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8. Romantic Fight​​​ (8/12)

로맨틱 파이트(Romantic Fight) 3권

8. Romantic Fight

“흣, 허억.”

흥분한 것이 분명한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었다. 소리는 그저 귀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재승의 피부로까지 와 닿는 중이었다. 원영이 숨을 크게 몰아쉴 때마다 재승의 맨살 위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몸 위를 바람이 훑으면, 재승은 그때마다 포박당한 몸을 바르르 떨며 발버둥 쳤다.

재승 또한 어떤 의미로든 원영과 비슷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숨이 가쁜 것을 보면 아마 자신도 그와 비슷하게 숨소리가 거칠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온통 원영의 것밖에 없었다. 원영에게 깔린 채 그에게 키스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재승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달라고 할 거라더니……. 뜬금없이 천국에 가고 싶다고 그랬던가?

다시 상기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굳어 있는 머리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김을 뿜을 것만 같다. 와중에도 재승의 몸으로는 계속해서 자극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놈의 가슴에 계속 집착하는 것 같더라니. 이원영은 거친 손으로 떡 주무르듯 가슴을 주물러대는 중이었다. 놈에게 희롱당하는 가슴. 그 중간의 뾰족 튀어나온 돌기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빨리고 있는 혀가 뽑혀나갈 것처럼 얼얼했다.

치켜뜨고 있는 눈에 비치는 얼굴은 방금까지 술을 마시고 있던 이원영의 얼굴이 맞았다. 위에서 내리깔고 있는 몸은 자신보다 무거웠으며, 양 손목을 휘어잡고 있는 힘은 빈말로도 약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감으로 느끼고 있음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승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원영의 눈을 똑같이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사실은, 모르는 사이 많이 취해서 헛소리를 들은 것이 아닐까. 이 상황이 사실은 꿈이어야 더 현실감이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욕구불만이 올 시기가 되기도 했다. 애인이 없었던 시기는 말해봤자 입만 아플 정도로 길었고, 자위를 안 한 지도 벌써 어림잡아 한 달은 족히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물론 아무리 욕구불만이 길어져도, 재승은 자신의 망상에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별의 인간을 끌어들인 적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원영이 그제 좆 얘기를 했었다. 뭐랬더라? 좆, 좆 달린…….

“흐읏!”

저도 모르게 현실도피를 하던 재승이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원영의 손이 바지의 고무밴드를 늘이며 하반신으로 침입하고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침입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침입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원영은 순식간에 브리프 안쪽으로 손을 넣었고, 곧 침대 밑에 깔려 있던 재승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재승이 다리에 힘을 줬다. 그와 동시에 빨고 있던 혀를 놓친 원영이 다각, 치아를 부딪치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찰나, 지금이 아니면 놈의 무식한 키스를 벗어날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승은 팩, 고개를 돌리며 당장 할 수 있는 말을 되는대로 내뱉었다.

“너, 너…….”

그래봤자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원영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재승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술기운이 만연한 것 같기도, 어쩌면 아주 멀쩡한 정신인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얼마 못 가 웃음을 그친 원영이 다시금 재승을 향해서 입술을 들이밀었다. 원영의 입술은 보드라운 볼을 찍고 매끈한 목덜미를 따라 미끄러졌다. 동시에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이 앞으로 이동했다. 흥분으로 인해 반쯤 서 있던 성기가 원영의 손에 쥐어졌다. 재승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소리쳤다.

“야! 너!”

“선배는 화만 내고…….”

원영이 재승의 귓가에 대고 작게 구시렁거렸다. 낮고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는 그가 언젠가 억지로 목을 긁어내며 만들어냈던 목소리와는 천지 차이였다. 때문에 재승의 등줄기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성적인 긴장감이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를 귓가에 속삭이듯 들어보는 날이 올 줄이야. 재승으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한. 아니, 상상할 일도 없는 경험이었다.

“근데, 있잖아요…….”

원영이 달큼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어느새 재승은 그와 두 볼을 마주 대고 있는 상태였다. 원영은 달큼한 목소리를 낸 사람답게 아주 달큼한 손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브리프 안쪽의 커다란 손이 재승의 기둥을 쥔 채 위아래로 살살 문질렀다. 손날에 음모가 닿자 부러 털이 난 자리를 비비기도 했다.

재승은 점점 거세지는 자극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원영이 안 그래도 붙어 있던 몸을 으스러트릴 듯 붙여왔다. 그가 묘하게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섰어요. 그것도 제가 만지기 전부터.”

재승 또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선배도 막 나쁘지는 않은 거 아닌가?”

분명히 말하는데, 처음 선 건 화가 나서 선 거지 성적인 흥분 탓이 아니었다. 크기는 조금 다를지언정, 놈도 똑같은 것이 달려 있으니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딱히 뭐라고 반박을 하기가 어려웠다. 원영은 성감을 돋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고, 좁은 브리프 안에서 움직이는 것치고 그 움직임은 꽤 그럴싸했다. 지금 재승은 확실히. 아주 조금쯤은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을 꼽자면, 놈이 남자라는 것, 그런 놈을 괜찮은 친구이자 대표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아직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재승은 취하지 않았고, 아주 이성적이었다. 물론, 그 이성을 뒤받쳐줄 말주변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재승에게는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다.

“너, 너 이 새끼야, 이러, 이러려고!”

“네. 계속 이러고 싶었어요.”

“놔, 일단 이거 놓고 대화부터-”

“선배는 도대체…… 제가 선배한테 왜 잘해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야 모르지, 씨발, 아!”

재승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기둥을 쥐고 느리게 문지르기만 하던 원영이 엄지를 들어 재승의 귀두를 문지른 탓이었다. 몇 번 문질렀다고 새어 나온 프리컴이 민감한 살 위로 덧칠됐다. 프리컴은 떡칠 때 더 수월하라고 나오는 액체였고, 그러니 그게 뭉개지는 느낌이야 말할 것도 없이 매끄럽고 좋았다.

참고로 재승이 혼자 야동을 보면서 자위할 때도 흘러나온 프리컴을 귀두 주변에 발라서 문지르곤 했다. 그래야 기분이 더 좋고, 사정감도 더 빨리 찾아왔으니까. 그렇다면 이원영도 자위를 비슷하게 하는 걸까? 정말 묻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야, 씨발, 비비지 마, 비비지 마!”

재승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몸을 버둥거렸다. 분명히 원영의 손아귀를 벗어나 보겠다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양팔은 붙잡혀 있고 온몸은 짓눌려 있었다. 때문에 허리를 들썩거리며 원영의 몸에 제 몸을 비벼댄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재승을 느낀 원영이 안달 난다는 듯 낮게 신음했다.

“아아, 씨발…….”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췄다. 몰아치던 자극이 사라지자 닿아 있는 타인의 체온에 안달하듯 성기가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재승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지와 브리프, 거기에 원영의 손까지 제 성기를 막고 있으니 답답했다. 어서 놈을 치우고, 화장실이라도 들어가서 어쩔 수 없는 것을 혼자 처리한 다음, 놈과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와중에 아까는 말 편하게 하랬더니 이름을 부르고, 이제는 선배 앞에서 욕까지 하는 놈의 버르장머리를 꾸짖고 싶기도 했다. 유교에 찌든 꼰대라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야 놈이 저에게 또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재승은 아직까지는 원영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딱 원영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아…….”

낮은 한숨과 함께 재승의 바지 속에 들어가 있던 손이 불쑥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지에서 손을 뺀 원영은 느닷없이 어깨 힘만으로 일어서서 재승을 내려다봤다. 재승은 원영과 눈을 맞췄다. 눈만 보고 있는데, 놈의 온몸이 자글자글 끓고 있을 것 같았다. 또 소름이 돋았다. 어째, 지금부터는 절대 돌이킬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선배.”

“일단, 우리, 말로-”

츄웁, 듣기 싫다는 건지 원영이 재승의 입술을 질척하게 빨아들였다. 누가 격투기 하는 놈 아니랄까 봐, 휘어잡고 있는 손은 아직도 놓치지 않았다. 관절과 관절을 엮어 잡은 손은 방심 중에 제대로 잡힌 것이라 절대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잡힌 재승이 잘 아는 만큼, 잡은 원영은 더더욱이 잘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원영이 아무렇지 않게 제 성기를 꺼냈다. 슥슥, 두어 번 성기를 문지르는 모습에 재승은 경악한 듯 눈을 치떴다.

