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Stupid Date​​​ (6/12)

6. Stupid Date

자괴감과 후회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비벼놓은 밥을 끝까지 해치운 재승이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재승은 커다란 볼 안으로 바닥에 놓여 있던 빈 반찬통들을 차곡차곡 겹쳐 넣었다. 꼴도 보기 싫었던 탓에 원영이 앉아 있는 곳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승의 머릿속에는 원영의 얼굴이 동동 떠다녔다. 아주 아주 얄미운 얼굴이었다.

‘내가 125억을 정말 벌 수 있다고 봐?’

남은 밥을 먹다가 홧김에 물어본 질문에 원영은 ‘글쎄요. 충분히 가능하시지 않을까요.’라고 통 믿음이 가지 않을 대답을 내놓았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글쎄요’ 하고 시작해서 ‘않을까요?’라며 말을 끝내는 게 정말 사기꾼의 말버릇이라고 봐도 진배없었다.

때문에 화가 난 재승은 그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사인을 한 건 자신인데 애꿎은 놈에게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겠는가. 괜한 감정 소모를 할 시간에 관장님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지나 떠올려 놓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봤자 나빠진 기분이 다시 좋아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빈 그릇들을 모두 겹쳐 든 재승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어느새 재승을 따라 일어선 원영이 그가 들고 있는 그릇들을 빼앗아 들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원영은 재수 없게 가벼워 보이는 얼굴로 성큼성큼 싱크대를 향해 걸어갔다. 싱크대 앞에 서서 커프스단추를 푼 그가 곧 수도를 틀고 수세미에 거품을 냈다. 작은 싱크대 앞에 선 커다란 인영은 덜그럭덜그럭 열심히도 움직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옛날에 자신을 보던 할머니가 이런 느낌을 받으셨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좁은 집에 덩치 산만 한 게 들어차 있으니, 원래 든 자리는 표가 안 나는 법인데 그렇게 표가 난다고. 과거 할머니가 했던 말마따나, 설거지하고 있는 뒤통수가 쓸데없이 커다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가득했다.

저기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걸 보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내심 기분이 좋기는 하다만, 이원영 대신 예쁜 여자친구가 서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망상을 하게 되는 것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일 뿐, 현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요, 선배.”

어떻게 들어도 굵직한 사내놈의 목소리가 울리자 재승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딱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으나, 말한 본인이 들어도 그 한마디에 온갖 불만이 다 들어간 듯 들리는 목소리였다. 때문에 재승의 목소리를 들은 원영이 굳이 뒤를 돌아 재승의 얼굴을 확인했다. 1초 눈을 마주친 그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배는 해보고 싶은 일 없으십니까?”

뒤이어 뽀득뽀득, 그릇이 손가락에 문질러지는 소리가 났다. 저 소리도 뜬금없고, 원영이 한 말 또한 뜬금없었다. 재승은 그가 한 말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보고 싶은 일이라니, 범위가 너무 넓지 않은가.

그때 원영이 또 힐끗 뒤를 돌아봤다. 그는 재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피식 하고 작게 웃었다. 끼익, 수도꼭지를 잠근 그가 물 묻은 손을 개수대 위로 탈탈 털어냈다. 벌써 설거지를 모두 끝낸 모양이다. 원영이 싱크대에 안정적으로 기대 재승을 내려다봤다.

“이를테면…… 해외의 유명한 선수랑 경기를 치러보고 싶다든가, 어느 스포츠 브랜드의 모델을 해보고 싶었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선배 이름을 딴 체육관을 내보고 싶었을 수도 있고……. 그냥 선수로서 이런 건 좀 해보고 싶었다, 하는 거 있잖아요.”

“아…… 글쎄…….”

재승이 말끝을 늘였다. 그런 거라면 솔직히 많이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넘쳐났다. 그냥 지금 원영이 말한 모든 것이 재승이 늘 꿈에 그리며 해보고 싶어 하던 일들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이미 알 사람 다 아는 무식함을 가려보겠다며 관장님의 조언에 따라 언론의 눈치를 보고, 오로지 관장님이 시키는 일만, 관장님이 시키는 경기만 나가다 보니 모든 일이 전부 꿈에서 그쳤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현실성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일이 현실성 없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해졌었다.

물론 관장님이 재승이 생각하는 ‘멋진 일’을 아주 안 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완벽히 같다고 하지 못할 엇비슷한 일이었어도, 재승은 꽤나 멋진 일들을 해보았다. 일단 관장님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서 해외 경기는 몇 차례 뛰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광고는 찍지 못했지만, 경기에 들어갈 때마다 늘 협찬을 받아서 온갖 읽지 못할 브랜드들의 이름이 잔뜩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야망이 있는 만큼, 재승은 유명 스포츠 스타가 하는 모든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중에서 지금 해보고 싶은 일을 굳이 골라보자면…… 그래, 그거. 일전에 꿈만 꾸다 말았던 이종격투기 케이블 광고 모델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그 케이블 광고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이종격투기 시즌이 시작하면 방송을 하기 전마다 나오는 광고였다. 이종격투기의 룰, 그리고 그 시즌에 나올 선수들과 경기가 치러지는 장소 같은 것들을 성우가 설명해주는데, 화면에는 선수 한 사람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왔다. 이를테면 모델로 선 선수가 이종격투기 자체를 대표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 광고는 시즌마다 모델이 바뀌어도 거의 비슷한 형태를 띠었다. 예를 들면 누가 봐도 펌핑한 근육에 보디빌더처럼 기름을 바르고 샌드백을 친다든가, 뜬금없이 엄청 멋진 바닷가를 달리면서 원투를 날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이 어린 선수들이나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은 아무리 전통이라지만 광고가 너무 촌스럽지 않으냐는 의견을 내기도 하는 광고였다.

물론 재승의 생각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재승은 그 광고를 보면서 늘, 온 세상의 멋짐이 거기에 다 녹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자신이 그 광고를 찍는다면 DVD로 녹화를 할 것이다. 아마 하루에 한 번씩 시청해도 죽을 때까지 그 광고가 질리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근데 그건 전에 이원영이 섭외를 추천했다고 했었고, 관장님이 무조건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땐 받았다가 도로 빼앗긴 느낌이 들었더랬다. 다시 말하면 나 시켜주나? 아니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기만 한 건가?

