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트 자작가 차남의 회귀-7화 (8/200)

5장: 바르코스로 가는 길

히죽히죽.

아무리 봐도 다이너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이라면 저리도 헬렐레한 상태로 연신 히죽댈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검에 미쳐 사는 인간이라 해도 경지 상승을 위한 수련 과정 자체는 죽도록 힘든 것이 당연했다.

육체라는 유한한 틀에 갇혀 있는 인간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나와의 대련을 방금 막 끝낸 녀석이 저리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싱글벙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녀석을 설렁설렁 굴린 것도 아닐진대, 마치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을 연상케 하는 역겨운 미소를 짓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현재 에릭스의 지휘 아래 바르코스 요새로 향하고 있는 라인하트 영지군.

다이너의 상태만 봐서는 지금이라도 이 대열에서 낙오시키는 것이 옳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만약 녀석이 저런 꿈에 나올까 두려운 미소를 입에 걸고 있는 이유를 몰랐다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봤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

“헤…… 예?”

“그렇게 좋으냐고?”

원인은 다이너의 손목에 있었다.

녀석의 손목에 매어져 있는 붉은 스카프.

저것이 다이너의 정신을 완전히 쏙 빼 간 원흉이었다.

“아아, 예. 좋습니다.”

대련 직전 조심스레 풀어 고이 모셔 놓더니, 대련이 끝나자마자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시 매어 둔 스카프.

정성도 이런 정성이 따로 없었다.

왼 손목에 매둔 뒤 혹시 때라도 탈까 봐 오른손은 아예 뒷짐까지 지고 있는 다이너였다.

오른손이 무의식중에 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라나, 뭐라나?

“아가씨께서 저에 대한 오해를 푸셨다는 것도 좋고, 저한테만 이런 귀한 보물을 주셨다는 것도 너무 좋고, 또 아가씨께서 이리도…….”

에일린이 다이너에게 선물한 스카프였다.

또한 다이너가 언급한 바처럼 그에게만 건넨 것이기도 했다.

당시 에일린이 밝힌 선물의 의미는 오해에 대한 사과.

공식적으로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데, 그랬던 것이 다이너 개인에게는 그 이상, 아예 초월했다고 봐야 할 지경의 의미로 작용 중이었다.

꼴불견에 볼썽사납기 짝이 없는 광경을 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얼씨구.”

절레절레.

얼빠질 대로 얼빠진 다이너의 모습.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동시에 나로 하여금 문득 가까운 과거의 어떤 대화를 떠오르게 했다.

때는 이드리스 설득에 성공한 직후.

회상 속 대화 상대는 지금 다이너를 저 꼴로 만든 장본인, 에일린이었다.

* * *

매해 겨울, 슈라우드 왕국 북부의 좌장이라 할 수 있는 바르코스 후작령에서는 북부 각지의 병력을 소집한다.

겨울마다 밀고 내려오는 카르가디아 산맥의 몬스터 떼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카르가디아 산맥과 접한 북부의 최전선 바르코스 요새에는 매년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물밀 듯 밀고 내려오는 몬스터와 이를 막아서는 인간, 요새를 수놓는 낭자한 선혈과 성벽 아래로 쌓이는 시체의 산까지.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끔찍함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드리스의 반대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난 가고자 했다.

가야만 했다.

특히나 올해는 무조건.

올해 겨울, 바르코스 요새에서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 재앙이 라인하트 영지에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비극을 초래한다.

내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비극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고, 따라서 반드시 가야 했다.

이를 위해 에릭스와 내기를 벌였고, 승리하여 그를 이드리스 설득 작업에 동원했다.

에릭스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드리스는 결국 설득당했고 말이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흘러왔다.

계획이 착착 맞아떨어지며 이드리스라는 산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에릭스에 이어 이드리스까지 등정을 마친 내 앞에는 진정한 의미의 태산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에일린이라는 이름의 태산이었다.

에릭스 정복에는 검과 깨달음을 이용했다.

이드리스 등정에는 내기에서 진 에릭스를 무기로 활용했다.