“미, 미친…….”

욕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재승의 바지도 내려갔다. 원영은 이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재승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원영의 입술이나 혀를 물어뜯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쌓인 정이 있으니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런 재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영의 입맞춤은 게검스럽기 그지없었다. 입술을 찢어먹을 듯 빨았고, 치아, 혀, 입천장 할 것 없이 아주 온갖 곳을 들쑤셔댔다. 위가 그렇게 정신없으면 아래 사정이라도 봐주어야 할 텐데……. 당연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원영은 재승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재승의 성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까는 없던 두툼한 살덩이가 재승의 성기와 함께 마찰하기 시작했다. 성기 두 개가 윤활제 없이 비벼지는 느낌은 뻑뻑했다. 문지르는 대로 마찰열이 올라 어쩌면 살이 벗겨질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턱, 턱, 턱.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성감이 고조되며 숨이 가빴다. 여태껏 눈조차 감지 않고 있던 재승은 급하게 올라오는 사정감을 참으며 코앞에 놓인 놈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바라봤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 있는 게 이원영이 맞을까.

물론 이원영이 맞다. 그렇다면 이 미친놈은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그건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계속 머릿속으로 곱씹고만 있는데. 이 새끼는 지금 추행 중이었다. 이종격투기의 선배님이자, 자기 회사의 소속 선수를.

“으븝, 흡.”

당연히 화는 나지만, 당장은 술에 취한 미친놈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흣, 예전에, 선배가요…….”

거기다가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유야 뭐, 놈이 여태껏 계속 이러고 싶었다니까. 물론 눈 뜨고 코 베인 느낌인데. 완전히 그렇다고 치기엔 또 묘하게 현재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런 거다. 만약 키스해서는 안 될 놈, 아주 못할 놈이랑 키스했다면. 지금처럼 당황스럽기도 당황스럽겠지만, 일단 역하고 기분이 나쁜 것이 먼저가 아니었을까. 정확히는 이원영 대신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체육관 식구와 키스를 했다고만 상상해 봐도, 재승은 정말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조금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기왕이면, 몸매 좋은 사람.”

“읏.”

“키도 좀, 컸으면, 하, 좋겠고……,”

“하윽.”

“머리는, 짧아야 섹시하고……,”

“야, 좀, 아읏!”

“운동도, 흣, 좋아했으면……. 하아, 씹…….”

“흐윽!”

“후우……. 선배. 그거 다 저한테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원영이 막 사정한 뒤의 나른함에 잠긴 얼굴로 물었다. 꽉 붙잡혀 있던 팔목이 어느새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재승은 잠깐 그가 한 질문의 답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정당방위다, 이 개새끼야!”

맞을 짓을 한 놈에게는 그에 맞는 철퇴가 필요하다. 그것이 재승의 기준에서는 놈에게 대답을 해주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재승은 머뭇거림 없이 원영의 관자놀이를 향해 훅을 메다꽂았다. 맨주먹으로 때렸기 때문인지 너클파트(knuckle part : 주먹의 제2 관절과 제3 관절 사이의 평평한 부분)가 울렸다. 그렇다는 말은 주먹이 아주 제대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재승은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

그리고 그 순간.

원영은 무언가 재승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언젠가 들어본 어느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 키스를 하는데, 어디선가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어.’

어디서든 들어보았을 법한 로맨틱한 헛소리였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은 첫 키스와 동시에 더 멋진 것을 해낸 사람이었다. 그래서 로맨틱한 헛소리를 내뱉는 그들과는 아주 조금 달랐다.

그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지만, 자신은 그냥 골이 울렸다.

뎅. 뎅. 뎅.

원영은 만약 자신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보다 더 로맨틱한 경험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뎅. 뎅. 뎅.

골이 울린다.

로맨틱한 밤이었다.

*

“이게 도대체…….”

방갈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비서가 탄식을 내뱉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방 안은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맥주캔이야, 기실 관대하게 마음을 먹으면 그럴 수 있다 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라지만. 다리 한쪽이 무너져버린 1인용 침대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게다가 다리가 부러진 침대로 곤란할 사람은 오로지 비서인 그뿐이었다.

비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방 안의 다른 곳을 빠르게 살폈다.

널려 있는 맥주캔, 젖은 수건이 바닥에 흩날리기는 하다만…… 다행히도 부서진 것은 침대 하나가 다인 듯 보였다. 물론 부서진 게 침대 하나뿐이라고 해도, 대표가 방갈로 주인에게 물어주어야 하는 돈은 그 침대의 네 배 가격이었다.

방 멀쩡하게 쓰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멀쩡하게 쓰고 남은 돈으로 보너스나 좀 더 챙겨주시지.

대표에게 직접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구시렁거린 비서가 뒤늦게 다리 부러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는 그제야 슬그머니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대표와 눈을 맞추는 순간, 비서는 전쟁이 난 듯한 방 안의 상황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저게 어쩌다 부러졌나 했더니. 대표님께서 이 좁은 방 안을 경기장으로 쓰신 모양이었다.

비서는 대표를 따라다니며 지겹게 들었던 이종격투기 해설자들의 말투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청코너 이종격투기의 미친개, 미들급의 천재승. 홍코너 KFC의 대표, 헤비급의 이원영.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와 비슷하게 원영의 비서로 일한 그는 이제 경기의 흐름을 얼추 파악할 줄 알았다.

만약 케이지(cage : 격투기 대회에서 사용하는 철장 형태의 무대) 안에서 벌어진 싸움이라면 당연히 홍코너. 헤비급인 이원영이 승리를 거머쥐고 천재승과의 경기에서 3:0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잘 믿기지는 않았지만, 어제자 싸움의 승자는 아무래도 천재승 선수가 맞는 것 같았다.

“대표님 얼굴이…….”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가르마를 따라 시원하게 트인 대표의 한쪽 관자놀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얼핏 보면 하나 같지만, 뚫어지라 바라보면 두 개의 멍이 합쳐진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힐끗거린 반대편의 침대에는 천재승 선수가 걸터앉아 있었고, 그는 매스컴에서 자주 보아왔던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같이 싸웠다고 하기에는 티 없이 맑기만 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천재승이 이겼든가, 대표가 싸운 사람이 천재승이 아니든가. 답은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헤비급의 선수가 쳐들어왔다 해도, 자신의 대표님이 이겼을 터였다. 그러니 후자는 애초부터 성립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일반인이 총을 들었으면 말이 조금 될지 모르겠지만, 총 든 놈이 총을 안 쏠 리가. 게다가 만약 총을 안 쏘고 갔다면 대표가 여태까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정말 천재승이 때렸다는 말인데…….

실제 싸움과 경기장의 싸움은 당연히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대표님이 어디 가서 힘으로 지지는 않으실 터였다. 그렇다면 상처가 없는 천재승만 대표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게 조금이나마 사실에 근접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비서는 천재승 선수가 당당하게 주먹질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해봤다. 당연히 짧은 시간 내에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그나마 당장 떠오르는 건 천재승 선수의 나이가 더 많다는 것 정도였다. 천재승의 나이가 더 많으니까 대표님이 아예 주먹을 올리지도 않으셨다? 흠. 우리 대표님께서 유교를 아시는 분이었던가?

그 의문을 끝으로 비서는 이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대표는 싸움에서 유교를 따지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대표가 싸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일도 없을 테니, 오늘 본 일은 일생의 미스터리로 남겨질 게 분명했다. 어디 가서 쉽게 떠들지도 못할 궁금증에 비서는 벌써부터 속이 답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서류가 차 안에 있어서 같이 이동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

아무튼, 일은 해야 했기에 비서는 익숙한 핑계를 대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대표는 그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리퍼를 직직 끌며 문 앞까지 걸어간 대표가 비서의 앞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선배. 저 잠깐 일 좀 보고 올게요. 빨리 올 거예요.”

며칠 내내 대표가 내뱉던 말과 똑같은 말이었지만, 어제와 다르게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어색하게 들렸다. 천재승 선수는 눈을 올려 대표님을 바라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문에 비서는 갑자기 긴가민가해졌다. 생각해보니까 천재승 선수는 늘 저런 표정이었던 것 같아서. 어쩌면 대표님은 천재승 선수와 싸운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대표님은 천재승 선수를 전에 없이 챙겼고, 두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기는 했다. 역시 총을 든 괴한의 침입밖에는 답이 없는 것일지도.