재승이 원영의 눈치를 살폈다. 원영은 그런 재승을 보며 싱긋, 상쾌해 보이는 미소를 흘렸다.

“뭔데요?”

기대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사람이라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고,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다.

만약 진짜 아무거나 다 시켜주려는 거면 어떡해. 그래, 말한다고 해서 나빠질 것도 없는데 일단 질러나 보자.

짧은 생각을 끝마친 재승은 이내 침을 꼴딱 삼키며 소리쳤다.

“켁, 케이블! 이종격투기 케이블 광고!”

“아아, 그거요. 이번 시즌은 지났으니까 어쩔 수 없고, 다음 시즌 모델 선배로 넣어 드릴게요. 8월 말이나 9월 초쯤에 촬영 들어가면 되겠네요.”

원영이 별것도 아닌 걸 왜 그렇게 뜸을 들였느냐는 식으로 담백하게 말했다. 아직 이루어진 것은 없지만, 말하는 것으로만 보면 도깨비가 뚝딱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재승은 어안이 벙벙했다.

정말 시켜주려고?

재승이 당장 물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곳을 보며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원영은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는 듯 재승에게 또 다른 것을 묻고 있었다.

“그럼 경기에서 만나보고 싶은 선수는 없으세요? 10월에 시즌 시작하면 컨디션 봐서 많이는 말고 딱 한 경기 정도만 출전하시면 좋을 것 같거든요. 원하는 선수 몇 명 말씀해 주시면 대진표 짤 때 참고할게요.”

말을 끝낸 원영이 말해보시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때문에 재승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들어찼다. 원영의 말투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고르면 어떤 선수든 그 선수와 겨룰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재승은 이날 이때껏 ‘대진은 무조건 랜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래서 다른 선수들에게 관심을 가져본 역사가 없었다. 재승에게 다른 선수는 만났을 때 싸우고, 이기고 나면 잊히는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선수라고는 재승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4인, 아니 5인뿐이다.

피따완, 장채일리, 존록스, 고즐링. 그렇게 외국인인데도 이름을 외워버린 네 사람과…….

“너.”

이원영.

“당장 떠오르는 선수 없으시- 네?”

원영은 자기를 꼽을지는 몰랐는지 다른 말을 하려다가, 당황한 듯 재승을 향해 되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재승의 선택이 변하지는 않았다.

“너랑 경기할래.”

재승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한 번 더 원영을 꼽았다. 케이블 광고를 불렀을 때와 달리 원영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곤란하다는 듯 턱밑을 긁적인 그가 천천히 재승을 향해 다가왔다.

“저는 선배를 무차별급에 내보낼 생각이 없어서요.”

“어어? 안 돼! 한번 졌다고 미들 나가면 이겨도 무시당한댔어! 이길 때까지 할 거야! 아니면 질 때 지더라도 좀 멋있게 지든가!”

흥분한 기색의 재승이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관장의 말이 어찌나 가슴에 남았던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으면서 말이다.

원영은 그 사실을 몰랐으나, 관장이 대충 어떤 식으로 재승의 기를 죽여놓았을지가 눈에 보여 눈살을 찌푸렸다. 터져 나갈 뻔한 한숨을 끝내주는 인내심으로 참아낸 그가 재승의 옆자리에 철퍼덕 하고 앉았다.

“……그래도 저는 빼고요.”

“고르라며. 리벤지매치 할래. 해줘.”

재승은 가까워진 원영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원영의 얼굴이 어쩐지 허락할 것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이겼나? 희망적인 기운에 재승의 거칠었던 숨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려던 그 순간이었다.

“저는 이번 시즌에 선수 은퇴합니다. 그래서 안 돼요.”

원영이 밑도 끝도 없이 은퇴 선언을 했다.

“왜?!”

당연히 재승은 믿을 수 없다며 소리쳤다. 그러자 원영은 재승을 보며 눈웃음쳤다.

“아무래도 전, 대표로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아서요.”

재승이 보기에 그는 정말 사무실에 앉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 사람처럼 보였다. 때문에 대진표는 알아서 해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재승은 그 말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억울했지만, 관장님과 일 이야기를 할 때보다 어쩐지 편하고 즐겁다고 느꼈다.

아마도. 놈이 또래라서 그런 것이리라.

*

뒤이어 선수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재승은 자기도 모르게 예전에 패배했던 경기들에 관한 이야기를 술술 내뱉고 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지난 경기들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말이 대화지, 사실 대부분의 말은 재승이 했고, 원영은 그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을 뿐이었다.

“친 횟수가 비슷하기는 했는데 누가 봐도 걔가 더 피 많이 흘렸고 마지막까지 나는 멀쩡했잖아. 근데 왜 그 쥐똥만 한 새끼가 이긴 거냐고.”

정작 패배를 했던 당시에는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난 지금도 흐려진 곳 하나 없이 그때 상황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재승은 그때도 지금도 자신이 어째서 패배를 한 것인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말을 하는 내내 원통스러웠다. 그리고 원영은, 그런 재승을 위로하는 데 퍽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아…… 그러게요. 선배가 어째서 지셨을까요.”

원영은 자신이 더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이미 진 경기를 과거로 되돌려 다시 이길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렇게 타인에게 공감 비슷한 것을 받고 있자니 재승은 이제 지난 패배들을 모두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보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해서인지 턱이 다 아프다. 재승이 손을 들어 턱을 쭈물거렸다. 그러면서도 재승은 제 앞에 있는 원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문득, 원영의 모습이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던 때와 많이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 덥냐?”

무엇이 달라졌는가 곰곰이 생각하던 재승이 덥석 질문을 던졌다. 달라진 것이 그의 차림새 같았기 때문이다. 꼼꼼히 채워져 있던 그의 와이셔츠 단추가 위에서부터 반 이상이 풀려 있었다. 팔은 설거지를 했을 때 그대로 걷어붙인 상태였고, 게다가 넥타이는 목에 걸려는 있는데 차라리 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헐렁하게 흘러내렸다. 원영이 참고 있었다는 듯 앞섶을 쥐고 펄럭거렸다.

