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Romantic Confession
재승이 살아가면서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본 일은 모두 몸 쓰는 일밖에 없었다. 막노동에 ‘재능’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경우는 없었으므로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것은 킥복싱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기초를 배울 때는 들어보지 못했었던 것 같다.
재승은 첫 스파링에서 이기고 나서야 겨우 ‘너 재능 있구나!’ 하는 소리를 들어봤다. 관장님이 그 말을 하면서 어찌나 놀란 표정을 지었던지. 그 장면은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재승에게는 손에 꼽을 행복한 기억이었다.
재승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이종격투기 선수라는 직업이 좋았다. 맞으면 당연히 아프지만 아픈 거 참아가며 두들겨 패고, 그렇게 두들겨 패서 이겼을 때의 기쁨과 쾌감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했다.
관장님은 칭찬에 인색한 스타일이셨다. 그런 관장님이 이겼을 때마다 툭툭 던지는 칭찬이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그냥 경기를 하는 자신이었다. 케이지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뭐, 처음에 응원한 사람은 자신이 아닐지라도, 원래 사람은 이긴 사람을 추켜세워주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이종격투기 선수라는 직업에 대한 본인의 만족도는 지극히 높았다. 그러나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본인과 친근한 사람들의 만족도는 좋지 못한 직업이었다. 가족은 이제 없으니까 일단 넘어간다 치더라도 재승의 애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직업을 탐탁잖아 했었다.
다치는 게 보기 싫다고도 했었고, 보고 있으면 무섭다고도 했다. 그냥 그만두고 다른 일 하면 안 되느냐고 묻는 경우도 아주 많았다. 고민을 아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애인이 아무리 좋아도 자신의 첫 재능을 발견해준 관장님과 이종격투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애인이었던 모두에게는 존중해달라는 말 대신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고, 도리어 서운하기만 했었는데도.
그래서 이 장황한 생각을 왜 하고 있는가 하면…….
“선배! 잘 참았어요!”
이원영은 애인이 되어도 나를 응원해줄 것 같다고. 아마 그 말을 속으로라도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린 재승이 링 바닥에 주저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재승과 함께 링 안에 들어가 있던 코치가 링을 아래로 내리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사이 원영이 링 위로 올라왔다. 원영은 재승에게 가까워지기 무섭게 차가운 물에 젖은 스포츠 타월을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차갑게 식은 손이 구부러진 재승의 어깨를 곧게 폈다. 재승은 눈을 감은 채 그저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찬 손이 뒷목을 주물렀고, 그와 동시에 납작한 얼음팩이 가슴에 닿았다.
“으아…….”
맞아서 후끈후끈하던 곳에 한기가 닿자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시원해서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문질러주었으면 하는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아래, 아래. 배, 배…….”
재승이 작은 목소리로 원영에게 말했다. 훈련 중 어찌나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는지, 하다못해 목소리까지도 정상에서 한참을 벗어난 상태였다. 재승은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큼큼, 헛기침을 했다.
원영이 재승의 요구에 따라 얼음팩을 복부로 가져갔다. 후끈후끈하던 곳에 한기가 닿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살만해진 재승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배 위를 향했다. 그러자 얼음팩을 문질러주고 있는 원영의 손이 보였다. 굳은살이 박여 있어도 원래는 새하얗기만 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빨갛게 얼어서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얼음팩 때문이다. 내려놓고 있다가 끝났을 때 들고 오면 되지 그걸 무식하게 내내 들고 있으니까 손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다.
재승이 맷집 훈련을 하는 동안 원영은 혹한기 훈련을 한 것이 분명했다. 손에다가 그 훈련을 해서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당최 알 수가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보기가 좋지 않았다. 재승이 얼음팩 위에 얹어져 있던 손을 밀어냈다. 고개를 든 재승의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생겨 있었다.
“너는…… 왜 네가 이걸 하고 있어? 안 바빠?”
세계에서 알아주는 고급 인력이 소속선수 보조나 하고 있는 건 절대로 흔하지 않은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근래 2주 동안 KFC타워에서는 그런 일이 아주 흔하다 못해 일상으로 벌어졌다.
원영은 비단 회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재승이 가는 모든 곳에서 재승의 보조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되고 싶은 대로 되었다. 어쩔 때는 재승에게도 필요한 이유가 있어서, 또 어쩔 때는 재승이 반박을 하지 못해서. 필리핀 여행에서 그를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했다.
재승은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지금까지 원영과 지겹도록 붙어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자는 6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놈이 어쩌다 사라지는 몇십 분씩을 빼고 종일이라 보면 됐다. 원영이 하는 것이 싫었던 적은 없었고, 그러니 붙어 있는 것도 당연히 좋았다.
하지만 여행에서도 좋은 게 문제였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역시 좋은 게 문제다. 훈련하는 동안 체육관 내부에서 서류를 보는 얼굴이 익숙해져서, 그러다가 지금처럼 달려와서 자신을 보조해 주는 것이 익숙해져서. 이원영은 어디 가서 사람 녹이는 법을 배우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재승은 사정없이 살살 녹았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고 있지 않든 간에.
“저번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그래도 다시 말해 줄게요. KFC가 다른 선수도 아니고 천재승을 잡았잖아요. 가장 큰일이 끝났는데 옛날보다 바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예요. 그리고 저는 선수도 관둘 거라 원래 훈련하던 시간이 텅텅 비었어요. 그래서 완전 한가해요. 선배만 졸졸 쫓아 다녀도 아무런 지장 없을 만큼.”
여전히 뒷목을 손으로 주물러주면서 원영은 은근슬쩍 얼음팩 위로 자신의 손을 다시 가져다 댔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만연했다.
재승은 아직도 빨간 손가락 끝을 한 번, 부드럽게 웃고 있는 놈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후, 잡고 있던 얼음팩을 놓아 버렸다.
원영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웃으며 얼음팩을 뒤집어 대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재승은 원영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재승은 완벽하게 패배했다.
“경기 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었어요. 불안하다 했더니…… 실핏줄 다 터졌잖아요. 어차피 맞기만 할 거 순서도 알고 있겠다 그냥 눈 감고 맞으면 되지…….”
원영이 걱정 어린 잔소리를 주절거렸다. 그리곤 뒷목을 쓰다듬던 손을 빼서 재승의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무의식적인 행동 같았다. 소속선수와 대표, 선배와 후배라는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지는 않을 테다. 재승도 알고는 있지만 원영이 가끔(사실은 자주)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좋았다.
재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원영의 얼굴만 눈에 담았다.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정신을 차린 원영은 저 혼자 흠칫거렸다. 원영이 쥐고 있던 재승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좋아한다고 고백은 잘만 했으면서 좋아하는 마음 행동으로도 조금 티 내는 게 뭐가 그렇게 당황스러운지 모르겠다.
재승은 속으로만 잠시 불퉁거렸다. 분명 불퉁한 마음이 든 것은 같은데, 그런 마음이 어째서 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이라도 드실래요?”
재승의 마음을 모르는 원영은 부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러자 재승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물 마시면 토할 것 같아.”
빈말이 아니라 뭐라도 들어오면 곧장 게워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승은 자신도 모르게 원영에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원영과 재승이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 재승은 원영에게 처음으로 코치를 소개 받았다. 이름은 황세준이고 나이는 스물일곱. 원영과 동갑으로, 재승보다는 한 살이 어린 남자였지만, 나이는 어려도 국내에서는 손에 꼽힐 만큼 잘나가는 코치라고 그랬다.
원영의 말처럼 코치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재승은 알지도 못하는 선수들의 이름을 읊으며 자신이 그들을 코치했다고 자신 있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곤 느닷없이 황송하다고 말했다. 살다 살다 천재승 선수를 코치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영광이라고 그랬다.
근데 그건 분명히 빈말이었을 것이다. 재승이 그렇게 확신을 하는 것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황 코치가 다음 날부터 차근차근, 재승을 갈았기 때문이다. 갈았다. 조금 과격한 표현이라고 느낄지 몰라도 그 말이 아니면 코치의 횡포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KFC체육관에 있는 삐까뻔쩍한 운동기구로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것은 아주 신나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당시 마냥 신이 나 있던 재승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재승은 생전 ‘체계적인 훈련’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황 코치의 체계적인 훈련을 설명하기에 앞서 일단 관장의 훈련을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관장의 훈련은 늘 재승이 흥겨울 만하면 모든 루틴이 끝났었다. 약간 아쉬운 정도라 집으로 돌아가서 샌드백 몇 시간을 더 쳤다. 거기에 조깅까지 1시간쯤을 더 하고 나면 딱 만족스러웠다. 훈련은 아쉬운 정도인데 그마저도 자주 하지 않았다. 그러니 늘 혼자서 뛰고 혼자서 치고. 그게 익숙했다.
그렇지만 관장도 나름 해야 할 훈련은 했다. 이를테면 오늘 한 맷집 훈련 같은 것 말이다. 여러 명이 번갈아가면서 같은 곳만 무식하게 때렸다. 강도는 칠 때마다 달랐고, 예상할 수도 없었다.
어쩔 때는 치는 게 힘들다며 커다랗고 무거운 공을 누워 있는 재승에게 계속해서 떨어트리는 것만 했다. 아프니까 훈련이 되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은 그것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아, 조금 더 해봐도 될 것 같은데요?’
이 질문은 황 코치의 습관 같은 말이다. 처음 그 말을 들은 것은 데드리프트를 배우고 고중량으로 3세트 한 뒤 힘들어서 숨이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그때부터 황 코치는 재승이 익숙해졌다 싶으면(참고로 재승은 시키는 모든 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저 말을 내뱉었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러다 무언가를 게워낼 것 같거나 딱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여기까지 하자고 말했다.
게다가 맷집 훈련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인간은 체계적으로 맞을 수도 있다. 이종격투기 선수로 그만큼을 굴렀지만 몰랐는데 재승은 황 코치를 만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좌폐, 우폐, 비장, 췌장, 신장. 장기가 있는 곳을 골고루 시간 맞춰서 같은 속도와 같은 힘으로 맞는 느낌이라니.
무식하게 맞으면 몸만 상하니까 체계적으로 조져야 된다고? 기왕 조질 거 무식하게 조져줬으면 좋겠다. 재승은 무식하게 맞는 게 더 좋았다. 무식하게 맞으면 적어도 무조건 급소만 맞는 것보다는 덜 아프니까. 황 코치는 악마였다. 사탄……. 사탄도 그런 사탄은 아마 없지 싶었다.
“원영아……. 황 코치님이 나 싫어하는 거 같아. 주먹에 감정 실렸어.”
재승이 작은 목소리로 원영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진짜로 욕을 하는 건 아니었다. 황 코치가 재승을 굴리는 건 확실했지만, 효과만큼은 분명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맞은 부위의 근육들이 더 탄탄해졌고, 원래도 좋았던 체력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도 똑똑히 받고 있었다.
“자를까요?”
원영은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재승을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말만 하면 정말 잘라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재승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원영이 좋은 느낌과는 다르지만, 황 코치도 좋았으니까.
어쩌면 재승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황 코치가 천재승이라는 선수만을 위해서 새로운 루틴을 짜고, 선수 천재승을 살피며 훈련을 해나간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야말로 조력자라는 것을 말이다.
“선수님! 재개할까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를 치며 황 코치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원영이 재승에게 둘러놓은 수건과 문지르고 있던 얼음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다리로 성큼 링을 빠져나간 원영이 수건을 가볍게 휘둘러 찰싹, 황 코치의 팔뚝을 내리쳤다.
“살살해라, 살살.”
“아이고, 대표님! 시즌 훈련을 어느 코치가 살살하지 말입니까!”
황 코치는 원영의 장난스러운 말에 똑같이 장난스러운 대응을 하며 깐족거렸다. 재승은 링에 퍼질러 앉아 그 모습을 보며 히죽거렸다. 원영과 말장난을 주고받던 황 코치가 링 안을 보며 소리쳤다.
“아이고, 선수님! 이제 일어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일어나요!”
재승이 칼같이 대답하며 무릎에 손을 짚었다. 문 앞에 선 원영이 재승을 향해 손을 들고 파이팅 하는 포즈를 취했다.
“선배 열심히 하세요!”
꼭 어디 갈 것처럼 인사하는 원영을 보며 재승이 그래 하고 손을 흔들었다. 재승에게 다가가던 황 코치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황 코치는 자신에게 반말하는 이원영이 천재승에게는 존댓말을 쓰고,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는 천재승은 이원영에게 반말을 쓰는 게 아직도 우스웠다. 족보가 빙빙 꼬인 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2주 내내 황 코치뿐이었다.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천재승은 나이 어린 코치도 코치 대접을 해주려는지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주시는데. 저런 사람한테 도대체 그런 소문은 왜 났던 거지? 황 코치는 소문의 근원이 궁금했고, 마냥 어이가 없었다.
*
황 코치와 천재승이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체육관 내부에서 팡팡, 일정한 간격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고로 어디 갈 것처럼 인사했던 원영은 당연히 어디 가지 않았다. 원영은 재승이 두드려 맞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 체육관의 구석에 앉아 자연스럽게 태블릿의 화면을 켰다.
태블릿에는 재승이 봤다면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할 것 같은 파일이 열려 있었다. 힐끗 링 위에서 맞고 있는 재승을 바라본 원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곧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훈련하는 천재승은 좋지만, 맞고 있는 천재승을 보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재승을 위한 일이니까. 당연히 원영이 감내해야 하는 마음이었다.
