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 ​​​7. Spoil anyone’s party​​​ (7/12)

7. Spoil anyone’s party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FC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비행기는 김포에서 마닐라로 직행하는 FC항공 102편입니다. 캐빈 매니저 이사랑과 12명의 승무원이 여러분을 마닐라까지 편안하고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내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비행기 좌석의 모니터에 안전벨트를 매는 방법과 비상시 대피요령 등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미리 안전벨트부터 맸던 재승은 그 뒤부터 지금까지 얌전하게 자리에 앉아 활주로가 내다보이는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자리에는 당연하게도 원영이 앉아 있었다. 듣기로는 이 비행기의 어딘가에 그의 비서도 앉아 있다던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조합으로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인지.

그렇게 복잡할 것은 없는 사정이었지만, 마닐라행 비행기에 올라타 있는 지금도 재승은 솔직히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뜬금없는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를 설명하려면, 재승이 참외를 먹으며 원영을 기다렸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재승이 잠시 그날을 회상했다.

재승은 그날, 밝게 떠 있던 해가 사라져 사방이 어두컴컴해지고 나서야 낮잠에서 깨어났다. 게다가 모기향도 피워놓지 않고 잠이 든 탓에 이곳저곳 모기를 뜯긴 상태였다. 간지러운 곳을 벅벅 긁으며 부스스 눈을 뜨자, 언제 왔는지 원영이 재승의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그는 깨어난 재승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자기는 방금 왔다며, 그러니까 자기는 선배님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며 구구절절 장황한 변명을 내뱉었더랬다.

당연히 재승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단지 놈의 재미없고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할지 모를 농담이 또 시작된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재승은 요즈음 늘 그랬듯 그의 재미없는 농담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듯 웃어주었다. 그리고 이만하면 많이 웃었겠지 싶었을 때 그를 향해 물었다.

‘참외 먹을래?’

그래서 원영은 재승이 예쁘게 깎아준 참외를 먹었고, 재승과 함께 저녁으로 꽃등심을 구워 먹었다.

여기까지는 원영이 외출했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엇비슷한 하루였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면 평소와 완벽히 같은 하루였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원영이 느닷없이 마루로 나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새하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물건이 난데없이 솟아났을 리는 없으니 그 쇼핑백은 재승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있었거나, 그의 비서가 잠깐 사이 가져다 놓은 것일 테다. 하지만 재승은 마치 그가 요술을 부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술처럼 생긴 쇼핑백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었는가 하면, 재승이 생전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포장의 와인이 담겨 있었다. 재승이 그의 손에 들린 와인병을 보며 물었다.

‘뭐야?’

‘제가 좋은 일이 있거든요.’

‘좋은 일? 뭔데?’

‘으음- 선배한테 말하기는 조금 그런데……. 그래도 선배랑 같이 기념하고 싶어서요.’

이유를 말할 수는 없으면서 기념은 같이하고 싶다니. 약 올리는 건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 소리에 재승이 미간을 구겼다. 그사이 원영은 와인을 순식간에 땄고, 익숙해진 부엌을 뒤져 커다란 사발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꼴꼴꼴, 새빨간 와인이 은색 스테인리스 사발에 한가득 따라졌다. 와인은 신기할 정도로 색이 고왔다. 때문에 재승은 인상을 찡그리던 것도 잊고 멍하니 사발을 바라봤다. 그러자 원영이 새빨간 와인이 찰랑거리는 스테인리스 사발을 건네왔다.

‘제가 선배 술 취향은 잘 모르지만…… 어쩐지 단 걸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안 마신다고는 하지 마세요. 운동선수라서……, 저한테 그거 안 통해요. 적당한 음주는 약이라잖아요.’

다른 스테인리스 사발에 와인을 가득 따른 원영이 재승의 사발에 제 사발을 부딪쳤다.

‘짠.’

원영이 히죽히죽 웃으며 후루룩 제 몫의 와인을 마셨다. 그 얼굴을 보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싶어졌다. 재승이 뒤따라 와인을 머금었다. 생전 처음 마셔보는 와인은 취향을 모르는 놈이 사 온 것치고 퍽 괜찮았다.

어릴 때 마셔본 막걸리와 소주 외에 이렇게 달고 맛있는 술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재승은 게 눈 감추듯 와인을 비워냈고, 원영은 재승의 빈 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한껏 기분 좋아진 재승에게 원영이 말을 붙였다.

‘선배 저번에 바다는 갈 기회가 자주 없어서 그렇지, 좋아한다고 하셨었죠?’

‘응.’

‘제가 섬나라 갈 일이 생겼는데, 같이 바다 가실래요? 가면 일단 바다는 실컷 볼 수 있고, 선배 좋아하는 산도 있어요. 활화산인데, 막 연기도 난대요. 그리고 별로 안 멀어요. 경비도 다 제가 대고, 선배는 그냥 저랑 같이……. 어때요?’

말을 끝마친 원영이 눈을 반짝거리며 재승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하지만 원영이 말한 것 중에 재승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재승은 그래서 오히려 더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렇게 운이 좋을 리가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재승도 원영이 저를 챙겨주고 놀아주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러다 뒤통수를 맞으면 그건 또 얼마나 얼얼할까 싶어서 매번 놈이 불안했다. 계약을 해지하려면 무조건 125억을 내야 한다던 그의 첫 뒤통수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뒤통수를 또 치려고 한다면 언제까지고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수준의 뒤통수만 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흔치 않은 기회이고 유혹이었기에 재승은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 가자.’

재승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 뒤로는 원영이 재승의 사발을 계속해서 채워줬다. 와인을 혼자서만 너무 많이 마셨는지, 원영이 어째 아쉬워 보이는 얼굴을 했던 것이 그날을 생각하면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아무튼, 더 장황하게 말할 것도 없이 그게 재승이 비행기에 올라타게 된 계기다. 재승은 원영이 준비를 위해 필요하다고 해서 가지고 있던 여권과 통장을 원영에게 줬고, 뒤늦게 아차 했지만 여행 당일인 오늘 다시 돌려받았다. 그러니 아직 이렇다 할 나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판에 덥석 비행기부터 올라탄 자신은 도착하자마자 새우잡이 어선에 팔려간다 하더라도 그에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무렴, 일이 벌어진다면 무조건 무식해서 속은 자신의 탓이었다. 속인 놈은 속일 만해서 속인 것이니 아무런 죄가 없었다.

바다도 보고, 산도 타고, 게다가 마닐라에서 열리는 이종격투기 경기도 보기로 했는데……. 출전 선수는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외국인들뿐이었지만, 메인 이벤트 경기에는 피따완이 나온다고 원영이 가르쳐줬다. 재승은 만약 원영이 저를 속이더라도 부디 그가 말한 것만큼은 저에게 다 시켜주고 속였으면 하고 바랐다.

