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passing hardships, eternal happiness
원영은 공항 출입구 옆의 전면 창 앞에서 핸드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공항의 전면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 하늘이 보였다. 오늘따라 더없이 높고 쾌청하기만 한 하늘이었다.
그때부터 원영은 창가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표정이 조금은 들뜬 것도, 어쩌면 초조한 것도 같아 보인다. 오늘은 재승의 광고 촬영을 위해 하와이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라 들뜰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또 원영과 재승이 연애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이 잠시 떨어져 있는 날이기도 해서 그가 초조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기껏 해봐야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이건만 원영은 벌써 재승이 보고 싶었다. 여기서 우스운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재승과 몇 시간 떨어진 덕분에 원영이 득을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배 천재승이 아닌 애인 천재승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할까.
원영은 저도 모르게 히죽거리며 자신이 고백하던 날 재승이 했던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외로움을 많이 타서 애인에게는 집착도 심하고 귀찮게도 잘한다고 했던가. 말로 들었을 땐 실감이 잘 안 나더니 겪어보니 잘 알겠더라. 참고로 원영의 생각에는 아주 사랑스럽기만 한 단점이었다.
그래서 그 단점이 무엇이고 하니, 재승이 이른 아침 헤어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짧으면 5분에서 10분, 길면 30분 간격으로 원영의 핸드폰을 울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흡사 미저리같이 느껴지며 무서웠을 수도 있을 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행한 자는 천재승이었고, 재승은 미저리로 치면 아주 유순한 미저리였다.
재승은 원영이 바빠서 전화를 받지 못해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고, 게다가 시간이 맞아떨어져 전화를 받는다고 해도 짧게 통화를 끝냈다.
재승의 전화는 그저 ‘어디야? 뭐해?’ 하는 짧은 질문이 끝이었다. 그저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났을 뿐이었다. 그러면 원영은 헤어지기 전에도 미리 말해 두었던 동선을 때에 맞춰 그대로 읊어주었다. 어디에서 회의 뒤 어디로 이동, 어디에서 회의 뒤 어디로 이동하면서 다정하게.
사실 원영이 건물만 바꾸어가며 회의를 하는 그 시간, 재승은 오히려 더 바빴을지도 몰랐다. KFC타워에서 아침 운동을 하고, 그 뒤엔 어쩌다 보니 오래 비워둔 파주 집으로 이동해서 집 청소를 한다고 했었으니까.
양 비서가 파주 집으로 느지막이 픽업을 하러간 뒤에도 자동차에 탔다며 어디쯤이라며 몇 번 더 전화가 왔었다. 원래라면 재승이 먼저 도착했어야 맞지만 양 비서가 안전운전을 하는 탓인지 어쩌다 보니 원영이 먼저 공항에 도착하고 말았다.
하지만 원영은 기다림조차도 썩 유쾌했다. 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자신뿐만은 아니니까. 얼른 눈앞에 가져다 놓고 남들 몰래 뽀뽀라도 쪽쪽 해주면 더욱 좋을 것 같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홀로 하는 짝사랑만 해도 사랑하는 이 주변의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이나 보이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었더니 그 사람이 주변에 없어도 세상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이다.
아마 지구가 느닷없이 폭발해도 그 장면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탈바꿈할 테다. 물론, 이건 지금처럼 재승이 자리를 비웠을 때가 아니라 재승이 옆에 있을 때 한정이겠지만.
원영이 멀뚱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헛생각을 하던 그때, 익숙한 인영이 공항 신호등을 건너 입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두리번거리는 것도 없이 앞만 보고 걷는 남자는 노란색 체크무늬 반바지에 하얀 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정면만 바라보던 무뚝뚝한 남자가 전면 유리창 앞에 서 있는 원영을 발견했다. 남자는 턱 밑에 보조개를 패며 웃더니 손을 가슴께까지 들어 좌우로 수줍게 흔들었다.
“어! 천재승 선수님 도착하신 것 같은데요?”
원영의 뒤편에서 촬영팀들과 함께 수다를 떨던 황 코치가 그새 재승을 발견하곤 커다란 목소리를 냈다. 연인의 달콤한 재회를 이렇게 또 와장창 무너뜨려 주셨다. 덕분에 유리문이 열리며 재승이 들어서자 촬영팀이 우르르 몰려가 재승을 애워쌌다.
“선수님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촬영팀 총괄부장 허창섭입니다.”
“네……. 아, 천재승입니다.”
앞으로 나온 부장과 재승이 각 잡힌 악수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원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둘이 느긋한 시간을 보내려면 아무래도 어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편이 나을 듯 보였다.
비행기 예약은 스태프들은 이코노미, 양 비서와 황 코치는 비즈니스, 재승과 원영은 퍼스트클래스 좌석에 탑승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행시간이 9시간이나 되는 터라 촬영을 해야 하는 선수의 컨디션을 위해서 따로 퍼스트클래스를 예약한다는 명목이다.
사실 비즈니스만 되어도 재승은 아주 달게 잘 테지만, 원영이 그와 단둘이 있고 싶어서 번지르르한 이유를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했다.
인원이 인원인지라 원영의 생각대로 인사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재승의 손을 잡고 싶어서 손가락이 다 근질거렸지만, 인사를 끝낸 후에도 곧장 단둘이 남을 수는 없었다.
“사나이들끼리 해외여행 가는 거 뭔가 낭만 있지 않습니까.”
탑승구를 향해 걷는 동안 입이 근질거렸던지, 황 코치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마도 무뚝뚝한 얼굴의 재승에게 말을 건 것일 테다. 하지만, 은근슬쩍 재승의 손가락이라도 한번 건드려보려던 원영은 괜히 혼자 놀라서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황 캔디. 놀러 가?”
짐짓 나무라는 말투에 황 코치가 과장된 얼굴로 눈을 키웠다.
“아뇨, 아뇨! 나중에 놀러 가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지 말입니다.”
황 코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원영을 놀리듯 특유의 밉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서 있던 재승이 ‘말입니다.’하고 황 코치의 뒷말을 작게 따라하는 것이 들렸다. 그리곤 이내 으학,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린다.
재승이야 단지 말투가 재미있어서 웃음을 터트린 것일 테지만, 오늘 재승을 웃기지 못한 원영은 괜스레 황 코치에게 질투가 났다.
“내가 군대 선임도 아니고 그 말투 좀 어떻게 하지. 진짜 군기 잡기 전에.”
진짜 군대에서의 선임은 황 코치였기에, 황 코치가 파하학 하며 커다랗게 웃었다. 어쩌다보니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이런 우스갯소리가 오고 가는 게 익숙한 편이었다. 황 코치는 ‘정말요?’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군에서 이렇게 말하면 처맞지 말입니다.”
비꼬는 말투에 이번에는 원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저 말투는 군대에서 원영 먼저 한 것이었고, 당연히 그가 처맞는 일은 없었으므로.
“오……. 진짜 그래?”
뜬금없는 감탄사와 물음에 세 남자의 시선이 재승에게로 쏠렸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관심 밖이라는 듯 핸드폰을 보며 걷던 양 비서의 시선까지 모이니 재승은 조금 민망한 듯 했다.
“드라마에서는 비슷한 말투 쓰던데. 왜 유명한 군대 드라마 있잖아.”
재승이 턱 밑을 긁적이며 말하자 세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영과 양 비서는 재승의 사정을 대충 알았기에 학력미달 면제구나, 더 이상 묻지 말아야지 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데다가 궁금한 게 많은 황 코치는 원영이 앗차 하는 순간 재승에게 묻고 말았다.