“예. 조금 덥긴 하네요.”

순순하게 대답하는 원영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재승은 뒤따라 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조금 덥기는 무슨. 아마 더워서 딱 뒈질 것 같다고 생각 중일 터였다.

혼자였다면 또 몰라도 남들보다 적어도 두 배는 큰 장정이 둘이었다. 재승의 집이 있는 곳은 산속이라고는 하지만 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구역이었고, 차에서도 안 돌아가는 에어컨이 집 안이라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날씨는 어찌나 눈치가 없는지 근래 들어 가장 무더웠다.

낡은 선풍기 한 대가 두 사람 사이에서 강풍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바람은 미지근했다. 물론 미지근한 바람이 부는 선풍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재승은 선풍기의 머리를 잡고 선풍기를 원영의 쪽에 더 가깝게 고정했다. 자신은 여름마다 겪는 무더위에 익숙했지만, 늘 KFC 타워에 있을 원영은 이런 무더위에 익숙할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지금 정장 차림이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선배도 더우실 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원영의 눈에 감동이 비치는 것 같았다. 힐끗 그의 와이셔츠 안쪽을 훔쳐본 재승이 덤덤하게 물었다.

“등목할래? 그 김에 옷도 좀 갈아입고.”

어째서인지 원영의 목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색하게 인사한 원영이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옷가지들을 한 손으로 옮기며 현관문을 열었다. 한 걸음 밖으로 발을 내딛던 그가 뒤를 돌아본다. 재승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저었다. 고작 샤워하러 가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거창하게 인사까지 하고 가나 싶어서.

원영도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현관 문틈 사이로 원영이 사라졌다. 재승은 그가 사라진 문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버릇처럼 텔레비전을 틀었다. 틱, 틱, 의미 없이 채널을 바꾸던 재승이 저도 모르게 픽,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전에 나간 원영 때문에 터진 웃음이었다.

원영이 샤워를 하러 갔다는 말은 당연히 그가 등목을 거절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뭐랬더라. 우리가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라고 했었던 것 같다. 원영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양손으로 엑스자를 만들며 제 가슴을 끌어안았었다.

역삼각형 모양의 상체는 팔로 엑스자를 그리며 가려봤자 전혀 가려지는 느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 꼴이 너무 황당하기도 했고 어떤 반응을 해줘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무시하는 걸 택했었다. 재승은 옷장으로 가서 옷과 수건을 꺼내 들었고, 등목이 싫으면 샤워라도 하고 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원영이 지금 샤워를 하러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보내놓고 떠올려보니 어떻게 반응했어야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재승은 확신했다. 아무래도 그때 웃었어야 했던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원영은 사기꾼치고는 착했고, 또래라서 그런지 대화도 잘 통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든지 단점이 있다더니, 아무래도 유머코드가 조금 난해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원영이 자신의 대표가 되었지만, 연장자는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또 그가 대표라며 뻗대지 않고 자신을 연장자 취급해주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아주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얼마나 큰일이었을까. 왜 드라마에서는 상사가 하는 농담에 웃지 않으면 눈치 없는 새끼라며 욕을 먹지 않는가. 하마터면 ‘저도 가슴 큰데’를 비롯해서 바로 전 농담까지, 두 번이나 욕을 얻어먹을 뻔한 것이었다.

원영이 또다시 이상한 농담을 하고, 그걸 자신이 무시한다고 해도, 지금까지로 보아선 그에게 욕을 얻어먹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재승은 이제부터 놈이 무언가 이해 안 간다 싶은 말을 하면 웃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젊은 나이에 그런 유머코드를 가진 원영이 조금 딱해서.

실없이 픽픽거리며 원영을 생각하던 재승은 이내 채널만 돌려대던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을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댔다. 평소에도 가지고 있다는 걸 자주 까먹는 기계를 오늘은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재승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주 전화를 하던 큰아버지는 빚을 떠넘긴 채 필리핀으로 도망가버렸고, 그러니 이제 전화를 걸 사람은 관장님뿐이었다. 핸드폰의 액정에는 당연히 ‘관장님’이라는 글씨가 띄워져 있었다. 재승은 심장 박동이 순식간에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화면의 통화 아이콘을 스크롤 했다.

-야, 천재승!

전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관장이 큰 소리를 냈다. 때문에 재승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튕겼다. 떨어트릴 뻔한 핸드폰을 양손으로 받쳐 든 재승이 버벅거렸다.

“여, 여보세요? 관장님?”

-너 인마, 무슨 짓을 한 거야?! KFC랑 계약했다는 거 사실이야?

늘 그렇듯 관장의 입에서는 본론부터 튀어나왔다. 잘못한 것이 있으니 당황은 했지만, 관장이 벌써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재승이었다. 그도 그럴 게 계약서에 사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관장에게 전화가 걸려온 이유 자체는 병원에 입원한 것 때문이라고 봤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일단 질문을 하면서도, 관장에게 몸 괜찮냐는 한마디조차 못 들은 것이 못내 서운했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연신 관장이 콧김을 씩씩거리며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큰일이 먼저기는 하다. 재승이 다시 관장님, 하며 그를 불렀다.

-내가 귀가 없냐, 눈이 없냐! 그럼 기사가 그렇게 났는데 알지 몰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어떻게 된 거냐니까!

처음엔 KFC랑 계약했냐고 물어본 것이고, 계약의 자초지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면서. 관장은 처음 물어보는 질문을 하고 있음에도 이미 물어봤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듯 재승을 다그쳤다.

그런 관장이 무섭지 않다면 그건 당연히 거짓말일 것이다. 재승은 관장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무서웠다. 다만 오늘 여러 번 생각했듯, 일은 이미 벌어졌고 돌이킬 수도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관장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으니까, 차라리 당당해지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이거다.