재승이 힐끗, 옆자리의 원영을 살펴봤다. 원영은 하나도 재미없는 안내 방송을 보면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저게 자신이 낚여서 신이 난 건지, 아니면 자신처럼 바다와 등산과 경기관람이 기대돼서 신이 난 건지 재승은 조금 궁금했다. 물론 굳이 물어보지는 않을 테지만.

“야, 근데.”

“……네?”

“나 돈 받았는데, 일 안 하고 막 놀기만 해도 돼? 네가 말한 대로 계약금이라고 해도…….”

그래도 이 정도의 질문은 괜찮지 않을까.

재승이 눈치를 보며 묻자, 원영이 그 질문의 의도를 가늠하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방긋 웃으며 말했다.

“선배 놀기만 할 거 아닌데. 놀면서도 일한다고 생각하세요. 음……. 일종의 사전탐사? 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재승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전탐사가 국어사전을 본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놀기만 하는 건 아니란다.

역시 관장님의 말처럼 혹여나 놈이 ‘나쁜 일’을 시킬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는 게 재승의 감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재승은 한편으로, 만약 원영이 지금 저를 속이고 있다고 치더라도, 놈은 여태껏 자신을 속인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이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어찌나 착한지 일을 할 거라며 미리 언질도 해 주고, 사기 칠 놈한테는 굳이 비싼 돈을 들일 필요가 없을 텐데도 맛있는 고기며 여행까지 시켜주고.

게다가 여행도 그냥 시켜주는 게 아니라 시작부터 최고급이었다. 재승은 관장님을 따라 해외 원정 경기를 몇 차례 뛰어보았고, 덕분에 없이 살았던 것치고는 비행기를 탄 경험도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재승이 탄 좌석은 늘 비행기 내에서 가장 저렴한 좌석이었다.

기다란 장신의 몸을 좁은 좌석에 욱여넣고 있느라 비행기만 타면 맷집 훈련이라도 한 듯 삭신이 쑤셔댔던 걸 기억한다. 하지만 오늘 비행기는 몸을 욱여넣기는커녕 다리를 쭉- 뻗어야 앞좌석에 발이 닿았다. 심지어 옆자리에는 자신보다 더한 장정의 덩치가 앉았는데도 서로의 다리가 부딪치지 않는다.

그렇게 두 자리씩 붙어 있는 좌석에 앉게 된 것도 놀랍건만, 놈은 심지어 창가 자리를 양보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재승은 창가 자리에 앉는 것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땅을 내려다볼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FC항공 102편이 곧 이륙을 시작합니다. 휴대용 전화기와 전자기기는 안전한 비행을 위해 전원을 꺼주시고, 좌석 등받이를 세워…….]

어느새 여행을 시작하는 안내 방송이 끝나갔다.

“근데 밥은 언제 주더라?”

재승은 일단 여행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

마닐라까지 소요되는 비행시간은 총 4시간 10분 남짓이었다. 재승은 그중 절반의 시간을 먹는 것으로 소모했다.

두 명씩 앉을 수 있는 자리는 가장 저렴한 좌석과 다르게 먹을 것도 많이 줬다.

타자마자 와인과 함께 과자를 잔뜩 집어 먹었고, 그 뒤에는 기내식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두 접시 먹었다. 기내식은 무조건 인당 하나씩인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남은 음식이 있으면 추가로 1인분 정도는 더 먹을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친절한 원영이 미리 언질을 둔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재승은 막 배가 부르지는 않아도 퍽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를 끝마쳤다. 다만 식사 후 조금 괴로운 것이 생겼는데, 그건 소화를 시킬 겸 간단한 운동 따위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키와 덩치가 있으니 비행기 내부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은 당연히 민폐가 될 터였다.

때문에 원영에게 비켜달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던 재승은 괜히 가고 싶지도 않은 화장실을 한 번 들른 뒤, 곧장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비행기 내부의 다른 사람들처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 핸드폰은 와인을 마셨던 그날 원영이 다시 한번 요술을 부리듯 꺼내 재승에게 건네준 물건이었다. 그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늘 원영이 곁에 있었기에 재승이 핸드폰을 제대로 손에 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새 물건이라 그런지 핸드폰은 확실히 무척이나 좋게 보였고 또 좋게 느껴졌다. 다만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는데, 새 핸드폰이 세월을 건너뛰어도 너무 건너뛰었다는 것이었다.

재승은 최신식 핸드폰이 너무 어려웠다. 덕분에 화면이 접히는 부분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재승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선배, 도착했어요.”

원영이 재승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번쩍 눈을 뜬 재승이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비행기 빠르네.”

요즘, 답지 않게 계속 낮잠을 자는 것 같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다쳐서 아픈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신이 해이해진 것인지. 뭐가 되었든 좋은 징조는 아닐 것 같은데 말이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자 이미 대부분의 승객은 비행기를 빠져나간 듯 보였다. 자느라 착륙하는 비행기 창문을 구경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움은 잠시였고, 재승은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리핀은 경기 때문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나라였지만, 놀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서 비행기를 벗어나 공항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

“오…….”

늘 비슷한 재승의 감탄사에 원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든 말든 재승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다.

우기였나, 우가였나.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 내부를 걷는데, 원영이 사실 지금은 필리핀에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고 말해줬었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 것인지, 막 해가 뜨기 시작한 하늘에는 작은 구름 한 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파란 하늘 밑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오오…….”

가까운 서해나 겨우 몇 번 가본 재승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빛깔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거듭해서 감탄을 내뱉었을까. 내내 직진만 하고 있던 자동차가 천천히 멈추어 섰다.

“도착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원영의 비서가 뒷자리의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재승은 그제야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으로만 보이던 바다가 정면으로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선배, 내릴까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원영이 다정하게 물었다. 재승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차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바다 특유의 짠 내가 맡아졌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바람까지 불어왔다. 솨아아, 시원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나가자 정면으로 보이는 야자나무의 이파리들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차 안에서는 아직 멀게만 보였던 에메랄드빛 바다가 그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다가온 듯 보였다. 그렇게 알려진 곳은 아닌지 휴가철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다. 새하얀 모래사장에 점점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조차 하나의 풍경 같아 보인다. 재승은 감탄하는 것도 잊은 채 잠시 멍하게 굳었다.

“선배. 방부터 확인하고 가까운 곳으로 가서 보세요.”

얼마 뒤 원영의 목소리가 재승의 정신을 깨웠다. 정신을 차린 재승이 원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원영은 무척 다정해 보이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재승은 그걸 또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영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재승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리곤 한 손으로 재승의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며 다른 한 손으로 해변의 왼쪽을 가리켰다.

“숙소는 저거예요. 방갈로 형식인데 테라스에서 곧장 해변으로 넘어갈 수 있대요. 로컬만 찾는 해변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진짜 좋죠?”

원영의 물음에 숙소 방향을 바라보던 재승이 고개를 마구 주억거렸다. 방갈로가 뭔지, 로컬이 뭔지 못 알아들었으면 뭐 어떤가. 지금 계약을 할 것도 아니고, 진짜 좋다는 말만 알아들었어도 다 알아들은 것과 다름없을 터였다.