파란 쿠션의 스테인리스 의자는 맞춤정장을 차려입은 커다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영은 불편하고 좁은 의자 위에 앉아 꽤 골몰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일을 하느라 골몰한 것은 아니었다. 눈은 태블릿을 보고 있지만 생각은 영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원영은 지겹지도 않은지 방금 본 재승을 또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평범한 의자가 작아 보일 만큼 커다란 남자 이원영은 요즘 한없이 작아진 상태였다. 커다란 이원영이 자꾸 작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짝사랑 때문이다.
천재승. 천재승. 천재승.
원영은 여태껏 보아왔던 그 어떤 것보다 천재승이 어려웠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아서. 그런데 포기는 안 되고 그럴수록 오히려 더 애틋하기만 하니, 아주 요물이 따로 없었다.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쉬울 것 같은 남자가 다시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남자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하……. 이런 매력덩어리. 원영이 탄식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원영은 천재승에게 고백을 하고 차였다. 하지만 2주 내내 둘 중 그 누구도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이 모양새를 재승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원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다시 재승을 꼬실 수 있는 기회라고. 그러니까 재승에게 최대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했다.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똑똑한 원영은 ‘놀란 밤비가 부담스러워서 도망부터 친다’는 상황도 염두에 두었다. 매력 어필도 하기 전에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 밤비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서 매력 어필도 하는 아주 멋진 상황을 만들었다. 세부사항을 읊어보자면 이러했다.
일단 첫째로, 원영은 재승의 낡은 용달트럭을 들먹였다. 조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노후 경유차 수도권 제한을 한 지도 좀 되었다.
배기가스 5등급 이상이면 서울을 들어올 때마다 벌금을 내는데, 대부분의 10년 이상 된 차들은 이것 때문에 대부분 폐차를 했다. 그리고 재승의 차는 10년 이상 된 차일 것이 분명했다.
‘선배 차는 배기가스 등급이 몇 등급이에요?’
원영은 재승에게 물었고, 재승은 답을 알지 못했다. 벌금 내라는 소리를 못 들은 걸 보면 5등급이 아니라 4등급일 것이 거의 확실했으나, 원영은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재승을 조금 겁주었을 뿐이다.
‘5등급이면 선배 차 폐차해야 할지도 몰라요.’
재승의 안색이 기다렸다는 듯 시퍼렇게 질렸다.
‘폐차……? 폐차는 안 되는데…….’
재승은 안쓰러울 정도로 불안해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불안에 떨고 있으니 약간 양심의 가책이 올라왔다. 하지만 재승에게 선물을 줄 예정이었기에 원영의 가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선배. 자동차를 폐차시키지 않는 방법이 있어요. 외관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뜯어고치면 되잖아요. 그렇죠?’
‘오…….’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원영은 생각했던 대로 자신이 깔아놓은 포석을 알맞게 사용했다. 재승은 그날 체육관에 타고 올 자동차가 사라졌다. 새로운 차를 사는 것보다 많은 돈이 깨지는 방법이었지만 원영이 신경 쓸 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원영은 돈보다 더 좋은 재승의 점수를 따냈다.
[재승이 아끼는 차를 폐차의 위험에서 구출해 주었다. 거기에 리폼 비용까지?! 완전 멋져! +10]
참고로 차가 돌아오기까지는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가 걸릴 예정이었고, 아침부터 재승을 만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 원영이 재승 몰래 얻어가는 특급 보상이었다.
그래서 둘째, 원영은 아침마다 재승을 데리러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셋째, 맛있는 아침밥을 먹였고. 넷째, KFC타워로 들어가 훈련하는 재승을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다섯째는 재승과 저녁밥을 먹으며 서로에 대한 이야기(라지만 재승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은근슬쩍 종용했다)를 나누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재승을 집으로 데려다준 뒤 그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켰다.
원영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힘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첫 번째에서는 확실히 점수를 따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나머지 2주째의 점수가 희미했다. 넘어오고 있기는 한 건가? 반응을 모르겠다.
하지만 따놓은 점수와 상관없이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재 인내심의 정도는 이러다 사고 한 번 더 치지 싶을 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원영은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방금만 해도 자신도 모르게 재승의 얼굴을 주물럭거리지 않았나. 조금 더한 것을 이실직고하자면, 사실 하루에 한 번씩 재승이 잠들면 몰래 도둑 키스도 하고 있었다. 입술은 양심이 아프니까 이마와 볼에.
자고 있는 재승이 너무 예뻐서 그 얼굴을 보면서 몰래 수음할 생각도 한 적이 있지만 그건 어떻게든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듯 보인다.
재승의 훈련이 끝나가고 원영이 재승과의 퇴근을 앞둔 시각. 원영은 얼음팩을 챙기러 가며 곰곰이 고민했다. 2주. 이쯤 했으면 다시 고백을 해봐도 좋은 시점이지 않을까? 참 일리 있는 고민이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그 말처럼 만약 재승을 열 번이나 찍어야 한다면, 한 번 한 번을 최대한 합리적이고 빠르게 찍어줘야 하지 않을까? 더더군다나 이제 고작 두 번째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원영은 다짐했다. 오늘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 번 더 찍어보자고. 원영이 마음속으로 간 도끼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예리하지만 아주아주 예쁜 도끼였다.
*
훈련을 끝마친 재승에게 마지막 얼음찜질을 시켜준 뒤, 재승이 샤워하고 나올 것을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향긋한 냄새를 풀풀 날리는 재승이 곧 샤워장에서 나왔다. 원영은 매너를 아는 남자였으므로, 재승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그를 에스코트했다.
“선배 어제 스테이크 먹고 싶다고 하셨죠?”
“응. 저번에 갔던 데……. 오늘은 다른 거 먹어볼까?”
“그럼 저번에 드셨던 거랑 다른 것으로 몇 가지 시켜드릴게요. 코스에서 나오는 애피타이저도 좀 바꿔드릴까요?”
“애피타조?”
“……스테이크 나오기 전에 주는 수프나 빵 같은 거요.”
“아……. 그럼 그것도 다른 거 먹을래.”
힐끗. 재승이 눈치를 봤다. 잘만 대답하다가 뒤늦게 눈치를 보는 게 귀여웠다.
원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애피타이저의 종류와 스테이크의 종류를 줄줄이 읊었다. 저녁 식사 메뉴를 경청하는 재승은 하나라도 놓칠까 원영의 말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때문에 원영에게 끌어 안겨 있다는 것이나 팔뚝을 주물거리는 손길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원영은 조금 아쉬웠다. 조금 멀리 대놔도 좋았을 것을.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까지의 거리가 쓸데없이 가까웠다.
주차장 입구 가까이에 세워진 차는 원영이 자주 모는 SUV였다. 하지만 원영은 조수석에 올라탔고, 운전석에 앉은 것은 재승이었다. 재승은 잠시 차를 잃은 뒤부터 쭉, 집으로 돌아가는 길 원영의 차를 몰았다. 버튼으로 시동 거는 것을 너무 신기해하기에 원영이 그날부터 재승에게 운전대를 쥐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승은 이제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시동을 걸었고 내비게이션의 자판도 알아서 톡톡 두드렸다. 원영이 뿌듯한 얼굴을 하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사실 뿌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차는 언제쯤 사달라고 말할 거예요?’ 하고 마음속으로만 질문하는 표정이었지.
아마도 놀라울 사실 한 가지를 말하자면, 원영은 물욕이라는 것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원영이 사는 오피스텔의 주차장에는 그의 차가 딱 네 대밖에 세워져 있지 않았다. 원영은 2주 동안 재승이 그 차들을 전부 몰아보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몰아볼 수 있는 종류가 너무 적은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종류 다른 것으로 몇 가지 정도는 더 사놓을걸. 뒤늦은 후회도 들었다.
지금이라도 몇 대 더 사놓을까? 운전대를 잡은 재승의 손을 보니 그런 유혹이 원영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당장은 차 선물을 해주어도 절대 받지 않을 것 같지만.
만약 사귀는 사이가 되면 그 정도야 받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되면 트럭은 장식품으로 전시를 해놓고 평소에는 좀 예쁘고 편안한 차를 타고 다니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진짜 실행 가능성이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힐끗, 재승을 훔쳐보던 원영은 재승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재승이 ‘뭐?’ 하고 묻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원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헤벌쭉 웃기만 했다. 물기를 머금고 있던 귀밑머리가 어느새 말랐는지 뽀송뽀송해 보인다. 만지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거렸다.
참아야지. 오늘도 귀여운 선배. 선배는 나한테 언제 반하지. 오늘 넘어와 주면 안 되나. 잘 찍을 수 있는데.
어느새 원영의 손은 본인도 모르게 재승의 귀밑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까슬까슬해서 귀여워. 그렇게 생각한 원영이 흠칫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다행히 재승은 아무렇지 않게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선배가 눈치 없어 다행이었다.
*
얼마 뒤, 두 사람이 탄 SUV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 재승은 한번 와봤다고 발레파킹을 맡기는 것과 엘리베이터를 잡는 것까지 알아서 척척 해냈다.
원영은 쓸데없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재승이 잡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에스코트를 하는 것도 좋지만 에스코트를 받는 느낌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좋았다. 뭐가 됐든 천재승이 최고라는 말이다.
“레스토랑이요.”
직원을 향해 말하는 재승의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재승이 원영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할 때는 방금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딱히 어디가 부드럽다고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보다 원영을 대할 때 조금 더 부드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끼 찍기 딱 좋은 장소에 재승의 마음도 약간은 느껴지니 원영의 가슴은 설렘에 부풀었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직원이 버튼을 눌렀다. 전광판의 숫자가 빠르게 뒤바뀌기 시작했다.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른 엘리베이터는 호텔 최상층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재승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벗어났고 원영이 여유롭게 그 뒤를 따랐다. 말이 ‘여유롭게’지,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쫄쫄쫄 재승을 쫓았다. 그러나 쫄쫄쫄 쫓아봤자 워낙 다리들이 길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입구에 서 있던 직원들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커다란 남자 둘이 순식간에 레스토랑의 입구를 넘어가자 멀리 서 있던 직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직원 하나가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리곤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혹시 편하신 자리가 따로 있으시다면 그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급하되 품위를 잃지 않고 다가온 직원은 공손하게 안내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선 후부터 연신 레스토랑 안을 두리번거리기만 하던 재승이 마침 찾던 것을 발견한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직원을 봤다.
“저기. 창가요.”
재승은 일전에 원영과 함께 앉았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재승이 가리킨 자리를 확인한 직원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승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는 예약하신 분들께만 제공되는 자리입니다.”
당연하지만 재승은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영이 피식 웃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이원영으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원영의 말에 직원이 가슴 포켓에 꼽아 놓았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때, 멀리서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허둥지둥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지배인은 언제 급하게 달렸냐는 듯 정중한 목소리를 내며 손짓을 한 뒤 자리를 안내하기 위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선배. 원영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재승을 불렀다. 재승이 원영을 올려다봤다.
“오…….”
예약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셨던 선배께서 무척이나 감동하신 눈치셨다.
*
재승을 원하는 자리에 앉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리 주문해 놓았던 애피타이저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재승은 새로운 수프와 빵을 오물오물 맛나게도 먹었다. 초반 식사를 하면서 나눈 이야기는 오늘 재승이 한 훈련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늘 일로 시작해 사적인 대화로 넘어가고는 했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원영은 재승과 자신에게 예상 가능한 미래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재승은 혼자서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훈련은 뭐가 재미있고, 뭐는 힘들었다고. 그 뒤엔 이번 주에 가는 광고 촬영에 대한 기대감을 읊다가, 느닷없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하와이는 찍는 사람이랑 우리 둘만 가는 거지? 비행기 같이 타? 그 사람한테 인사하러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아뇨, 선배. 일단 양 비서, 황 코치, 거기에 선배 처음 보는 애들 둘 정도 더 붙을 거예요. 촬영 4일 동안 걔들이 간단한 심부름이나 운전을 할 건데, 인사는 그냥 공항 가서 하세요. 훈련도 바쁜데 인사까지 다니면 선배만 피곤해요. 그리고 촬영 스태프는 아마 감독 포함해서 스무 명……? 그쯤 되지 않을까요. 간단하게 간다고 그랬으니까.”
“……간단?”
재승이 경악한 듯 되물었다. 그 반응을 보고 나서야 원영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움직이는 경험을 선배가 이번에 처음 겪어보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그걸 이제 깨닫다니, 새삼 우스웠다.
원영은 비웃는 듯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웃음을 흘리며 재승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다.
재승은 굳이 묻지 않아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옥타곤 안에서는 그렇게 담이 크신 분이, 현실에서는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보다도 담이 작았다. 찍고 싶다고 할 때는 언제고 고작 이런 것에 부담을 느끼시는지.
재승이 원하는 ‘유명한 사람’이야 이미 되고도 남은 상태지만, 유명한 사람이 유명한 티를 내려면 이 정도는 익숙하다 못해 ‘애걔?’ 하셔야 했다. 원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간단하죠.”
“나 심부름 해주는 사람 필요 없는데.”
“막상 가면 필요해져요.”
“양 비서님은 왜 가?”
“제 비서니까요?”