“그게, 제가 뇌가 터져서 쓰러졌는데, 이원영이 자기 탓이라면서 병원에 입원시켜 줬거든요. 그런데 그때 큰아버지가 필리핀으로 도망을 가서요. 아, 큰아버지가 도망갔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큰아버지가 빚을 낼 때 저를 보……, 아무튼 그거를 시켜서 큰아버지가 없어지면 제가 돈을 다 갚아야 하거든요. 근데 벌써 도망은 가버렸고. 큰아버지가 지은 빚이 원금이랑 이자 합해서 거의 3억 가까이 됐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돈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원영한테 도와달라고 그랬어요. 걘 돈 많잖아요.”

나는 늘 멍청하지만 이번에는 속은 것이 아니다.

일부러 도움을 받았다는 듯 설명을 하는 데 성공한 재승이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린 채 작게 숨을 가다듬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한 것처럼 숨이 가빴다. 핸드폰 너머의 관장이 깝깝하다는 듯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냈다. 관장은 재승을 어르듯 말했다.

-이놈아, 그걸 왜 나한테 먼저 말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계약 못 하겠다고 말해. 철회 기간이라는 게 있을 거 아니냐, 빚은 내가 빌려줄 테니까…….

“관장님 저번에 돈 없다고 하셨잖아요. 저 때문에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 해결됐고, 이원영이 저 달마다 1억도 넘게 벌게 해주겠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빚 갚으라고 준 돈은 일 안 해도 그냥 주는 돈이래요. 5억이나…….”

-아이고, 답답한 양반아! 그 말을 믿어!

그럼 믿어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냥 턱 하니 쥐여줬는데.

재승은 말대답하는 대신 눈만 끔뻑거렸다. 관장이 다시 재승을 타일렀다.

-일단 줬으니까 나중에 말 바꿔서 무슨 일이든 시키겠지. 세상이 안 그러냐, 재승아! 그리고 그 사기꾼 놈이 이종격투기 관련된 일만 시킨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어? 그놈 원래 회사가 위험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 줄은 아냐! 너처럼 띨한 놈 데려다가 나중에 운동시켜준다 그러고 나쁜 일만 시킨다고, 그놈들이!

“에이, 아니에요. 관장님, 이원영이 저 8월 말이나 9월 초에 케이블 광고 찍게 해준다고 그랬어요……. 다음 시즌에는 경기 하고 싶은 선수 고르면 걔랑 경기도 시켜준다고 그랬는데…….”

-그럼 그 전에는!

“……저 아직 아프니까……. 그래서 쉬라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이놈아, 당연히 아니지! 재승아, 천재승! 생각을 해라, 생각을! 네가 아무리 아파도 운동 모르는 일반인 하나 못 잡겠어? 정치인이나 그런 놈들은 비쩍 곯아서 네 주먹 한 대만 맞아도 저승 문턱이 보일 텐데! 걔들 경호원이라고 해봤자 고상하게 경호용 기술이나 배우지 개싸움 배운 놈들이 아니라고! 그럼 우리나라가 총기 소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얼마나 쓸모가 많겠냐. 내가 걱정돼서 그런다, 재승아. 당장이라도 철회 기간 이야기하면서 해지해 달라고 말해. 돈은 내가 어떻게든 빌려줄 테니까, 응?

관장이 애절하게 말끝을 올렸다. 듣다 보니 맞는 말 같고, 관장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것이 또 후회됐다. 참 안타깝지만,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걱정을 하시는데 철회 기간은커녕 해지하려면 5억의 스물다섯 배를 줘야 한다고 어떻게 사실을 말할까.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재승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전 괜찮아요.”

재승이 눈을 꾹 감은 채 통화 종료의 빨간 아이콘을 스크롤 했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관장의 말은 순식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

한편 원영은 집 문밖에 서서 재승이 통화하는 소리를 엿듣는 중이었다. 외벽이 얼마나 얇은지 완벽하게 바깥에 서 있는데도 코앞에서 이야기하는 듯 재승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재승이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중이라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승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딱히 상대편의 말까지 엿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원영은 ‘전 괜찮아요’라는 말을 끝으로 조용해진 집 안에 귀를 기울이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 표정은 온화해 보였으나, 흙바닥을 걷는 갈색 로퍼는 어울리지 않게 방정맞은 소리를 만들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들뜨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지 않은가.

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고 주먹구구식으로 계약을 성사시켰는데 결과가 이렇게나 좋을 줄이야. 그냥 지켜볼 땐 답답하기만 하던 순수함이 속이는 처지에서는 확실히 거저먹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원영이 급하게 구상한 플랜A, ‘관장이 쓰레기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재승을 낚아챈다’는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플랜B를 실행시킬 차례였다. 참고로 플랜B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재승 모르게 관장을 처리하고 연애 상대로서 재승을 꼬시는 것’이었다.

도착한 현관문 뒤에서 잠시 심호흡을 한 원영이 로퍼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집 안은 여전히 한눈에 내다보였고, 재승은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있는데 콧날이 어찌나 오뚝한지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옆모습이었다.

원영은 재승이 눈을 뜨지 않는 틈을 타 그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예쁜 것을 보면 구상이 떠오르는 법이고, 재승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구상이 떠오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케이블 광고의 레퍼토리가 많이 낡긴 했지. 저 옆모습을 담기 위해서라도 광고의 레퍼토리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계속 저 얼굴만 보고 있어도 지루할 틈이야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토커처럼 마냥 얼굴만 훔쳐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원영은 부러 발소리를 크게도 내보고, 그래도 시선이 오지 않자 큼큼 목청을 가다듬기도 했다.

“……욕실에서 보이는 풍경이 꽤 괜찮더라고요.”

마침내 말다운 말을 내뱉자 재승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원영의 얼굴을 확인한 재승은 꼭 눈으로 말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맞다. 네가 있었지.’

눈으로도 언어를 들을 수 있다면 원영은 재승의 말을 분명하게 들었다. 그렇게 ‘이원영이, 이원영이’ 하면서 이름을 잘만 불러놓고 어떻게 자기가 와 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있는 건지. 재승에게 조금 서운할 것도 같았지만 서운해봤자 짝사랑이었다. 그렇다면 이깟 서운함쯤이야 잠시 잊고 플랜B를 위해 박차나 가하는 편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원영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재승에게 말했다.

“선배. 죄송하지만 제가 목이 좀 마른데……. 아까 마셨던 그거 조금만 따라주시면 안 될까요.”

