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억울한 다이너
“이 아이를 거두겠다고?”
“응, 근데 말이 내가 거두는 거지 실상은 나도 형한테 얹혀사는 입장이잖아. 그래서 형한테 허락받고 잘 봐달라고 부탁도 할 겸 찾아왔어.”
“가족끼리 얹혀살고 말고가 어디 있어? 다 같이 사는 거지. 그나저나 원래부터 알던 아이야?”
“아니, 오늘 처음 본 아이.”
“그런데 거두겠다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냥 이 아이한테서 특별한 느낌을 받아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특별한 느낌을 준 아이라는 내 대답에 이드리스의 시선이 매튜에게 향했다.
그러자 즉각 90도로 머리를 숙이며 인사 올리는 매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 매튜라고 합니다. 거둬만 주신다면 시키시는 일은 뭐든 죽을 힘을 다해 하겠습니다.”
공손하기는 하되 떠는 기색은 일절 보이지 않는 매튜.
오늘 처음 보는 영주와의 대면임에도 말이다.
이 점을 이드리스도 포착한 듯 매튜를 향해 재미있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으로 매튜를 데려오며 이 부분에 대해 질문했었다.
처음으로 영주를 알현하는 자리인데 떨리지 않느냐고.
그러자 매튜는 이렇게 답했다.
본인도 이상하다고.
분명 떨려야 하는데 내 옆에 있으니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고 말이다.
아예 차분함을 넘어 아늑한 느낌까지 드는 것 같아 매튜 본인도 의아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렇듯 안정된 상태의 매튜는 이드리스 앞에서도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사실 평범한 시종 일 시키려고 이 녀석을 거두는 게 아니야.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형한테 인사까지 시킬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매튜한테 공부를 포함해서 이것저것 경험해 볼 기회를 주고 싶어. 부탁 좀 할게, 형.”
특별함을 느끼기는 했으나 매튜가 어떤 분야에 소질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 볼 기회를 제공하여 적성을 찾아 줄 계획이었다.
“그래, 알았다. 네가 말한 대로 일러 두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드리스의 허락이 떨어졌다.
애초에 구하는 게 의미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쉬운 허락이었다.
어찌 됐든 이로써 매튜는 공식적으로 내 사람이자 라인하트 가문의 일원이 됐다.
잠시 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매튜가 집사를 따라 빠져나갔고, 영주 집무실 안에는 나와 이드리스, 그리고 기사단장인 에릭스 경만 남게 됐다.
“고마워, 형.”
“글쎄 이걸 감사를 받아야 하는 건지, 내가 너한테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지금 네 모습이 정말 보기 좋거든. 물론 아직 적응은 잘 안 되긴 하지만.”
“내가 좀 변하긴 했지?”
“그럼, 변했지. 많이 변했어. 오로지 검밖에 모르던 녀석이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관심도 가지고 말이야.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아주 좋은 의미로.”
나를 보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환하게 웃는 이드리스였다.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이드리스 입장에서는 검밖에 모르는 내가 심히 안타까웠을 테니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세상을 뜨신지 2년이 흘렀다.
졸지에 영주에 이어 동생들을 케어하는 가장의 역할까지 모두 떠안게 된 이드리스.
당시 갓 성인이 된 20살에 불과했던 이드리스에게는 버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영지 일만으로도 바쁜데 어린 동생들 케어까지 완벽하게 해내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당연했다.
최대한 노력한다고 했지만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동생인 나는 검밖에 모르는 외골수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바르게 자라 준 에일린이 있다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나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컸을 터.
그랬던 내가 이리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니 절로 함박웃음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거 다이너한테 상이라도 내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안 그렇습니까, 에릭스 경?”
정말 기분이 좋았는지 함께 자리하고 있던 에릭스에게 가벼운 농을 던지는 이드리스였다.
내가 이리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 마나 폭주 이후이니 그 계기가 된 다이너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
당연히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건 명백히 이드리스의 실수였다.