“황 코치는?”
“가서도 선배 코치해주려고요.”
“그럼 황 코치는 그냥 쉬라고 하자! 나 혼자 훈련 잘할 수 있어. 옛날보다 배운 것도 많으니까 더 열심히 할게. 하와이가 가깝지도 않은데 그냥 며칠이라도 편하게 쉬라고 그래. 거짓말 아니고, 나 진짜 혼자서도 훈련 잘할 수 있어.”
“아하하하.”
원영이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심각하던 재승은 뭐가 우스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원영이 웃는 얼굴로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고 팔을 뻗은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보라는 듯 재승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재승은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 위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원영이 최대한 잘 보이도록 핸드폰을 든 채 톡톡 액정을 두드렸다.
← 그룹채팅 3
황 코치. 천재승 선수님께서 황 코치 피곤하니까 하와이 출장은 안 가도 된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생각해?
세 사람이 같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원영의 문자가 올라갔다. 문자 옆에 떠 있던 숫자 2는 순식간에 1이라는 숫자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원영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원영은 황 코치에게 걸려온 전화를 수신 거부했다. 그러자 다시 진동이 울렸다. 웅, 웅, 웅. 또 전화가 오는 것같이 연달아 울렸지만 이번에는 문자다. 원영은 계속해서 오는 황 코치의 문자를 재승에게 보여주었다.
← 그룹채팅 3
황 코치. 천재승 선수님께서 황 코치 피곤하니까 하와이 출장은 안 가도 된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생각해?
왜ㅐ요?
어째서ㅓ요?
선수니 저한테 화나셧ㅅ어요?
오늘휸련 어제ㅔ 말씀 안드린거는 전날부터 기붕 아죠을까봐 그랫어요ㅠㅠ
저 여자친구랑 엄마 선무 사주기로 약속했는데ㅠㅠ
데려가주세요ㅜㅜㅜ
제바류ㅠㅠㅠ
딱한 황 코치가 오타 가득한 문자로 기함한 심정을 피력했다. 재승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올라오는 문자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원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답장 안 해주면 황 코치 곧 울 것 같은데요.”
재승은 그제야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접혀 있던 화면을 편 재승이 서툴러 보이는 손길로 화면을 열심히 터치했다. 웅. 원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 그룹채팅 3
가치가요
곧이어 황 코치의 답장이 올라왔다.
← 그룹채팅 3
사랑해요 천재승!
재승은 어쩐지 쑥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화면을 닫았다. 다음 이야기의 주제는 아무래도 황 코치가 좋을 것 같았다.
원영이 또래의 코치를 붙여준 것은 당연히 재승이 친구, 친구 노래를 부른 탓이 컸다. 자신에게 하듯 곧장 말을 놓지 않은 것은 의외였지만, 두 사람은 이제 나름대로 친구 같은 느낌을 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즐겁게 지내는 데다가 같은 사람을 알아 공통분모가 늘어났다는 점이 원영에게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황 코치 어제 저녁에 문자로는 내일은 힘든 것 하나도 없어요, 그랬었잖아. 토끼 그림 막 보내면서 귀여운 척하고. 정말 생각할수록 악마 같네.”
재승이 흉보듯 말하며 콧김을 흥 내뿜었다. 원영이 웃자 재승은 또 흥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니까 황 코치는…… 사탕이야!”
뜻 모를 소리에 원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탕이요?”
“응. 사탕도 그런 사탕이 없어.”
재승은 굴린다는 둥, 괴롭힌다는 둥. 앞에서 말했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의 말을 덧붙였다. 어감으로 봤을 땐 황 코치를 욕하는 것 같았다.
욕이 참……. 달콤해도 이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사탕이 뭘까. 사탕, 사탕. 입속으로 단어를 굴리던 원영이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는, 황 사탕……. 이라고 불러도 좋겠네요.”
“으움! 어감 좋다. 황 사탕.”
뭐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는지 재승이 그사이 먹고 있던 음식을 냉큼 삼키며 대답했다. 원영은 그저 맞장구만 쳐주었다.
“그러게, 어감도 좋은 것 같네요. 사탄보단 사탕이 낫지. 걔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은근슬쩍 ‘사탕’을 정정하는 말을 흘리자 재승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곤 실수가 아닌 척 히죽 웃었다.
“그치.”
그러면서 키 작고 우락부락한 사내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아닐 것 같지만, 진짜 뜻은 사탄이니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단다.
“으학.”
재승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제 실수가 우스운 건지, 사탕이라는 별명이 마음에 들어 웃는 건지 원영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재승이 즐거우면 그걸로 되었지 싶었다. 원영은 마주 보고 미소만 지었다. 늘 그렇듯 원영의 미소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달그락, 달그락.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포크를 움직였다. 요정이라도 지나가는 모양인지 언제 떠들었냐는 듯 두 사람의 사이로 잔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원영은 방금 서빙 받은 스테이크를 커다랗게 썰어 한 번에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맞은편에서 앉아 열심히 먹고만 있던 재승이 포크를 쥔 채 원영을 바라봤다.
“근데, 원영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뜬금없이 진지해진 얼굴이었다. 잘 웃다가 저러니 괜히 긴장되었다. 원영은 꼴깍 소리를 내며 씹고 있던 음식을 삼켰다.
“……예. 뭔데요?”
입술을 달싹거리던 원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재승은 원영의 물음에도 한동안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눈치를 보며 방울토마토 한 알을 입에 넣은 재승이 도토리 숨긴 다람쥐 같은 얼굴을 하고 목을 울리기만 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애를 태우시는지. 재승 몰래 벌여놓은 일이 몇 가지 정도 있는 원영은 커다랗던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체육관 있잖아. 왜 나만 써?”
결국 입을 연 재승은 누군가 기를 죽기라도 한 듯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기는 했지만 원영이 숨까지 죽일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원영은 다행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김이 샜다. 얼른 표정을 숨긴 원영이 이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체육관이요?”
원영의 물음에 재승이 허둥지둥 볼에 저장하고 있던 토마토를 힘차게 씹었다. 그래놓고는 다시 목을 울린다.
“그…….”
“그?”
원영이 추임새를 넣자 재승이 입을 다물었다. 재승은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우물쭈물했냐는 듯 재승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영이 네가 나 돈도 많이 주고 맨날 비싸고 맛있는 거 사주잖아. 나는 지금 훈련 빼면 하는 것도 없는데……. 촬영하는데 사람 엄청 많이 가면 그것도 다 돈일 거고, 황 코치님이랑 나랑 둘만 쓰고 있는 체육관도 둘만 쓰는 게 말이 안 돼. 그렇게 넓은 데를……. 이러다가 너 망하는 거 아니지?”
말의 마무리는 끝을 올린 질문이었다. 하지만 원영은 곧장 대답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고작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나 싶어서. 재승 딴에는 무척이나 고민하다가 내뱉은 질문일 게 뻔했으나, 재승이 아무리 크게 고민을 했다고 한들 원영의 어처구니가 도망가는 것을 막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이거 원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어처구니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조금 좋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 언젠가는 공중파 방송으로 나가는 승리 인터뷰에서 망하라는 저주를 잘도 퍼붓던 선배가 아니던가. 그런 선배가 이제는 망할까 봐 걱정이란 것을 하고 계시니, 원영으로서는 참으로 성은이 망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제가 선배 때문에 망할 것 같아요?”
“……조금?”
“선배 좋아하니까 선배한테만 막 퍼주다가?”
“……그런가?”
대답도 질문도 아닌 말을 내뱉은 재승이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긍정으로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퍼주다가 망하는 이원영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걸 막상 당사자의 말로 들으니 기분이 이상해진 모양이랄까. 아니, 어쩌면 그만큼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 중일지도 몰랐다. 원영은 재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당연하지만 원영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추측이 될 뿐이었다. 원영이 재승의 마음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확신할 수가 있었는데, 재승이 원영에게 무언가 받는 것을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확신을 가진 원영의 심정을 말하자면, 상당히 억울했다. 여태껏 재승에게 사적으로 준 것이라고는 먹으면 사라지는 저녁 식사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재승이 받은 모든 것은 원영의 사심이 없어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공적인 영역의 것들이었다. 그러니 만약 재승이 아니라 다른 선수였다면 원영에게 은근슬쩍 말을 흘리며 지원 목록을 추가하자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승이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재승은 욕심이 너무 없었다. 아니지. 욕심은 있을지 몰라도 욕심 부리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뭐든 가져본 놈이 욕심도 부리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재승은 탐욕이란 것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호구가 아니라 등골 브레이커로 살 수 있도록.
물론 원영의 등골은 재승 하나에 휠 리가 없고 아주아주 튼튼하지만, 열심히 가르치다 보면 언젠가는 그 튼튼한 등골도 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
“……막 퍼주다가 망하면 그것도 좋을 것 같네요.”
원영이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재승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원영은 그 얼굴을 보면서 아주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농담하는 얼굴처럼은 보이지 않도록. 원영이 진지한 말투로 재승에게 말했다.
“근데 그렇게 망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
“제가 선배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치는 편이라서요. 그리고 체육관은 원래 선수당 층 하나씩 써요. 그게 KFC 방침이에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
“응.”
“선배한테 자동차랑 집이 필요할 것 같아요.”
“…….”
재승이 멀뚱멀뚱 원영을 바라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굳이 원영에게 질문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원영은 내려두었던 핸드폰을 들고 어째 안심하고 있는 재승을 손짓으로 불러냈다. 재승이 보는 화면 위로 양 비서와 원영의 채팅창이 켜졌다. 원영은 채팅창이 잘 보이도록 핸드폰을 든 채 아까처럼 톡톡, 자판을 두드렸다. 글씨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 양 비서
천재승 선수 이름으로 차 몇 대랑 오피스텔 좀 사자. 차는 작은 건 별로니까 SUV 종류로 몇 개 뽑아. 그리고 오피스텔은 KFC 근처에 하나, 나 사는 오피스텔 매물 나온 거 있으면 그것도 하나 사. 그리고 괜찮은 땅 100평 정도 찾아봐. 단독주택 하나 새로 지을 건데 찾는 김에 리모델링도 좀 알아보고.
더 쓸까 싶었지만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채팅을 끝까지 써낸 원영이 전송 버튼 앞에 손가락을 띄운 채 재승을 바라봤다. 그 뒤 원영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러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재승이 파다닥 하고 고개를 떨었다.
“잠깐, 잠깐만, 원영아!”
숨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원영의 손에 있던 핸드폰이 재승의 손으로 넘어갔다. 재승은 지우는 곳을 꾹 누른 채 원영을 바라봤다. 오늘 훈련 때문에 실핏줄이 터진 눈이 더 이상 키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뜨여 있었다. 눈이 빨개져서 더욱 놀란 토끼 같아 보였다. 원영이 피익,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이러니까 겁나죠.”
원영이 질문을 끝내기 무섭게 재승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완전 깜짝 놀랐다, 야. 완전. 절대 농담이라도 그런 거 주려고 하지 마. 나한테 그런 거 주지 마.”
몇 번이고 반복하는 대답에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기시다니. 원영이 재승 대신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셔주었다. 이럴 줄 알고 한 일이라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었다. 그래도 완전 깜짝 놀란 선배는 귀여웠으니 이쯤에서 만족해야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만 만족해야겠다는 다짐 뒤로 ‘사실은 만족할 수 없어!’ 하고 아우성치는 속마음이 날뛰었다. 원영은 재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사소한 거에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이래도 부담스러워하고, 저래도 부담스러워하면 선배가 생각해도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지지 않겠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재승에게는 그저 협박처럼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맞은편의 재승이 대답은 안하고 그저 미간을 찌푸리기만 하는 것이 보였다. 표정을 해석해보자면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더 가까웠으나, 아무튼 절대 기뻐 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질문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던 원영은 피식 하며 웃음을 흘렸다. 재승의 표정을 보면 웃으면 안 될 상황이었지만, 자각을 해도 과거 생각이 나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까운 과거엔 꽃등심 사준다는 말에도 화를 내던 선배이지 않은가. 차 사주고 집 사준다는 말에도 대놓고 화를 내시지는 않으니 이거 참 많이도 해냈구나 싶어져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난 선배한테 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선배가 싫어할 것 같아서 매일 참아요. 제가 선배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선배가 싫어하는 거 안 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참는 거예요. 선배 눈에 완전히 예뻐지면 선배도 내가 주는 거 안 부담스러워하겠지? 그럼 그때 가서 잔뜩 줄 거예요. 선배 사랑도 잔뜩 받고.”
원영은 흥겨워진 기분에 따라 자신이 생각하던 것을 마구 쏟아냈다. 업그레이드 된 원영의 도끼질은 거침이 없었다. 할 말을 잃은 듯 멍하게 굳어진 재승의 반응으로 보았을 때 확실히 임팩트 또한 남달랐던 것 같았다.
원영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재승이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하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선배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실까?
원영은 잠시 생각했지만, 굳이 재승에게 입으로 묻지는 않았다. 재승이 고민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도끼질은 이제 고작 두 번째였고, 재승이 무엇을 고민하건 원영이 차일 것은 분명했으니까. 차인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 어차피 무슨 생각을 하시든 거기서 거기라는 마음이었다.