목이 아무리 말라도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맛이었지만, 재승이 집에 쟁여놓고 마실 정도면 그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니까. 기왕 먹어본 거 아예 맛을 들여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잘한 희생도 가끔 따르는 법이기에, 원영은 자신의 미각을 희생양 삼기로 했다. 눈치도 없고 초능력은 더더욱이 없는 재승은 원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으리라.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재승이 맹한 얼굴을 한 채 냉장고를 턱짓했다.

“수정과, 그거 냉장고에 있어. 따라 마셔.”

원래 같았다면 저 얼굴이 귀여워서라도 그가 시키는 대로 음료를 따라 마셨을 원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적이 있으므로 그런 재승을 굳이 부려먹어야만 했다.

“저 손님이잖아요.”

환자를 간호하겠다는 구실로 온 원영의 뻔뻔한 발언에 재승이 허, 하며 어이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재승은 앉아 있던 자리에 핸드폰을 내려두고 냉장고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원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서 걸음을 옮겼다.

원영의 목적지는 재승이 앉아 있던, 그의 핸드폰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몇 걸음 만에 핸드폰 앞에 선 원영은 또 한 걸음을 내디딜 것처럼 발을 높게 치켜들었다. 시선은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재승에게 두고, 높게 들어 올린 발을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트렸다.

콰직 하는 파열음과 함께 낡은 핸드폰이 박살 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원영이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굽히며 커다란 목소리로 재승을 불렀다.

“으으윽, 서, 선배!”

예상된 통증이었으나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아팠다. 아무리 맞는 훈련을 하는 이종격투기 선수라지만 물건 밟아서 깨트리는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망각한 원영은 미각을 잃기도 전에 오른쪽 발바닥부터 잃었다. 발바닥을 잃고 얻은 소득은 당황한 듯 재승을 부르는 연기가 아주 그럴싸했다는 것이다.

큰 소리에 놀란 재승이 뒤를 돌아봤다. 재승은 네모난 수정과 통을 손에 든 채 허둥지둥 원영을 향해 달려왔다. 사람 눈이 이렇게 커다래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눈을 키운 채, 재승은 당황한 듯 원영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뭐야? 뭔데? 왜?”

정신없이 종알거리는 재승의 목소리에 설핏 웃음이 터져나갈 뻔도 하였지만, 다행히 통증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영의 발밑에는 아직 재승의 핸드폰이 깔려 있다. 아마도 산산이 부서졌을 테고, 만약 그것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영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상태 그대로 제 발밑을 손가락질했다.

“서, 선배 핸드폰이…….”

“아니, 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물건 밟았으면 안 다쳤어? 앉아 봐, 발 좀 보게.”

재승이 원영을 다그치며 그의 팔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또 감동을 주신다. 당황이 아니라 걱정이었다는 것에 깊게 감명받은 원영이 시선을 아래로 깐 재승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봤다. 미간을 모아 이마에 주름이 져도 잘생겼다. 까맣게 촘촘한 속눈썹이 두어 번 펄럭거릴 동안, 원영은 입을 헤 벌린 채 재승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리고 재승이 눈을 치켜떴다. 재승은 도깨비같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원영에게 호통쳤다.

“피 나잖아, 바보야!”

심지어 그가 소리친 말은 무려 ‘바보야’였다. 바보야. 원영이 들었다는 점에서 참 생각이 많아질 만한 소리였다.

재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스스로 개똥밭을 구르는 바보 중에 상바보인데, 원래는 사기만 당하는 바보인 줄 알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자기 직업인 이종격투기의 규칙도 제대로 몰라서 점수 계산도 못 하는 똥멍청이였다.

하긴, 여태까지 진 경기들을 빼면 무조건 KO나 TKO로 승리를 한 재승이였으니까. 사실상 그에게는 점수 계산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편을 들어줘봤자 그가 바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바보 중에 가장 바보인 사람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은 원영의 감상으로 말하자면. 생각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아니. ‘좋다’라는 말로는 감히 표현이 안 됐다. 어쩌면 행복한 것도 같은 기분이라고 하면 이 마음이 조금은 표현이 되는 것도 같다.

‘피 나잖아, 바보야!’는 즉, ‘다치지 마, 바보야!’와 같지 않은가. ‘바보’가 연인 사이의 애칭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마음이 간질간질하기만 한데. 와중에 재승은 어디선가 구급상자를 찾아들고 돌아오시니. 발바닥 잠시 잃고 얻는 것도 참 많다는 생각이었다.

원영은 까진 발바닥에 소독약이 닿아도 쓰라린 줄을 몰랐다. 원체 뭐 하나에 빠지면 물불을 안 가리는 원영이었지만, 천재승이라는 사람은 여태껏 빠졌던 무언가와 달라서 쉽게 질릴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로서는 짝사랑을 하고 있어도 행복하기 그지없었으나, 마냥 그렇지만은 않을 테다. 동네 바보도 알만한 사실을 생각하면서도 원영은 잠시 속이 퍽퍽했다.

원래 짝사랑이라는 건 1년 지나고부터가 진짜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몇 개월 팬 사이트나 보며 짝사랑만 키워나간 것치고, 사실 원영의 참을성은 그다지 좋지 못한 편이었다.

답답한 것을 못 참아서 자신의 주관으로 판단해 행동하면, 모든 일이 언제나 술술 잘 풀려 왔다. 그런데 연애하고 싶어서 골머리를 앓고, 그에 더불어 연애를 하겠답시고 계획을 짠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어도 그건 연애에 대한 것은 아니니까. 슬슬 손이라도 잡고 입이라도 맞춰보고 싶은데, 머릿속 진도와 현재의 진도가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았다. 원영이 당장 할 수 있는 건 무드 없게 발바닥에 연고를 발라주고 있는 손길을 느끼는 것뿐이다. 그래서 조금 더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 거다.

“선배.”

“어어, 아프지? 그래도 밴드는 안 붙이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런 상처는 원래 막아놓으면 더 늦게 아물어. 걸을 때만 좀 조심하면 아마 내일만 돼도 괜찮아질 거야.”

“예……. 저기, 선배.”