“선수님 공익 가셨어요? 몸은 건강하시지 않나?”
황 코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표정이었다. 때문에 원영만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KFC에서 중졸이냐는 물음 한 번에 얼마나 미운털이 박혔던가.
만약 예민한 천재승 씨의 기분이 이미 안 좋아진 상태라면. 이틀 촬영 이틀 휴가를 위해 죽어라 일했던 원영만 죽을 쑤는 노릇이었다.
불안함에 재승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살이 떨렸다. 그 순간, ‘아’ 하고 운을 떼는 재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 신경이 재승에게 쏠린 원영은 한마디 내뱉은 그 목소리만 들어도 재승이 화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곧장 확인해 본 재승의 얼굴이 역시나 둥글다.
원영은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 와중에 재승은 멋쩍은 얼굴로 황 코치에게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안 가서……. 원래는 공익을 갈 수도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면제더라고……요. 근데 할머니 돌아가셔도 면제였어……요.”
“거참, 그냥 말 놓으시라니까요. 선수님은 말 조금만 길어지면 꼭 그러시더라.”
황 코치의 말에 재승이 굳건한 표정으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곧 죽어도 사부한테는 말을 놓지 않겠다며 근래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터라 황 코치도 더 길게 권유하지는 않았다.
“면제셨구나. 저는 선수님 군에 왜 말뚝 안 박으셨을까 했거든요. 완전 군대 체질이시니까.”
“……제가요?”
“아침 일찍 일어나시지 않아요?”
“…….”
“산 타는 거 좋아하시고. 힘 잘 쓰시고. 똑같은 거 계속 해도 안 지겨워하시고. 아, 맞네! 우리 선수님 존대가 조금 어려우시지 말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한텐 잘 하는데!”
재승이 버럭 소리치며 반박했다. 덕분에 재승을 뺀 세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넓은 공항 내부를 걷는 동안 재승은 자연스럽게 황 코치의 군 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황 코치의 후임으로 들어온 누군가의 일화들이었는데, 후임이 원영인 것을 모르는 재승은 그저 감탄만 연발했다.
그러다 후임이 그렇게 싸가지 없어도 괜찮느냐는 재승의 물음에 원영이 ‘그거 저예요.’ 하고 맘 상한 얼굴을 했다.
재승은 맘 상한 애인을 달래는 법도 모르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유순한 얼굴이 귀여워서 원영의 서운함이랄 것도 없는 서운함은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황 코치와 양 비서라는 혹을 떼어내기까지는 아직 조금 더 많은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일 뿐.
“선수님은 하와이 가본 적 있으세요?”
그새 군대 이야기가 질렸는지 황 코치가 이번에는 퍽 괜찮은 주제를 내놓았다. 재승도 그 질문이 퍽 반가웠던지 들뜬 얼굴을 하며 해맑게 웃었다.
“미국이랑 필리핀이랑 베트남은 가본 적 있는데 하와이는 처음 가요!”
재승의 말은 어쩐 일로 존대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황 코치가 태클을 걸기에는 아주 충분했다.
아무리 순해진 재승이라도 2연속 공격은 조금 심하지 않을까. 원영은 군말하지 말라는 듯 눈을 부릅뜨며 황 코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쪽 계열 남자들의 특색인지 황 코치는 눈치를 개나 주었다.
“하와이가 미국이지 말입니다.”
황 코치가 아랑곳하지 않고 재승의 말에 태클을 걸었다.
“으학, 몰랐어.”
그런데 재승이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홀로 어안이 벙벙한 원영을 두고 황 코치와 재승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눈치를 보지 않았나 싶을 만큼이라, 원영은 재승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
아무튼지 간에, 재승과 황 코치는 죽이 잘 맞게 놀았다. 둘은 만약 황 코치에게 애인이 없었으면 원영이 오해하기 딱 좋을 만큼 사이가 좋아 보였다.
걷는 내내 나라별 수도 맞추기에 열성이더니 맞추면 맞췄다고, 또 못 맞추면 못 맞췄다고 꺄르륵거린다. 원영은 애인이 되고 말았으니, 재승이 친구로 정한 사람은 아마 황 코치가 된 모양이었다.
원영도 재승의 친구 사귀기에 이견은 없었다. 아니, 이견이 없다 못해 재승의 친구로 황 코치면 딱 적절하지 싶었다.
육군 투스타 아들. 그래서 그런지 쓸데없이 도덕관념이 투철한 편.
재승의 주적은 돈 떼먹는 사기꾼들인데, 적어도 황 코치는 그럴 염려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럴 리는 없지만 혹여 재승과 원영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때 황 코치가 원영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어줄지도 몰랐다.
……원래 지인이 겹치면 헤어지는 것도 어렵다지 않던가. 그러니 원영은 되도록이면 지독하게 재승을 자신의 주변에 엮고 싶었다.
원영이 재승 모를 흑심을 품으며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 사이, 황 코치가 퀴즈를 내는 속도가 어쩐지 점점 느려졌다. 흠,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침음하던 황 코치는 얼마 뒤에야 겨우 질문을 했다.
“그럼……. 미국의 수도가 뭐지 말입니까?”
어째 길게 고민한다 싶더니만 기껏 내뱉는다는 것이 미국이었다.
사실 재승에 비하여 낫다뿐이지 황 코치도 상식이나 지식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죽이 잘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의 쿵짝이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는 것이다.
“나 이거 알아! 에레이!”
재승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어느 순간부터 존대는 포기했는지 뒤에 붙이던 ‘요’자도 사라진 상태였다. 재승이 말한 ‘에레이’가 과연 ‘LA’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답처럼은 들렸다.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원영과 양 비서는 입을 다물었고, 그게 답인 줄 알았던 황 코치는 더 이상 퀴즈를 낼 거리가 없었다. 황 코치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근데 선수님, LA갈비가 어째서 LA갈비인지 아십니까?”
“……에레이에서 먹어서?”
그걸 또 진지하게 고민하는 재승이 귀여워 원영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만담 같은 대화를 엿듣다 보니 멀기만 하던 탑승구가 어느새 코앞이다.
“아홉 시간 후에 뵙겠습니다!”
황 코치의 우렁찬 인사를 끝으로 원영과 재승, 양 비서와 황 코치로 이루어진 두 팀이 각각 흩어졌다.
재승과 나란히 걷던 원영이 주머니를 톡톡 두들기며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원영의 주머니에는 안으로 들어올 때 잠시 꺼냈었던 두 사람분의 여권이 들어 있었다.
준비물인 여권도 무탈하게 주머니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제 진짜로 비행기에 탑승하는 일만 남았다. 광고 찍는 천재승은 또 얼마나 매력 있을 거야. 속으로 생각한 원영이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영이 마주 걷고 있는 재승의 옆모습을 힐끗 훔쳐보았다. 어쩐지 재승 또한 원영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비행기는 아직 뜨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기대가 만발이었다. 두 사람의 걸음이 경쾌했다.
*
휴가철에 여행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직항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재승과 원영이 앉는 퍼스트클래스에는 두 사람을 빼면 사람이 없었다.
재승과 원영은 승무원에게 라인의 중앙 창가 자리와 그 옆자리를 각각 안내받았다. 사람이 없어서 여유로운 것인지, 퍼스트클래스라서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재승이 느끼기에는 승무원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내내 붙어서는 이건 어떠신지 불편한 건 없으신지 물어대신다. 그들이 가져다주는 것은 일단 받았지만 재승은 그저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불편은 무슨. 솔직히 이게 비행기 내부가 맞나 싶은 심정이었다.