“빨리 가요, 선배.”

원영이 신이 난 듯 재승의 어깨를 이끌었다. 뒤편에서 ‘나중에 뵙겠습니다’하는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석하게도 당장은 둘 중 어느 하나 그 말에 대답할 만한 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다란 다리를 십분 활용해 성큼성큼 잘도 멀어져갔다. 잠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비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내 차에 올라탔고, 차는 순식간에 해변을 벗어나 사라졌다.

*

원영이 멀리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두 사람이 묵을 숙소의 테라스는 해변의 새하얀 모래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둘러서 걸어간 것치고, 두 남자는 숙소 앞에 도착한 뒤로도 한참 동안을 그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당연히 원영의 뜻은 아니었고, 모두 재승의 탓이었다.

재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냥 좋다는 듯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본 바다는 맑고 투명해서 물속의 작은 자갈까지 비쳐 보였다.

원영은 여행을 퍽 자주 다녔던 터라 ‘바다’하면 떠오르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니 테라스 위에서도 충분히 구경할 수 있다며 재승의 정신을 깨울 수도 있었지만……, 원영은 그러지 않았다.

재승을 보채기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재승의 까만 눈동자가 너무나도 예뻤다. 어째 촉촉한 듯도 보이는, 이 우수에 차 반짝이는 눈동자라니.

맹하고 해맑게 웃는 얼굴보다 어쩌면 더욱 흔치 않은 표정일지 몰랐다. 원영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재승의 얼굴만 멀거니 쳐다봤다. 재승의 정신이 빠져 있는 것처럼 원영의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재승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데서 살아도 좋겠다.”

얼이 빠져 있던 원영은 재승이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똑같은 말을 곱씹었다. 이런 데서 살아도 좋겠다. 당연하지만 그가 한 말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말은 아니었기에 원영은 곧장 그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해되기 무섭게 떠오른 대답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아주 무난하게도 ‘지루하지 않을까요’였다. 하지만 막상 원영의 입 밖으로 삐져나간 말은 그 말일 수가 없었다.

“……그러게요.”

왜……. 그렇지 않은가.

파주 산골짜기에서 산 타고 샌드백이나 치며 잘만 살던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에서라고 왜 못 살겠어. 아마 재승이라면 아주아주 잘 살 것이다. 어쩌면 등산 대신 낚시를 즐기며 더욱더 즐겁게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들어가 볼래.”

재승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를 했다. 원영은 퍽 호들갑스럽게 재승을 이끌며 숙소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비서에게 미리 받아두었던 열쇠로 문을 열자 원룸 형식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얀 페인트칠이 된 벽과 코팅된 나무 바닥. 방 끝쪽에 1인용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고, 오른쪽에는 탁 트인 테라스가 연결된 나무문이 달려 있었다. 아마 왼쪽 끝에 붙어 있는 문은 화장실 겸 욕실일 테다.

로컬이라 침대가 고급스럽진 않지만, 대신 분위기만큼은 아주 아늑했다. 재승도 퍽 마음에 드는지 환하게 웃으며 안쪽 침대를 향해 잰걸음을 했다.

“야, 원영아! 여긴 침대가 두 개나 있네! 우리 집보다 좋다!”

재승은 쿠션도 좋지 않은 침대에 앉아 몸을 흔들어댔다. 재승이 몸을 튕길 때마다 침대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묘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그 소리와 자신만 바라보는 재승의 눈길은 원영의 심장에 분명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은 그보다 더 마음을 앗아가는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원영아라니. 원영아라니!

원영이 감격에 젖은 눈으로 재승을 바라봤다. 재승이 그 눈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쁘지는 않은 생각이었을 터였다. 재승은 해맑은 얼굴로 쉴 틈 없이 원영을 향해 입술을 조잘거렸다.

“관장님이랑 숙소 갈 일 생기면 맨날 커다란 침대 하나만 있었거든. 근데 두 개 있는 곳도 있다, 그치? 관장님이 나 잠버릇 안 좋다고 맨날 뭐라고 해서 솔직히 아까 조금 걱정했었어. 바닥에서 잘 때는 네가 뭐라고 안 했었잖아. 근데 침대 같이 쓰면 내가 너 발로 찰 수도 있고……. 아, 혹시 말 못 한 건가? 우리 집에서 잘 때 내가 잠꼬대 심하게 하면 선배 뭐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깨워.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자면 잠꼬대도 원래 덜 한 대. 참으면 괴롭잖아. 참, 근데 너는 잠꼬대 진짜 하나도 안 하고 엄청 얌전하게 잔다? 사실 관장님은 코를 너무 심하게 골고, 거기다가 이까지 갈아서 같이 자면 진짜 힘들거든. 넌 진짜 신기하게 하나도 안 그렇더라.”

재승이 진짜 부럽다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원영은 오만 생각을 다 했다. 일단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선배. 제가 선배 모르게, 그 새끼 꼭 족쳐드릴게요.’라는 다짐이었고, 그 뒤로 한 생각은 ‘아,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트윈룸 말고 더블룸으로 할걸.’이라는 후회였다.

그러나 뭘 생각하든 이미 늦었고, 당장 속이 시원해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원영이 착잡해진 속을 감추며 재승에게 말했다.

“필요한 거 사러 가려고 하는데. 선배, 같이 가실 거죠?”

“으으음……, 그냥 난 여기 조금만 더 구경하고 있을게.”

재승의 의외로운 대답에 원영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영은 자신이 빨리 오기야 하겠지만, 그전에 혹여 나가고 싶으시더라도 절대 완전히 밖으로는 나가지 마시고 테라스 안에만 계시라는 당부를 몇 번 한 뒤에야 숙소를 벗어났다. 그 뒤 원영은 그렇게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의 편의점에서 속도 있게 쇼핑을 시작했다.

일단 선배의 취향을 몰라 선크림과 오일을 하나씩 담고, 칫솔 둘에 치약 하나, 면도기 두 개, 쉐이빙크림과 샤워워시 샴푸, 갈아입을 속옷에 맥주, 보드카, 안주로 먹을 과자……. 선배가 이름도 불러준 판에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콘돔과 러브젤.

그렇게 신나게 쓸어서 담고, 다시 신나게 계산을 마친 원영은 다시 신나게 숙소를 향해 내달렸다. 밖으로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숙소에 도착하는 것은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재승이 원영의 말을 잘 듣고 있었느냐, 하면 당연히 아주 잘 듣고 있었다.

아무렴 관장의 좆같은 명령도 개같이 잘 수행하던 그였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는데, 문제는 눈앞으로 보이는 상황이 참. 화가 날 것도 같고 황당하기도 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러니까 그 상황으로 말하자면, 원영의 선배님께서는 지금 테라스의 끝자락에 서 계셨다. 그리고 테라스의 밖, 그러나 재승의 손이 닿을 거리에는 상의에 비키니만 걸친 헐벗은 차림새의, 아마도 필리핀 국적을 가졌을 듯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재승은 그 사람의 등에 곱고 예쁜 손동작으로 선크림을 발라주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아-주 재승의 취향에 적합해 보였다.