다만 원영이 재승의 속을 완벽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면 고민의 끝이 긍정으로 끝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원영은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스테이크가 먹기 좋은 크기로 예쁘게 썰렸다. 순식간에 썰어낸 스테이크는 재승의 앞으로 갔다. 원영이 다른 접시를 들고 이번에는 자신의 몫의 스테이크를 대충 칼질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렇게 좋은데?”
기다리던 재승의 목소리가 원영의 귓가를 잔잔히 울렸다. 당연하지만 원영이 생각하던 내용은 아니었다. 원영은 조금 당황했고,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승이 물끄러미 원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도끼질에 나무가 넘어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이 원영에게 아주 좋은 기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원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여워요.”
조심스럽게 열린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 나간 말은 다소 생뚱맞았다. 재승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상상하던 대답이 아니었을 테니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원영도 이것 말고 다른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었다. 하지만 고민해봐도 역시 귀엽다는 말은 꼭 제일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귀여우면 이미 끝난 거라는.
원영은 자신이 이미 끝난 상태라는 것을 재승에게 알리고 싶었다. 재산을 거덜내든,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리든, 재승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괜찮은 상태라는 것을 그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만약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재승은 그걸 이용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사랑스러웠다. 재승 본인은 모를 테지만.
“처음에는 남들보다 조금 귀여워서 관심이 갔는데, 보다 보니까 안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냥 하나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다 좋지만 그래도 몇 개 꼽아보자면, 음……. 선배가 처음에 저 경계 많이 하셨잖아요. 선배는 그때 제가 좋아하는 거 몰랐고, 제가 일방적으로 귀찮게 하면서 쫓아다닌 건데……. 귀찮아하시면서도 저한테 나쁜 말은 안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착한 사람이라서 좋았어요.”
원영이 잠시 말을 끊고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었다. 할 말을 모두 끝낸 것은 아니지만 재승이 어째 할 말이 있어 보여서 잠시 시간을 준 것이었다. 역시나 재승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했어, 나쁜 말. 너 좆밥 선수나 키운다고, 네 회사 곧 망할 거라고 했잖아.”
꼭 나빠 보여야 할 필요성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변명하듯 말한다. 원영은 그게 자신을 거부하겠다는 징조로만 보였다. 차여도 어쩔 수 없는 건 맞지만 당연히 차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노력을 해야 했다. 최대한 예뻐 보였으면, 하고 생각한 원영이 사르르 미소 지었다.
“그 생각은 저도 아까 잠시 했었는데요. 카메라 앞에서 한 말은 진심이 아니라 쇼맨십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보다 저는 선배가 방금 전에 했던 말이 더 진담일 것 같아서요. 저 망할 것 같다고 걱정해준 사람 선배님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원래도 엄청 좋아하는데 더 좋아졌어요. 책임지셨으면 좋겠지만 책임지란 말은 안 할게요. 선배가 다정한 게 선배 탓은 아니잖아요.”
“아우…….”
재승이 뜻 없어 보이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번 안건이 통과되었다는 뜻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 안건을 나불거려야 할 때다. 원영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 여태껏 이상형 같은 거 생각도 잘 안 했고 딱히 있지도 않았거든요? 선배 좋아하고 나서 선배 이상형 계속 곱씹다가 알게 된 건데요, 알고 보니까 제 이상형도 선배 이상형이랑 완전히 똑같았어요. 키 크고, 몸매 좋고, 운동도 좋아하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건데 착한 사람. 근데 그건 큰 틀일 뿐이고 세부적으로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랑 비슷하게 아니면 나보다 더 밥 잘 먹었으면 좋겠고요, 데이트하다가 뜬금없이 미트 치자고 그래도 받아주고, 15분씩 세 세트 미트 치면서도 안 힘들어하고 즐거워했으면 좋겠어요. 또 제가 눈치가 조금 없는 편이라 좋은 거, 싫은 거 얼굴에 다 티 나는 사람이 좋아요.”
“…….”
“……제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웬만한 건 다 해줄 수 있는데요. 그래도 사소한 걸로 자주 감동해주는 사람이 좋아요. 제가 이런 마음 주체 못 하고 막 나가면 주먹질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좋아요. 선배. 저는 딱 선배 같은 사람이 좋아요. 선배가 완전 내 이상형이에요. ……선배 혹시 울어요?”
“땀이다.”
재승이 볼을 타고 흐른 물줄기를 휙 하고 훔쳐냈다. 원영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눈에서 볼의 중간까지 일직선으로 흐른 물이었다.
당연히 눈물 같았지만 물기를 닦아내는 게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정말 땀이었나 싶기도 했다.
원영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재승을 바라봤다. 재승은 별말 없이 볼만 붉히고 있었다. 조금 부끄러워 보이기도, 어쩌면 감동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이거저거 다 쏟아내고도 원영은 아직 할 말이 많았다. 재승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에 원영은 다시 말을 잇기로 했다. 조금 전의 고백과는 약간 결이 다를지도 모르는 고백이었지만, 어째 분위기상 지금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제가 생각해도 좀 재수 없을 것 같아서 남한테 이런 이야기 못 했거든요.”
“……뭔데?”
“저 어릴 때부터 되게 인기 많았어요.”
원영의 말에 재승이 침을 꿀떡 삼켰다.
“……그럴 거 같았어.”
재승은 자기가 대답해놓고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원영이 하하, 커다랗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내 부드러운 미소만을 남긴 그가 재승에게 말했다.
“근데 상대한테 방금 같은 고백해본 적 처음이에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
“…….”
“못 믿는 눈치신데, 제 딴에는 이유도 있어요. 난 사람들이 다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좀 괜찮아서 친해졌다 싶으면 다 집안 부채나 자기 필요한 돈 얘기를 하더라고요. 집안이 그러니까 그러려니 해도, 먼저 다가온 사람들도 제가 좋아서 먼저 다가간 사람들도 하나같이 그러니까……. 사람한테 관심이 잘 안 가더라고요. 진짜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근데 선배 만나고 나서 요즘 좀 반성해요.”
원영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입으로 뱉고 나서야 자신이 요즘 반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하지만 반성은 반성일 뿐, 현실에 반영되는 무언가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계산적으로도 잘 이어지고 있으니까. 원영은 재승 하나면 충분했다.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원영이 정신을 차리자 고개를 기울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승의 모습이 보였다. 반성한다는 말 다음으로 이어질 말이 나오지 않으니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원영은 재승에게만 헤퍼지는 웃음을 흘렸다.
“제가 과거에는 다 덜 좋아했었나 봐요. 지금은 선배가 저 좀 이용해 줬으면 좋겠거든요.”
헤픈 웃음과 천치 같은 소리가 잘도 어우러졌다. 재승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분명 이용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테다. 귀엽다는 생각에 원영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때, 재승이 입을 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나 못 배웠고 무식해.”
원영보다 더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재승의 예민한 부분이었으므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나 보다. 재승은 뜸을 들이듯 스테이크 한 조각을 씹더니, 이내 원영을 바라보았다.
“운도 좀 없는 편이고. ……아니다, 운은 조금 많이 없다. 내가 돈 넣은 은행 망하는 거 너도 옆에서 봤지? 그게 제일 심한 거긴 한데……. 자잘하게는 라면에 건더기 스프만 두 개 들어 있을 때도 많고……,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주인 찾아주려고 주웠다가 느닷없이 주인이 나타나더니 신고해서 경찰서 잡혀간 적도 많아.”
“……그건 운이 아니라 지갑 주인들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원영의 질문에 재승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원영은 다시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재승이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 말꼬리 잡는 놈은 매력 없지 않나 하는 마음이 조금 더 컸지만, 아무튼 원영의 마음은 그랬다.
“……가족들도 운이 안 좋아서 다 돌아가셨어. 어머니랑 아버지는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셨고, 고모도 한 분 계셨는데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운 없었던 거 맞는 것 같다. 할아버지가 간암이었거든. 할머니는 원래 아픈 곳도 없었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고. 그리고 큰아버지…….”
큰아버지 소리에 원영의 얼굴이 애매하게 굳었다. 벌은 좀 줬지만 죽이지는 않았는데, 다 돌아가셨다는 슬픈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큰아버지 소리가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원영이 그러든 말든 재승은 슬퍼 보였다. 재승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 사실 큰아버지가 언젠가 그럴 거 같았어. 이건 운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멍청해서 그런 거긴 한데…….”
“아니, 선배. 그건 그냥 선배가 착한 거죠.”
“멍청한 거야.”
“아뇨, 착한 거예요.”
이번에는 질 수 없다는 기분에 원영이 말대꾸를 두 번이나 했다. 재승이 말끄러미 원영을 바라본다. 또 어떤 슬픈 이야기와 망발을 하실까, 원영은 가슴을 졸였다. 재승이 앞니로 제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러다 덤덤한 얼굴을 했다. 일상적인 얼굴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재승이 입술을 움직였다.
“나 이젠 지갑도 잘 안 줍고, 큰아버지는 도망갔고, 은행에 저축할 돈도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내 단점 다 알아도 괜찮으면……. 우리 해보자, 연애.”
“……네?”
“대신 나한테 실망하면 안 돼. 미리 말할게. 나 외로움 많이 타서 집착 좀 심해. 귀찮게 잘하고, 자존심만 세서 내가 잘못했어도 사과 잘 못 해. ……그래도 노력할게.”
“네! 그럼-”
“아직 말 안 끝났어. 제일 중요한 건데. 네가 나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어디 좋은데 데려가 주고 해도 지금 나는 너한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근데 내가 열심히 벌어서 나중에 해줄게. 너한테 절대 도와달라는 말은 안 할 거야. ……할래?”
“네! 할래요!”
원영은 재승이 번복이라도 할까 버럭 호통을 치듯 대답했다. 이래도 받아줄 거냐는 눈빛을 보내던 재승이 안도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원영은 제 연애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더 이상 자신과 재승의 사이에서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반짝반짝한 도끼가 재승이라는 나무를 두 번째 도끼질 만에 쓰러트렸고, 아직도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물론 빵빵한 가슴 근육의 힘도 나무를 쓰러트리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 몰랐다.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돼. 원영이 비실비실 웃으며 재승에게 말했다.
“선배. 아까도 말했지만 저 마음껏 이용해주세요. 도와달라고도 해주세요. 그럼 제가 지켜줄게요.”
“……밥 먹어. 스테이크 다 식었어.”
재승이 포크로 꾹 찌른 스테이크를 원영의 입가에 대주었다. 원영은 애인의 특혜를 놓칠까, 스테이크를 덥석 받아먹었다. 방금 사귀기 시작했는데 벌써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
재승이 준 스테이크를 맛본 원영은 직원을 불러 다 식은 스테이크를 돌려보냈다. 곧 뜨겁게 달궈진 스테이크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원영은 돌아온 스테이크를 열심히 썰어 재승에게 넘겨주었고, 재승은 예쁘게 썰린 스테이크를 야무지게도 먹어치웠다. 이렇듯 두 사람의 식사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느긋하게 이어졌다. 지극히 근래와 같은 모습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고 해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눈에 띌 정도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점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스테이크 그릇을 받아 든 재승이 포크로 고기를 찍다 말고 원영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릇을 보며 칼질을 하는 뽀얀 얼굴이 볼 부분만 발그레했다. 단정한 입매는 흐물흐물 풀어져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재승은 그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평소와 같을지 모르겠지만, 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더 간지럽게 다가왔다. 원영의 얼굴은 재승의 어딘가를 간지럽히는 구석이 있었다. 저런 놈이 자신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게 아직도 조금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 재승은 내가 왜 그렇게 좋냐는 질문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원영의 마음을 받아주겠다는 생각 따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원영이 무슨 말을 할지가 조금 궁금했다.
기껏해봐야 ‘그냥 선배라서 좋아요.’ 내지는 ‘그냥, 선배가 좋아서 선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유 없이 좋다는 소리만 하면, ‘그렇구나. 그래도 미안.’하며 또 거절하려고 그랬다. 언제든 금방 사그라들 마음이겠구나, 홀로 가뿐해지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원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승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보잘것없는 관심으로 시작한 그의 마음이 어떻게 점점 커졌는지를 구구절절하게 표현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간절한 고백에 마음이 어찌나 요동치던지, 원영에게는 땀이라고 했지만, 기어코 눈물까지 뽑아내고 말았었다.
원영의 고백을 들었을 때 재승은 감동이란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대단한 고백을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자신은 그 고백보다 못한 사람 같았으므로, 원영이 그 사실을 알기 전에 얼른 붙잡아야 할 것만 같았다. 찰나 마법이라도 걸린 듯했다.
단지 같은 성별이기 때문에 연애나 성애가 따라오는 사랑의 감정을 생각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렇게 좋은데. 원영 덕분에 깨달았고, 결국엔 이렇게 이어졌으니 그를 위해서라도 헤어짐 같은 건 웬만하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재승은 본인을 위해서, 자신을 계속 주저하게 만들었던 고민을 잠시 밀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일단 잡길 잘했다는 생각만 해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나자 가슴이 따끈따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재승은 아주 행복했다.
재승이 저도 모르게 원영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원영은 마침 커다란 스테이크 조각을 입으로 나르는 중이었다. 음식을 어찌나 깔끔하게 먹는지 아무리 커다란 것을 먹어도 입가에 소스를 묻히지 않았다. 게다가 씹는 소리도 없이 입술만 오물오물 움직이는 게 기품이 넘쳐흘렀다.