재승의 자리는 창가에 딱 붙어 있는 자리였는데, 혼자 볼 수 있는 창문이 무려 네 개나 달려 있었다. 심지어 창 밑으로 손을 받치거나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달려 있고, 의자를 완전히 눕힐 수도 있단다. 공간의 길이는 재승이 두 다리를 쫙 펴면 딱 맞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아늑하게 칸막이로 막힌 공간의 정면에는 커다란 텔레비전도 붙어 있어서 만약 원영이 일을 한다고 해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약간 아쉬운 점은 원영과의 거리가 생각보다는 멀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의자를 내린 상태에서 반대편 소파에 한 사람이 앉으면 해결될 듯 보였다.
“앞으로의 비행이 즐거운 비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느새 설명을 모두 끝마친 담당 승무원 네 명과 사무장이 친절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하지만 곧장 원영과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어찌나 딱 맞춰 온 건지 비행기가 이륙 준비에 들어가 버렸으므로.
짧게 헤어져 있던 시간에 이어 얼굴 보고 인사한 게 전부인 채 강제적으로 대화를 하지 못했더니 어째 말을 거는 것이 어색해져 버렸다.
때문에 재승은 비행기가 뜨고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안내가 나온 이후에도 멀뚱이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자 막혀 있는 칸막이 위로 불쑥, 고운 얼굴이 튀어나왔다.
“선배.”
익숙하게 재승을 부르는 목소리가 여유로웠다.
“따라오세요.”
까닥 고개를 움직인 원영이 성큼성큼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재승은 허둥지둥 안전벨트를 풀고 원영의 뒤를 따랐다. 닫힌 커튼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화장실이 나왔고, 다시 닫힌 커튼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작은 라운지가 나왔다.
라운지는 이코노미 한 칸을 비운 정도의 크기였다.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 네 개가 놓여 있었는데 두 사람은 그중 문에서 가장 먼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영이 미리 지시를 해놓았는지 승무원들이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세팅된 테이블에는 정갈한 한식상이 차려졌다. 그런데 승무원은 음식에 어울리지 않는 샴페인 병을 두 사람의 앞으로 들어 올려 보였다.
“식전 샴페인은 요청하셨던 돔 페리뇽 로제 빈티지 2004년 산으로 준비했습니다.”
재승은 길다고 이름을 외우지 못했지만 일전에 원영과 재승이 신나게 섹스를 하고 마셨던 그 샴페인이었다.
원영이 들어 올린 크리스털 잔에 핑크빛 액체가 따라지고 나서야 이 샴페인이 그때 그 샴페인과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날이 떠올랐다.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달뜬 얼굴을 한 원영의 모습이었다.
사실 근래에 신나게 섹스를 하지 않은 날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처음이었다 보니 그때의 섹스도, 그때 마셨던 샴페인도 무척 특별하게 느껴졌다.
식사 전에 야한 생각이 떠오른 재승이 한눈에 보아도 멍한 얼굴을 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재승은 크리스털 잔을 반 정도 채운 핑크빛 액체를 입에 머금었다.
반주는 막걸리라고 배웠지만 밥 먹기 전에 산뜻한 샴페인을 마시니 이것도 나름 입맛을 돋우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재승은 멍하니 샴페인만 홀짝거렸다. 정신을 놓은 터라 어느새 승무원들이 사라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원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은 괜찮았죠?”
재승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원영을 바라봤다. 원영이 어째 불퉁한 것도 같은 얼굴을 하며 재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재승의 시선이 다시 슬그머니 테이블로 내려갔다.
재승도 자신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재잘재잘 잘도 떠들다가 원영의 앞에서만 말을 하지 않았단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쑥스러운 것도 별수 없었다.
“……그냥 오래 비워두는 게 싫어서 그렇지 집이 외진데 있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 계실 적에도 도둑은 한 번도 든 적 없어. 근데 오랜만에 집 가니까 온도가 적응이 안 되더라. ……너네 집이 워낙 시원하잖아.”
길게 대답을 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어색한지. 재승은 눈을 올렸다가도 끝내 원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울림에 재승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곧장 원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보기 좋게 눈을 휜 채 재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승이 느끼기에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내내 쭉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을 터다. 때문에 재승은 괜히 수줍어했다며 지나간 몇 분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봐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원영이 재승에게 물었다.
“나 보고 싶어서 계속 전화했던 거 아니에요?”
“……맞지.”
“그런데 왜 안 봐줬어요? 혹시 저보다 황 코치가 더 좋은 거예요?”
원영의 물음에 재승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뻔히 아닌 걸 알면서 묻는 것이 우스웠다.
“설마. 그냥 내가 전화를 너무 많이 했나 싶어서……. 좀 민망했어.”
대답을 하고 보니 그래서 얼굴을 못 쳐다봤었나 싶었다. 재승이 자기가 한 말에 감명 받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원영의 웃음이 짙어졌다.
“난 보람 있고 좋았는데. 천재승 애인으로 둔 느낌이 이런 느낌이구나 했으니까 계속 그렇게만 해주세요. ……전화 횟수 줄어들면 섭섭할 줄 아세요.”
끝에 이어진 원영의 말이 재승 자신이 섭섭해진다는 것인지, 원영이 섭섭해진다는 것인지 모호했다.
하지만 허락도 받았겠다 열심히 전화를 할 예정이었기에 섭섭해질 대상 같은 건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재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집어 들었다.
눈앞에 놓인 갈비가 샴페인을 마실 때부터 향긋하니 재승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조금 기분 이상했잖아요.”
“움?”
갈비를 씹으며 감동하던 재승이 원영의 뜬금없는 말에 놀란 듯 눈을 키웠다. 하지만 정작 재승을 놀래킨 원영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선배가 너무 순해져서요. 저는 저 한정으로 귀여워진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이 귀여워지신 것 같아요.”
원영은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재승의 그릇에 제 몫의 고기를 열심히 덜었다. 그러던 그가 불쑥 눈을 맞추며 참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제가 중졸이냐고 물어봤을 때, 선배 엄청 화내지 않았어요?”
생각해볼 것도 없이 원영이 서운할 만한 일이었다. 분명 그때 재승은 원영에게 화를 냈었으니까.
그러나 억울한 것도 사실이었다. 원영이 알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지금 재승이 변한 것은 모두 원영 때문이었다. 아니, ‘때문’보다는 ‘덕분’이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땐 누가 물어도 화냈어.”
재승의 말에 원영이 안 그래도 내리고 있던 눈꼬리를 더욱 축 늘어트렸다.
“지금은요?”
“지금은 화 안내.”
“왜요?”
“못 배웠다고 놀리고 무시하는 사람들만 옆에 있어서 몰랐는데, 너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잖아. 황 코치도 내가 모르는 거 있으면 착하게 가르쳐주고. 무시 받을까 봐 화부터 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왜요?”
“네가 나 지켜준다며. ……무시하는 사람은 네가 혼내주겠지.”
수줍게 붙인 뒷말에 원영의 표정이 사르르 녹은 것이 보였다.
“……키스하고 싶다.”
원영은 재승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덕분에 재승은 쾌적한 비행기 내부의 온도가 느닷없이 덥다고 느껴졌다.
재승은 후끈후끈한 열기를 맛있는 갈비로 달랬다. 그러자 맞은편의 원영도 예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말이 없어도 간질간질한 이 느낌은 언제 느껴도 질리지가 않았다. 얼마 뒤 서로 힐끗거리던 두 사람의 눈이 딱 하고 마주쳤다.
원영이 오물오물 씹고 있던 음식을 삼키며 재승을 불렀다.