낯도 많이 가리시는 분께서 해외에 오시더니 잠시 미치기라도 하신 건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는 했어도 자신이 낯가리는 선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선배가 낯 안 가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절대절대 일어나서야 안 됐다. 원영은 테라스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달려가는 그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시뻘겠다.

“선배! 선배! 선배!”

처절한 원영의 외침에 잔뜩 굳은 얼굴의 재승이 원영을 돌아봤다. 재승은 원영이 오자 무척이나 안심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선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손을 호다닥 붙이고 있던 등에서 떼어냈다. 덩달아 원영을 바라보던 사람이 힐끗 재승을 뒤돌아봤다. 재승이 원영을 보며 말했다.

“말이, 말이 안 통해…….”

잔뜩 가라앉아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무척이나 무서우셨나 보다. 원영은 그제야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싸구려 종이봉투도 같이 픽 하고 터졌다.

“…….”

다행히 굴러떨어진 물건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작은 튜브 안에 찰랑거리는 러브젤이 모래사장을 데굴데굴 굴렀다. 러브젤은 테라스의 사람 앞에서 뚝하고 멈췄다. 재승에게 선크림 서비스를 받던 사람은 러브젤을 주웠고, 원영의 앞으로 내밀며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애인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당신 애인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몸매가 정말 핫하네요. 구매한 러브젤 문구처럼 달콤한 사랑하세요.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허스키한 목소리로 행복을 빌어주며, 그는 멀어져갔다. 원영은 아직도 멍청하게 굳어 있는 재승의 눈치를 보며 후다닥 러브젤을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행히 재승은 긴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고, 저에게 처했던 상황에 당황해 떨어졌던 물건도 차마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저 사람이 뭐랬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승이 원영에게 물었다.

“선크림 발라줘서 고맙대요.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으니까 꼭 좀 전해달래요.”

당연히 원영은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

테라스를 넘어 숙소로 돌아온 원영은 재승 몰래 비밀스러운 물건을 숨긴 뒤 차곡차곡 두 사람이 사용할 물건들을 꺼내 정리했다. 재승은 테라스 앞의 그 사람이 뭐라고 그랬냐고 질문한 뒤로 다시 한참 동안을 멍하니 굳어 있는 상태였다.

얼마 뒤 원영이 모든 물건을 다 꺼내 정리를 끝마쳤을 무렵, 재승이 겨우 평정을 되찾은 듯한 얼굴로 원영을 불렀다.

“원영아.”

무려 ‘야’가 붙지 않은 ‘원영아’ 였다.

“아까 그 사람 진짜 예쁘더라.”

하지만 이어지는 말의 내용 때문에 원영은 전처럼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면서 그런 말씀은 좀 안 하셨으면. 짧게 생각한 원영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나 원영은 이내 싱긋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단언컨대 절대로 억지 미소가 아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아주 여러 가지가 존재했다. 그중에서 가장 가벼운 이유를 말하자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만큼 재승과 친해지긴 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른 친구 같았다면 사람이 사라지기 무섭게 지금과 같은 말을 들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테다. 심지어 조금 전 그 사람은 재승에게 대놓고 플러팅을 걸지 않았나. 선배는 눈치가 없어서 아마 그걸 모르셨는가 본데, 마음에 들었었다면 뒤늦게 아쉬워서 한마디 할 수야 있는 것이었다.

아량이 하해와 같이 넓은 원영은 선배가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지금, 그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원영이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

“선배.”

“응?”

“그 사람 남자예요. 아니, 정확히는 남자가 아니라 트렌스젠던데…….”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재승의 취향에서 한 가지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직 있어요.”

바로 원영 자신처럼.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원영은 그가 분명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트렌스젠더가 하의를 펑퍼짐한 바지로 가리는 이유는 대부분 그러하다. 그렇기에 원영은 질투가 나도 ‘하하, 그 사람도 어차피 안 돼!’ 라는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생글생글 웃는 원영을 보며 재승은 그저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제대로 못 알아들으신 듯하다. 원영은 머뭇거림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페니…… 아니, 좆. 달렸다고요.”

선배. 자지요, 자지.

당연히 확인사살 또한 전혀 서슴지 않는 모습이었다.

재승이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키웠다. 그리곤 자기 혼자 곰곰이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게 예쁘면……. 괜찮지 않나?”

재승은 자신 없는 듯 말끝을 흐리다가 끝에 가서는 원영에게 의견을 묻듯 말끝을 올렸다.

호오? 속으로 감탄하는 원영의 입술이 동그랗게 모였다.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렇다면 예쁘고(?) 좆도 달린 자신이 되물어드려야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정말요? 좆이 달렸는데?”

원영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물었다. 재승은 그 물음에 다시 곰곰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음……. 만약에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데 나도 그 사람이 좋아지면……, 좆, 그거 좀 달려도 괜찮지 않을까……? 대신 말도 통해야 돼.”

“그렇죠?! 좆! 달려도 괜찮겠네요!”

원영의 느닷없이 커다란 대답에 재승이 흠칫 몸을 떨었다. 원영은 그런 재승을 보면서 싱글벙글했다.

아니, 선배도 참. 뭘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그런 가정을 하신담. 사람을 찾으려면 국내에 더 완벽한 놈이 있었어요. 물론 그 완벽한 놈은 해외에도 같이 왔지만.

몸매도 좋고 예쁘고 말도 통하고 선배를 사랑하는 원영은 자신감에 차올랐다. 원영은 정리 때문에 잠시 내려놓았던 선크림과 오일을 들어 올리며 재승을 향해 해맑게 말했다.

“선배, 제가 선크림이나 오일 발라드릴까요?”

“어? 아니, 나 원래 잘 안 타. 일부러 태우는 건 멋도 없는 것 같고.”

“앗, 그러시구나…….”

원영이 안타깝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살이 원래 잘 안 타는데 나름 그을린 듯 보이는 피부색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신 걸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뭐, 아쉬움은 잠시였다.

“그럼 저 발라주세요. 저는 피부가 약해요.”

원영이 재승에게 선크림을 내밀었다. 재승은 원영이 내민 선크림을 들었고, 원영은 그것을 보자마자 상의를 훌러덩 벗어 던지며 침대로 가서 드러누웠다.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뒤따라온 재승이 그가 누운 침대에 앉는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기울어지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선배가 앞판은 안 발라주시겠지. 자신의 가슴은 만졌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데 말이다.

원영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매력을 더 어필할 수 있을지 누운 상태에서 고민했다. 그때 재승이 덥석 원영의 등에 손을 가져다 붙였다. 언제 짰는지 미끌미끌한 선크림이 잔뜩 발린 상태였다.

재승은 굳은살이 박여서 부드럽다고 표현하지는 못할 손바닥으로 원영의 탄탄한 등을 이리저리 문질렀다. 원영의 기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연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자신이 재승을 문질러 줄 수 있었다면 더욱더 좋았을 테지만, 그건 언젠가 선크림이나 태닝오일이 아닌 다른 것을 바르고 행하면 그뿐일 터였다.