……예쁘네.
재승이 저도 모르게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그 순간 원영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힐끗거려요?”
재승이 깜짝 놀라 그릇을 덜그럭거렸다. 그 덕에 원영도 덩달아 놀라며 그릇을 바라봤다. 먼저 정신을 차린 원영이 그릇 밖으로 튀어나온 스테이크를 안쪽으로 쓱 밀어 넣어주었다. 소스가 묻은 포크를 쪽 빨아먹은 원영이 제 턱밑으로 꽃받침을 만들며 웃었다.
“그냥 대놓고 봐주세요.”
그 말에 재승도 그냥 환하게 웃었다. 문득 놈이 애인한테는 애교가 많아지는 편인가 보다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이원영이라는 사람에게 그렇게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으학. 목을 타고 울리는 소리에 재승이 괜스레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자신도 좀 멋있어 보였으면 싶은데. 그러기엔 웃음소리가 너무 바보같이 들렸다.
“뭐 얘기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아니면 저한테 궁금한 거라든가…….”
원영이 뜬금없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어왔다. 잘하는 거, 못하는 거,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하다못해 가족 관계나 재정 상태를 물어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겠다며 원영은 재승을 재촉했다. 곰곰이 원영의 말을 듣던 재승이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별로?”
물론 진짜로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은 애인이 생겼다는 것으로도 벅차서 다른 것을 머리에 주입시킬 만한 여력이 없었다. 대충 흘려들어서 서운한 일을 만드느니, 느긋하게 주입하는 것이 재승에게는 효율적이었다. 그걸 모르는 원영은 어째 시무룩하고 서운한 얼굴을 했다.
“……선배 혹시 제가 불쌍해서 사귀자고 한 거예요? 저는 그래도 못 물러드려요.”
“아냐, 절대 아냐. 나도 너 좋아. 그냥 천천히…… 자연스럽게 알고 싶어서. 내가 보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듣는 건 까먹을까 봐. 까먹으면 너 서운할까 봐, 그래서.”
재승이 변명하면 할수록 원영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렇구나, 그러셨구나. 원영이 재승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창밖으로는 자동차가 만드는 하얀 불빛들이 화려한 야경을 만들었고, 레스토랑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노래는 뭔지 몰라도 듣기 좋았다. 게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원영까지 합해지니, 재승은 제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이 보였다.
주연은 이원영과 천재승이고, 장르는 멜로. 으학. 재승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원영은 그런 재승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길이 너무 빤해서 재승이 부끄러워질 즈음, 원영이 조심스럽게 재승을 불렀다.
“선배, 있잖아요.”
“응.”
“오늘은 우리 집 가보지 않으실래요?”
“……원영이 네 집?”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승이 눈을 키우며 되물었다. 원영은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초롱초롱한 눈에 기대가 가득해 보였다. 음흉한 생각을 안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전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런 기대 또한 하고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의도가 너무 빤하지만 다 큰 성인 둘이고, 애인이랑 야한 짓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절대 흉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생각해 볼 필요성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
재승은 입을 다문 채 가만 원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원영의 입에서 작게 탄성이 터졌다.
“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터진 탄성 뒤로, 원영은 느닷없이 불그죽죽, 얼굴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보이는 모든 곳을 시뻘겋게 물들인 원영은 한눈에 봐도 당황한 모습으로 허둥지둥거리며 말했다.
“선배, 진짜 그게 아니라요. 지금은 차 때문에 술도 못 마시니까…… 오늘 특별한 날이잖아요. 가서 기념 샴페인도 한 잔씩 마시고 그 김에 저 어떻게 사는지 구경도 시켜주고, 진짜 그러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완전 순수한 마음으로. 밥 먹고 집에 가면 선배 금방 주무시는 거 다 아니까, 그래서 헤어지기 싫어서 한 말이에요. ……물론, 분위기 타고 싶은 마음도 아주 없진 않은데요. 선배가 싫으면 절대, 절대 아무것도 안 할게요.”
원영이 말을 끝마치며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부채질했다. 결론은 야한 생각을 먼저 한 건 재승이었다는 말이다. 재승은 또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더 그러고 싶었나……? 하긴, 욕구불만이 심하기는 했다. 사귀기도 전에 그런 거부터 했는데, 이제 와서 빠르고 말고가 무슨 소용이지? 얘도 그러고 싶다는 것 같은데. 정말 그렇지 않은가.
빠르게 결론으로 도달하고 있는 재승의 얼굴이 무뚝뚝하기만 했다. 때문에 무슨 오해를 했는지, 원영이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선배한테는 주먹이 있잖아요.”
굳이 해설을 하자면 만약 자신이 말을 듣지 않거든 있는 주먹으로 맘껏 패달라는 소리일 터였다. 마음을 모를 때야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에 주먹이 나갔다지만, 사귀는 사이가 된 지금, 원영의 말을 빌자면 분위기를 탄 상황에서 주먹이 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저 예쁜 얼굴에 멍자국은 좀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재승은 굳이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재승이 턱 옆에 보조개를 패며 방긋 웃었다.
“가자. 가서 집구경도 하고, 샴페인도 마시고, 분위기도 타보자.”
재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승은 남아 있던 스테이크 조각들을 포크로 한꺼번에 찍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스테이크를 우적우적 씹으며 원영을 따라 일어서자, 먼저 일어나 있던 원영이 웃는 얼굴로 재승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원영은 재승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러주었다. 또 입에 묻히고 먹었구나. 원영을 올려다보면서 멍하니 생각하는데, 원영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문이 있는 방향으로 빙글 몸을 돌려버렸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 원영이 재승의 입을 닦아준 손을 제 얼굴로 가져갔다. 뒤따라 걷던 재승은 얼굴을 붉혔다. 손을 올린 원영이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빨아먹고 있었다.
“……더 맛있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기라도 하는 듯 가깝게 들렸다. 간지러운 놈. 어째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간지러워지고 있는 재승의 애인이었다.
*
돌아가는 길에는 원영이 운전석에 앉았다. 뜬금없이 수줍어진 재승은 원영에게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를 몰랐다. 원영은 조금 긴장한 듯 보이는 얼굴로 각 잡힌 운전만을 선보이는 중이었고, 내비게이션에 뜬 미터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재승의 집으로 가는 거리의 반의반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 여행을 하려고 비행기를 탔을 때보다 더 두근거렸다. 원영의 얼굴을 자꾸만 힐끗거리게 됐다. 운전하느라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긴장한 듯하면서도 약간은 상기되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재승은 원영의 얼굴을 양껏 훔쳐본 다음에야 히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재승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의 품 안이었다. 재승의 품 안에는 레스토랑의 종이봉투가 안겨 있었다. 그 안에는 예쁜 리본을 단 샴페인과 주전부리가 들어 있었다.
케이크도 샴페인도 재승이 외우기에는 이름이 너무 어려웠다. 재승은 원영이 주문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꽤나 좋았다. 와인이 담긴 유리병은 크고 고급스러웠다. 작은 조각 케이크도 모양이 예뻤다. 단지 음식일 뿐인데도 쓸데없이 로맨틱한 느낌이었다. 품 안의 물건을 말로 표현하자면 딱 이원영 같았다.
뒤늦게 뜨거운 체온으로 샴페인이 식을까 염려되었다. 재승은 무릎 끝에 종이봉투를 올려놓고 에어컨 바람을 쐬어줬다. 비싼 술과 비싼 간식이 제 몸값만큼의 호사를 누렸다.
에어컨 바람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차 안의 공기는 아주 선선했다. 재승은 원영을 힐끗거리며 마냥 웃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원영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싶기도 했고, 그냥 이대로 달콤한 긴장을 쭉 이어나가고 싶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는 말을 걸고 싶었지만, 재승은 자신이 분위기를 망칠까 봐 염려되었다.
때문에 뭐 하나 선택한 것이 없는데도 자동차 안은 조용함을 유지했다. 그러다 차창 밖의 풍경이 변했다. 어느새 차가 주차장을 들어서고 있었다.
*
“몇 층이야?”
“꼭대기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야 두 사람의 말문이 겨우 터졌다. 꼭대기. 재승은 원영이 한 말을 그대로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의 가장 끝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숫자 19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오오…….”
바보 같은 소리는 내지 않고 싶은데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원영이 집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원영의 집은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재승은 벌써부터 구경할 맛이 났다. 주차장에 번쩍번쩍한 대리석이 깔려 있더니만, 평범한 줄 알았던 엘리베이터의 문 안쪽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호랑이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어째 오늘 다녀온 호텔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 재승은 눈을 빛내며 조각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괜찮은 거 같아요?”
재승에게 물은 원영이 낮은 목소리를 울리며 웃었다. 말할 것도 없이 괜찮아 보였기에 재승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선배가 아랫집 살았으면 좋겠다. ……살래요?”
지나가듯 평안한 어조에 재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재승이 뒤를 돌아 원영의 얼굴을 확인했다. 원영은 전혀 빈말이나 농담을 한 기색이 아니었다. 눈을 껌뻑이던 그가 방싯 웃었다.
“아깝다.”
도대체 뭐가 아깝다는 건지 재승은 알 수가 없었다.
띵동, 층수에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곧장 커다란 현관문이 보였다. 좌우로 꽤 넓은 복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관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재승은 원영이 문을 여는 동안 복도의 끝과 끝에 붙어 있는 커다란 창을 구경했다. 창문에는 각각 서울의 야경과 강물이 비쳤다. 이 역시 재승의 눈에는 호텔의 야경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선배, 들어오세요.”
현관문을 활짝 연 원영이 문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재승을 불렀다. 재승은 부르는 대로 조르르, 원영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꼭 놀이동산에 놀러온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라, 원영은 약간 멋쩍어졌다.
“실망하시면 안 돼요. 사실 집은 딱히 볼 게 없어서…….”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재승은 밖에서 본 대리석 주차장이나 대리석 조각보다 원영의 집이 더 재미있었으므로. 재승이 눈을 빛내며 신발을 벗었다.
집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환하게 불이 켜진 내부는 원영의 집인 만큼, 원영과 퍽 잘 어울렸다.
넓게 트인 거실의 양 측면으로 밖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야경이 더욱 커다랗게 보였다. 강이 보이는 쪽 창 앞에는 러닝머신과 함께 간단한 운동기구가 놓여 있었고, 반대편의 창 앞에는 길게 소파와 테이블이 자리했다. 그리고 정면의 커다란 터널. 아마 저 터널을 들어가면 생활공간이 나오는 것 같았다. 벽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볼 게 없긴…… 완전 신기하고 좋은데. 집 천장 되게 높다. 나 이런 집 처음 와봐.”
재승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손을 들었는데도 천장에 손가락이 닿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요즘이야 평균키가 높아졌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봤자 아직은 작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은 나라였다. 때문에 180cm를 가뿐히 넘는 재승은 어디를 가도 소인국 놀러간 거인 꼴을 면치 못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재승의 집이 오래된 것치고 천장이 높은 편이라는 것인데, 그래봤자 머리를 박지 않을 정도인 거지 손만 뻗어도 천장은 그냥 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집은 손을 쭉 뻗어도 천장이 저 멀리 있다. 원영이 쭉 뻗어도 천장에는 닿지 않을 터였다. 186cm도 아니고 192cm인 이원영이 거실 한복판에 서 있는데 전혀 답답해 보이지 않는 집이라니. 이런 집이 있는 줄도 몰랐던 재승은 완전 감동했다.
“거실 더 보실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요, 선배. 이거 먹고……, 아니다. 집 구경부터 끝까지 할까요?”
혼자 내버려 두어도 내내 잘 놀 것 같은 재승을 눈앞에 둔 집주인 이원영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자서 허둥지둥거렸다. 재승은 원영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내려다보며 3초 정도 고민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걸 먹을 땐 분위기를 내야 하니까…….
“일단 집 구경.”
재승은 단호하게 지시했다.
*
평균키 189cm의 두 남자가 쓸데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이좋게 거실을 지났다. 재승이 터널이라고 생각한 뻥 뚫린 문을 지나면 곧장 탁 트인 주방과 다이닝룸이 나왔다.
원영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식탁 위에 잽싸게 올려둔 뒤 재승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동안 재승은 부엌 스캔을 끝낸 상태였다.
재승 생각에는 대충 거실이랑 비슷한 분위기였다. 다른 점을 말하자면 운동기구 있을 자리에 싱크대가, 소파가 있을 자리에 식탁이 놓여 있는 것 정도.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은 아까와 다르게 정면이 벽과 문으로 막혀 있다는 것이었다. 재승은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문을 번갈아 보면서 어느 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거나 열어도 돼요. 어차피 안은 다 이어져 있어요.”
재승의 고민을 어떻게 알았는지 원영이 미리 해답을 줬다. 덕분에 재승은 고민 없이 왼쪽 문고리를 손에 잡았다. 원영이 기다렸다는 듯 재승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사귀기 전부터 밥 먹듯이 스킨십을 해오던 원영이었지만, 재승은 새삼 놀라며 어깨를 흠칫 하고 떨었다.
참고로 단순하게 원영이 스킨십을 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원영의 손이 어째 평소보다 축축한 것 같아서 놀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주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기에 재승은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밀었다.
“옷이 엄청 많네…….”