비서는 점점 커지는 의문을 뒤로한 채 자신의 대표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대표가 털어놓지 않는 이상 의문의 해답을 찾기는 요원할 듯 보였다. 아마도 영원히.

*

비서의 랜트카는 해변으로 진입하는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앞장서서 해변 앞에 멈춰 선 원영은 비서가 조수석으로 가 서류를 꺼내오는 동안 가만히 해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라도 재승과 떨어져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그러니 타이밍에 비서가 찾아온 것도, 서류를 확인해야 한다는 핑곗거리가 생긴 것도 원영으로서는 아주 천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비서가 도운 아침이었다.

KFC의 대표 이원영의 시간은 황금과도 같다. 그러므로, 잠시 남은 자투리 시간이라도 알차게 사용해야만 했다. 원영은 일단 가장 시급한 후회부터 먼저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가 어제 왜 그랬지.

한마디 후회를 떠올렸을 뿐이건만, 해변을 바라보는 원영의 눈이 금세 촉촉하게 물들었다. 원영이 아련한 눈으로 회상을 하기 시작했다.

원영이 후회하는 어제의 일은, 정확히 말하자면 재승에게 첫 번째 훅을 맞은 뒤의 일이었다. 원영은 재승과 키스를 하고, 패팅을 하고, 그 뒤에 훅을 맞아서 골이 뎅뎅 울린 것까지는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물론 재승의 주먹은 셌고, 취한 와중에도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이거 KO겠구나 싶었었다.

하지만, 정신을 다잡은 원영은 KO로 쓰러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KO를 당했으면 후회를 할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원영이 후회하는 일은 그 이후에 내뱉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라는 뜻이었다.

술과 (자신이 생각하기에) 로맨틱한 상황으로 만취해 있던 원영은 재 뿌린 선배에게 용암까지 들이부었다. 변명하자면, ‘선배. 그거 다 저한테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는 질문의 대답이 ‘정당방위다, 이 개새끼야!’라는 것에 조금 삐져 있었다.

짝사랑 주제에 뭘 삐지기까지 하고 그러냐, 라는 말을 하신다면 선배가 잘 세우시기에 잠깐 미쳐 있었다고 대답하겠다.

원영은 그때 잠시 미쳐 있었다. 물론, 자기 사랑이 가득한 원영은 그래도 그 정도면 곱게 미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곱게 미쳤든 제대로 미쳤든, 이미 엎질러져 버린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는 게 현실이었다.

‘한 대 맞아주면 정당방위 맞죠? 그럼 선배. 이따가 또 정당방위 하세요.’

원영은 재승의 목을 핥아 올리며 그의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승은 가만히 있었다. 원영은 그게 허락의 신호인 줄 알았고, 그래서 한 손으로는 재승의 엉덩이를 지분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배에 사정해 놓았던 자신의 정액을 퍼 올렸다. 곧 정액으로 흥건한 손이 재승의 엉덩이골 사이로 문질러졌다. 원영이 재승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선배는 먹는 거 좋아하죠? 편식 같은 거 안 하니까 내 좆도 맛있게 먹어줄 거야. 그렇죠?’

재승은 간지럽다는 듯 목을 움츠렸다. 그게 귀여워서 조금 웃다가, 그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양손으로 지분거리던 엉덩이골의 안쪽에서 오밀조밀 꽉 다물린 구멍을 찾아낸 것도 그쯤이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성기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원영은 다물려 있는 구멍 주변을 중지로 문지르면서 다시 재승에게 속삭였다.

‘조금 만져보고 뻑뻑하면 젤 발라줄게요. 이럴 줄 알고 사놨어요. 완전 기특하죠.’

이때쯤 재승의 숨소리가 거칠었던 것도 같다. 당시 원영은 그가 흥분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해보니 그건 분명히 폭발의 전조였다. 게다가 취한 정신의 원영은 선배의 양손이 자유롭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배가 얼마나 잘 씹억!’

덜 취한 데다가 화가 난 선배는 힘이 셌다. 원영은 양 옆구리를 잡힌 채 번쩍 들렸고, 곧바로 침대에 내리꽂혔다. 뒤이어 재승은 원영의 몸 위로 올라탔다. 눈 밑을 벌겋게 물들인 재승이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원영을 내려다봤다.

경기로 따지자면 마운트포지션의 수비수 위치를 취하게 된 것이었고, 본래 원영은 이 위치와 사람을 올려다봐야 하는 각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라탄 사람이 천재승이 되자 느껴지는 기분이 달랐다. 어떤 체위가 생각나는 각도가 퍽 꼴릿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영은 그 꼴릿함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다.

‘근데 이 새끼가!’

재승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허술한 가드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원영은 변변찮은 가드 하나 없이 똑같은 급소를 연달아 맞았고, 때문에 의식을 다잡지 못했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우지끈하며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무너진 것이 침대 다리라는 것을 깨달은 건 잠(기절)에서 깨어난 후,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이 어딘지 모르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였다.

필름이 끊기기는커녕, 이렇듯 어제의 기억이 선명했다. 때문에 원영은 눈을 뜨자마자 딱 죽고 싶었다. 정말 살면서 오늘 아침만큼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선배를 봐야 할지 몰라 자는 척을 하고 있던 것조차 원영의 수치심을 가증시켰다.

만약 그때 비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원영은 재승이 배가 고플 것도 무시한 채 오후까지 잠든 척을 했을지도 몰랐다. 확실히 말하는데, 그건 다 재승 때문이었다.

우리 선배가 어찌나 친절한지, 그런 미친 짓을 한 후배를 위해서 물수건으로 거시기를 닦아주시고, 친절하게 속옷과 바지도 올려주셨으니까. 차라리 거시기라도 찝찝했으면, 원영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평소처럼 주접을 떨었을지도 몰랐다. 정말 아주 조금이나마 덜 수치스럽다고 느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싫고 나랑 한 행위가 끔찍했으면, 수건으로 닦아주기는커녕 바지를 올려주지도 않지 않았을까?

원영의 갈색 눈동자가 본래의 빛을 되찾으며 초롱초롱해졌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대표님. 저 왔습니다.”

원영이 뒤를 돌자 A4용지 몇 장을 손에 든 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원영에게 가까워졌다. 비서는 모래사장에 쭈그리고 앉은 채 가지고 온 서류들을 분류해서 내려놓았다. 똑같이 자리에 쭈그리고 앉은 원영이 비서가 내려놓은 서류 중 가장 앞쪽에 있는 서류를 집어 눈으로 훑었다.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지금 보고 계신 서류가 그제 자택인 부칼 쪽으로 보냈던 서류입니다. 며칠 내내 연락도 무시하고 어떻게 잘 도망 다니더니, 서류 보자마자 직접 연락이 오더라고요. 오늘 부부가 옷 장사 중인 바클라란 쪽으로 직접 찾아갈 예정입니다.”

“다른 말은 없고?”

“자기들은 천재승 선수가 선수로서 입지도 튼튼하고, 그러니까 받는 돈이나 모아놓은 돈도 많으면서 없는 척하면서 치사하게 구는 줄 알았답니다. 앞으로 귀찮게 할 생각 없이 딱 이것만 받고 끝낼 생각이니까 천재승 선수가 취하하게 좀 도와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야……. 핑계 고상하네.”

원영이 진심으로 감탄한 듯 말했다. 비서는 거기에 대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아무 말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비서였다.

원영이 몇 장 없는 서류들을 눈으로 모두 훑고 나자, 비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모래사장 밖으로 사라졌다. 본래 필리핀행의 목적이었던 큰아버지의 일은 이렇듯 오늘로써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처리를 모두 끝마친 상태라 큰아버지 부부는 고국 땅을 밟는 순간 구속이 확정되어 있었다. 비서는 그 내용을 서류를 통해 큰아버지 부부에게 가르쳐준 것이었고, 오늘은 변호사와 가드를 대동한 채 방문하여 입으로도 똑같은 내용을 반복 읊어주기로 되어 있었다.

죄명은 명의도용과 사기. 통화로도 제 죄를 인정했고, 오늘 만나서도 알아서 죄를 읊을 그들이었기에 오히려 만나면 만날수록 철장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질 테였다.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해외로 도피했으니 도주 우려도 있겠다, 그들은 공항에서 곧장 잡혀갈 운명을 절대 거스를 수 없었다.