“아, 수정과 여기. 그냥 들고 마셔. 어차피 얼마 안 들었어. 일단 마시고, 더 먹고 싶으면 말해. 새것 뜯어줄게.”

“새것도 있구나…….”

“응, 있지!”

재승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해맑게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걱정해주는 것 참 좋고 목마르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니 수정과도 그래, 그까짓 거 참 좋아하며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원영이 재승을 부른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선배! 우리 내일은 뭐 할까요!”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이었다.

원영의 고함 아닌 고함에 재승이 눈을 키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질문이 머릿속에 입력된 모양이라는 거다. 재승은 곰곰이 고민을 시작했다. 음, 하고 길게 신음을 하던 재승이 이내 원영을 보며 대답했다.

“아침에는 뒷산 타고, 돌아와서 세차? 아, 그다음엔 은행 문 닫기 전에 은행도 가야 되겠다. 남은 빚 싹 정리해 버리면 이제 신경 쓸 일도 없겠지. 그래, 그래야겠네.”

재승은 저 혼자 뭐가 그렇게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영은 분명 ‘우리’ 내일은 뭐 할까요? 하고 물었지만, 건너온 답변은 늘 재승 혼자서 했을 일이었고, 원영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원영은 자신이 사들인 뒷산을 재승과 함께 올라탔다.

염두에 두지 않으면 뭐 어떤가. 데이트라고 생각하면 그게 데이트인 것을.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산을 둘러보니, 원영은 아무래도 산을 너무 잘 산 것 같았다. 재승과 올라탔다는 주관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산은 공기가 무척이나 맑은 편이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올라타기 좋은 등산 난이도는 덤이다. 때문에 산에는 첫새벽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바글바글했다.

결론은 데이트 첫 코스가 참 즐겁다는 말이었다. 원영은 아주, 아주 즐거웠다.

*

“총각들, 그거 진짜로 다 먹을 수 있겠어?”

“네.”

“그래, 덩치 보니까 둘 다 잘 먹어야겠다. 힘들게 딴 거니까 버리지 말고 꼭 다 먹어! 총각들 덕분에 나는 오늘 일찍 가겠네. 홍홍.”

바닥에 은색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흥겨운 웃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 뒤 아주머니는 주머니에서 까만 비닐봉지 뭉치를 꺼내더니 은색 돗자리에 늘어서 있던 나물들을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원영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그동안 재승은 아주머니가 건네는 까만 비닐봉지들을 품 안에 한 아름 안아 들었다. 늘어서 있던 나물은 종류만 다섯 가지였고, 한 종류를 넣는데 비닐봉지 두 장이 가득 들어찼다.

모든 나물을 다 담자 봉지는 총 열 개가 됐다. 당연히 재승 혼자 충분히 들 수 있는 무게였지만 원영은 그중 다섯 개를 빼앗아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봐도 살다 살다 산에서 쇼핑을 다 해본다는 감상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즐거운 뒷산 데이트의 끝은 산 밑에서 파는 나물을 쓸어 담아 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나물 파는 아주머니는 출근하자마자 퇴근을 해서 기분이 좋아 보였고, 재승은 쇼핑이 아주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원영은 그냥 재승이 즐거우니까 좋았다.

그러니 어디서 뜯었는지 출처가 불분명한 나물들은 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겠거니, 내 산에서 뜯었겠거니 생각하기로 하자. 뭐든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재승은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원영이 든 짐을 빼앗고 옥색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냉장고 앞에 쭈그리고 앉아 산에서 사 온 나물들로 야채칸을 꽉꽉 채워 넣고 있는 뒷모습이 무척이나 뿌듯해 보인다. 순식간에 일을 끝마친 재승은 곧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이따 은행 나가는 김에 고기도 사 오자. 어제 먹은 삼겹살 엄청 맛있었지? 그거 비싼 거였다? 그거 또 먹을래?”

“……그럴까요?”

“그래, 그럼 오늘 저녁도 고기 사서 구워 먹자. 내가 고춧잎도 무쳐줄게. 매콤하게 무쳐서 고기랑 같이 먹으면 엄청 맛있어.”

해맑게 웃으며 말을 끝마친 재승이 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재승이 뒤늦게 물어온 것은 ‘아삭이 고추도 무쳐줄까?’라는 질문이었다. 원영은 마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뭐랄까. 이거 좀……. 신혼부부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솔직히 이번만큼은 퍽 일리 있는 생각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 오늘은 옷이라도 가지고 올 겸 밤에는 자신의 집에나 잠시 들렀다 올 예정이었던 원영이었지만, 당연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쓰려고 남들보다 많은 돈을 비서에게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재승이 저녁 반찬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감히 집으로 돌아갈 생각 따위를 했었다는 것 자체가 아주 큰 죄를 지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원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냉장고 앞에 서서 반찬 이야기를 하던 재승이 느닷없이 현관 앞의 원영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뿐이었으면 원영 또한 그냥 선배가 다가오는가 보다 했을 터다. 하지만 재승은 단지 다가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승이 입고 있던 상의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그가 입고 있던 상의가 거실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몇 평 되지 않는 거실의 길이 덕분에 재승의 벗은 몸이 원영의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뜬금없는 재승의 유혹에 당황한 원영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제 눈을 양손으로 가렸다.

“왜, 왜 이러세요, 선배!”

새된 비명은 퍽 처절했다. 상상 속에서는 손도 잡고 입도 맞추고 이것저것 다 한 사이였지만, 현실에서는 당연히 곧장 되지 않을 진도일 테니까. 그렇다면 기대나 충동을 주는 행동은 좀 자제하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지금 원영이 가지는 아주 소박한 바람이었다.

“으하학, 으하학.”

그런데 소박한 바람을 들어주시기는커녕, 선배님은 해맑게 웃고나 계신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 건지. 재승이 어째서 웃는지, 또 어떻게 웃고 있는지 궁금해진 원영은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으하학, 그게 뭐 하는 거야?”

재승은 원영의 코앞에서 해맑게 웃으며 원영이 방금 했던 것처럼 제 눈을 가렸다가 빼며 까꿍거렸다.

원영은 잠시 재승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봤다. 커다랗게 웃으면 턱 근처에 보조개가 패는구나. 오늘 처음 안 사실이었다. 정말 쓸데없이 귀여운 건 다 가진 선배님이셨다.