옷가게 같아. 재승이 작게 중얼거리자 원영이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옷방을 따로 해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또 느낌이 달랐다. 일단은 신기했고. 신기한데 좋았다.
기분이 좋은 것은 다른 사람의 드레스 룸이 아닌, 이원영의 드레스 룸이기 때문일 터였다. 옷이 많아서 그런지 방 안 가득, 원영의 냄새가 났다. 재승은 자신이 원영의 냄새를 알고 있다는 것조차 지금 처음 알았다. 포근한 듯 부드러운 체취였다.
원영을 어깨에 매단 채 코를 킁킁거리던 재승이 이번에는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감탄했다. 행거에 색깔별로 줄줄이 걸려 있는 정장들이 전부다 이원영 같아 보여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옷들보다 눈에 띄는 물건도 있었다.
재승이 한쪽 벽면에 걸린 유리 장식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장식장 안에는 원영이 경기에서 입었던 경기복으로 보이는 바지 몇 장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재승은 장식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깨에 매달려 있는 원영을 올려다봤다.
“저거 언제 입은 거야?”
“아……. 맨 앞은 데뷔 경기, 두 번째 건 첫 챔피언 타이틀 얻었을 때 입은 거, 마지막은……. 선배랑 리벤지 매치 했을 때요.”
“오오…….”
재승이 역대 했던 감탄 중 가장 길고 커다란 감탄을 터트렸다. 자신도 기념할 만한 경기의 경기복을 한번만 입고 모아놨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다 헤져서 버린 경기복들이 떠올랐다. 사라졌고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이걸 보고 나니 괜스레 아쉬웠다.
“선배 KFC 소속 공식 첫 경기 하고 나면 제가 저거 만들어 드릴게요. 그다음에는 챔피언 얻고……. 아니다. 이제부터 어떤 경기를 나가든 선배 경기복은 다 기념할까요? 이유 하나씩 만들어서 크리스털 명패도 제작해 줄게요. 은퇴하기 전까지 방 하나는 다 채우고도 남겠다. 그죠?”
재승의 기분을 어떻게 알았는지, 원영이 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눈치가 없는 편이라더니. 재승은 세상에 이렇게 눈치 좋고 감동 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얘 만나려고 여태껏 운 없이 살았던 건가. 퍽 타당한 의문을 떠올리며 재승이 소리 내서 웃었다.
“으하학!”
자신이 낸 소리에 민망해진 재승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지우며 방의 정면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무슨 집이 가로로 이렇게 기냐…….”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기에 찰싹 붙어 있던 원영이 작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래서 방음이 좋아요.”
꽤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라면 몰라도 이런 쪽에서는 원영보다 눈치 없는 재승이 그걸 알아차릴 리가 만무했다.
대놓고 말해줘야 아는 재승은 아무렇지 않게 파우더 룸을 구경했다. 앞서 본 곳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재승의 집 안방 반 정도 되는 크기의 방이었다. 하지만 그거 봤다고 좁아 보였고, 금세 다 봤다.
방의 중앙에 선 재승이 정면의 문과 오른쪽의 문을 보며 이번엔 어떤 문을 열지 고민했다. 그러자 여태껏 재승의 선택에 일언반구 없던 원영이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직진은 끝났어요, 선배. 앞은 욕실이에요. 그리고 아까 못 봤던 오른쪽 제일 첫 번째 방은 서재. 그럼 방은 이제 여기 하나 남았는데.”
원영은 재승이 넘어갔던 방을 스포일러까지 해가며 그가 오른쪽 방문을 열도록 꼬드겼다. 재승은 아무 생각 없이 오른쪽 문을 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침실 하나뿐이었으므로, 재승이 문을 연 곳도 당연하게 침실이었다.
“오오…….”
천재승 다섯 명이 굴러도 될 듯 보이는 침대가 보이기에 재승이 큰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옷방보다 포근한 냄새가 강했다. 대놓고 코를 킁킁 대려는데 냄새에 취해보기도 전에 움직이려고 한 적도 없는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배, 앉아보세요. 제 침대 엄청 푹신푹신해요.”
재승의 몸을 멋대로 조종한 조종사가 밀어를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를 냈다. 재승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침대에 살포시 앉혀져 원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원영이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재승은 침대 위에서 홀로 열심히 몸을 들썩였다. 얇은 여름 이불이 깔려 있는데 어쩜 이렇게 푹신한지 모를 일이었다.
“좋죠?”
원영이 다정하게 물어보며 재승의 옆에 살며시 앉았다. 이쯤 되어서야 재승은 분위기가 조금 묘해졌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 모르던 놈이 이만큼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재승으로서는 장족의 발전이었지만, 다른 것에는 아직도 조금 면역이 부족했다. 하지만 당장 면역을 키울 시간 따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
재승은 수줍음을 감추며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괜스레 갑작스럽게 느껴지고 낯이 간지러웠다. 그래봤자 어차피 이러려고 왔고, 이럴 건 다 알고 있었지 않은가. 생각과 동시에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받았다.
“샴페인은 이따 마시면 안 돼요?”
원영이 보채듯 물었다.
“그러자.”
재승은 곧장 대답했다. 아주 솔직해지자면……, 많이 기대됐다.
*
재승의 뒷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쥔 원영이 부리로 쪼듯 부드럽게 입술을 부딪쳤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쪽쪽 소리가 나는 게 말 그대로 분위기가 났다. 두 사람은 말도 없이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서 어린애들 같은 입맞춤을 길게 이어갔다. 쓸데없이 진중하고 경건한 표정들을 하고 있는 탓에 무슨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계속해서 스치는 입술이나 원영이 쓰다듬는 목덜미가 간지러웠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재승은 원영의 입술이 다가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마중하듯 마주 부딪치는 움직임에 원영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자신에게 집중한 모습이 마냥 좋았으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승은 무언가 대화라도 시도해볼까, 아니면 먼저 몸이라도 한번 만져볼까 하며 고민했다. 그때 원영의 혀가 재승의 입술을 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대화를 시도하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불발되었다. 입안을 침범한 혀는 입천장을 훑은 뒤 혀를 얽고 있었다.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재승이 손을 뻗어 원영의 하얀 와이셔츠 위를 더듬었다.
원영의 몸이 움찔하고 튀었다. 힐끗 눈을 내리자 재승의 손은 원영의 두툼한 허리 위에 제대로 안착해 있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간지러울 만한 부위였다. 재승은 만진 것은 본인이면서 오히려 자신이 더 간지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으힉.”
맞붙은 입술을 통해서 재승의 웃음 섞인 숨이 원영의 입안으로 불어 넣어졌다. 원영이 덩달아 웃는 것이 느껴졌다.
원영은 가슴을 작게 들썩이면서 재승의 혀를 빨았다. 부드럽게 빨려 들어간 혀가 입술에 꽉 감싸인 채 느릿하게 원영의 입속을 빠져나왔다. 원영은 제 입에 재승의 혀를 넣었다 뺐다 하며 살살 빨았다. 몇 번을 반복해서 혀를 빨던 원영이 쫍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뭐가 재미있었어요?”
원영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다정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평소 같지 않게 느껴졌다. 나른한 것 같기도, 또릿한 것 같기도 한 게 참 오묘하다.
재승은 대답하는 것도 잊고 멀뚱하게 원영의 얼굴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원영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제 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넥타이를 잡아당겨 한 번에 풀고, 목을 꽉 조이고 있던 단추도 하나 풀었다. 시선은 내내 재승에게 고정한 상태였다. 두 번째 단추를 풀며 원영이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다시 시작된 키스는 좀 전의 부드러운 키스와는 다르게 난폭한 구석이 있었다. 원영은 혀끝을 아프지 않도록 잘근잘근 씹거나 뿌리째 뽑아버리기라도 할 듯 세게 빨아당기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정열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게걸스러운 키스였다. 애들 장난 같던 입맞춤을 하며 달짝지근한 기분을 느꼈다면 지금은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오롯이 성감만이 고조되었다. 두 사람은 게걸스럽게 키스하며 정신없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키스를 하며 하나씩 풀어나간 끝에 원영의 와이셔츠가 활짝 열렸다. 재승은 와이셔츠의 안쪽으로 손을 넣으며 원영이 와이셔츠를 벗기 쉽도록 도왔다. 몸을 흔들며 열심히 옷을 벗던 원영이 결국 안 되겠던지 내내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원영이 팔 끝에 걸려 있던 와이셔츠를 벗는 동안 재승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냈다. 그런데 벗고 보니 뒤늦게 너무 무드 없지 않았나 싶었다. 벗겨줄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괜히 어색한 얼굴로 원영을 바라보자 원영은 어느새 와이셔츠를 벗어 던진 채 재승의 몸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재승도 원영을 훑어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원영의 가슴 근육이 커다랗게 부푸는 것이 보였다. 보기 좋게 갈라진 복근은 긴장되어 있었고, 남색 정장 바지의 앞섶도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남자의 몸이었다. 심지어 흥분한 남자의 몸.
예전 같았으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거나 부럽다는 생각 정도를 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야해 보이기만 했다. 재승이 원영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원영이 작게 탄식했다.
“아.”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에 떠올릴 게 뭐가 있나 싶다. 재승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저, 생각해보니까 씻고 와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선배는 아까 씻었는데……. 오늘 날씨가 많이 더웠잖아요.”
“우리 옷 벗었다. ……그리고 너 더운데 간 적도 없잖아. 체육관, 차, 호텔, 다 에어컨 있어서 시원했는데. 그렇다고 네가 뛰어다닌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저번에도 씻고 바로 한 건…….”
재승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옷 훌렁 벗은 거 하나 때문에 분위기를 깬 건 아닌가 민망해했고만, 이원영이 아주 대놓고 산통을 깬 것이 황당했다. 또 자신은 어째서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혼자만 몸이 달아서 보채는 것 같은 게 기분이 영 이상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원영을 바라보자 눈을 마주친 원영이 헤실 하고 웃었다. 분위기 다 깨놓고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데, 안타깝게도 웃는 얼굴이 퍽 예뻐 보이기는 했다. 재승이 허허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원영이 돌연 재승을 향해 달려들었다. 재승은 순식간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읏.”
놀라서 낸 신음이 원영의 입술에 틀어막혔다. 원영은 사나운 기세로 입속을 헤집어댔다. 원영의 커다란 손은 마치 이걸 노리고 있었다고 말하듯 재승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원영은 재승의 탄탄한 가슴을 신나게 주물럭거리며 키스하던 입술을 미끄러트려 목을 핥았다. 힘을 빼고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자 재승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든 말든 원영은 제 할 일을 했다. 원영이 재승의 빗장뼈를 핥으며 유두를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기분…… 되게 이상하네.”
재승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애무를 받고 있자니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원영은 작게 웃으며 또 쪽쪽 소리를 냈다. 유두를 누르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간 손은 고무줄 바지와 속옷의 고무 밴드를 한꺼번에 늘이며 속으로 들어갔다. 반쯤 서 있던 재승의 성기가 커다란 손에 부드럽게 감싸 쥐어졌다.
느닷없는 자극에 재승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자 원영이 빼꼼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하얀 얼굴이 상기되어 눈 밑만 불그스름했다. 재승은 문득 자신의 얼굴은 어떻게 변했을지가 궁금해졌다. 원영의 얼굴은 아주 보기 좋았다. 꼭 자신만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런 거 처음이시죠.”
언젠가 억지로 쥐어짜냈던 목소리와 다르게 무척이나 섹시한 목소리를 내며 원영이 물었다. 하지만 차마 대놓고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멋쩍은 얼굴로 눈길을 피하자 은근히 성기를 문질러주던 원영의 손길이 멎었다. 원영은 잠시 조용하더니 이내 배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뭐예요? 저 있을 때 몰래 자위하셨어요?”
“아니, 너 있을 때 어떻게 해. 당연히 너 없을 때 했지.”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 나간 대답에 재승은 아차 싶었다. 눈을 내려 원영을 살피자 원영이 눈을 세모꼴로 뜬 채 재승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 말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이었다. 자신이 자위를 한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에 사람을 둔 채 몰래 하는 변태는 아닌데 말이다.
다만 원영은 늘 재승이 잠들 때까지 같이 있었으니 그가 오해할 만한 소지는 충분했다. 그리고 당장 원영에게 붙잡혀 있는 성기가 어서 자극을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그러니 재승은 빨리 변명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빨리 말을 끝내야 하던 것을 마저 이어서 할 수 있을 테니까. 재승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그, 욕구불만인지 새벽에 깨서, 너무 하고 싶어서……. 너도 그럴 때 있잖아. 안 빼면 못 잘 것 같고, 계속 설 때.”
“……그거 봤어요? 동영상.”
뜬금없이 대화가 튀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 재승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원영이 ‘DVD요.’하고 뒤늦은 사족을 달았다. 재승이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길게 신음했다.
“아……. 틀긴 틀었지.”
말끝을 흐리던 재승은 아주 묘한 어감으로 대답했다. 말한 대로 틀긴 틀었었다.
“근데 화면에 집중이 안 되더라고.”
하지만 다시 말한 대로 집중이 안 되어서 문제였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늘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똑같은 야동 몇 개를 돌아가면서 보아도 생전 지겹다거나 물린다는 생각 한번을 한 적이 없던 재승이었다. 전혀 생각이 없을 때도 야동을 틀기만 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잘도 세웠었고, 커다란 가슴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신음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몇 번 흔들지 않고도 잘만 사정까지 끝마쳤더랬다.