변호사는 적당히 어려운 말을 섞어가며 스트레스를 줄 거다. 재승에게 한 행동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처사가 아닐 수 없었으나, 알아서 이민을 왔던 그들이 고국 땅을 밟으면 무조건 감옥으로 끌려가게 될 처지가 되었으니 절대로 행복하지는 않을 터였다.

딱히 어려운 것도 없는 일이었고 사실 어제쯤 완전하게 마무리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그래봤자 기껏해야 하루가 더 걸렸다. 원영은 재승과 약속한 경기를 보기 위해서 어차피 이틀을 더 필리핀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원영이 해야 하는 일은, 그 경기를 보는 것이 ‘재승 선배’가 아닌 ‘자기’와의 데이트가 되도록 아주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지금 원영의 기억에는 이미 어제 저지른 자신의 과오가 상쾌하게 세척된 상태다. 대신 ‘선배는 나를 좋아하게 돼 있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의 온 정신을 지배했다.

원영이 방갈로를 향해 몸을 틀었다. 다리 길이에 맞춰 커다란 보폭으로 걷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당당했다.

*

하지만 방갈로로 돌아와 재승을 눈앞에 두고 나자, 원영은 재승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재승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원영이 재승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방갈로 근처의 레스토랑이었다. 일전에 갔던 체인 레스토랑 옆의 간판 없는 레스토랑이었는데, 닭 종류만 팔던 체인 레스토랑보다 주요리의 종류가 훨씬 많았다. 덕분에 원영은 퍽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선배 비프 스테이크, 포크 스테이크, 치킨 스테이크 중에 어떤 거로 주문해드릴까요? 아…… 그런데 필리핀은 소가 맛이 없어요. 물소라서 질기거든요. 그러니까 선배는 돼지? 아니면 닭?”

“……돼지랑 닭. 이 인분씩.”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재승이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다 싶었는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영은 웨이터를 불러 유창한 영어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재승의 얼굴을 계속해서 힐끗거렸다. 주문을 끝마치고 나면 도대체 뭐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야 할지 전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재승은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다만, 원영이 느끼기에 그는 아주 조금 화가 난 듯 보였다.

원영이 성공적으로 주문을 마치고 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예고된 적막이 찾아왔다. 조용한 테이블 위에는 곧 샐러드가 놓였고, 그것을 비우자 수프가 올라왔다. 두 사람이 말없이 수프를 비운 뒤에는 주요리인 스테이크들이 테이블 위로 줄지어 놓이기 시작했다. 웨이터는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을 한가득 채웠고, 테이블에 미처 올리지 못한 스테이크들을 서빙트레이 위에 그대로 남겨둔 채 사라졌다.

가만히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던 재승이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달그락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돼지 안심살로 만든 스테이크의 끝에 칼집이 생겼다. 재승은 시작한 칼질을 차마 끝마치지도 않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 이원영.”

재승이 원영을 불렀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냐.”

퍽 살벌한 음색이었다.

“…….”

속으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부리던 원영이었으나, 원영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 것이 도의적으로도 더 맞기는 했다. 아무렴, 눈뜨기 무섭게 볼 낯짝도 없었던 놈이 그까짓 자신감이 생겨봤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거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건넨 재승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승은 원영이 어제 자신에게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그 변명을 다 하고 나면 그가 자신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사과까지 다 받고 나야 재승 또한 어제 두 번이나 주먹질을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원영에게 사과할 수 있을 테다. 그다음엔 비로소 껄껄껄 웃으며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해줄 생각이었다. 술에 취한 네놈의 입이 아주 걸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까 내 앞에서 다시는 술 마실 생각 하지 말라고. 넌 술 마시면 (발정 난) 개가 되더라고 말이다.

철장 안에서 미친개 취급을 받는 재승은 철장 밖에서 원영만큼 개가 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 그런 놈에게 주먹을 올린 것은 정말 말 그대로 불가항력이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놈은 충분히 맞을 짓을 한 것 같았다. 재승은 때릴 만해서 때렸다. 그리고 재승은 제발, 원영이 변모했던 ‘완벽한 개’가 그저 그의 흔한 술주정이었기를 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전날의 기억(그러니까 원영이 자신을 억지로 수음시키고, 본인도 같이 수음했던 것)을 없었던 일로 치고 싶어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재승은 나름 희망찬 사람이었으므로, 사과만 한다면야 어제 그 일 정도는 그냥 아주 강렬했을 뿐인 해프닝으로 웃고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같은 사내놈이 한순간이라도 자신에게 욕정하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어디 하나 모자란 놈이 그랬으면 또 모르겠는데, 원영은 돈도 잘 벌지, 키나 얼굴도 훤칠하니 잘생겼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했다. 굳이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원영은 그 누가 보아도 멀쩡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재승은 더더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한테 네가…… 도대체 어째서……?

어제 기절한 원영의 가랑이 사이를 닦아주면서도 재승은 곰곰이 생각했었다. 이놈이 뜬금없이 내 이상형을 왜 읊었으며, 나한테 왜 발기한 좆을 들이밀었는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단순히 성욕이 일어서였을까. 아니면 만만하고 멍청한 선배라 한번 놀려보고 싶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좋아해서일까? 어쩌면 진짜 단순하게 욕구불만으로 술주정이 격해진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성욕이 일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원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더욱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재승은 그때나 지금이나 명확한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놈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주먹을 든 이유는 이원영이라는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먼저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재승이 아니라 그 누구더라도 혼자 바보가 되는 상황을 바라지는 않을 터였다.

재승은 자신이 원영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아니면 진지하게 타일러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가볍게 웃고 넘겨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얌전하게 원영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하는 대답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하는 반응도 답이 나올 테였다. 기왕이면 웃고 넘길 수 있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모든 일은 재승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어제 일 말씀하시는 거면……. 저는 후회 안 합니다.”

변명하기는커녕 세상에 다시 없을 뻔뻔한 얼굴을 하며 원영이 한 말이었다. 재승은 할 말을 잃은 채 원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원영이 입을 꾹 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원영은 재승의 눈길을 피하며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스테이크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리기 시작했다. 원영은 두툼한 스테이크를 완벽하게 썰어가면서 재승에게 말했다.

“선배는…… 제가 그렇게 안 했으면 저랑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을 거고, 어제는 선배도 반응이 나쁘지는 않으셨던 것 같고. 그러니까 후회 안 해요. 앞으론 더 열심히 들이댈 거예요. 대신…… 그런 일은 허락받고 할게요. 선배가 허락해주시면……. 정당방위 너무 아팠어요. 취했는데 봐주는 것도 없고 말이야. 나쁜 선배.”

원영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예쁘게 잘린 스테이크가 재승의 앞에 놓였다. 그 뒤 원영은 재승의 앞에 놓여 있던 잘리다가 만 스테이크를 들고 가서 다시 칼질을 이어갔다.

재승은 포크와 나이프를 꼭 쥔 채 원영의 멍든 관자놀이를 바라보다가, 그가 잘라준 스테이크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스테이크에 뿌려져 있는 소스가 무척이나 달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방금까지 정리하고 있던 생각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저 KO 시킨 건 선배가 처음이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원영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제 몫의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어느새 그가 바꿔 간 스테이크까지도 모두 적당한 크기로 썰려 있었다. 이렇게 칼질을 잘하는 거 보면 여자한테도 분명히 인기가 많을 텐데. 역시나 자신에게 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전후 사정 다 무시하고 저런 소리를 하면, 지나가는 이종격투기 팬 오해하기 딱 좋지 않은가. 재승도 자신이 지금 우쭐해져야 하는 건가 싶었었다. 물론, 아무리 단순하고 무식해도 그게 아니란 건 알았고, 여긴 해외라서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고 오해까지 해줄 만한 격투기 팬도 존재하지 않는다. 재승은 스테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따지듯 물었다.

“……근데 나한테 왜 그랬는지부터 말해줘야 순서 아니냐.”

“선배가 좋아서요.”

“오…….”

재승이 할 말을 잃고 멍청한 소리로 감탄했다. 놈이 장난이라거나, 기억이 안 난다며 발뺌할 줄이나 알았다. 이렇게 대놓고 고백을 해올 줄이야.

재승은 살면서 저 좋다는 사람을 거절한 역사가 없었다. 만약 애인이 있는 상태에서 고백을 또 받았다면야 당연히 거절했을 테지만, 워낙 다가가기 힘든 타입이다 보니 한 번에 여러 명의 여자가 좋다며 만나자고 한 경우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연애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에는 제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어떤 사람도 추파를 던지지 않았고…….