“……근데 아까 그 사람은 어쩌다가 발라주게 된 거예요?”

“아. 나한테 와서 막 뭐라고 하는데,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그 사람이 손에다가 선크림 쥐여주고 뒤로 돌았어. 바르라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는데, 못하겠다는 말도 할 수 없고.”

“그랬군요…….”

원영이 한탄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해외는 말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 좋을 줄 알았더니, 몸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어서 더 위험하다는 결론이었다. 이제부터는 선배의 의견은 무시하고 어디를 가든지 질질 끌고 다니리라. 원영이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근데 그 사람 목소리가 낮고 막 갈라지더니…… 그래서 목소리 꽤 섹시했던 것도 같은데…….”

“선배, 제 목소리도 허스키한 편이에요.”

원영이 후다닥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 원영의 목소리는 ‘허스키’가 아니었고, 낮아서 동굴처럼 울리기는 하지만 맑기만 한 목소리였다. 재승의 의문을 읽었는지 원영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크으으으음. 봐요, 섹시하죠.”

일부러 목을 긁으면서 낸 목소리는 인위적일지언정 확실히 섹시의 범주에 들 것 같았다. 그러나 재승은 그의 섹시함에 달아오르기는커녕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멈춘 재승이 원영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으하학, 맞네. 섹시하네.”

물론, 정말 섹시하다고 느껴서 한 대답일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나 원영은 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웃는 재승이 그렇게 야해 보였다. 사실 지금이 키스 타이밍이지는 않을까. 재승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미치지 않았기에 참아냈다.

와중에도 착실히 선크림을 바르고 있던 재승은 원영의 팔뚝을 잡아 문지르며 ‘오’ 하고 감탄했다. 그것을 본 원영이 팔뚝에 힘을 줬다.

“더 세게 만져보셔도 돼요.”

이만하면 소득 있는 대화들도 많이 나눴겠다, 이제 시작인데 너무 마음을 급하게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만 되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 중의 사람 이원영은 재승의 앞에 섰을 때 유독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편이었고, 때문에 원래도 급하던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짐을 느꼈다. 게다가 뒤늦게 질투까지 치솟아 올라 그의 조급함에 한몫을 더했다.

재승의 외형이 잘생겼다는 것도, 그의 몸매가 훌륭하다는 것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외면에 홀라당 빠져드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재승에게 아무렇게나 플러팅을 거는 그들은 재승이 잘빠진 외형 속에 어떤 재앙을 숨기고 있는지 몰랐다. 자신은 그 말도 안 되는 재앙을 품었으며, 지금도 자신의 비서는 필리핀에 와서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재승에게 함부로 유혹을 걸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아까 그 인간이 만약, 나는 애인이 있는 줄 몰랐다, 달콤한 사랑 하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원영은 아마 얼굴 앞에서 그에게 쏘아주었을 테였다.

당신 저 인간이 저 얼굴로 얼마나 답답하게 사는 줄 알아! 곧 망할 은행에 아마 전 재산일 돈을 입금하고! 아무 계약서에나 사인하고! 2억 넘는 보증도 섰어! 당신이 그거 다 책임질 수 있겠어! 너 돈 많냐고! 나 아니면 저 인간 책임 못 져! 나니까 그런 것까지 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거라고! 알아!

원영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이 재승에게 어떻게 공을 들였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몰라도 그에게 들이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정말 감히 그러면 안 됐다.

원영은 재승이 제 몸에서 손을 떼어낼라치면 ‘여기가 덜 발렸어요’ 하며 재승과의 신체 접촉 시간을 꾸역꾸역 늘려갔다. 그렇게 선크림 반 통 이상을 처바른 후에야 그는 하릴없이 재승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로 잡은 여행 기간 내내 재승을 비좁은 숙소 안에 붙들어두고 싶었다. 그래야 이 여행 한번 제대로 즐겨보겠다고 일주일간 몇 시간도 못 자가면서 일을 몰아 한 자신이 보상을 받지 싶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기에 주변을 경계할 뿐이었다. 어느새 완벽하게 떠오른 해가 쨍하게 두 사람을 비췄다.

“우리 이제 뭐 해?”

원영의 마음을 모르는 재승이 손 그늘을 만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저 얼굴만 일주일 내내 봐도 그깟 일로 한 고생 다 보상받지 싶어졌다.

원영이 재승의 어깨를 감싸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선배. 배 안 고파요?”

일단 선배 밥부터 먹이고. 다른 생각은 그다음에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

원영이 재승을 안내한 곳은 해변을 쭉 걸어가면 나오는 필리핀의 체인 레스토랑이었다. 해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가.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은 제법 한산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유리창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재승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원영은 알아서 척척 주문을 마쳤다. 국내와 달리 주문받은 음식은 아주 느리게 상 위에 올랐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재승은 제 앞에 음식이 차려지자 곧장 음식에 집중했다. 얼마 뒤 다정한 목소리가 재승에게 물었다.

“선배. 맛있어요?”

커다란 닭고기를 손에 든 채 정신없이 입을 우물거리던 재승은 그제야 식탁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며 맞은편을 바라봤다.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원영의 얼굴이 보였다. 재승은 그 다정한 얼굴을 보며 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완전.”

재승의 대답은 비단 식사에 국한된 대답이 아니었다. 이런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지금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재승의 기준에 완벽했다.

어쩐지, 텔레비전을 보면 늘 가까운 국내는 놔두고 죄다 해외만 놀러 나가더라. 원래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해외여행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싶었다.

제주도는커녕 당일치기 국내 여행만으로도 늘 만족하며 살아왔던 재승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돌아가고 나면 아마 홀로 가는 당일치기 여행 따위로는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는 생전 처음 보는 옥색 바다가 너무나 예뻐서도 있겠지만, 분명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녀석의 탓이 더 클 게 분명했다. 아무리 좋은 풍경을 봐도 혼자 있으면 외로울 테니까.

그러니까 그건, 생전 처음 보는 색의 바다나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여행해줄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소리였다.

아, 그럼 국내 여행도 같이 가면 되는 건가? ……바쁜 놈이 같이 가줄 리가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흘러가는 생각을 마무리한 재승은 뜯고 있던 닭고기로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먹고 있는 닭의 맛을 말로 표현하자면 옛날 통닭 같은 맛이었다. 그런데 완전히 옛날 통닭 같지는 않은 게 끝에서 묘하게 외국 냄새가 났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재승은 그게 어찌나 입맛에 잘 맞는지 적어도 세 개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승이 입을 커다랗게 벌려 닭고기를 뜯은 후, 원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거 더 먹을래.”

원영은 곧장 손을 들고 직원을 불렀다.

*

여행 첫날은 아주 무난하게도 흘러갔다. 느긋한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근처에서 수영복과 티셔츠를 샀고, 이후에는 옥색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겼다. 손과 발이 팅팅 불 때까지 물놀이를 한 뒤, 두 사람은 모래사장 위에서 햇볕을 쐬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닷물의 소금이 두 사람의 온몸에 하얗게 말라붙었다.