하지만 문제의 그날 이후로는 커다랗게 흔들리는 가슴이나 높은 신음 소리에 도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야한 것’의 이미지가 완전히 뒤바뀐 느낌이었다.
“왜……. 네가 나 내려다보면서 자위하던 거……, 그게 자꾸 생각나서. 야동은 별로…….”
재승이 말끝을 흐렸다. 멈춰 있던 원영의 손이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좁은 옷 안에서 위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이던 원영이 답답하다는 듯 손을 빼고 바지를 허벅지까지 확 내렸다. 원영이 덥석 성기를 잡았다. 조금 전과 달리 조금 세다 싶을 정도의 악력으로 성기가 쥐어졌다. 원영은 턱턱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재승의 좆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그래서 제 생각하면서 이렇게 흔들었어요?”
“응……. 야동은……, 껐어. 하아, 좀만 빨리.”
재승이 숨을 몰아쉬며 원영에게 요구했다. 원영은 요구사항을 듣는 것과 동시에 손을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기대하던 바를 이루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쾌감이 강했다. 원영의 손날이 음낭에 가까워질 때마다 찌릿찌릿 울렸다. 정액이 몸속의 관을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분에 재승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영은 그런 재승을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감상하는 중이었다.
“원영아, 잠깐만. 나 나올 것 같은데…….”
재승이 제 성기를 움켜쥔 손을 붙들며 원영을 불렀다. 이왕이면 저번처럼 같이 즐겁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손으로만 문지르는 것보다는 서로의 것을 마주 대고 문지르는 느낌이 훨씬 좋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원영은 재승의 손을 손등에 얹은 채로도 계속해서 성기를 흔들었다. 오히려 움직임이 더욱 세분되기까지 한 것 같았다. 쿠퍼액으로 젖어 든 귀두 끝에 엄지가 닿더니 꾹 눌려 문질러졌다.
당황한 재승이 손에 힘을 주자 원영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웃는다. 재승은 그런 원영을 보면서 그의 아랫도리를 향해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같이, 같이 해야지. 너도 섰고…….”
절정이 코앞인 탓에 목소리가 꼭 애원하는 것 같았다. 다만, 원영이 들어주지를 않았다. 손에 닿은 부드러운 천 사이로 딱딱하게 발기한 원영의 성기가 느껴졌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재승은 헤엄이라도 치듯 손을 허우적거렸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기둥이 문질러졌다. 대놓고 사정을 유도하는 손짓이었다.
“아, 너도, 앗.”
“선배 좋아요? 저는 선배 싸고 나면 선배가 더 좋은 거 해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좋은, 하윽…….”
좋은 게 무엇이냐는 질문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재승이 몸을 잔뜩 경직시켰다. 원영의 손에 쥐어진 성기에서 하얀 정액이 팍하고 터져나갔다. 재승이 사정한 정액은 그의 배에서 가슴까지 하얀 선을 만든 뒤 올록볼록하게 파인 근육의 선을 타고 고여 들었다.
원영은 정액이 남김없이 나올 때까지 성기를 문질러주다가 재승의 배에 고인 정액이 투명해지고 나서야 그의 것에서 손을 떼어냈다.
아직 몇 번은 더 뽑을 수 있지만, 아무튼 만족스러운 한 발이었다.
“……좋은 게 뭔데?”
재승이 사정 후 나른해진 목소리로 원영에게 물었다. 원영은 어쩐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로 싱긋 웃기만 했다. 당연하지만 재승이 ‘꿍꿍이’를 알아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승은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긴장이 풀린 덕인지 현재 상황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느껴졌다. 참고로 재승이 느낀 현재 상황이란, 분위기를 타도 너무 급하게 탔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침대에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가로로 누워 있었다. 몸은 누웠는데 발은 바닥에 닿아 있는 것이 아주 편하지만은 않은 자세였다.
그렇게 재승이 편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원영이 재승의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
재승은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침대 위에 똑바로 눕혀졌다. 허벅지에 걸쳐 있던 바지와 속옷이 스르륵 벗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재승을 발가벗긴 원영은 아무렇지 않게 침대 옆의 협탁을 향하는 중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재승이 고개를 돌려 걸어가는 원영을 구경했다.
한 걸음 걸으면서 바지의 벨트를 풀고, 다시 한 걸음 걸으면서 지퍼를 내린다. 도착한 협탁 앞에서 서랍을 여는 순간에는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아래로 내려갔다.
“…….”
느닷없이 배꼽까지 바짝 선 성기와 탄탄한 엉덩이를 마주해서 재승은 깜짝 놀랐다. 잠깐 흠칫했으나 재승은 이내 뚫어져라 원영의 나신을 감상했다. 야해라……. 방정맞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몸이었다.
재승의 머릿속은 방정맞았지만, 정작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원영은 전혀 방정맞아 보이지 않는다. 재승은 맛있는 것을 녹여 먹듯 느릿하게 원영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라갔다. 사정을 마치고 수그러들었던 성기에 다시 힘이 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게 뭐냐니까?”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재승이 원영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자 원영이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협탁에서의 볼일을 다 끝마쳤는지 원영의 손에는 재승이 못 보던 물건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원영은 딱히 물건을 숨긴다거나 하지 않고 곧장 침대에 걸터앉았다. 원영이 물건 중 작은 것을 침대에 내려놓고 커다란 것의 뚜껑을 열었다. 딸깍, 경쾌한 소리가 나자 원영은 그 소리보다 더 경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 말해주면 기대가 안 되잖아요.”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소리였다. 연인끼리 사랑을 나누는데 기대? 당연히 중요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았던가.
“내가 해 줘야 하는 거라며……?”
묻고 보니 역시, 재승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선배가 조금 놀랄 것도 같은데, 그래도 저 때리면 안 돼요.”
“……뜬금없이 내가 널 왜 때려?”
도통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한다. 사이좋게 홀딱 벗고서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인가 싶었다. 재승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더 좋은 것을 해달라기에 혹시 팰라티오를 바라나 싶었는데.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건 영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억!”
재승이 상황에 맞지 않는 괴성을 내질렀다. 느닷없이 두 발을 번쩍 들린 탓이다. 원영은 재승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적당히 벌리더니 제 몸으로 살포시 내리눌렀다.
“발로 차는 것도 안 돼요.”
원영이 재차 당부했다. 때리지 말라, 발로 차지 말라. 처음 한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이젠 방금 한 말과 전에 한 말까지 모두 이해가 됐다. 재승은 저도 모르게 힘을 줄 뻔한 다리에서 애써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차갑고 축축하고 미끄러운 것이 고환 밑으로 문질러졌다.
“으읏!”
생경한 감촉에 재승이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 깔아뭉개진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원영은 재승의 탱글탱글한 엉덩이 두 짝의 사이를 무언가에 젖은 손으로 마구 문질러댔다.
생소하고 조금 수치스러웠지만 은밀한 부위가 만져진다는 점에서 성감이 오르기는 하였다. 무언가를 해달라던 사람이 무언가를 해주고 있는 상황은 잠시 무시하기로 하고 재승은 지금 당장 가장 궁금한 것을 원영에게 물었다.
“뭐야?”
무척이나 포괄적으로. 그럼에도 원영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재승이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던 양, 원영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들고 있던 것을 재승에게 보여주었다. 영어가 쓰여 있는 작은 튜브였다. 방금 사용했다는 것을 알려주듯 반의 반 정도가 비어 있는 튜브는 투명한 핑크빛으로 아주 귀여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영어는 SWEET LOVE. 직역하면 달콤한 사랑이다.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이 재승과 필리핀에 간 원영이 달콤한 꿈에 젖어서 샀던 바로 그 친구였다. 물론 재승은 오늘 처음 보는 친구였고, 러브는 읽을 수 있었으나 앞의 영어는 읽지 못했다.
“……이거예요. 러브젤.”
원영이 친절하게 병 안의 내용물을 설명해주었다. 덕분에 재승은 1차 궁금증을 풀었다. 궁금증에 숫자를 붙였다는 말은 다른 궁금증이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승은 또 다른 궁금증. 그러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다만 처음의 것보다 다소 물어보기가 민망한 질문이라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엉덩이골 사이를 문지르던 원영의 손이 어느 순간부터 골 사이에 난 작은 구멍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손가락에 날을 세워서 주름을 세기라도 할 것처럼 문지르는데 느낌도 그렇고 기분까지 너무 이상했다.
“거길 왜…….”
어쩔 수 없이 입을 연 재승이 결국 말끝을 흐렸다. 거길 왜 쑤실 것처럼 문지르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낯짝 두껍고 수줍음 없는 재승도 차마 끝까지 물어보지 못할 만큼 민망했다.
“저번에도 만졌지……? 도대체 왜 그럭-!”
하지 말라고 좋게 타이르려던 재승이 그만 혀를 씹고 말았다. 입구만 지분거리던 손가락 하나가 불쑥 구멍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미끌미끌한 러브젤 덕분인지 아니면 조금 넣은 덕분인지. 원영의 손가락은 너무나도 매끄럽게 진입했다. 마디 하나 정도였으나 이물감이 느껴졌다. 재승의 애널이 숨을 쉴 때마다 빠끔빠끔 원영의 손가락을 물어댔다. 원영이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선배 여기에 내 거 넣고 싶어서요.”
이 상황에 ‘내 거’라고 함은 원영도 있고 재승도 있는 그것밖에 없었다. 재승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원영을 바라보았다.
넣어? 그걸? 그게 되나? 가능한 이야기인가?
생각은 많았지만 당황해서인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원영이 달뜬 얼굴을 하고서 재승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남자끼리는 여기로 섹스한대요. 처음은 생각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데……, 며칠 할 거 오늘 몰아서 하면 오늘 바로 기분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익숙해지면 정신 못 차리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금방 익숙해지게 해드릴게요.”
원영이 말을 하면 재승은 그게 아무리 개소리라고 할지라도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다. 섹스,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하는 것이 좋았다. 다만, 어째서 자신이 무조건 넣어지는 입장인 것인지가 재승은 조금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자기 입으로 정신 못 차리게 좋아진다 말하지 않았던가.
걸고 넘어가자면야 당연히 걸고 넘어갈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재승은 가타부타 원영의 말꼬리를 붙잡지 않았다. 가능하니까 말했겠지. 자신은 원래 모르는 것이 많지 않았나. 게다가 이제 사귀는 사이가 되었는데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모든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선배애, 네?”
원영이 안달 난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여태껏 재승이 겪었던 어떤 애교보다도 더 과격한 애교였다. 딱딱하고 두꺼운 기둥을 높이 들린 허벅지에 비벼대면서 눈 밑만 벌겋게 열이 오른 야한 얼굴을 귀엽게 기울이는 애교. 애인이 이런 애교를 부리는데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미약하게 남아 있는 수치심 따위야 격렬한 무언가를 시작하게 되면 곧 사라질 테다. 재승은 긴장으로 인해 어색해진 표정을 하고 원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운을 떼어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 말에 원영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선배는 그냥 가만히만 계시면 돼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더니. 활짝 핀 원영의 얼굴에 재승은 이미 갚은 빚을 또 갚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
그리고 재승은 곧장 커다란 빚더미에 나앉는 기분이 되었다.
“……아프지는 않죠?”
원영의 낮은 물음과 함께 한마디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깔짝깔짝 앞뒤로 움직이며 점점 더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탓이다. 러브젤 덕분인지 아프지는 않았고, 손가락의 움직임도 아주 매끄러웠다. 하지만 가히 좋다고 느껴질 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근데 좀 그렇다. 거기 손가락 넣은 너도 그렇게 좋을 것 같지는 않고…….”
“아닌데. 전 꼴려요.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선배는 여기 근육도 탄탄한 것 같아요. 지금 여기 들어가면 자지 찌그러지겠어요. 손가락 조이는 게 너무 세서 오래 풀어야 될 것 같은데……. 선배 힘 풀고 있는 건 맞죠?”
“응……. 키스할래?”
이런 대화에 수줍어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수줍은 편이었던지도 모르겠다. 재승은 원영이 심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탓했다.
다행히도 원영은 얌전하게 입을 벌리며 다가왔다. 허벅지에 성기가 꾹 눌릴 정도로 재승을 뭉갠 채 원영은 깊게 키스했다. 팔꿈치로 침대를 짚은 손은 재승의 얼굴을 감싸 쥐었고, 다른 한 손은 바쁘게 구멍을 들쑤시며 벌렸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재승은 전혀 키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자면 찝찝한 느낌인데, 깔짝거리며 문질러질 때마다 미묘한 간질거림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 정신 못 차리게 좋아진다는 느낌은 아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가락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의 쾌감이 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으음…….”
느껴지는 감각을 머릿속으로 더듬던 재승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비좁은 입구를 벌린 원영이 손가락 하나를 더 비집어 넣고 있었다.
원영은 처음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을 때처럼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첫 번째 손가락을 넣을 때와 비슷한 움직임이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깊숙한 곳을 향해 원영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힘을 풀고 가만히 견디고만 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싫어서 길게 느껴지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뜨겁게 맞닿은 체온. 드문드문 허리를 놀려 성기를 허벅지에 문지르는 원영의 움직임은 꼭 섹스를 하는 것 같아 아랫배를 저릿거리게 만들었고, 서로의 혀를 얽고 있는 입에서 나는 척척한 소리도 짜릿했다.