아무튼, 사람이란 게 원래 아무것도 모르고 만나도 만나다 보면 그 사람만의 장점이 보이게 되는 거고 좋아도 지는 거다. 재승은 늘 외로웠기 때문에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았었고, 연애의 끝에는 항상 먼저 다가왔던 사람의 마음만 식고 자신만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버림받을 것이 무서워서 그렇지,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당장 지금이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상대가 남자라니. 이건 경우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원영이 좋아한다며 고백을 한 통에 어제 일을 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재승에게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연애를 하던 시절처럼 ‘그래, 우리 한번 만나보자’ 하며 생각 없이 손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걸릴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종신계약 사기를 친 것부터 시작해서, 놈의 성별, 놈의 지위, 부담스러운 것이 정말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자신만 원영에게 도움을 받은 현재의 상황이었다. 느닷없이 빚이 생기고 은행이 파산했을 때, 재승은 그 순간 원영이 없었으면 회생이 불가능했을 테다. 원영이 만약 그때도 자신을 좋아해서 도와준 것이었다면, 나중에 연애하다가 자신에게 질렸을 때 그 순간을 얼마나 후회하겠느냐 이거다.

정나미가 떨어졌으니 125억이나 내고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라는 말을 할지도 몰랐다. 그럼 자신은 그때쯤 원영을 좋아하고 있을 거고, 상처와 돈에 허덕거릴 것이다. 어쩌면 이게 이원영의 큰 그림이었을지도 몰랐다. 세상에 이렇게 끔찍할 수가! 생각을 끝마친 재승이 스테이크를 포크로 잔뜩 찍어 입으로 욱여넣었다.

“……그래서 선배는 어떤데요?”

재승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원영이 못 참겠다는 듯 재승에게 물었다. 재승은 어쩐지 기대하고 있는 듯 보이는 원영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열심히 스테이크를 씹었다. 다시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놈이 진심인지. 만약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거절이 맞았다.

재승은 생전 처음으로 거절에 가까운 말을 내뱉으려고 하고 있었다. 재승이 꼴딱, 씹고 있던 음식물을 삼켜냈다.

“일단 125억부터 모으고 그때 다시 생각해볼게.”

“……네?”

“나 좋아해 주는 건…… 그게 어떤 의미든 엄청 고맙다. 근데 내가 널 좋아한다거나 너랑 연애하는 건 125억부터 모으고 생각해볼게. 지금은 잘 모르겠어.”

말을 끝마친 재승은 퍽 뿌듯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제 딴에는 아주 멋있게 거절한 것 같았다.

아마 125억을 모으고 나면 안도감이 생겨서라도 연애를 하고 싶어질 것 같다. 물론 그때까지 이원영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또 괜찮을 것 같았다. 125억이나 모을 정도면 그보다 더 모을 수도 있다는 것일 테니까.

한 몇억쯤 더 모아서 멋있는 체육관을 짓고, 그 뒤엔 125억을 내고 KFC를 나간 다음 체육관을 운영하자. 그럼 외로움 따위 느낄 새가 없을 것이다. 수강생이 없어서 운동기구만 닦고 있어도 아주 행복할 것 같았다.

이원영이 125억쯤은 아주 쉽게 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설마 좋아하는 사람한테 거짓말을 했으려고. 아니, 정말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한가? 하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같은 남자의 성기를 어째서 만지겠는가. 만약 놀리려고 그랬어도 놀리다가 자기까지 괴로울 텐데 말이다.

“……선배 혹시……. 종신계약 때문에 아직도 화나셨어요?”

원영이 뒤늦게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큰 사건을 두고 ‘아직도’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다행히 재승이 그 단어를 신경 쓰는 일은 없었다. 원영이 억울한 얼굴을 하며 더욱 신경 써야 할 질문을 한 탓이었다.

“……그럼 왜 닦아주셨어요?”

아마 생략된 단어는 ‘제 가랑이’ 정도가 맞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제 자지’도 맞을 것 같았다.

“왜 닦아주긴…… 그럼 그냥 둬?”

재승은 황당하다는 듯 원영에게 되물었다. 맞을 짓을 해서 때리기는 했지만, 바지 벗고 뻗은 놈을 무시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싶었다.

자신은 그 꼴을 보고도 발 쭉 뻗고 잠들 만큼 막돼먹은 심성을 가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심성이 아니더라도 그를 닦아야 할 명분은 분명히 존재했다. 재승은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서, 원영과 함께 자는 날이면 늘 그보다 일찍 잠든 뒤 일찍 깨어나곤 했다. 그러니 만약 원영을 닦이고 입히지 않았다면, 재승은 깨어나자마자 원영의 성기를 또 보아야 했을 터였다.

그 성기는 아마도 새벽 발기를 했을 테고, 정액이 말라붙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찝찝함을 주었을 테지. 아침처럼 상쾌한 안구를 위해서도, 딱한 이원영을 위해서도. 재승은 아주 옳은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깨끗하게 닦아서 옷까지 입혀 놓았더니, 닦이고 입혀진 놈이 억울해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이제 꽤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데……. 원래는 노출증이 있었는데 여태까지는 잘 숨기고 있었던 건가……?

재승은 꺼림칙한 눈으로 원영을 훑었다. 물론 사실을 보자면 아무 곳에서나 상의를 탈의하고, 신발보다 맨발을 선호하는 재승이 오히려 더 노출증에 가까웠지만. 재승이 굳이 현실을 인지해야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래요. 그……. 그래도 선배, 저랑 한 키스는 좋았죠? 제가 만지기 전부터 선배 거 서 있었잖아요. 싫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원영이 말끝을 올리며 강요했다. 제일 꼴불견이라는 답 정해놓고 대답 바라기였다. 재승은 이번에도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반박을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원영이 소리쳤다.

“그, 만약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거면 한마디 드릴게요! 우리는 같은 남자니까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워, 원래 몸이 좋으면 마음도 따라오기 마련 아닙니까! 물론 저는 선배 허락을 받고 뭐든 할 생각이지만! 선배도 그렇게 따라주시다 보면 제가 좋아지실 수도 있고!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배 ‘오’ 했잖아요! 오……! 그거 선배가 괜찮다 싶을 때만 내는 소리 아니었어요?!”

웅변하듯 소리친 원영은 끝내 터질 것같이 시뻘건 얼굴로 씩씩거렸다.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서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동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재승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어쩜 이렇게 추접스러운 말을 잘도 할까. 귓구멍에 구정물이라도 튄 기분이었다.

물론 원영의 말처럼 재승도 남자고, 연애 중에는 밤낮 구분 없이 애인에게 치근덕거렸을 만큼 정력 또한 남다른 편이었다. 그래도 원영과는 달랐다. 재승은 로맨스를 챙길 줄 아는 로맨틱한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내가 해준 밥을 예쁘게 잘 먹어서 당장 안고 싶어졌다거나, 같이 있는데도 아쉬워서 네가 나를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달콤한 말이 진심으로 나올 상대에게만 진심을 다해서 구애하고 몸을 겹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키우기 위한 데이트, 깊지 않은 스킨십 따위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원영의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몸이 가면 마음도 가는 게 이치였다.

다만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마음이 떠나면 몸도 떠났다. 연애 후반,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데 자신만 몸이 달아 애달팠던 때의 기분은 가히 처참했었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승은 눈앞의 추잡한 놈이 자신을 아무리 좋아해도, 어쩌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25억은 어찌 됐든 모을 예정이지만.

“야. 똑똑히 말해두는데, 그때는 화가 나서 선 거지 흥분해서 선 거 아니야. 그리고 넌 내가 좋은 게 아니라 내 몸이 좋은 거지?!”

“하.”

원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째 같잖다는 느낌이라 뭔지는 몰라도 기분이 확 상하려고 그랬다. 비웃냐고 따지려는데, 원영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재승의 말을 막았다.

“말 똑바로 하세요, 선배. 몸‘도’ 좋은 거죠. 내가 미치지 않았으면 몸만 좋은데……. 아무튼, 그건 됐고. 제가 웬만해서는 선배 말에 토 안 달고 그러는데 이건 좀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선배. 이상 성욕자가 아닌 이상에야 화가 나면 성기는 쪼그라듭니다. 설마 선배는 경기할 때마다 세우세요? 진짜 그렇다면 제가 죄송하고요. 근데 아닐걸요? 아니죠?”