“그런데 선배.”
“응.”
“그럼 고등학교는 왜 졸업 안 하신 거예요?”
재승에게 뭐든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원영은 이참에 궁금하던 것을 전부 물어볼 작정인 듯 보였다.
물론, 재승도 원영이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뭐든 대답해줄 생각이었다.
다만 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전혀 없기에 조금은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다. 재승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며 작게 목을 울리다가 이내 말문을 떼어냈다.
“졸업을 안 한 게 아니라 아예 안 간 건데……. 중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부모님 돌아가셔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산다고 괴롭힘을 좀 당했거든. 어차피 공부에 욕심도 없었고 할 일도 좀 정해져 있다시피 했었으니까. 괜히 할아버지 할머니 욕먹게 안 하고 일이나 하자 싶어서 그냥 안 갔어.”
“……선배 중학교 때는 좀 작았어요?”
원영이 괴롭힘당했다는 재승의 말에 화가 나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물었다. 게다가 괴롭힘당하는 천재승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재승은 화내는 원영은 이해해도 원영이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묻는 질문에 뭐든 대답하려 했으니 얌전히 대답은 내놓았다.
“졸업할 때……. 아마 180 정도 됐던 거 같은데?”
정확히는 180.7cm로 졸업을 한 재승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너는 아주 클 놈이라며 커다랗게 맞춘 교복이 작아지길 어찌나 반복했던지, 중학교 때만 교복을 3번이나 새로 샀다.
사실 그 돈이 아까워서 고등학교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있었다. 저렴한 교복을 사도 교복은 사복보다 비쌌으므로.
“하나 패주기라도 하지 얌전히 당하고만 있었어요? 왜? 할머니랑 할아버지 생각해서?”
아무튼 화가 난 원영이 버럭 호통을 치듯 재승에게 물었다. 재승은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머쓱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뭔가…….”
“네.”
“내가 치면…… 죽을 것 같았달까.”
재승이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자 원영이 할 말을 잃은 듯 재승을 멀거니 바라봤다.
재승도 사람인데 어린 마음에 치기가 어리는 경우가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호승심이 올라 주먹질을 하고 싶을 때마다 어째 자신이 콩알만 한 놈들을 때리면 걔들이 운 좋으면 어디가 잘못되고, 운 나쁘면 명을 달리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참았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자니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지 싶기도 했다.
원영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피식 웃었다.
“……역시 선배는 선수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나 봐요. 그때부터 선수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셨네요.”
운동선수는, 특히 격투기 쪽 유단자는 아무리 화가 나도 일반인을 쳐서는 안 되었다. 화 한번 못 참아서 주먹질을 했다가는 쇠고랑을 차는 건 둘째 치고라도 살인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실제로 다혈질 격투가 중에 살인자가 된 인물들도 꽤나 많았고 말이다.
재승은 원영의 말에 그저 히죽 웃고 말았다.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든 원영이 하는 칭찬은 재승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
이후로도 원영과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이 모두 동났다.
하지만 재승의 배를 채우려면 한참이 모자란 양이었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과 케이크를 안주 삼아 샴페인을 마시고 있자니, 원영이 새로운 음식을 주문해 주었다.
저번에 탄 비즈니스석이나 이번에 탄 일등석이나 시켜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는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일등석은 일등석이라 어째 음식이 그때보다 조금 더 감칠맛이 나는 것 같았다.
재승은 새로 온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지기 무섭게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맞은편에 앉은 원영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배불리 끝낸 재승은 원영이 챙겨주는 칫솔과 승무원이 가져다준 잠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양치와 옷 갈아입기를 동시에 끝낸 뒤 화장실에서 나오자 맞은편에서 똑같은 잠옷을 입은 원영이 화장실을 나오는 것이 보였다.
비행기를 전세 내고 밀월여행을 가면 딱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으학, 재승이 웃음을 터트리자 원영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얼굴들이 퍽이나 행복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가 있는지. 재승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
사이좋게 좌석으로 돌아가자 승무원들이 그새 이부자리를 펼쳐준 상태였다. 재승의 자리는 창가였지만, 재승의 이부자리가 펼쳐진 곳은 원영의 옆에 붙어 있는 자리였다.
원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약간 아쉬웠던 재승은 냉큼 안내해주는 자리로 들어가 헤실헤실 웃었다.
좌석의 문을 닫자 내부의 불이 소등되고 승무원들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위이잉 소리를 내며 옆 칸과 이어지는 문이 열렸다.
가부좌를 튼 채 자리에 앉아 있던 재승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영의 얼굴이 보였다. 자리가 완벽하게 이어진다면 더욱 좋았을 테지만,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창은 아쉽게나마 그럭저럭 크기가 큰 편이었다.
“선배.”
원영이 아래로 내려간 문에 턱을 괜 채 재승을 불렀다. 재승이 엉덩이 걸음으로 다가가자 원영이 다정한 듯, 혹은 유혹하는 듯한 얼굴을 하며 물어왔다.
“잘 거예요?”
아마도 자지 말라는 뜻에서 물어보는 질문처럼 들렸다. 재승도 원영의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지만 조금 고민을 해 봐야 할 문제였다.
비행기가 뜬 시간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 시간이면 미국은 저녁 시간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예전에 경기 때문에 미국에 갔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시간에 비행기가 떴었는데, 시차문제로 경기 전까지 컨디션 회복을 하느라 꽤 애를 먹었던 것이 기억났다.
비행기에서 밥만 먹이면 재우려고 드는 게 시차적응을 위한 배려였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도 바로 그때였고 말이다.
이코노미에 비교하면 여긴 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편안하고, 그렇다면 촬영을 위해서라도 잠을 자두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재승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 재승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낮잠은커녕 밥 먹고 한 바퀴 뛰지 못한 탓에 온몸이 다 근질거리는 상태였다. 너무 편안해서 기력 소모가 되지 않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재승에게 고문과 같았다. 그것도 꽤나 강도가 센 고문이었다.
“선배. 저 그쪽으로 넘어가도 돼요? 선배 잠들기 전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재승이 고민 중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원영이 재승을 말로 꼬드겼다. 당연하지만 재승은 말 한마디에 홀랑 넘어가고 말았다.
‘그럼.’하며 말문을 떼어내려는데, 원영은 그것만 듣고도 재승의 대답을 알아차렸는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난다.
성큼성큼 걷는 원영의 상체가 재승의 문 앞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보인다. 재승은 괜히 허둥거리며 리모컨에서 문이 열리는 버튼을 찾아 눌러주었다.
문이 열리자 원영이 실내용 슬리퍼를 잽싸게 벗어 던지며 재승의 의자 위로 올라왔다. 힐끗 바닥을 내려다보니 급하게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슬리퍼가 참 가지런히도 놓여 있었다.
재승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자 원영이 말도 없이 부쩍 다가오더니 버튼을 눌러 좌석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사방이 막혔다. 길게 펼쳐진 공간은 일반인이 앉기에는 나름대로 좁지 않은 편이었지만, 덩치 산만한 남자 둘이 앉기에는 아주 많이 비좁은 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좁은 공간에 사이좋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서로를 마냥 마주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재승은 문득 무엇이든 말을 걸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원영과 헤어져 있는 도중에 했던 일 중, 말하고 싶었던 일도 있었다. 원영을 보자 너무 반가워서 홀라당 다 까먹고 말았었지만.
“나 핸드폰 번호 바뀐 거 오늘 알았잖아.”