반면, 에일린에게는 도구로 쓸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인하트 영지에서의 에일린은 사실상 무소불위의 절대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렇다 할 계획도 세워 두지 못했다.

높디높은 태산을 그 어떤 도구도 없이 맨몸으로 오르는 것,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 가.”

“그래서 나는…… 응? 뭐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에일린에게 직접 부딪쳐 보기 전까지는.

“다녀오라고, 바르코스 요새.”

“어? 어어…… 그래.”

그런데 아니었다.

내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에일린의 허락은 이드리스의 그것과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쉽게 떨어졌다.

어떻게 허락을 얻을지 고민했던 시간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말이다.

“왜, 내가 오빠 못 가게 하려고 울며불며 매달리기라도 할 줄 알았어?”

“음, 솔직히 조금쯤은?”

“그래서, 내가 한 번도 안 붙잡아 주니까 되려 섭섭해? 그래도 예의상 한 번은 붙잡아 줄 걸 그랬나?”

“그렇다기보다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채로 가벼운 농담까지 건네는 에일린.

다만, 그런 입가와 달리 녀석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안 잡아. 아니, 못 잡아. 내가 어떻게 그래? 오빠가 오빠 길을 찾아가겠다는데. 더구나 오빠 몸이 멀쩡하다는 걸, 심지어 오빠가 다이너 경보다도 세다는 걸 에릭스 경께 확인까지 받은 마당에.”

“…….”

“솔직히 마음 같아서야 백 번, 천 번이고 말리고 싶지. 두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그러고 싶어.”

에일린의 눈꼬리는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감정을 가득 담은 채로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근데 못 그래. 그랬다가 오빠가 다시 예전처럼 차가워지면 어떡해? 난 오빠가 이렇게 큰 오빠랑 나를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 안위에 대한 걱정과 염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등 오로지 나와 관련된 것들로 그득한 그런 감정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가서 잘하고 와. 오빠 선택을 말리지 않고 응원할 테니까. 대신 절대 어디 다쳐서 오지 말고. 그때는 정말 앉은뱅이를 만들어서라도 내 옆에 고이 모셔 둘 거야.”

난 정말 오빠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아니, 그냥 자격 자체가 없었다.

명색이 오빠라는 놈이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에일린은 정말 강한 녀석이었다.

내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에일린에게 처음부터 설득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에일린은 내 선택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응원해 줄 줄 아는, 어찌 보면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었다.

그리고 이런 동생에게 자격없이 살아온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진심을 담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외에는.

“네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 앞으로는 절대 네 앞에 나타날 일 없을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약속할게.”

회귀 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밝히는 내 진심이자 포부였다.

깨어난 직후 결심했듯 이번 삶은 오롯이 내 사람들을 위해 살 작정이었다.

그 외 다른 것들은 어떤 것도 중요치 않았다.

이런 내 진심을 듬뿍 담아 에일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을 동생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도록.

“응, 믿을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180도 바뀌어 버린 내 성격이 아직은 낯선 것인지 헛기침과 함께 먼저 화제를 돌리는 에일린이었다.

“흠흠, 그건 그렇고 오빠가 요새로 가 있는 동안 매튜는 내가 맡고 있을게.”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 너도 매튜 녀석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네?”

새로운 화제는 매튜.

요 며칠 에일린이 매튜를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은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다행히 매튜가 에일린의 맘에도 쏙 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영지를 떠나 있는 동안은 신경 써 주기 어려워 걱정이었는데, 에일린이 맡아 준다면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심지가 굳고 올바른 아이더라고. 무엇보다 똘똘해. 오빠가 왜 특별히 데리고 왔는지 바로 알겠더라. 그래서 내가 한번 제대로 이것저것 가르쳐 볼까 해.”

“역시 너도 알아봤구나. 그럼 부탁 좀 할게, 에일린.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

에일린 덕에 마지막 남은 고민거리마저 해결됐다.

이제 맘 편히 바르코스 요새에서의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온전한 집중을 위해서는 아직 선결 과제가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사실 과제나 고민거리라고 하기에는 과한 측면이 없잖은 일이었다.