귀여운 선배님께서는 멍청하게 굳어 있는 원영을 보며 한참 동안 으하학, 바보같이 해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 재밌네……. 나 세차할 거야. 넌 도와줘도 되고, 아니면 그냥 앉아서 구경해도 되고.”

뒤늦게 너무 웃었다 싶었는지 재승이 혼자 민망해하며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힐끗 뒤를 돌아본 재승은 따라올 거면 신으라며 원영의 앞으로 삼선 슬리퍼 하나를 내어줬다. 원영은 당연히 그 슬리퍼를 곧장 꿰어 신었다.

그렇게 재승의 하얀 (쫄)티셔츠와 노란 체크 무늬 반바지, 하얀 양말과 삼선 슬리퍼까지 빌려 신은 원영은 재승의 뒤를 졸졸 쫓아 그의 차가 세워진 곳 근처에 멀뚱히 섰다.

멀리 원영을 버려둔 채 어딘가로 사라졌던 재승은 기다란 선과 양동이를 들고 트럭 앞으로 돌아왔다. 마당의 수도에 들고 온 선을 연결하고, 커다란 양동이에 세제를 푼 재승이 성큼 트럭의 짐칸에 올라탔다.

쭈그리고 앉았는지 잠시 사라졌던 재승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이내 다시 트럭 위에 나타났다. 활짝 펼쳐진 짐칸 위에 올라탄 재승이 시원하게 물을 뿌렸다. 호스의 중간을 손가락으로 집었는지 물길이 부채꼴로 펼쳐졌고, 햇빛에 반사된 물줄기가 무지개를 만들었다.

그 광경만으로도 매우 훌륭하건만 재승은 차에 물을 뿌리다 말고 느닷없이 제 머리를 물에 적셨다.

재승의 머리카락에 맺힌 물길이 폭포를 만들었다. 호스에서 머리를 뗀 재승이 고개를 털자 커다란 물방울이 후드득 하고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멍하니 재승을 관람하고 있던 원영은 다시 멍하니 생각했다.

저게 진짜 꼬시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고. 나 보라고. 만지고 싶지 않느냐고.

그렇다면 마냥 쳐다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원영은 생각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성큼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야! 가까이 오면 물 튄다!”

다가오는 원영을 보고 놀란 재승이 호스를 어깨 뒤로 돌리며 소리쳤다. 원영은 재승이 그러든 말든 방긋 웃는 얼굴을 하며 트럭 위로 껑충 올라갔다. 공손하게 손을 내민 원영이 더없이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시원해 보여서요. 물 뿌리는 거 도와드릴게요. 제가 아주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 말은 ‘제가 선배를 홀딱 적셔줄게요. 아주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였다. 말은 비슷하지만, 속에서 한 말은 사실 적시고 싶어 하는 액체가 다르다.

그러나 원영의 음습한 속마음을 모르는 재승은 순수한 얼굴로 그에게 호스를 건넸다.

그래. 어차피 물로밖에 적시지 못할 운명이었다. 호스를 받아 든 원영이 취이익, 온 사방에 물을 뿌려댔다. 차는 완벽히 물기를 머금었고, 재승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됐다.

“으하학! 너 일부러 그랬지!”

하지만 젖은 놈이 좋아하니 원영은 죄가 없었다.

순식간에 호스를 다시 빼앗은 재승이 원영을 향해 물을 뿌렸다. 원영이 재승에게 빌려 입은 하얀 (쫄)티셔츠가 물에 젖어 없느니만 못해졌다. 원영은 그 꼴이 되어서야 재승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허리를 껴안은 구실은 당연히 호스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매끈한 어깨에 턱을 괴고 한쪽 팔로는 배를 받쳐 안은 채, 다른 팔로는 별로 빼앗고 싶지도 않은 호스를 향해 휙휙 손을 휘저었다. 재승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척, 척, 물에 젖은 소리가 울렸다. 배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옆구리를 찌르자 재승이 몸을 푹 수그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히익 하고 숨을 먹는 소리를 내는 재승 때문에 원영은 찰나지만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맨 팔에 감겨 있는 살갗이 탄탄하면서 매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살성을 가졌으면서 예민하기까지 하면 어쩌란 말인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선배에게 심술이나 부려보려던 것이 어째 제 무덤을 판 느낌이었다.

눈치 없는 선배님은 마냥 신이 나서 꺄르륵 웃음이나 흘리고 있었다. 간지럽다며 고개를 젓는데 그렇게 고개를 저을 때마다 목덜미가 입술에 문질러졌다. 목마른 척하고 그 목덜미를 확 빨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원영이 먼저 손을 들었다.

“선배, 장난 그만하고 세차하죠. 세차한 다음엔 점심 먹고 은행 가야 하잖아요. 할 거 엄청 많은데, 우리.”

원영은 항복하듯 손을 든 채 재승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재승이 웃던 얼굴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본 재승은 또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재밌었다.’ 턱 옆의 보조개 두 개를 채 숨기지도 못한 그가 눈을 부릅뜨며 진지한 척 호스를 넘겼다.

“뿌리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 꼭 또다시 물을 뿌려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눈치다. 물론 더 이상의 장난은 원영이 무리였다. 원영은 다시 물을 뿌리지 않았다.

*

그리고 그날 밤. 재승은 한 근에 9천 원 하는 삼겹살 대신 원영이 사준 꽃등심 앞에 앉아 있었다.

“오…….”

빨갛고 촉촉한 살이 돌판 위에 올라가자 향긋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재승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은 후, 꼴깍하고 침을 삼켰다.

그러자 원영이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고기를 곧장 뒤집었다. 돌판 덕분에 겉면은 순식간에 익었지만 속은 아직 익을 생각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재승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원영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원영은 그러든 말든 뒤집었던 고기를 들어서 재승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장난기는 없지만 미소를 띠고 있었고, 무척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선배 드세요.”

“……벌써?”