재승이 불쑥 서두를 내밀자 원영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오전에 무슨 대화를 하던 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승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의 명의가 사실 원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때문에 자신의 번호가 바뀌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아차렸더랬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땐 KFC와 계약을 하기도 전이었는데 원영이 자신의 핸드폰을 덥석 계약해 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 또한 중요한 일을 까먹는 일이 잦았고, 그래서 이 정도 일에 원영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원영은 깨먹은 구식 핸드폰도 엄청 좋은 핸드폰으로 바꾸어 주었지 않은가. 금도끼 은도끼의 나무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선물을 받은 것이었지만, 재승은 다 죽어가던 구식 핸드폰 하나 망가진 것을 가지고 원영에게 최신식 핸드폰을 선물 받았다.
그런데 기껏 핸드폰을 받아 놓고도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사실 핸드폰 망가지기 바로 전에 관장님이랑 통화했었는데, 내가 말도 없이 KFC랑 계약했다면서 엄청 화내셨었거든.”
“…….”
“계속 전화 드려야지, 전화 드려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실지 걱정돼서 전화하기가 싫은 거야.”
“……네.”
“그래서 오늘 비행기 타러 오면서 문자 남겼어. 바쁘셨는지 바로 전화가 안 와서 그냥 비행기를 타버렸는데, 한국 돌아가면 선물 사서 뵈러 가려고. ……사실 이럴 거 같아서 문자도 그렇게 남기기는 했지만.”
“그래요……?”
원영의 대답이 어쩐지 떨떠름했다. 하지만 재승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들렸겠거니 생각했다.
“내가 기억력도 나쁜데 어떻게 관장님 번호는 기억이 나더라. 관장님이 똑같은 번호를 오래 써서 다행이지.”
“네……. 그렇네요.”
원영이 심각한 말투로 재승에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정말 그렇다는 것도,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유감이라는 것도 같은 어투였다.
그쯤 되니 조금 의아해진 재승이 무언가 문제가 있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원영이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산뜻한 얼굴을 했다.
재승은 그걸로 안심했다. 자신이 잘못 느꼈나 보다고 생각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곤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올라가 있는 원영의 손 하나를 끌어다 쥐고 조물조물 만지며 말했다.
“그냥……. 아까 내가 너무 배움만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한테 한탄하고 싶었나 봐.”
재승 딴에는 애교를 부르는 것이었고, 아마 원영 또한 애교로 느낄 만한 행동이었다. 원영이 잡히지 않은 손까지 재승의 손 위에 턱하고 올리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랬구나. 선배가 배. 은. 망. 덕. 한 것 같으셨구나? 그럼 또? 다른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한탄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얘기해요. 들어줄게요.”
“으학, 배은망덕. 알았어. 다른 거, 다른 거……. 음……. 없는데. ……아. 잠깐 떨어져 있어도 엄청 보고 싶더라. 관장님 얘기하는 거 아니야. 원영이.”
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재승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쥐어져 있던 원영의 손이 도망을 가고, 그 손이 재승의 뒤통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 두 개가 부드럽게 맞물렸다. 원영이 재승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차례 빨아들였다. 입술이 빨려들어갈 때마다 장소에 맞지 않는 아릿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재승은 원영이 제 입술을 빨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맞물린 원영의 입술을 빨았다. 원영의 도톰한 아랫입술.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얇은 윗입술.
그러자 원영이 부드럽게 빨았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 소리를 내지 않고 그 모양에 따라 재승의 입이 벌어지자 두툼한 혀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벌어진 입 사이로 두 개의 혀가 부드럽게 얽히고 비벼졌다. 다만 너무 부드러워서 재승의 애가 탈 정도였다. 이 남자가 얼마나 격정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아는데, 그리고 그 격정적인 키스가 며칠 사이 익숙해졌는데.
키스는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키스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애가 탄 재승이 원영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이끌려 오던 원영이 재승의 혀를 쪽 빨며 느닷없이 재승을 뒤로 밀어냈다.
재승은 혀를 길게 뺀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영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재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재승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새 리모컨 버튼을 눌렀는지 좌석 문이 열리고 있었다. 원영이 가지런히 놓여 있던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냥 다시 자리로 돌아갈게요.”
묻지도 않고 문 앞에 서서 대뜸 통보를 하는 통에 재승의 얼굴이 서운해졌다. 처음 이쪽으로 넘어오겠다고 한 것도, 잠들기 전까지 같이 있겠다고 한 것도 전부 원영이었는데, 감질나게 키스를 하더니 어째서 갑자기 가겠다고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원영이 보란 듯이 제 하체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원영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 재승의 눈에 그의 하체가 비쳤다. 재승은 그제야 원영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보라도 모를 수 없을 만큼 원영의 바지 앞섶이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으니까.
재승도 분명 발기하기는 했지만 애달픈 키스에 아주 미약하게 발기했다가 금세 수그러들고 만 터였다. 하지만 그런 재승과는 다르게 원영의 성기는 그가 성기를 수납한 방향에 따라 오른쪽으로 아주 커다랗고 흉흉하게 서 있었다.
아마 건드린다면 아주아주 딱딱할 터다. 평소 즐겨 입는 탄탄한 브리프가 저 정도로 들어 올려졌으니까 말이다.
“부끄러워요. 그만 봐.”
원영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목소리로 재승에게 말했다. 그리곤 허리만 숙여 재승의 귓가에 바투 다가오더니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소곤소곤 속삭였다.
“공공장소에서 그런 거 하면 안 되잖아요.”
“…….”
“대신 손 잡고 잘까요?”
원영의 물음에 재승이 힐긋 두 칸이 이어지는 창을 살폈다. 생각보다 틀이 높아서 아무리 장신의 두 사람이라도 손을 잡고 자기에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원영은 그 살피는 행동 하나로 손을 잡고 자겠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굴었다. ‘문 잘 닫아요.’ 다정하게 말한 그가 성큼성큼 자신의 좌석을 향해 걸어갔다.
몇 초 뒤 원영이 좌석에 앉아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재승의 문은 원영이 시킨 대로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얌전히 창틀에 손을 올려둔 채 원영을 기다리자 원영이 목을 울리며 빼꼼 고개를 내밀어 재승을 봤다.
“먼저 손 올리셨네요.”
잘했다고 칭찬하는 목소리였지만, 늘 만족스러운 원영의 칭찬이 이번에는 퍽 불만족스럽다.
“……손 잡고 잘 수 있겠나?”
재승은 원영이 돌아왔으면 싶기도 하고 손을 잡고 자는 게 무리라는 생각도 들어서 안 될 것 같다는 기색을 가득 담아 원영에게 물었다. 그러자 원영이 창틀 끝에 제 손을 올리며 웃었다.
“잡았네요.”
분명 잡지 않았는데, 잡았다는 말은 꼭 진담처럼 들렸다.
“이제 누워요. 자야지. 나도 자고, 선배도 자고. 푹 자고 일어나서 숙소 가면 좋은 거 할까요?”
좋은 건 보나 마나 섹스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괜히 아쉬움에 허덕이지 말고 비행기에서는 체력을 비축하자는 뜻인 건가.
물론,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키스 빼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
재승이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톡, 톡, 일정한 박자로 창틀이 울리기 시작했다. 빼꼼 얼굴만 들어 확인하자 재승 자신의 손과 함께 가지런히 올라가 있는 손가락 끝이 톡, 톡 일정한 박자를 만들고 있었다.
재승은 편안하게 자리에 누웠다. 원영과 손이 닿아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닿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비행기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에만 1시간이 걸렸다. 원영과 재승 그리고 촬영 스태프들이 묵을 숙소는 촬영지가 내려다보이는 리조트였다.