“안 됩니다. 잘못은 잘못이니까요. 감히 영주님 가솔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일입니다. 한데 영주님께서는 고작 제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 가두는 것조차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옳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농이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에릭스 브란부르크라는 사람은.
이드리스도 금세 본인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하여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아,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군요. 그럼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오늘 라이가 매튜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에 대해서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다이너 녀석의 잘못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이드리스도 얼른 다이너에 대한 변호를 늘어놓았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저 수련 중에 일어난 사고였을 뿐이에요. 고의가 아닌 사고요.”
“그렇다 해도 잘못은 잘못이지요.”
“하아, 또 왜 이러십니까? 솔직히 다이너가 에릭스 경 아들이 아니라 일반 평기사였다면 앞장서서 잘못을 덮어 주려 하셨을 분이. 왜 이리 본인 자식에게만 엄격하신 건지 원.”
“…….”
“그리고, 보세요. 라이도 저렇게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이너 좀 다독여 주시면서…….”
“저 역시 말씀드렸다시피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잘못은 분명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에릭스에게서는 일말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매듭짓고 넘어가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이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이드리스.
깊은 한숨도 함께였다.
그렇게 영주 동생을 위험에 빠뜨린 기사단장 아들의 처벌을 두고 영주와 기사단장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펼쳐졌다.
이대로 두면 단장 아들을 옹호하는 영주와 영주 동생을 옹호(?)하는 단장의 실랑이가 밤새 이어질 기세였다.
그래서 피해 당사자가 직접 나섰다.
“형 말이 맞습니다, 에릭스 경. 저의 과한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이에요. 다이너에게 엄한 벌을 내릴 일은 결코 아닙니다.”
“이건 그리 단순하게 치부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라이.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해야 해. 사적인 친분으로 덮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야.”
하지만 당사자의 등판도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매튜와 호나르두 관련해서 내가 시킨 뒷정리 때문에 이 자리에 없는 다이너가 봤다면 가슴을 치고 통탄할 광경.
하나 어쩌겠는가?
이런 대쪽같은 사람을 아버지로 둔 다이너 본인의 팔자를 탓해야지.
그리고 이런 다이너의 박복한 팔자 덕분이기도 했다.
“정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이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펄쩍 뛰고도 남을 절충안이 도출된 것은.
* * *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야심한 밤, 터덜터덜 내 뒤를 따르던 다이너가 입을 열었다.
어째 원망과 회한 따위의 감정이 가득 실린 듯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차라리, 차라리 아버지 말씀대로 해 주셨어야죠.”
“널 감옥에라도 보냈어야 한다는 거야?”
“요즘 같아서는 차라리 그게 나았어요. 차라리 감옥이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지금 제 꼴은…….”
본인의 처지에 대한 한탄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지난 일주일간의 행적에 대한 탄식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 한탄과 탄식을 유발한 원흉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그럴 수야 있나? 이렇게 유능하고 성실한 수행비서를 어떻게 감옥으로 보내겠어? 옆에 두고 있는 대로 부려먹어도 모자랄 판국에.”
“아오! 공자님, 진짜!!”
지난 일주일간 다이너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다이너를 처벌해야 한다는 에릭스에게 내가 제안한 절충안 때문이었다.
나는 다이너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내 수행비서로 붙여 달라고 요구했다.
내 몸이 다 나을 때까지 말이다.
감옥에 들어가 하염없이 시간만 축내느니 나를 수행하며 직접 용서를 구하는 편이 처벌의 취지에도 더 부합한다는 논거와 함께.
결과적으로 절충안은 받아들여졌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는 방안이니만큼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리하여 다이너는 내 개인 수행비서가 됐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고작 일주일 만에 학을 떼고 있었다.
시작은 매튜와 호나르두에 대한 뒷정리였다.
호나르두가 지난 일에 앙심을 품고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의 앙심이 나나 다이너를 향할 리 만무했다.
당연히 매튜를 향할 터.
매튜를 곧장 영주성으로 들였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감시는 필요했다.