그저 조금, 아니 꽤 많이 귀찮달까?

“그리고 에일린, 이제는 다이너 녀석을 좀 봐줘도 되지 않을까? 오해도 다 풀렸을 거잖아.”

다이너가 종일 옆에서 징징대는 꼴을 계속 두고 보자니 이제는 짜증마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내 심신의 안정과 집중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치워 버릴 필요가 있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다이너 녀석 잘못이 아니야. 폭주도 내 욕심이 초래한 거고, 이번 대련도 내가 억지로 끌고 간 거야. 에릭스 경께 직접 확인도 했다며? 그러니까 다이너 녀석 좀 이제 그만 용서해 줘.”

다이너는 내가 자신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고 내내 원망해 왔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에일린에게 다이너를 변호했다.

녀석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에일린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강하게 변호하지 못한 측면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이너의 지속적인 비난과 달리, 할 만큼은 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직 아니야. 아직 조금 덜 여물었어.”

“응? 덜 여물다니?”

“아, 별말 아니야. 그리고 걱정할 필요 없어. 다이너 경을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까. 처음부터 진심으로 화냈던 것도 아니었어. 그냥 요즘 너무 풀어진 것 같아서 긴장 좀 하라고 살짝 주의만 줬을 뿐이지. 어쨌든 다이너 경과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빠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 그래.”

난 내 동생에 대해 정말 눈곱만큼도 몰랐던 것 아닐까?

어쩌면 훔쳐 간 게 아니라 평생을 조련당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떤 누군가는 말이다.

혹시나 하는 이런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가는 순간이었다.

* * *

한심함을 넘어 어째 살짝 불쌍하게까지 느껴지는 다이너를 뒤로한 채, 나는 내게 배정된 막사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그래, 바비. 식사 준비도 거의 다 끝나 가는 모양이네.”

그러자 에릭스가 내게 배정해 준 두 명의 십인장 중 하나인 병사 바비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다이너에게 다녀온 사이 병사들과 함께 막사 설치에 이어 저녁 준비까지 거의 다 마쳐 둔 그였다.

“예, 5분 정도만 더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한데 입맛에 맞으실는지…….”

“걱정 안 해도 돼. 웬만한 건 다 잘 먹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안에 들어가 좀 쉬고 계십시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따로 차려 올려 드리겠습니다.”

“뭐, 그래 준다면야.”

내심 피식하고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곧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 기꺼워서?

물론 약간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상황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바비는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나를 다루고 있었다.

비단 바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머지 한 명의 십인장 레몬드를 비롯하여 두 사람 밑에 있는 20명의 병사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나에게 염려의 눈길을 보내왔다.

물론 대놓고 티 나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딴에는 배려한답시고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병력 지휘에 필요한 사항들을 챙겨 주려 했다.

아마 초짜 기사라면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을 만큼 노련하고 세심한 보살핌이었다.

하지만 내 눈을 피해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소드마스터까지 오른 기사였다.

회귀 전의 일이라고는 하나 그 연륜과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전생에서는 개인의 경지에 몰두하여 부하들과 인간적인 정을 쌓지는 않았으나, 단순히 병력 지휘 경험만 놓고 보면 에릭스와 비견될 만큼 풍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 눈에는 다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병사들이 하는 양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덕분에 괜한 신경 낭비 없이 편하게 오지 않았는가?

더욱이 저들만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바르코스 요새로 향하는 300명의 영지병, 이들을 지휘하는 에릭스 포함 3명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내게 하나라도 더 신경을 써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런 상황에 굳이 내가 먼저 나서서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초짜 기사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막사에 들어앉아 떠먹여 주는 수프나 날름날름 받아먹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나 먼저…… 음?”

분명 그랬다.

해서 바비의 배려에 따라 막사 안으로 냉큼 들어가려 했다.

찌릿.

새로 얻은 감각이 내 발걸음을 붙잡지만 않았다면.

감각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어둡고 음습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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