공항에서 양 비서 일행을 만나 스태프들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해변가에 앉아 바다를 구경하다가 뒤를 이어 도착한 스태프들과 다시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엔 스태프들의 컨디션 회복을 위해서 6시간을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모두가 짧은 인사를 더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당연하지만 원영과 재승 두 사람의 숙소는 같은 방이었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와 응접실, 거기에 욕실까지 있는 스위트룸으로 소속사 대표와 선수가 함께 묵는다고 치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방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괜한 걱정을 할 리가 없었다. 탁 트인 창문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창밖 풍경이 바다로 바뀐 원영의 오피스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좋기만 했다.
그때, 잠시 방밖 풍경을 구경하던 재승과 도착한 이후부터 쭉 재승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원영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약속한 거 해야죠?”
원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승이 훌러덩 입고 있던 옷부터 벗어 던졌다. 연애에는 무드도 중요하지만 열정도 중요한 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터라, 허둥지둥 옷을 벗었어도 분위기를 깬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영도 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결론은 주어진 6시간 중 3시간을 서로 물고 빨며 섹스를 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뒤 1시간은 사이좋게 목욕을 하는데 사용했고, 그다음 2시간은 사이좋게 졸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휴식을 취했다고는 해도 그만큼 격렬한 섹스를 했으니 재승이 조금은 피곤할 법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천재승 체력 걱정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원영은 새삼, 자신의 애인인 천재승이 무척이나 튼튼한 편이라는 것을 속으로 되새겼다.
어찌나 튼튼하신지, 그렇게 섹스를 해놓고도 촬영 전 근육 펌핑을 해야 한다며 황 코치가 찾아오자 싫어하기는커녕 도리어 신이 난 기색으로 후다닥 뛰쳐나가 버리셨으니까 말이다.
하얀 모래사장 위에선 재승은 격한 운동을 하기 전 준비운동으로 팔 벌려 뛰기를 뛰었다. 옆에서 같이 뛰고 있는 황 코치의 존재는 원영의 시선에서 당연히 자체 블라인드 처리가 되었다.
원영은 오직 재승의 모습만 눈에 담았다. 조금 떨어져 있어도 애인의 모습만 두 눈 가득 들어오는 게, 원영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딱히 신기할 거리도 없었다.
새파란 하늘, 에메랄드 빛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 풍경 속의 천재승은 열심히 팔 벌려 뛰기를 하다가 황 코치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열심히 푸시업을 해댔다.
원래도 상의를 입기 싫어하던 재승이니만큼 해변가의 그는 그새 상의를 훌러덩 벗어 던진 상태였다. 그 모습이 원영이 느끼기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런데 원영의 눈에 그림으로 보였으니 관광객들의 눈으로 보면 또 오죽했을까 이 말이다. 내 눈에 보기 좋은 건 남들 눈에도 보기 좋다고, 한껏 꾸미거나 비키니를 입고 휴식을 즐기던 여자들이 지나가다 말고 멈춰서 재승에게 들으라는 듯 꼭 한 번씩 소리를 쳐대는 것이다.
『웁스, 저 섹시가이는 누구야?』
그럴 때마다 원영은 해변 중간에 서서 커다랗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누구긴 누구야, 내 애인이다! 내 거다!
짧은 팬츠 속이 키스마크로 얼마나 얼룩덜룩한지를 알게 되면 추파를 던지던 이들은 아주 깜-짝 놀랄 테다. 물론 보여주기도 싫고, 보여줄 생각도 없기는 한데……. 아무튼.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천재승 선수님, 카메라 설치하는 동안 메이크업 들어가실게요!”
어느새 운동으로 할당된 시간이 끝났는지 스태프 중 하나가 찾아와 재승을 향해 소리쳤다. 재승은 입 모양으로만 ‘오’ 하고 감탄하더니, 스태프를 따라 쫄래쫄래 걸어갔다.
맨몸 운동을 하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스태프들이 보였다. 카메라를 설치하는 뒤편에는 작은 의자와 함께 어떻게 가져왔는지 전신 거울까지 놓여 있는 상태였다.
재승은 작은 의자에 몸을 구기고 앉아 스태프에게 메이크업을 받았다. 얼굴에 무언가가 얹어질 때마다 간지러운지 입술이 움찔움찔 위로 올라갔다가 한일자로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저렇게 예뻐서 어떡하려고.
원영이 한탄스럽게 생각하는데 그새 얼굴 메이크업이 끝났는지 스태프가 엄치를 척 세우고 재승의 앞에서 요란을 떨어댔다.
“피부가 어찌나 고우신지 화장이 너-무 잘 먹어요, 선수님!”
그리곤 허둥지둥 화장품이 들어 있는 캐리어 가방 앞에 쭈그리고 앉아 황토색 병을 꺼내서 일어난다. 병을 들고 선 스태프가 감격에 젖은 듯 재승을 보며 읊조렸다.
“제가 또 이런 영광을…….”
“아뇨! 내가 합니다!”
순간 스태프의 감격에 젖은 얼굴이 파사삭 깨어졌다.
“……그게 뭔데?”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재승이 순진한 얼굴로 원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원영은 해사하게 웃으며 재승을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오일이요. 몸에 바르는 거.”
원영이 황토색 병의 뚜껑을 열고 색감이 들어간 구릿빛 오일을 손바닥에 덜어냈다.
“오…….”
마냥 감탄만 하고 있는 재승의 가슴에 덥석 손을 얹고 문지르자 탄탄한 가슴 위로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욕심 많은 원영은 아무리 다른 누군가의 일이라 할지라도 재승의 몸을 만지고, 문지르고 치대는 영광을 그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으힉, 으학!”
민감한 부위를 스칠 때마다 재승이 간지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간지러운 것이야 누가 만져도 다 간지러울 텐데, 역시 다른 사람 손으로 재승이 그런 촉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재승이 웃는 모습을 보면 스태프가 착각할지도 모른다.
‘천재승 선수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지 않나? 근데 나를 보고 웃어? 어라? 나한테 마음이 있나?’ 하면서. 반하기만 해도 문제인데 고백이라도 하는 날엔……. 어휴.
천재승이 운동선수라서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만약 재승의 직업이 배우였다면, 대본에 키스신이 있는 걸 보는 순간 원영은 재승을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 감금해 두었을지도 몰랐다.
이것저것 헛생각을 하며 손을 놀리다 보니 마침내 재승이 입고 있던 짧은 팬츠 속을 제외한 모든 살에 구릿빛 오일을 바르는 것이 끝났다. 눈치 없이 끼어든 대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몰래 흘겨보던 스태프가 원영에게 클렌징 티슈를 건넸다.
그렇게 원영이 티슈를 뽑아 미끌미끌한 손을 닦고 있는 사이, 재승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뽀르르 전신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신기하다는 기색을 가득 담아 이리저리 자신을 비추어보던 그가 느닷없이 가슴을 쭉 내밀고 양팔을 들어 굽히며 포츠를 취했다. 그리곤 이내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재승은 흐뭇해 보이는 표정 그대로 휙, 뒤를 돌아보았다. 재승을 구경 중이던 원영이 무슨 일이냐는 듯 다정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재승이 원영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으하학! 원영아, 나 멋있다! 그치?”
“네. 최고로.”
곧장 터져 나온 원영의 대답에 재승이 으하학,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최고로 멋있다 뿐인가, 최고로 귀엽고, 최고로 섹시하시기까지 한 것을.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원영이 재승을 따라 헤벌쭉 웃었다. 그때, 카메라 쪽에 있던 스태프 하나가 달려오며 원영을 불렀다.