원영이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왼쪽 관자놀이가 강조되는 모습이었으나, 원영은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재승은 그 얼굴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세운 적이 없었다.

깔끔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는 편이 좋을 테지만,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재승은 다시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무언가는 경기를 나가면 경기복 안쪽에 파울컵(낭심 보호대)을 착용한다는 것이었다. 파울컵 안쪽의 사정은 상대편 선수는 물론이고, 경기를 관람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오로지 본인만 알 수 있는 비밀이었다. 그런고로 재승은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었다.

“아니야! 난 서! 난 그래!”

자신이 이상 성욕자임을 알아달라며 크게 소리를 지른 꼴이었지만, 확실히 말싸움에서는 이긴 기분이 들었다. 재승은 아주 많이 우쭐해졌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문 원영이 그런 재승을 말없이 바라봤다. 원영은 곧 스테이크를 찍어 입가로 가져갔다. 느닷없이 벌어진 말싸움의 종결이었다.

승자는 천재승. 어젯밤에 벌어진 결투를 포함해 스코어는 2 대 0이다. 3라운드가 언제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일단 이렇다 할 대화 없이 바쁘게 손과 입을 움직였다. 먹성 좋은 사람들답게 스테이크 8인분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릇 위에서 모두 사라졌다. 원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빌지에 결제 금액과 팁을 꽂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걸음을 내딛자 바다 특유의 짠 내와 함께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더운 나라 사람들은 먹을 것이 풍족해서 선천적으로 게으른 사람이 많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그런가? 바람마저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좀 뛸까요?”

원영이 재승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물어왔다.

역시 잘 통하긴 하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재승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식후에는 가볍게라도 운동을 해주어야 했다. 안 그러면 몸이 무겁고, 그래서 기분마저도 처질 수 있으니까.

*

두 사람은 10분 정도 스트레칭을 한 뒤 모래사장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이렇다 할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신기한 게, 그래도 나쁜 분위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 없이 달리다가 문득 옆을 보면, 무조건 원영과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원영이 무언가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원영은 앞서 말했듯 단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정면을 바라보며 달렸고, 그러면 재승도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느닷없지만……. 그저 같이 달리고 있는 것뿐인데 가슴이 간질간질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분명히 여행을 온 내내 아침마다 함께 조깅을 했음에도 유독 오늘만 달랐다.

식사 중에 말 같지도 않은 싸움을 했고, 화해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화해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게 다 몸‘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몸‘도’ 좋은 거라며 원영이 화를 낸 탓이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 나니까 평소라면 ‘노려보는’ 건가 싶어 마음이 불퉁해졌을 상황에도, 혹시 내내 이렇게 나를 ‘바라봐주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려서. 가슴이 제멋대로 두근거리고 제멋대로 원영에게 기대하려 했다.

재승은 달리다 말고 멈춰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직 125억 모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습관이 나오는 자신을 질타하기 위함이었다.

재승은 몸이 헤픈 것 같다며 원영을 욕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재승 또한 자신의 마음이 이만큼이나 헤플 줄은 몰랐다. 성별 때문에라도 걸릴 것이 생길 줄 알았는데, 눈이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이원영이 연애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였다. 원영의 장점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원영의 외형적인 장점을 꼽으라면 일단 가장 두드러지는 게 하얀 피부와 부드러운 눈매였다. 원영은 이종격투기 대표와 선수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주먹질은커녕 손에 물 한번 닿지 않고 자랐을 것 같은 도련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몸은 또 기가 막혔다. 자기가 강조하던 말마따나 탄탄한 가슴근육도 예뻤고, 긴 추리닝 바지를 입거나 정장 바지를 입어도 말처럼 탄탄한 허벅지가 숨겨지지 않았다. 다리가 길고 어깨가 넓으니 무슨 옷을 입어도 옷태가 예쁘고…….

거기까지 생각한 재승이 사고를 멈췄다. 요상한 생각 좀 그만하자고 멈춰 섰는데, 오히려 2절 3절까지 하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이러다가는 자신도 부담스럽고, 쟤도 곧 부담스러워할 거다. 그냥 달리기나 하자.

재승이 생각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어느새 멀리 떨어진 원영이 휙 하고 뒤를 돌아봤다. 원영은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재승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선배! 선배! 선배!”

다급하게 소리를 치며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재승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영의 장점을 하나 더 찾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는데도……. 목소리가 참 부드러운 것 같았다.

*

딴생각하느라 잠시 뒤처진 재승을 원영이 놀라서 쫓아온 뒤, 재승은 이쯤 하면 많이 뛴 것도 같다며 원영에게 달리기를 끝내자고 말했다.

원영은 재승이 그 말을 할 때까지도 꽤 놀란 상태였다. 뭘 그렇게 당황하고 놀랐나 했더니 자기가 대드는 바람에 선배가 화가 나서 저를 버리고 가는 줄 알았다더라.

내 나라도 아닌 곳이고, 돈도 없고, 그래서 갈 곳은 더더욱이 없었다. 심지어는 혼자서는 비행기를 탈 줄도 모른다. 버리고 가봤자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국제미아가 될 뿐인데 도대제 어째서 자신이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느냐 이거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지언정 원영에게 자신의 입으로 사실을 말하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재승은 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원영이 그 눈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색한 침묵 뒤에 원영은 늘상 짓던 다정한 표정으로 제의를 해왔다.

“미트는 없지만 가볍게 맨몸 훈련이라도 할까요?”

전의 상황이 어땠건, 머릿속이 복잡하든 말든 간에 재승이 절대로 거절할 리가 없는 제안이었다.

“오늘은 방어랑 반격 위주로 움직여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선배?”

“좋아. 아, 잠깐만……. 이제 공격해.”

재승은 그새를 못 참고 웃통과 신발을 벗어 던졌다. 가드를 올린 채 어서 오라는 듯 스텝을 밟자, 모래사장 위에 떨어진 재승의 옷과 슬리퍼를 보던 원영이 이내 재승과 같이 가드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모래사장 위에서 서로 대치했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던 현지인 몇 명이 멀리서 봐도 신기한 광경에 혹해 두 사람의 근처로 몰려들었지만, 둘 중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관심을 두는 일은 없었다. 원영이 훈련이라고 말한 지금의 상황은 사실 두 사람에게 있어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자 유흥이었다.

재승이 KFC와 계약을 맺고, 원영이 재승의 집에 눌러앉은 내내, 두 사람은 늘 이렇게 뜬금없이 훈련을 시작하곤 했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고, 오늘 원영이 자신에게 고백을 함과 동시에 변태 같은 헛소리를 해댄 것은 지금 상황이랑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었다.

재승은 이미 재미를 알았는데 굳이 하기 싫은 거절까지 해가며 이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원영의 훈련이 그가 재승에게 건네는 추파 중 하나라면, 재승은 이미 100퍼센트 넘어간 상태였다. 단순한 재승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리는 만무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가드를 한 두 사람은 마치 경기를 치르듯 한쪽 주먹을 뻗어 상대방의 주먹에 톡하고 부딪쳤다. 곧 재승이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뒤로 멀어졌다.

장거리 타격형 선수이지만, 같은 장거리 공격에 약한 재승이기에 훈련 상대로 원영만큼 좋은 사람은 없었다. 공격을 기다리는 재승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멀찍이서 가드를 올리고 있는 원영의 눈에서도 똑같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솔직한 말로 재승은 기본기가 좋지 못했었다. 지금이야 워낙 선수 짬밥을 먹었고 다른 선수들을 보며 배운 것이 있어서 기본기도 훌륭해졌지만, 사실 선수 초창기 때는 늘 이겨도 욕을 먹었었다. 어디 깡패 같은 새끼가 경기장에 올라가서 물을 흐리느냐고.

물론, 그건 복싱 경기에 올라갔을 때의 이야기고, 이종격투기로 종목을 바꾼 이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관장은 천재승으로 돈 벌 궁리나 했지 천재승이라는 선수를 가르칠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격투기 좀 배워봤다 하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본디 킥복싱이라는 게 역사가 그리 깊지도 않고 짬뽕 무술이다. 공수도의 스타일을 살리면서 복싱펀치와 무에타이의 시합 룰을 응용한 격투기. 설명이 조잡한 것 같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킥복싱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체육관을 차려놓고도 아무거나 가르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관장은 원래 태권도 사범이었다. 태권도가 대체로 어린아이들이나 돈이 되는데, 어린애들 가르칠 성격은 못 돼고 게다가 돈도 안 되는 것 같아서 대충 단증을 취득하고 킥복싱 체육관을 차린 것이었다.