원영은 그때가 되어서야 재승에게 방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했다. 재승은 고개를 끄덕였고, 방으로 돌아간 뒤에는 재승이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한 재승은 저도 모르게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해가 진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고, 잠들지 않고 일을 하던 원영과 다시 밖으로 나가서 맥주를 마셨다. 두 사람이 함께 잠이 든 것은 아주 늦은 새벽이었다. 어찌나 즐겁게 놀았는지 재승은 꿈조차 꾸지 않고 달게 잤다.

그래서 오늘은 여행 이틀째.

재승의 생활 패턴에 맞춰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전날 저녁 비서가 세워두고 간 랜트카에 올라탔다. 날씨는 전날과 같이 쾌청했다. 비서가 빌려온 자동차는 덩치 두 명이 사이좋게 앞자리를 채워도 여유가 있었고, 에어컨은 몇 단을 틀어도 차가운 바람이 쾌적하게 흘러나왔다.

국제면허가 없는 재승 대신에 오늘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원영이었다. 때문에 재승은 차가 달리는 내내 창밖을 보며 원영에게 쓸데없이 말을 붙이기만 했다.

저긴 뭐 하는 데야? 저건 뭐라고 읽어? 저 나무는 한국에서는 못 자라겠지?

원영은 다섯 살짜리 꼬마가 했다고 해도 믿길 법한 질문에 최선을 다해서 대답해주었다. 재승은 외롭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한 시간 반을 차에서 보냈고,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목적지는 원영이 재승에게 데려가주겠다고 약속했던 곳 중의 하나인 활화산이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운 원영은 그 근처에 모여든 현지인들과 무언가를 열심히 대화하기 시작했다. 재승은 당연히 그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 알아듣지도 못할 말에 신경을 쓰는 대신, 곧 올라가야 할 산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산은 재승이 매일 타는 산과 비교해서 그다지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돌 위에 흙, 듬성듬성 나 있는 빈약한 나무가 끝인 것 같다 할까. 재승이 힐끗 원영이 서 있는 곳을 훔쳐봤다. 원영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무언가를 결제하고 있었다.

팔랑거리는 지폐를 받은 현지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원영이 재승을 돌아봤다.

“선배! 이 산은 원래 말 타고 올라가는 거래요!”

원영은 재승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며 소리쳤다. 퍽 신나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약간 실망하고 있던 재승도 덩달아 신이 났다. 동네 산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승은 동물원에는 가본 적이 없었고, 말을 타기는커녕 실제로 보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사극에서나 보던 말을 실제로 타볼 수 있다니. 아직 말을 보지도 않은 상태이지만, 자신이 그 동물에 올라탈 수 있다는 게 벌써부터 신기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잠시 사라졌던 현지인이 말 두 마리를 몰고 자리에 돌아왔다.

“…….”

재승은 한동안 말없이 처음 보는 말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기만 했다. 말 두 마리를 보기 무섭게 그 아이들 중 하나에 올라타겠다는 생각은 접어버린 상태였다.

“……선배. 운동도 할 겸, 걸어서 올라갈까요?”

그리고 그건 원영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응. 그러자.”

재승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두 사람의 양옆에는 두 사람보다 한참 작은 현지인 한 명과 그보다는 크지만 그래봤자 작고 앙증맞은 조랑말 두 마리가 함께였다. 덕분에 남들보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소인국에 놀러 나온 거인처럼 보였다.

두 명의 거인은 조랑말에 올라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원영은 재승과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고, 재승이야 원체 산 타는 것 자체를 즐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은 해발 400m였고, 조그마한 산답게 두 사람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정상에 올랐다.

첫인상과 다르게 분화구의 호수는 아름다웠다. 재승이 한동안 멍하게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원영은 어디선가 일회용 카메라를 사 들고 나타났다.

덕분에 재승은 여행 이틀째에 원영과 함께 처음으로 기념사진이란 것을 남겼다. 한 자리에서……, 아마도 열 장쯤 찍은 것 같았다.

*

“크으!”

재승이 커다랗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빈 맥주캔을 구겨놓았다. 원영과 마주 앉은 작은 테이블 밑에는 구겨진 빈 캔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빈 캔은 어느새 10의 자리를 훌쩍 넘어섰다. 그런데도 술술 넘어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와인보다는 이쪽이 더 자신의 취향이었던 것 같았다.

즐거운 관광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원하게 샤워까지 했더니 문득 어제 처음 마셔보았던 맥주가 떠올랐더랬다. 그런데 마음이라도 통했던 건지, 원영이 대뜸 술을 사러 나가자며 재승을 밖으로 이끌었다. 원영은 편의점 안에 있는 맥주를 종류별로 쓸어 담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보드카라는 것도 커다란 놈으로 하나 집어 들었다.

‘선배. 이거 같이 반반씩 마셔요. 이게 도수가 가장 높대요.’

그 말을 어째서 속삭이듯이 말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재승은 고개를 마구 끄덕여주었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맥주를 다 마시면, 원영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것처럼 보드카라는 것도 꼭 마실 거다. 여태껏 놈이 추천하는 것 중에 맛없는 음식은 없었으니까 재승은 아마 마시면서 후회를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선배. 이젠 말씀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뜬금없이 들려오는 말에 재승은 눈을 댕그랗게 뜨며 원영을 봤다. 그러자 원영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재승의 옆으로 의자를 옮겼다.

“저한테 술 안 마신다고 그랬던 거. ……솔직히 다 거짓말이셨죠.”

그리곤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였다. 원영은 취조하듯 얼굴을 들이밀며 재승이 대답하길 종용했다. 당황한 재승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나 거짓말 안 했는데……?”

재승의 대답은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시기 싫어서 안 마셨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운동선수가 되고 나서는 술을 마신 적은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재승으로서는 충분히 억울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원영은 통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살면서 나쁜 짓이라고는 요만큼도 한 적 없는 선량한 사람을 몰아갔다.

“거짓말이잖아요. 안 그럼 술이 이렇게 셀 리가 없어. 이거 봐, 이거 봐. 피부색 하나 안 변하시면서…….”

게다가 말로 다그치면서 은근히 말을 놓기까지 하는 악질적인 모습도 보였다. 오해받는 것이 당황스러웠던 재승은 연신 눈만 껌뻑거렸다. 심문하듯 재승에게 고개를 들이밀던 원영은 그 틈을 타 재승에게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재승의 목을 손에 감싼 원영은 목에서부터 천천히 손바닥을 쓸고 내려갔다. 까칠한 손바닥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재승은 평소처럼 웃음을 터트리는 대신 잠깐 흠칫거렸고, 곧 몸을 잔뜩 움츠리기만 했다. 그러든 말든 원영의 손은 슬금슬금 움직일 뿐이었다.