“대표님! 감독님께서 촬영 전 마지막으로 스크립트 한 번만 더 확인받고 싶다고 하십니다!”
“네, 갑니다. 선배 잠깐 계세요.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에 계셔야 돼요.”
국제미아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잘난 애인을 간수하기 위함인지. 아무튼 재승에게 신신당부를 한 원영이 카메라 쪽으로 가서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생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안 했을 것 같은 재승이 관장에게 굳이 하고 싶다는 말이라도 해 본 것은 이번 광고가 처음이라고 들었기에, 이번 촬영 스크립트는 어쩐지 재승의 로망이었을 것 같은 리스트가 화려하리만큼 꽉꽉 담겨 있었다.
그 말인즉 화려하게 촌스러운 리스트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늘 원하던 그림이 그것이었고, 이번 모델은 천재승인데 무엇을 걱정할까.
당연히 고칠 것은 없는 상태라 원영도 감독도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며 재차 확인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네, 그럼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아, 감독님 그리고요…….”
힐끗 재승을 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원영이 감독에게 한 가지 지시를 더 내렸다. ‘그럼요!’ 하는 감독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원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재승에게 다가갔다.
“촬영 기대돼요?”
“응.”
“떨리진 않아요?”
“오……. 그러고 보니까 그건 별로. 경기장에도 카메라는 있고 여긴 경기장보다 사람 없잖아. 안 떨려. 그냥 신나.”
“다행이네요.”
도리어 더 신난 것 같은 기색의 원영이 재승에게 말하자 재승이 으아, 하며 아무런 의미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이후 두 사람은 잠시 이렇다 할 대화 없이 바다를 감상했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에메랄드빛 바다에는 서핑보드에 올라가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화려한 수영복을 입은 채 물장구를 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기하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멀리서 들으면 외국이나 한국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들렸다. 평소라면 시끄럽다고 느꼈을 수도 있는 소음을 나란히 듣고 있자니 어쩌면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것도 같은 게 묘했다.
“대표님! 준비 다 됐습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또 처음 보는 스태프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나란히 서 있던 두 남자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재승이 멍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영상 촬영을 위한 카메라는 준비가 아직도 한창인데 뭐가 준비가 다 되었다는지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메이크업 받은 김에 프로필 교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경기 할 때 나오는 프로필 그거 언제 찍은 거예요?”
“……첫 경기 할 때?”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얼굴에 원영이 ‘갑시다.’ 하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고작 프로필 촬영에 광고 촬영 한 번을 시작한 것뿐인데, 10년 가까이 재승의 곁에 있던 관장 놈이 해준 것보다 벌써 더 많은 것을 해준 느낌이었다. 때문에 비행기에서 재승이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럴 땐 화내는 시간도 아까우니 서둘러 더러운 기분을 정화를 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기분 정화에는 역시. 자신의 애인인 천재승만 한 게 없었다.
*
작은 나무 의자에 올라간 스태프가 까만색 암막을 펼쳐들고 섰다. 반사판을 한 개씩 들고 선 스태프 두 명과 보도용 디지털 카메라를 든 감독까지 서자 재승은 어색해하며 그들의 중간에 섰다.
“선수님, 가장 자신 있는 포즈 취해주세요!”
멀찍이서 구경 중이던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가 재승에게 요란을 떨며 소리쳤다.
재승은 스태프들을 힐끗, 그러다 원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으학 웃음을 터트리며 거울을 보면서 했던 것처럼 양팔을 들어 굽혔다.
탄탄한 이두박근을 자랑하며 재승이 해맑게 웃는 모습은 곧장 감독이 든 카메라에 담겼다. 평소 재승의 얼굴보다 어둡게 메이크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피부를 밝아 보이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너무 예쁘게 찍혀도 불안한데. 원영이 생각하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재승이 팔을 아래로 내려 불끈 쥐고 이번에는 배 근육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원영의 애인은 자신 있는 포즈가 많은 모양이다.
물론, 자신 있을 만했지만.
*
재승의 광고 촬영은 순조롭다면 순조롭고, 순탄치 못하다면 순탄치 못한 편으로 흘러갔다.
일단 재승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잘도 뛰었고, 빼는 것 없이 포즈도 잘 잡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너무 자주 웃음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야성미를 내세우는 광고에 들어갈 남자가 틈만 나면 청량한 얼굴로 웃어대니 보기도 좋고 분위기도 밝았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재촬영은 몇 번이고 다시 해야만 했다.
그래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즈음에는 그날 분의 촬영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날을 기약하며 헤어질 때, 현장에 나와 있는 스태프들은 전부 천재승 선수의 팬이 되고 말았다.
“스포츠 방송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부러 악의적으로 찍기도 하고 그러나 봐?”
“그러게요, 안 봤으면 영원히 모를 뻔했어요. 사람이 어쩜 저렇게 순하지.”
지나가는 스태프들이 하는 말마다 온통 재승의 칭찬 일색이었다. 순하고, 매너도 좋은 것 같고, 욕쟁이일 줄 알았는데 욕도 안 하며,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잘생겼다고.
기타 등등의 칭찬은 간혹 재승과 원영의 귀에 들어가기도 해서, 원영이 ‘선배, 들었어요?’ 하고 되짚어주면 재승은 으학, 으학 잘도 웃음을 터트렸다.
몸에 바른 오일을 닦아낼 겸 숙소에 들른 재승은 원영과 함께 샤워를 한 뒤 근처 펍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 뒤엔 사이좋게 데이트 겸 바닷가를 거닐었는데, 재승과는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이 하도 재승에게 말을 걸어오는 통에 결국은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동양미가 넘치는 미남형 얼굴. 사실 덩치에 맞지 않게 선이 고운 얼굴을 하고 있는 원영은 한국에서 더 먹히지만, 재승은 동양에서도 먹히고 서양에서는 특히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외형이었다.
원영은 재승이 영어를 하지 못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저 사람이 뭐래?’ 하고 물을 때마다, ‘길이 어디냐는데요.’ 혹은 ‘자기 일하는 가게로 오라는데요.’ 하는 식으로 온갖 사람들의 플러팅을 전부 둘러댈 수 있었으니까.
“참, 선배 광고 모델료 제가 이야기 안 해드렸었죠?”
숙소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원영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재승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재승은 그 중요한 걸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지 ‘오.’ 하고 감탄하더니만 이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게 참 천재승다웠다.
물론, 이제 와서는 천재승다운 일을 해도 문제될 것이 하나 없기는 했다. 혼자서도 잘 챙기고 다닌다면야 당연히 최고로 좋겠지만, 못 챙기더라도 원영 자신이 챙겨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온갖 김칫국을 마신 끝에 극적으로 재승과 사귀게 된 원영이 ‘어쩌다 이런 사람이 나한테 굴러들어왔지?’ 하며 자기 한 짓 모르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원영이 이내 피익 웃으며 재승에게 말했다.
“책정된 금액이 1억이니까 선배가 받는 돈은 9천만 원이예요. 원래는 거기서 세금을 빼야 되는데요, 이번엔 선배 KFC 들어오고 나서 처음 돈 버는 거니까 그거 기념할 겸 세금은 KFC 쪽에서 전부 부담하기로 했어요. ……결론은 하와이 와서 9천만 원 버신 거라고요. 금방 부자 되실 거라서 선배 세금 처리할 세무사도 미리 계약해놨어요. 세무사 비용은 애인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계속 제가 처리할 거니까.”