감시 담당자는 물론 다이너.
계속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아니라지만 한 번씩 주변 탐문을 위해 시간을 내야만 했다.
참고로 밝히자면 역시나 별문제는 없을 것으로 판단됐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 평판이 좋지 않던 호나르두였다.
한데 설상가상 영주 친동생에게 찍혔다는 소문까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평판과 손님이 더욱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
다이너의 탐문 결과에 따르면 기가 팍 죽어서 더는 전처럼 막무가내로 나대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매튜와 호나르두의 일은 시작이었을 뿐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나들이를 나갔다.
그리고 매튜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다.
내 입장에서는 새로운 감각에 대한 탐구 활동이었지만, 다이너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뻘짓에 불과했을 터.
더불어 쑤시고 다닌 뒤의 처리는 역시나 다이너의 몫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다이너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다이너는 누가 뭐라 해도 기사를 꿈꾸는 기사지망생이었다.
따라서 하루에 반드시 채워야 하는 수련 할당량이 존재했다.
이런 그가 일과시간을 모조리 나에게 할애하는 중이었다.
즉,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잠과 휴식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게 지금 다이너가 한탄하듯 쫑알대는 이유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면시간이 줄어 피곤해 죽으려는 그였다.
그런데 내가 이 야심한 시각에 불러내기까지 했으니 입이 댓 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았다, 알았어. 그렇다고 성질은. 내일부터는 너 끌고 밖에 나들이 갈 일 없을 테니까 진정해.”
물론 다이너의 입이 댓 발 나오든 말든 크게 신경 쓸 내가 아니었다.
다만 이제 더는 다이너에게 뒤치다꺼리를 맡길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감각에 대해 이런저런 실험들을 대강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다.
“정말요? 그 말씀, 정말인 거죠?”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뭐 해? 내일부터는 낮에 부를 일 없을 테니까 원래 일과 수행해. 대신.”
“대신……?”
그렇다고 다이너의 필요성이 다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난 일주일은 약간 놀려 먹으려는 의도도 섞여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매일 밤 이 시간에 여기로 날 찾아와. 여기서 나랑 할 일이 좀 있으니까.”
때마침 목적지에 도착한 참이었다.
“여기요? 이 시간에 연무장에는 왜요?”
목적지이자 도착지는 바로 연무장.
당분간 다이너가 야간에 출근해야 할 곳이기도 했다.
“연무장에서 뭘 하겠어? 당연히 이거지.”
휘릭~ 턱.
내가 연무장 한편에 비치된 수련용 철검 두 자루를 집어 하나를 다이너에게 던지며 말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행동으로 대신한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무, 무슨? 안 돼요,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돼요!”
얼떨결에 던져진 검을 잡기는 했지만 다이너는 기겁하며 거부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
왜 안 그러겠는가?
이 사달이 난 것도 전부 대련 때문이었다.
나와 대련 한 번 삐끗했다가 여태 그 고생을 한 것이다.
더구나 내 몸 상태는 아직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다이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런 나와 대련을 한다?
학을 떼는 것이 당연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다이너 너도 잘 알잖아? 내가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만다는 거. 그러니까 쓸데없는 데 괜히 힘 빼지 말고 얼른 자세 잡아.”
그러나 다이너의 사정을 안다 해도 그것을 고려해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깨어난 순간부터 몸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그저 주변에서 하도 호들갑을 떠니 장단에 조금 맞춰 주었을 뿐.
무엇보다 더는 탱자탱자 놀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실력을 끌어 올려야 했다.
그래야 이번 겨울에 있을 그 일에 약간이나마 대비가 가능할 터.
따라서 다이너의 거절은 거절이었다.
“안 돼요. 전 못 합니다.”
“그래? 후회할 텐데?”
“후회고 뭐고 못 합니다. 아니, 안 해요!”
설득은 쉽지 않았다.
하나 나 역시 쉽지 않은 것에 미련하게 매달릴 생각이 없었다.
쉬운 길 놔두고 왜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간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