커다란 손은 재승의 쇄골을 톡톡 치다가 손바닥으로 유두를 짓눌렀다. 정신없이 가슴에 파인 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이내 옆구리로 빠졌다.

그렇게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 손은 마무리를 못 하겠다는 듯 재승의 옆구리를 한참 동안 쓸었다. 벙찐 재승이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느낄 즈음, 그의 손은 긴장된 복근을 마무리로 더듬고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재승과 눈을 마주친 원영이 혀끝으로 제 아랫입술을 슬쩍 핥더니 헤실 웃었다.

“피부색이 이렇게 멀쩡한데? 술이 이렇게 세면서 진짜 안 마셨다고요?”

아무렇지 않게 웃는 놈의 모습에, 재승은 묘한 느낌을 상기하기보다는 저놈도 어지간히 친구가 없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응. 어……. 우리 할아버지가, 막걸리 세 병 마셔도 안 취하셨었거든.”

“아아……. 유전이셨구나. 제가 잠깐 선배를 오해했네요.”

원영이 다시 헤실하고 웃었다. 그리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까지도 마시지 않고 있던 보드카와 종이컵을 재승의 코앞으로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럼 이제 이거 마실까요? 독해서 그렇지, 마시다 보면 엄청나게 달 거예요.”

어째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재승만 그걸 몰랐다.

*

원영이 하는 꼴을 가만히 감내하고 있던 재승은 결국 속으로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다. 이원영은 생각보다 술이 약하구나. 그것이 재승이 내린 결론이었다.

38도짜리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반병이나 마셨다는 시점에서 술이 약하다는 말은 확실히 어불성설일 터였다. 하지만 재승은 술의 정확한 도수를 몰랐고, 보이는 대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원영은 술이 약했다. 그것도 자신에 비교하면 엄청. 아주 엄청나게 약한 것 같았다.

“선배는 나한테 그러면 안 돼. 알아, 알아요?”

원영의 말을 들은 재승이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뭘 그러면 안 되는 건지. 아까부터 알아듣지도 못할 헛소리를 해대는 원영은 지금 재승의 어깨에 볼을 비비는 중이었다. 마찰열이 오른 어깨가 뜨끈뜨끈했다. 어찌나 세게 비벼대는지 곧 자신의 어깨도 그의 볼도 홀라당 다 벗겨질 것만 같았다.

방 안은 에어컨이 없었고 대신에 천장형 선풍기가 내내 돌아가고 있었다. 재승은 방에 돌아오기 무섭게 윗옷을 벗어 던진 상태였고, 게다가 집에 있는 고물 선풍기보다야 여기 있는 천장형 선풍기가 훨씬 바람이 세고 시원했다. 다만, 커다란 놈이 치덕치덕 달라붙어 오는 게 문제다. 재승은 이제 조금 더우려고 그랬다.

“선배…… 좋은 냄새 나요.”

원영이 맨살에 코를 묻은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맥주를 마실 때부터 웃음도 헤퍼지고 말도 좀 짧아지더라니. 원영은 보드카를 3잔쯤 넘겼을 때부터 영 맛이 가기 시작했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재승의 몸을 계속해서 더듬었다. 딱히 싫지는 않아 가만히 있었더니 결국은 이 꼴이었다.

원영만큼은 아니지만, 재승도 이제 완전히 정상은 아니었다. 취기가 올라 온몸의 움직임이 둔했다. 그러니까 술자리는 그만 파해야 할 것 같은데……. 계속 원영이 문제가 됐다. 원래도 힘센 놈이 취하니까 더욱이 힘만 세졌다. 놈이 놓아주지 않는 이상 재승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벌써 몇십 분째 놈의 곰 인형 노릇을 하는 것은 다 그 이유 때문이었다. 놈이 놓아주지 않으면, 재승은 쭉 곰 인형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으, 뜨거워.”

참고 참던 재승은 결국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숙였다. 재승이 뒤척이자 원영은 재승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곤 뜨겁게 달궈놓은 어깨 대신에 재승의 목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원영이 재승의 목에 코를 비볐다. 재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선배는 오늘, 큰, 큰 잘못을 했어요.”

“그러니까 뭘.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냐, 내가.”

“취, 취하라고…… 사 온, 술이잖아요.”

“그래. 그래서 너 취했네.”

“아니, 아니지. 선배가……. 어우, 너무 독해요. 목구멍 아파.”

“뭐라는 거냐, 진짜…….”

재승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처음엔 원영이 무슨 말을 하든 당황했는데, 이젠 당황이 아니라 황당하기만 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종이컵을 들어 올리자 종이컵을 반쯤 채우고 있는 투명한 액체가 보였다.

도수가 가장 강하다더니 정말이지 더럽게도 독한 술이었다. 한 모금만 넘겨도 목구멍을 태울 듯 작열감이 느껴졌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느낌이라 그런지 재승은 그 느낌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입맛에 맞아도 이제는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재승은 이원영 같은 주정뱅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술이 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선배가 답장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가슴이…… 막! 그랬는지! 선배가, 어? 알아요? ……이거 봐줘. 이게, 이게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주정뱅이가 꿍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주정뱅이는 어렵게 비밀번호를 치고 문자를 켜서 재승에게 보여줬다. 당연히 재승의 목에 딱 붙인 제 볼때기를 떼어내지는 않은 상태였다. 요령도 좋다. 재승이 픽 웃으며 원영이 내민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 천재승

20XX년 X월 X일 11:14 AM

이원영입니다. 주말에 시간 어떠십니까.

20XX년 X월 X일 08:45 PM

ㅗㅗㅗㄴㄱㅌ

20XX년 X월 X일 09:46 PM

잘 알겠습니다.

원영이 보여준 화면에는 어떻게 봐도 이어지지 않는 문자 세 개가 나열돼 있었다. 보낸 기억은 없지만, 중간에 있는 문자는 확실히 자신의 번호로 보내진 문자가 맞았다. 그러고 보니 놈의 문자를 한번 확인한 기억이 있었다. 아마 문자를 보고 있는 도중에 전화가 왔었나 보다.

“그러다가……, 볼로 아무거나 막 누른 거 같은데……? 근데 넌 그럼 도대체 뭘 알았다고 한 거야?”

재승이 제 목에 기대어 있는 원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재승과 눈을 마주친 원영은 꼭 눈치를 보는 사람처럼 눈알을 굴렸다. 데굴데굴. 눈알이 돌아갈 때마다 원영의 표정이 어쩐지 묘해졌다.

“선배, 저도 가슴 있어요오.”

그리곤 애교를 부리듯 끝말을 늘이며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지하게 질문을 했던 재승만 바보가 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재승은 황당함에 작게 실소를 터트렸고 그 웃음에서 뭘 느꼈는지, 원영은 헛소리에 헛소리를 더했다.

“내 가슴 크다? 막, 만져도 되는데?”

술에 취해도 개그 감각은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승은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 너는 말을 놓을 거면 그냥 완전히 놓든가.”

뭐, 놈이 이러는 걸 보면 자신뿐만 아니라 놈도 그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재승아아.”