절정으로 치닫지 않는 뭉근한 쾌감과 분위기가 불쾌한 듯 느껴지는 아래쪽의 감각을 완벽하게 상쇄시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재승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마침내 원영의 손가락 두 개가 끝까지 들어왔다.
손바닥에서 손가락이 시작되는 부분이 닿을 만큼 삽입은 깊었다. 막상 다 넣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물감이 장난 아니었다. 원영은 뼈대가 있는 편이라 손가락까지도 굵고 길었다. 하지만 원영의 성기는 그 굵고 긴 손가락에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재승은 목표의 반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도 이렇게 이물감이 드는데 원영의 성기를 넣는다면 도대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상상하자니 어쩌면 공포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재승은 싫은 기색을 표하거나 그만두자는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시련과 고난은 이겨낼수록 강해지는 법이다.
사나이 천재승, 남들 다 하는 섹스에 겁먹은 티를 내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읍!”
재승이 숨을 들이쉬며 막힌 신음을 냈다. 구멍 깊숙이 들어간 손가락이 안쪽에서 꺾이더니 주욱 내벽을 긁고 바깥으로 빠져나간 탓이다. 원영은 손톱이 있는 곳까지 손가락을 뽑아낸 다음 다시 천천히 구멍 안으로 찔러 넣었다.
“흐읍…….”
재승이 미간을 찌푸린 채 파르르 고개를 떨었다.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재차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추읍, 츱. 귓가를 울리는 질척한 소리가 밑에서 나는 건지 위에서 나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재승은 원영이 말한 것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좋지 않았어요?”
마무리하듯 짧은 입맞춤을 하며 원영이 물었다. 재승은 입을 벌린 채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배 안쪽이 짜르르 울리며 건드리지도 않은 성기까지 자극이 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원영은 빼지 않고 고분고분 대답하는 재승이 무척이나 예뻐 보였다. 원영이 입구의 자잘한 주름을 매만지며 구멍을 바깥쪽으로 늘렸다. 벌어진 작은 틈새로 손가락 하나가 더 비집고 들어왔다.
마음이 다급한지 쑤시는 움직임이 아까보다 빨랐지만, 이번에도 재승은 전혀 아파하지 않았다. 찔걱찔걱 구멍을 쑤시던 손가락이 순식간에 끝까지 삽입되었다. 깊숙이 파묻힌 손가락은 재승이 익숙해질 여유도 주지 않고 안쪽에서 구부러졌다.
“하읏.”
재승이 신음하며 원영의 탄탄한 팔뚝을 붙잡았다. 원영은 손가락을 구부린 채 내부를 갉작갉작 긁었다. 아래에 깔린 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비좁은 구멍이 내부를 긁을 때마다 손가락을 꼭꼭 물어댔다. 전희도 반응이 있어야 즐거운 법인데, 원영은 재승 덕분에 즐거워도 너무 즐거워서 문제였다.
“선배, 여기인가, 봐요……. 선배 기분, 좋아지는 자리…….”
삽입 당하는 것은 재승인데 도리어 원영의 말이 뚝뚝 끊겼다. 와중에도 재승을 배려한 원영은 전립선이라든가 하는 의학용어 대신 ‘기분 좋아지는 자리’라는 쉬운 말을 선택했다.
덕분에 재승은 쾌감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정립선?’ 하며 단어의 뜻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 아으…….”
재승이 달뜬 얼굴을 하며 끙끙 앓았다. 구멍의 양옆을 마구 늘릴 때는 버겁다가도 손가락을 구부리며 천천히 위아래로 쑤실 때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참을 수 없는 느낌이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비행기에 탄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원영이 주는 자극은 당장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구석이 있었고, 재승은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안타까웠다. 더 본격적인 것을 하고 싶었다.
“이제 넣어줄까요?”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원영이 묻는다. 원영도 단지 몸이 달았을 뿐이건만, 재승은 마치 그가 구원자처럼 보였다. 재승이 고개를 커다랗게 주억거렸다. 재승을 보며 씨익 웃은 원영이 내리누르고 있던 재승을 슬며시 풀어주었다.
원영은 재승의 손을 움직여 자기 허벅지를 쥐게 했다. 다리를 V자로 벌린 채 양손으로 허벅지를 쥐고 있는 것은 퍽 부끄러울 만도 했으나, 급박하게 젤과 콘돔을 집어드는 원영의 모습을 보니 재승은 그다지 부끄럽지도 않았다.
“잠깐 잘 잡고 있어 봐요.”
어쩐지 강압적으로도 들리는 말을 하며 원영이 콘돔 박스에서 콘돔을 주르륵 꺼냈다. 하나를 뜯어 치아에 물고, 닫혀 있던 젤의 뚜껑을 따서 벌어져 있는 재승의 구멍에 입구를 대고 쭉 짜 넣었다.
튜브에 공기가 차 있었던지 쀼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쀼륵, 쀼륵, 몇 번의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원영은 튜브를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입에 물고 있던 콘돔을 순식간에 뜯어낸 원영이 콘돔을 성기에 씌우며 재승의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쪽하는 입맞춤과 함께 두꺼운 귀두가 쿡, 입구를 찔렀다. 원영은 젤이 흘러나와 질척한 구멍에 귀두를 난잡하게 비볐다.
“아까 거기를 제 좆으로 잔뜩 문질러 드릴게요.”
달콤하게 속삭인 원영이 제 귀두 끝을 잡고 꾸욱 누르며 삽입을 시작했다. 아까는 버겁고 민망하기만 하던 원영의 음담도 이제는 그의 말마따나 꼴리기만 했다. 하지만 꼴린다고 해서 첫 삽입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귀두가 손가락 세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두꺼웠다. 억 소리가 절로 나는 압박감이었다.
원영은 성기의 기둥이 시작되기 직전 옴폭 파인 부근에서 삽입을 잠시 멈추었다. 원영이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재승 또한 이를 빠드득 갈았다. 고작 귀두를 넣었을 뿐인데 구멍이 잔뜩 벌어져 빠듯한 느낌이었다. 남자끼리의 섹스는 원래 이렇게 버거운 느낌이 드는 것인지, 아니면 평균을 한참 벗어나는 대물을 넣으려고 해서 버거운 것인지 재승은 모를 일이었다.
“너무, 조이는데……. 아파요?”
“조금……, 숨이 좀 막히는 것 같은데……. 참을 만은 해.”
“그럼 그냥 바로 넣을게요. 일단 다 넣고 나서, 익숙해질 때까지 조금 기다려 줄게요. 원래 넣는 게 힘들대요.”
원영의 말에 재승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원영이 눈가에 쪽 입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인터넷에서 그러더라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삽입되어 있던 성기가 꾹꾹 밀려들어 왔다.
윽, 윽.
재승이 막힌 신음을 내자 원영이 위로하듯 혀를 얽었다.
억지 삽입이 어느 정도 끝나자 원영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게 허리를 치댈 때마다 성기가 조금씩 안으로 진입했다.
탁, 탁, 탁, 탁.
빠르게 살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직 삽입하는 단계에 있을 뿐인데도 누가 듣는다면 벌써 제대로 된 섹스를 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크기의 소리였다.
“읍, 읏, 읏,”
재승은 내벽이 밀리는 느낌에 계속해서 뜻하지 않은 신음을 냈다.
원영은 재승의 통증을 분산시키기라도 할 요량인지 혀를 아플 정도로 빨아들이며 삽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통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운동선수의 몸부림인지 재승이 원영의 자잘한 허릿짓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원영이 입술을 떼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철썩, 철썩. 볼기를 내려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커다란 소음과 함께 엉덩이에 음모가 닿을 만큼 깊숙한 삽입이 끝났다.
“하아, 어때요? 이제 쑤셔도 되겠어요?”
기다려 주겠다던 놈은 어디 갔는지 원영은 정염에 불타는 눈을 하며 재승에게 물었다. 참고로 재승은 체계적으로 맞는 것보다는 몰아서 마구잡이로 맞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원영의 매는 그다지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충족감이 더 큰 매였다. 그 말인즉, 체계적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해봐.”
똑같이 정염에 불타는 눈을 한 재승이 원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호승심에 불타는 얼굴 같기도 했다.
재승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정을 본 원영은 안 그래도 최고치였던 흥분이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재승의 내부에 잠겨 있는 자지가 영혼이라도 생긴 듯 움찔움찔 혼자서 움직여댔다. 원영은 재승의 깊숙한 곳에 잠겨 있던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하으…….”
재승이 원영의 목을 끌어안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호기롭게 해보라고 한 것이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가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어쩔 줄 모를 느낌이었다. 원영이 찾아준 그 자리가 그의 성기가 들어차니 계속해서 눌려 힘들었다. 심지어 천천히 밖으로 나가자 울퉁불퉁한 자지에 긁히는 느낌이 또릿했다.
분명한 것은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원영의 성기가 전립선을 벗어나자 재승은 저도 모르게 구멍을 조였다. 재승 본인이 느끼기에도 빠져나가는 것이 아쉬우니 빨리 다시 들어오라며 원영을 조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원영이 퍽, 허리를 쳐올렸다. 순식간에 삽입된 성기 때문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숨을 멈춘 재승을 위로하듯 다정한 입맞춤이 얼굴 곳곳에 떨어졌다.
“이럴 것 같았어요.”
원영은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는 못했지만 재승은 후, 하고 멈추었던 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원영이 다정하지 못하게 허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껍고 긴 성기가 빠른 속도로 재승의 구멍을 들쑤셨다.
“으흑, 흣.”
재승은 생전 내지 않던 우는 소리까지 내가며 원영에게 매달렸다. 버티기 힘든 정도의 힘이었다.
기둥이 빠져나갈 때마다 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푹푹 안으로 들어올 때는 만지지도 않은 좆이 짜르르 울리기도 했다. 재승은 굳이 만져보지 않더라도 자신의 성기가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재승의 성기에서는 프리컴인지 뭔지 모를 액체가 계속해서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궁합도, 하아, 최고야. 진짜……, 천생연분, 아니에요?”
원영이 뒤늦게 말을 이었다. 재승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원영의 등과 엉덩이 목덜미 같은 곳을 매만졌다. 응, 응.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 얼굴이 잔뜩 달뜬 상태였다.
원영은 이를 악물며 빠르게 움직이던 허리를 뭉근하게 돌렸다. 하반신이 마찰하며 가끔 성기가 삐죽 빠져나올 때마다 아래에서 찌걱, 찌걱 하고 음탕한 소리가 났다. 원영이 다시 잘게 허리를 쳐올리며 말했다.
“오래 하고 싶은데……, 처음이라 그런지 금방 쌀 것 같아요. 우리, 끝나고 한 번 더 하는 거……, 맞죠?”
보채듯 묻는 얼굴을 보아하니 만약 한 번으로 끝내겠다고 말하면 천년만년 사정을 참아낼 기세였다. 같은 남자인 재승은 사정을 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주 잘 알았다. 물론 여러 번 사정하는 것도 사정을 참는 것만큼 아주 힘든 일이 될 테지만……. 원영이 느릿하게 움직이자 몸 안쪽이 간지러워 재승도 어쩐지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원영이 지금 사정을 하면 사이좋게 한 번씩 사정하는 것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재승이 섣부른 판단을 하며 원영의 목을 쓰다듬었다.
“싸. 빨리, 싸고……. 한 번, 더 해.”
재승은 평소의 무뚝뚝한 어투에 비교하면 퍽 다정다감하게 들릴 만한 목소리를 냈다.
원영은 재승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잘하게 치대던 성기가 크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에는 고환이 엉덩이에 부딪혀 찰싹 소리가 날 만큼 거세게 삽입했다.
“히익!”
원영이 느닷없이 재승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깊은 삽입과 빠른 후퇴를 반복하며 원영은 손에 쥔 성기를 같은 속도로 흔들어댔다.
“좋아요?”
차마 대답할 수도 없을 쾌감에 재승은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가 하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러자 원영이 ‘저도 좋아요.’ 라며 재승의 답을 알아서 추측했다.
“으응, 응, 읏, 흐읏,”
재승이 생전 처음 내보는 교태로운 신음을 내지르며 허리를 휘었다. 자신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원영은 눈을 부릅뜨고 재승을 바라보며 하아, 후우. 거친 숨소리로 그의 신음에 호흡을 맞추었다.
거침없는 허릿짓이 이어졌다. 위아래로 흔들다가 가끔 허리를 돌리면 재승이 자지러지며 원영을 끌어안았다.
원영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마지막 삽입을 했다. 밖으로 쌌다면 얼굴까지 튀었을 만큼 거센 힘으로 정액이 터져나갔다. 정액이 쏘아올려질 때마다 재승에게 꽉 물린 성기가 찌르륵, 찌르륵하며 요동쳤다.
재승은 성기가 요동칠 때마다 그의 성기를 꽉꽉 물며 짜냈다. 그렇게 원영이 사정을 끝마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원영과 재승의 상체가 엉망이었다. 재승도 동시에 사정을 한 듯 그의 성기에서 하얀 정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발갛게 상기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불이 지펴졌다.
활활 불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둘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혀를 길게 뺀 두 사람이 게걸스럽게 키스했다. 굳이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2차전은 잠깐의 휴식도 없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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