천재승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거나 그거나 돈이 안 벌렸지만, 결국 천재승을 얻었으므로 로또보다 큰 돈을 손에 넣었다. 관장이 ‘우리 재승이는 기본기가 훌륭해서-’라며 칭찬하는 것은 진짜 재승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다. 가르친 것도 없는 주제에 자기가 그만큼 가르친 줄 알고 으스대는 것에 더 가까웠다.

재승은 못 가르치고 안 가르쳐도 경기만 나갔다 하면 이겨서 돌아오는 노다지였다. 여태까지의 대단한 실적들은 모두 주먹을 겁내지 않고, 본능적인 감이 좋고, 승부욕이 남달랐던 그가 오롯이 혼자서 해낸 그만의 능력이었다.

재승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재승의 모든 경기를 분석하고, 분석하고, 분석한 원영은 아주 잘 알았다. 정확히는 아니어도 짐작은 갈 만했다. 그 정도도 짐작하지 못한다면 그가 KFC의 대표와 선수를 제대로 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재승이 아무리 아무것도 모른다 한들 본인이 몸으로 느끼는 것 정도는 있을 법도 했다. 재승은 그래서 원영과 훈련을 하거나 미트를 치는 게 너무 좋았다. 비슷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아도 원영은 가끔 무언가를 몸으로 가르쳐줬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 이런 응용 공격을 하면 좋겠구나.

혼자서 깨닫고 나면 재승은 그게 너무나도 행복했고, 원영에게 고마웠다.

장거리 공격을 위주로 한다는 것만 빼면 두 사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비슷한 점이 없는 선수였다. 미들급과 헤비급이라는 체급의 차이를 차치하더라도, 가드를 하는 스타일부터가 달랐다.

원영은 키가 큰만큼 무게 중심을 낮게 잡아 가드를 했고, 가드를 하며 쥔 주먹은 상대방이 주먹뼈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측면으로 세운 느낌이었다. 운동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권투의 가드였다. 재승은 꽤나 자주 보아왔어도 원영의 가드가 무척 멋있게 보였다.

참고로 멋있게 보이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원영과 자신이 서는 이종격투기 무대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서는 이종격투기 무대는 거의 무규칙 룰에 선수 보호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만 제한해놓은 것에 불과한 이기면 장땡이라고 보면 되는 경기였다.

KO나 TKO가 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점수를 계산하기야 하지만, 재승은 애초에 룰을 외우거나 점수 계산하는 법을 잘 모른다. 관장이 그런 재승을 위한답시고 추천해준 것이 바로 이종격투기였다. 당연히 위험하다는 소리를 듣는 어느 스포츠보다도 훨씬 더 위험했다.

이종격투기의 옥타곤 안에는 온갖 격투가들이 모이기 때문에 각자 스타일들이 다 달랐다. 하지만 대부분 권투의 가드를 취하지 않았다. 원래가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만을 막기 위해서 하는 가드이다 보니, 다른 공격을 막기에는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있으니까 가능한 가드랄까. 그래서 그의 가드가 멋있었다.

반면 재승의 가드는 킥복싱을 베이스로 두어 중심이 높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주먹을 쥐는 것도 바로 주먹이 날아가기 쉽게 쥐어서 상대방이 손가락 부근이 보이는 상태로 쥐었다. 처음에는 본능에 따라 가드를 취했었고, 경기를 뛰며 점점 모양이 변하다가 결국에 굳어진 자세가 이거였다.

만약 신체적 조건이 더 좋았다면 남들이 보아도 멋있는 가드를 취했을 텐데.

재승은 가드 자세 때문에 간재비 같다는 소리나 성룡 취권 흉내 내는 애새끼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었다. 지금이야 선수 생활을 오래해서 아무도 가드로 까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옛날에는 그랬다.

재승은 원영처럼 멋있는 가드를 하고 싶었다. 물론 원영의 가드보다 현실적인 가드는 재승의 가드였고, 때문에 아류선수 거의 대부분이 재승을 따라 하고 있지만. 재승은 당연히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거리가 닿지 않는 위치에서 원영의 잽이 날아왔다. 오른쪽, 왼쪽, 다시 오른쪽. 재승은 고개를 좌우로 비틀어가며 날아오는 주먹을 연달아 피했다. 그러자 원영의 두꺼운 다리가 왼쪽 옆구리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가드 중이던 왼쪽 팔을 내려 팔꿈치로 허벅지를 막았다. 탄탄한 허벅지가 팔꿈치에 닿았다.

재승은 원영이 허벅지를 내리기 전에 막고 있는 반대편의 손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균형을 틀며 원영을 모래사장 위로 쓰러트리자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훈련 중에 박수 소리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었다. 몇 번 주먹이 오가는 동안 깨지지 않았던 재승의 집중이 깨졌고, 그걸 눈치챈 듯 원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선배, 포즈 취해주세요.”

바닥에 엎어진 원영이 재승을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머릿속으로는 분명 하란다고 하겠느냐는 생각을 했으나, 재승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구경꾼들을 향해 이두박근을 자랑한 재승이 더욱 커다래진 박수 소리를 들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원영이 웃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 원영은 반달 모양으로 휜 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 몸에 붙은 모래를 툭툭 털어냈다.

어째 또 가슴이 간지러웠다. 재승은 서두르듯 몇 발자국을 걸어가 벗어두었던 옷과 신발을 주워 들었다. 원영이 그런 재승의 뒤를 순식간에 따라붙으며 조잘거렸다.

“땀났는데 물놀이라도 할까요? 아니면 제가 수영 가르쳐 드릴게요. 선배는 운동신경 좋으시니까 몇 시간만 배워도 금방 잘하실 거예요.”

“…….”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재승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는데 그게 운동의 한 종류이기까지 하니 재승으로서는 당연히 혹할 만도 한 것이었다.

필리핀에 놀러온 첫날, 대화를 하다 보니 어쩌다가 자신은 돈 드는 운동은 배우고 싶어 한 적도, 배운 적도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재승은 말 그대로 운동을 시작하는 준비물에 몸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운동은 전부 배워본 적이 없었다. 수영도 그중 하나였다. 커다란 풀장이 필요한 운동.

암만 산골이라고는 해도 시내로 나가면 수영장 하나쯤이야 있겠지만, 굳이 찾아가서 배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게 수영을 배우러 수영장에 가느니 그 시간에 산을 한 번 더 타고 뒤뜰에서 샌드백이나 두드리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었으니까.

아마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그렇지만 원영이 잠시 스쳐 지나간 대화를 잊지 않고 자신에게 가르쳐주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조금 감동적이었다. 하긴. 좋아한다고 그랬으니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 의식의 흐름이 잠시 멈추었다. 재승은 문득, 지금 상황이 사실은 엄청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와중에 원영은 재승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딘가로 끌고 가는 중이었다.

“수영 배우고 나면 내일 경기 보기 전에 물고기 보러 갈까요? 아니면 내일은 그냥 경기 보고 하루 더 있다가도 좋을 것 같은데. 여긴 이제 익숙해졌으니까 새로운 곳으로 숙소도 옮길까요? 근데 휴가철이고 주말이라서 더블룸……. 그, 알죠? 커다란 침대 하나 있는 방. 그런 방들만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선배랑 나랑 한 침대 써야 될 텐데. 그쵸.”

원영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재승의 어깨 위로 팔까지 휘감은 상태였고, 혼자서 북과 장구를 자진모리 장단으로 쳐대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해도 정신이 사나워서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얼굴 표정은 무척이나 흥겨워 보였다.

재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숙소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고, 어느새 수경을 쓴 채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잔잔한 바닷물이 골반 밑쯤에서 찰랑거렸다. 격한 운동을 하고 난 직후라 땀을 식히는 물이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본능에 이끌려 다리를 구부리자 찰랑거리는 물이 가슴께로 올라왔다. 재승은 눈을 감은 채 시원함을 만끽하다가, 조금 뒤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들어온 남자를 바라봤다.

원영은 재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은 반바지 한 장만을 걸친 상태로 탄탄한 상체근육을 과시하듯 양 골반에 손을 올리고 서 있는 모습이 어째 조금 듬직해 보였다.