근데, 이 새끼가.

느닷없는 야자타임에 재승이 살쾡이처럼 눈을 치떴다.

“허허허.”

하지만 이내 너털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주정뱅이랑 진심으로 싸워서 뭘 하겠나 싶었던 탓이었다.

그래도 억울은 하니까. 내일 놈이 술에서 깨면 네가 어제 이러더라 하는 말은 해줘야겠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근데 뜬금없이 남자는 사랑보다 우정이라더니, 그 말이 이래서 생겼던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영아.”

재승이 다정한 목소리로 원영을 불렀다. 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른 것은 들었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재승을 바라봤다. 어쩐지 기대감이 서린 표정이었다. 재승이 그 얼굴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너 친구 없지.”

말하고 보니 시비를 거는 것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물론 시비를 걸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재승이 저 질문을 한 것에는 딱히 거창한 뜻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자신도 친구가 없는데, 만약 너도 친구가 없다면. 우리 이제부터는 더욱 친하게 지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만 원영은 재승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고, 눈에 보이는 그의 표정이 무척 덤덤해 보였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원영은 취한 와중에도 선배가 자신에게 정이 떨어졌다고 말할 것 같았다. 원영은 두려움에 떨며 재승의 허리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가 재승의 살에 얼굴을 마구 비비며 소리쳤다.

“아뇨, 아뇨! 저 친구 완전 많은데요!”

어떻게 보면 친구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니 아주 잘된 방어였다고 볼 수도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한 원영은 사실 아까부터 조금 억울한 상태였다. 일단 취하라고 사 온 술에 정작 취해야 하는 사람은 취하지 않고 자신만 취한 것이 억울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사 온 술이 독한 것도 억울했다. 게다가 선배가 좀 동했으면 해서 계속 조물딱거리는데, 도리어 자신만 달아오르고 있는 것도 억울했다.

아니, 이건 조금 억울한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억울했다. 선배는 덥다면서 옷을 벗어 재끼는 것조차 유혹이 되는데, 저는 대놓고 유혹해도 유혹이 안 되니까. 지금 원영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재승은 그런 그의 대역죄인이다.

“……그치. 넌 많겠지.”

문득 들려온 대역 죄인의 목소리에 원영이 시선을 올려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재승은 어쩐지 묘하게 기가 죽은 듯 보였다. 기죽은 재승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지금이라도 사실은 친구 같은 거 없다며 말을 정정해야 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때 재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냥. 네가 사기꾼이고, 썰렁한 농담만 해도 꽤 괜찮은 놈 같아서. 나는 친구 없으니까,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물어봤지. 근데 넌 대표하느라 바쁘고, 친구도 많으니까…….”

재승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까 재승도 조금 취하기는 한 것 같았다. 말하는 그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가 시키는 거 열심히 할게. 만약 나쁜 일이라도 5억이나 미리 받았으니까 열심히……. 그래도 사람 죽이라고는 안 할 거지?”

근데, 아무리 취했어도 이건 좀…….

원영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찡그렸다. 재승이 한 말이 정말 뱉은 말 그대로의 뜻일지가 궁금했다. 재승은 그런 원영의 궁금증에 친절히 자신의 답을 보여주었다.

“……할 거야?”

동공을 흔들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원영의 만취한 정신이 확 깨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영이 여태껏 천재승이라는 사람 하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벌였던가. 그런데 이 천재승 씨는 은혜도 모르고 자신을 살인이나 청부하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원영의 집안 가업이 무척 어둡고 음습하기는 했지만, 인신매매는 해도 느닷없이 살인을 시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집안의 막내 이원영은 합법적으로 살고 싶어서 가업에는 손도 안 대었고 말이다.

KFC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사람이 조폭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원영 전대에는 가능한 일이었지만, 원영이 대표인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됐다. 당장은 재승과 딱히 어떤 사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재승이 원영 자신에 대한 것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원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승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가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며 속을 앓았을 것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마음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허무함이 컸다.

친구? 친구요? 여태껏 그렇게 티를 내며 들이댔는데, ‘살인 청부하는 친구’라는 칭호를 주시다니. 이거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원영은 원래도 천재승에게 약간 미쳐 있었고, 그런 그가 완벽하게 미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계기만 있으면 충분했다. 천재승 씨께서는 그 계기를 주셨다. 지금 원영은 아주 완벽하게 미쳐버리고 만 상태였다.

“할 거예요.”

원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재승은 경악한 듯 눈을 키우고 있었다. 원영이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을 덧붙였다.

“말 나온 김에 지금……. 저 좀 죽여주세요. 천국 가고 싶어요.”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원영이 재승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동그란 뒤통수가 손바닥에 착착 감겼다. 원영은 재승의 뒤통수를 누르며 적당히 도톰해서 예쁜 입술을 한입에 먹어 치웠다. 선배가 아직 죽여주시지는 않았지만, 천국의 문지방이 보이는 것 같았다.

원영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재승의 입술을 가르며 염치없이 제 혀를 그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재승의 입안은 알싸한 술 냄새가 났고, 열이 바짝 오른 자신과 엇비슷할 정도로 뜨거웠다.

치아 안쪽에 숨겨져 있는 혀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주제에 무척이나 몰캉거렸다. 혀도 근육인데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어쩌면 인성과 혀의 부드러움이 일치하는지도 모르겠다며 원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선배님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혓바닥이지 싶었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재승의 혀를 빨아들인 원영은 그의 혀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은 채 잔뜩 빨며 질겅거렸다.

그렇게 키스를 하는 와중에, 재승이 정신을 차린 듯 몸싸움을 하려고 들었다. 치켜뜨고 있는 재승의 눈은 이제 당황을 넘어 화가 난 듯 보였다. 물론 원영은 그런 표정 따위에 굴하지 않았다. 원영이 제 가슴을 밀어내려고 하는 재승의 양손을 순식간에 포박했다.

원영은 재승의 머리통을 쥐고 키스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의자 하나가 뒤로 넘어갔지만,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밀고 밀리던 두 사람이 침대 하나에 몸을 겹치며 쓰러졌다. 재승을 다리 사이에 가둔 원영은 쉴 틈 없이 재승의 맨몸을 더듬고 있었다.

용기 있는 자는 미인을 얻는다. 재승의 표정을 보자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는 속담이 더 들어맞을 듯 보였으나, 눈이 돌아간 원영은 그저 미인을 얻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재승이라도, 이 이후에 ‘친구’ 소리를 내뱉는 일은 없을 터였다. 게다가 이미 덤빈 것 절대 무를 수도 없는 일이 된 상태였다.

같잖게 들이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재승을 훨씬 많이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원영은 재승이 제 마음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하기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몸부터.

원영이 재승의 바지 고무밴드 속으로 솥뚜껑만큼 커다란 손을 밀어 넣었다. 근육이 꽉 들어찬 매끄러운 피부가 손에 감겼다. 더 일찍 터졌어야 했는데. 느닷없이 지나간 시간이 아쉬웠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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