원영이 어렵지 않은 말을 덧붙여가며 말한 덕분에 재승도 원영의 말을 얼추 알아들은 듯 보였다. 재승이 작은 목소리로 ‘9천만 원.’ 하고 중얼거렸다. 원영의 생각에는 그 뒤 재승이 으하학,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릴 줄 알았는데…….
어째 재승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당최 알아볼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승은 아마 ‘자신이 벌어들인’ 9천만 원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억 단위의 빚을 지었을 땐 화를 내기는 했어도 현실을 잘도 받아들이더니만, 어째서 좋은 일에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지.
아, 혹시 관장 때문인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원영이 잠시 으음, 하고 목을 울렸다. 이게 과연 실수를 한 것일까 하며 고민하는 목 울림이었다.
원영이야 당연히 관장이 짜증 나다 못해 죽이고도 싶었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며 늘 되새겼던 만큼 재승에게 대놓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영까지 재승에게 사기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까지는 아무리 원영이라고 해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관장의 인과응보 작업이 이미 들어간 상태인데, 재승이 여태까지 잘 잊고 있다가 뜬금없이 관장을 보러 가겠다며 문자를 남겼다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원영은 차라리 재승이 관장을 미워하기를 바랐다. 실상을 알면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게 살았는지도 알게 될 텐데, 재승이 그런 놈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히 보기 싫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원영은 신이 아니므로 바란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테다. 재승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이후에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는 그때가 되어서, 그때의 재승과 원영이 함께해야만 알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원영은 계속 재승과 함께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날이 온다면 옆에서 위로를 하든, 같이 욕을 하든 모든 다 해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선배.”
“……응?”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재승이 화들짝 제 세상으로 돌아왔다. 원영은 돈 이야기를 하다말고 뜬금없이 재승에게 고백하던 날이 떠오른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감격에 젖어 대충 흘렸지만, 생각해보니 조금 의아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선배 저랑 사귀기로 한 날이요.”
“응.”
“그날, 제 고백 받아 주시면서 은행에 저축할 돈도 없다고…… 그랬었죠?”
원영의 질문에 재승이 자기가 했던 말을 떠올리는 듯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아, 응. 그랬지?”
이내 흘러나온 대답에 이번에는 원영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어째서?”
묻고 나서도 ‘왜?’ 하는 물음이 머릿속에 한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재승이 계약금 명목으로 받은 돈이 정확하게 5억이었는데, 그중 큰아버지가 남기고 튄 빚과 재승이 원래 가지고 있던 빚을 청산하면 계산상으로는 1억 하고도 8천 정도는 남아야 맞았다.
혹시 재승이 자신 몰래 또 사기라도 당했나 싶어 원영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계약금 남은 거 어쩌셨어요……?”
원영의 물음에 재승이 눈치를 봤다. 때문에 원영은 재승이 그새 사고를 친 게 맞구나 싶었다. 내내 붙어 있었는데 사고 칠 시간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선배 혹시 사기…….”
“그거 아니야, 원영아. 그대로 있어.”
원영이 오해를 한다 싶었는지 재승이 그제야 변명을 했다. 하지만 그대로 있다는 말을 들어봤자 재승이기에 믿음이 안 가는 것은 사실이라, 원영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재승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한테 거짓말 하는 거예요, 지금?’
원영이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분명 표정으로 재승을 나무라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 재승이 자못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야. 통장에 그대로 들어 있어. 설마 한국은행이 망하지는 않을 거 아냐.”
재승의 말대로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나라에서 하는 은행이 망할 염려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억울해하는 것을 보면 돈이 그대로 있다는 것도 거짓은 아닌 듯 보였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영의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다. 원영이 불신이 가득한 눈초리로 재승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럼 왜 없다고 그랬어요?”
“……없는 셈 치기로 했으니까……?”
재승은 어째 자신 없는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멀쩡히 있는 돈을 왜 없는 셈 치기로 하셨는지 그 사정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 재승이 ‘125억 모으기 전까지는.’ 하며 끝난 줄 알았던 말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125억. 참으로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그 숫자에 원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 왜 이렇게 125억에 집착하세요. 진짜 종신계약 때문에 화나서 그러는 거예요? 선배 계약서는 종신만 빼면 남들 못 보여줄 정도로 좋은 계약서라니까요? 아무리 선배라도 KFC가 소수점을 먹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원영은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해대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여나 다른 선수에게 재승의 계약서가 알려지는 경우, 9 대 1까지는 ‘천재승이니까 가능한 퍼센티지’라고 말하면 대부분 수긍을 하고 돌아갈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퍼센티지가 소수점 단위로 내려가는 순간, 그건 특혜가 되고 말았다. 해줄 수야 있지만 분란의 변명거리가 없는 행동은 대표로서 하면 안 되었다.
게다가 계약서의 종신항목은 그 자체로서 재승과의 혼인신고서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뺄 수 없는 항목이라 이 말이다. 재승이 화를 내도, 혹은 울음을 터트린다 할지라도 원영은 자신과 재승의 영원을 보장받은 계약서만큼은 절대 고칠 수 없었다.
그런 원영의 복잡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승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봤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에 원영이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포부 가득한 표정을 지은 원영이 재승에게 말했다.
“일단 뭐든 말이라도 해봐요. 종신 빼라는 소리만 아니면 제가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재승이 바라는 게 있다면 계약서를 두 장 쓰면 될 일이 아닌가?
새로 쓴 계약서의 내용은 둘 빼면 아무도 모르게. 재승에게도 당부에 당부를 하면 비밀 또한 지켜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원영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재승은 계속해서 눈치를 보았다. 원영이야 당연히 답답했지만 그래도 꾹 참고 기다렸다. 그러자 재승이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네.”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
“헤어지면-”
원영은 그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재승의 말을 끊었다. 말 늘이는 게 어째 불길하다 했더니, 할 말 못할 말이 따로 있지.
가만 보니 신혼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 평생보장 애인에게 못하는 말이 없었다.
“선배 혹시 재면서 저 만나요?”
얘랑 언제 헤어지지, 하면서 날짜 세어가며 만나느냐고. 원영이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묻자 재승이 그게 아니라며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원영은 더욱 강수를 두었다.
“그럼 제 마음이 변할 것 같아요?”
나를 그렇게 못 믿느냐고. 그럼 선배 믿은 나는 뭐가 되는 거냐며 원영이 첫 질문보다 조금 더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재승은 원영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쩔쩔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안 변해. 미안……. 사랑해!”
재승이 사과를 하려다 말고 버럭 소리쳤다. 재승이 알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타이밍에는 미안하다는 말보단 사랑한다는 말이 더욱 잘 먹히는 법이었다.
덕분에 울컥 치솟았던 원영의 화도 푸시식 꺼졌다.
“뽀뽀.”
원영이 약간은 불퉁한 말투로 지시하자 쪽, 재승이 부드럽게 입맞춤을 했다. 고개를 끌어 보답이라도 하듯 쪽쪽, 재승의 입술에 두 번 입을 맞춘 원영이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재승에게 말했다.
“앞으로 돈 벌 때마다 펑펑 쓰세요. 나 해달라는 소리 아니에요. 선배 집 고치고, 차도 사고, 펑펑 써요. 통장에 125억 모으기만 해 봐요, 진짜.”
“……알았어.”
재승은 눈치를 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던 재승이 이내 행복한 듯 웃으며 원영을 끌어안았다.
둘은 마주 끌어안은 채 서로의 냄새를 맡기 위해 킁킁거리는 시간을 가졌다.
느닷없는 사랑싸움이 지나자 어째 조금 더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이 사랑은 식지 않고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아마 재승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원영은 확신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