러울 지경.

이건 도저히 처녀 출전한 초짜 기사의 실력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네 말대로 평범하지는 않으시지. 근데 그래서 뭐? 그냥 타고나신 거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잖아. 더구나 공자님이 능숙하셔서 우리한테 문제 되는 게 있어? 우리 입장에서는 나쁠 게 전혀 없잖아? 오히려 좋아 죽겠다면 모를까.”

다만 이 당연함이 레몬드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되려 지나치게 심각하다며 역으로 바비를 타박하는 레몬드였다.

“하여간에 바비 넌 매사 그 쓸데없이 심각해지는 버릇 좀 고쳐야 해. 처음 공자님한테 배정됐을 때는 너무 어리숙하면 어쩌나 밤낮을 걱정하더니, 이제는 또 너무 잘하신다고 고민이냐? 좀 쉽게 쉽게 살자, 이 답답한 친구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째 매사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 말 많은 친구에게 들은 타박이라 살짝 거슬리긴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닌지라 반박은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두 팔 벌려 환영해 마지않을 상황이었다.

라이오넬이 능숙하면 능숙할수록 휘하 병력이 겪게 되는 위험도는 줄어든다는 것을 뜻하니까.

레몬드의 타박대로 쓸데없이 심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안 되겠다. 너랑 더 있다가는 나까지 그놈의 심각병 옮을라. 혼자 많이 심각하세요. 난 갈라니까.”

그렇게 타박만을 남기고는 바비의 옆에서 떠나가는 레몬드.

떠나간 그가 향한 곳은 스튜를 세 그릇째 흡입 중인 라이오넬의 옆이었다.

그러고는 친화력 좋은 성격으로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그였다.

라이오넬 역시 스스럼없이 받아 주었고 말이다.

“하긴, 뭐 상관없으려나……?”

이 광경을 보며 바비도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이 어떤 숨겨진 내력을 가졌든, 이에 대해 바비 자신이 심각하든 말든 상관없이 올해 바르코스행은 그와 동료들에게 나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 * *

“바비.”

“예, 공자님.”

바비를 호명했다.

내 바로 뒤에서 행군 중인 바비와 레몬드에게만 들릴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런데 이 단출한 호명이 내 부름에 호응한 바비의 입을 거치며 상당한 심각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북서쪽 전방에 몬스터 출현! 전투 준비!!”

단순한 호명 한마디가 갖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무거운 심각성이었다.

그러나 이미 바비의 커다란 목청을 타고 라인하트 영지군 전체에 전파된 뒤였다.

더구나 육안으로는 사방 어디에서도 몬스터의 털 쪼가리조차 확인이 안 되는 상황.

어쩌면 바비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것인지도 몰랐다.

“전투 대형!”

“전투 대형!”

척척척척!

단, 어디까지나 라인하트 영지군과 관계없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바비의 목소리가 전파되자마자 영지군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전투 준비를 마쳤다.

300명의 영지군이 일제히 대형을 갖추는 데 채 10초가 걸리지 않았다.

모두 내 나지막한 호명 한마디가 도출해 낸 결과.

그리고 여기까지의 과정을 통틀어 의문이나 의구심 따위의 것들은 단 한치도 표출되지 않았다.

영지군이 표출하는 건 곧 벌어질 전투에 대한 긴장과 가벼운 흥분뿐이었다.

여전히 움직이는 생명체는 무엇 하나 감지되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경험이 체득시킨 반응이었다.

그것도 지난 며칠간 지겨우리만치 반복된 똑같은 경험이.

구성은 간단했다.

내가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이나 야산, 풀숲을 바라보며 몬스터의 출현을 경고한다.

그러면 얼마 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곳에서 실제로 몬스터가 나타난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진다.

이 간단한 이치로 구성된 강렬한 경험이 영지군 전체에 내 경고에 대한 즉각 반응을 체득시켜 준 것이다.

“전방에 오크 무리 출현!”

이윽고 저 멀리서 오크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는 광경이 포착됐다.

경험 법칙은 이번에도 역시 들어맞은 것이다.

덕분에 하루에도 네 차례 이상 몬스터 무리와 조우한 것 치고는 피해가 극히 경미했다.

약간만 치료하면 곧장 전투 복귀 가능한 경상자 20여 명이 피해의 전부.

이 정도면 피해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이 결과를 전부 경험칙의 덕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카르가디아 산맥에서 내려온 몬스터들이었다.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야산의 몬스터와는 질적으로 다른 괴물들인 것이다.

평지에서 카르가디아의 몬스터를 상대로 사망자 하나 없는 굉장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사전대비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라이오넬 영지군에는 그 무언가가 존재했다.

“다이너, 그럼 부탁한다.”

“또요? 아, 글쎄 위험한 짓 좀 그만하시라니…….”

탓!

다이너가 뭐라 뭐라 잔소리를 씨부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말 등을 박차고 튀어 나간 내 귀에는 제대로 닿지도 못했으니까.

파앗~!

그저 내 휘하 병력 지휘는 다이너에게 맡기고, 대형을 갖춘 영지군을 뒤로 한 채, 몰려드는 오크 무리를 향해 돌진할 뿐이었다.

단독으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