원영이 싱긋 미소를 흘렸다. 곧 하얗지만 어디로 봐도 사내의 것인 손 두 개가 재승의 눈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제가 손잡아드릴 테니까 물에서 다리부터 띄워봐요, 선배.”

원영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민 손 두 개를 흔들어 보였다. 벌써 따라들어오기까지 한 이상, 굳이 이제 와서 거절을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재승은 머뭇거림 없이 원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원영과 자신의 손은 비슷한 온기를 가졌고, 같은 운동을 해서인지 몰라도 촉감조차 비슷했다. 아니, 촉감은 비슷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제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 잡았을 때처럼 편안한 느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재승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다리를 뒤로 쭉 뻗었다. 곧 물 위로 다리가 뜬다는 느낌이 들었다. 찰방찰방 물장구를 치자 원영이 조금씩 뒤로 걷기 시작했다. 애초에 겁도 별로 없는 편이지만, 깊은 곳에서 얕은 곳으로 걷는 것이었기에 누구라도 겁을 낼 일이 없었다. 파닥파닥, 발로 물장구를 치는 재승의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선배, 재밌죠?”

원영이 재승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재승은 굳이 그걸 말로 해야 아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으하학.”

……재밌다. 그것도 엄청 엄청 재미있다……!

*

“거봐요, 금방 배우실 거라고 했잖아요.”

원영이 재승에게 다가오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의 손에는 해변 앞 가판대에서 사 온 코코넛 음료 두 잔이 들려 있는 상태였다. 재승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원영이 내민 음료 한 잔을 받아 들었다. 꿀꺽꿀꺽 몇 모금을 연달아 마시자, 소금물로 찝찝했던 입안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단기 속성 과외 3시간 만에 재승은 수영을 할 줄 아는 몸이 되었다. 원영이 말하길, 수영을 배우려면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더라.

무언가에 겁을 먹는 법이 없는 재승은 마냥 재미있기만 했었고, 그렇다 보니 배우는 속도가 남달랐다. 가르쳐주는 대로 흡수한 자신에게 뿌듯한 마음만 느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가르쳐준 놈이 매력 있어 보인다는 게 조금 흠이라면 흠이겠다.

생각해보니까 배우는 내내 원영의 손을 엄청 자주, 또 오래도 잡았었다. 잡을 땐 하나도 의식하지 않았으면서, 놓고 나니까 새삼 의식이 됐다.

재승은 유리잔을 잡고 있는 커다랗고 하얀 손을 힐끗거렸다. 자신이 계속 잡았고,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했던 손. 좋아한다는 말은 거절했으면서 좋아해서 주는 호의를 아무렇게나 받아먹은 것 같았다.

그래도 됐던 걸까? 쟨 거절당했으면서 이런 게 괜찮은 걸까? 합당한 의심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피를 키워나갔다.

과거를 상기해 보면 자신은 안 괜찮았었다. 그러니 같은 사람인 이상, 원영도 괜찮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는 괜찮아 보였다. 아까 정신이 없어서 끝까지 못 이어나갔던 의문이 다시금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재승은 이제야 정확히 인지가 됐다. 이거 정말 이상한 상황이 맞구나 하고.

어제는 그런 일이 있었고, 오늘은 원영이 고백을 했다. 물론 재승이 피해 보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원영을 거절한 게 멍청한 일일지도 모를 만큼, 원영은 계속해서 재승이 좋을 일만 했다.

재승도 알았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쯤은.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지금은 그를 붙잡아야 맞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 주는 것이 저에게도 더 이득이 되는 일이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쯤에서 느닷없이 고해성사를 해보자면, 여태까지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아주 과분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눈만 높은 편이라는 자각도 하고 있었다. 상처를 받았다며 매번 속으로 웅얼웅얼 대지만, 잠깐이나마 좋아해준 것이나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지, 원망을 하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운이 좋아서 쓸데없이 높은 눈에 부합하는 이상형의 사람들과 연애를 했다. 어릴 때는 그래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서 만나지 않았을까 했지만……. 아무튼.

그중에서도 이원영은 특출 나게 잘난 사람이었다. 그가 잘해줘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아주 객관적인 사실이 그랬다.

‘……선배. 그거 다 저한테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가 했던 이 질문은 사실 고민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키 크고, 몸매 좋고, 머리는 짧은 편이 좋고, 운동도 좋아했으면.’

성별이 같아서 따로 생각하지 못했을 뿐, 원영에게 줄줄이 읊었던 외형적 조건은 그와 아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게다가 그는 똑똑했고, 돈도 많았다. 심지어는 재승의 조건 중 가장 어려운 착한 사람이기까지 했다. 그의 자신감은 일리가 있었다.

굳이 단점을 찾아보자면 조금 변태라는 것 정도가 있는데……. 그마저도 애인이라면 오히려 매력 요소로 변하지 않을까 싶은 단점이었다.

부담스럽고 무서워서 거절을 했지만, 거절하기 전과 후에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러기엔 이원영에게 너무 미안했다. 연애를 해도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연애도 안 하는데 계속 받기만 하니까.

재승은 차라리 원영이 감히 자기를 찼다며 잠깐이나마 삐진 티라도 냈으면 자신이 이런 느낌을 받지도,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차여놓고 훈련도 시켜주고, 수영도 가르쳐주고, 간식에 음료수나 사주면서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를 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어째 인간이 찌질한 구석조차 하나가 없는 것인지. 125억도 없는 재승은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선배. 코코넛 주스 어때요?”

“……맛있어.”

“다행이다……. 근데 선배. 저는 묘하게 선배 집에서 먹었던 수정과가 생각나요. 지금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쵸?”

“응. 그러네.”

원영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던 재승이 대답하다 말고 정말 그렇다는 듯 뒤늦게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그리곤 생각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평화롭다고.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까 더욱이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평화로움이라고.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차가운 코코넛 주스. 그 주스가 담긴 유리잔에서 시원한 물방울이 주르륵 손가락으로 미끄러졌다. 어느새 옆에 앉아 있는 놈은 차여놓고도 뭐가 좋은지 예쁘게 웃고 있고, 실컷 뛰고 놀아서 몸은 노곤했다. 기분은 나쁠래야 나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125억도 없는 주제에 덥석 연애하자는 말부터 꺼낼 것 같았다.

내가 너보다 널 훨씬 더 좋아해줄게. 훨씬 사랑해줄게.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사랑’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 사랑은 흔히들 지겨워지곤 하는 것이라 이젠 주겠다고 말하는 게 참 거북스러웠다.

“선배, 제가 아까 물고기 보러 가자고 했던 거 기억나세요?”

“응.”

“그럼 우리 진짜 하루 더 묵었다가 갈까요? 아니면 며칠 더 묵는다고 생각하고 지역을 완전히 옮기는 건 어때요? 이왕 필리핀으로 나와 있으니까 세부나 보라카이도 좋을 것 같고…….”

“아, 그거 말인데.”

재승이 운을 떼며 원영을 봤다. 그러자 여태 방싯방싯 잘만 웃고 있던 원영이 어째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눈꼬리가 처져서 눈동자가 좌우로 왔다 갔다……. 옛날에 재승 자신이 자주 지었던 표정이었다. 자신감 넘치던 놈이 왜 눈치는 보고……. 아주 괜찮지는 않은 모양이지?

그래. 모르긴 몰라도 사랑 앞에 약해지는 건 잘난 놈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을 테다. 다만, 자신에게는 턱없이 아까운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재승은 속이 편치 못했다.

“집을 너무 오래 비우면 좋지 않은 것 같고……. 나밖에 안 사는 집이긴 한데, 그래도 마음이 찝찝해서. 그냥 경기 보고 돌아가자. 그게 좋을 것 같아.”

“물고기……, 알록달록해서 엄청 예쁠 텐데…….”

원영이 어물거리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재승은 그가 짓는 표정은 자신이 지어야 하는 표정이고, 그가 내뱉은 말 또한 자신이 내뱉었어야 하는 말에 더 가깝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 줄 알고 그 기회를 걷어찼다. 아니, 아주 돌아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나도 아쉽다.”

당연히 아쉬웠다. 하지만 여행 자체가 이미 주제넘는 일이었으므로 더 이상 주제넘는 일을 늘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원영이랑은 거리를 두어야겠다. 좋아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고, 좋아해 달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겁먹고 거절한 주제에 호의를 받는 것은 좋아서 역시 눈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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