재승은 찝찝한 기색으로 원영에게 물었다. 원영이 눈앞으로 내민 고기는 앞에서 말했듯 겉면만 익고 중간이 새빨갰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재승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원영의 젓가락으로 고개를 뻗었다. 설마 못 먹을 걸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덜 익기는 했지만, 하여튼 냄새는 좋았다.

덕분에 고기 앞으로 재승의 혀가 마중을 나갔다. 원영은 그런 재승을 당황한 듯 바라봤지만, 더러워 보여도 뭐 별수 있나. 자기가 먹으라고 준 것을 말이다.

“우음……, 오!”

재승은 고기를 입에 넣고 한번 씹기 무섭게 손을 파닥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덕택에 아까 원영이 한 말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정육점에서. 원영은 뜬금없이 자기가 고기를 사겠다고 하더니, 꽃등심을 일곱 근이나 사려고 했었더랬다.

그래서 재승은 그걸 말렸었다. 내가 평소에 두 근 정도 먹는데, 일곱 근이면 네가 다섯 근이나 먹을 수 있는 거냐면서. 분명 원영은 덩칫값도 못 하고 늘 재승보다 적게 먹었으니까 당연히 다 먹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었다.

하지만 원영은 이렇게 말했다.

‘이 고기는 선배가 여태 먹었던 고기랑 다를 겁니다. 선배는 분명히 네 근을 드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곤 기어코 무려 일곱 근을 결제한 뒤 정육점을 빠져나왔다.

저번에 갔을 때 7만 원이었던 꽃등심은 고깃값이 올랐다면서 오늘 무려 근에 8만 원을 받았었다. 그러니까 가격이……. 그냥 엄청- 엄청- 비쌌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야! 진짜! 달라!”

재승이 양손의 엄지를 세우며 원영에게 다시금 호들갑을 떨어댔다. 먹어보기 전에는 당연히 장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장담할 수 있었다. 재승은 엄청- 엄청- 비싼 고기를 네 근 정도는 아주 거뜬히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이 드세요. 소고기는 대충 구워야 방금처럼 맛있으니까 한꺼번에 올리지 마시고요.”

원영이 톡톡 고기 몇 조각을 돌판 위에 올렸다. 재승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면서 원영을 따라 톡톡 몇 조각을 돌판 위에 올리곤 순식간에 뒤집어서 와구와구 입안으로 처넣었다.

그런 재승을 누군가가 본다면, 손님한테 고기나 얻어먹고 잘하는 짓이라고, 그렇게 비싼 걸 얻어먹으면서 너무 염치없는 게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재승은 변명할 만한 말이 아주 많았다.

일단 재승은 손님으로 와 있는 놈에게 얻어먹을 생각 따위 원래는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원영이 느닷없이 과거 이야기를 들먹이며 재승의 양심을 찌른 것이다.

‘제가 사준 음식은 아직도 먹기가 싫으세요? 그럼 저 진짜 상처받을 것 같은데.’

……그러시다는데 달리 거부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재승은 원영이 손님이고 돈도 많이 벌게 해준다는 놈이니까. 그렇다면 비싼 고기를 사주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꽃등심 앞에 선 채 잠시 고민을 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놈이 고기를 사겠다 그랬다. 심지어 이렇게 많이 사게 될 줄도 몰랐었으니 재승은 억울했다.

그래서 비싼 고기 사주는 놈한테 뭐라도 잘해줘야겠다 싶어서 닦기 귀찮아 잘 쓰지 않는 돌판까지 꺼낸 거다. 게다가 원래 해주기로 했던 나물도 평소보다 더 열과 성을 다해서 무쳤다. 덕분에 얼마나 맛있는지 몰랐다. 그러니까 재승은 얻어먹는 놈치고 자신이 할 만큼 다 했다고 봤다.

*

그러나 원영은 재승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재승은 저녁 반찬으로 일주일 내내, 원영이 사주는 꽃등심을 먹었다.

그 말인즉, 순식간에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오늘. 재승은 무려 일주일 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주 나른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현재 재승은 마루에 걸터앉아 참외를 껍질째 씹으면서 원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참외가 더욱 달았다.

돌아오면 놈에게도 깎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재승은 오독오독 참외를 씹다가 마루 위로 늘어지며 다시 오독오독 참외를 갉아 먹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영은 요 일주일 내내 재승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일은 안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게, 이튿날 밤 재승이 습관적으로 불을 켜고 잔다는 걸 알아버린 원영은 그 이후 비서를 통해 가져온 서류들을 재승이 잠만 들면 해치워댔다.

재승은 원영이 도대체 언제 잠자리에 드는지 몰랐다. 하지만 평소처럼 새벽같이 일어나면 원영은 제 옆에 깔아놓은 이불 위에 얌전히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에는 그의 사인이 새겨져 있더라.

물론 재승은 그 서류들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냥 사인이 되어 있으니까 놈이 다 확인하고 일을 끝마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었다.

짹짹짹.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가 운다. 딱히 시끄럽지도 않은 놈이건만, 그런 놈 하나 없어졌다고 유달리 더 조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 계속 밖으로 나간 놈 생각만 하게 된다. 재승도 물론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자각한다고 해도 당장 드는 생각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 따로 나가지도 않고 꼬박 일주일을 뻐긴 놈이 오늘 나간 이유는, 비서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주일 내내 비서는 하루가 멀다고 출근 도장을 찍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날들과 달랐다.

비서는 출장이 어쩌고저쩌고하며 원영을 향해 원망 어린 하소연을 내뱉었다. 원영은 엄청 싫은 눈치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꾸역꾸역 비서가 가져온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원영은 결국은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고, 그러다 일할 때만 만난다고 해도 재승은 그에게 달리 뭐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나가지 않았고, 나가려던 길 현관문 앞에 서서 재승에게 약속했다.

‘선배. 나가는 김에 제가 선배 핸드폰 꼭 사 올게요. 그리고 출장이긴 한데 밤에 돌아올 거예요. 늦어지면 먼저 주무시고 계셔도 되고요. 최대한 빨리 올게요.’

제 갈 길 가는 것뿐이면서 뭘 그렇게 구구절절…….

원영이 막 나갈 땐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재승은 결국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이야 솔직히 부서진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고, 없다고 해서 불편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관장님에게 전화가 오면 죄송한 마음에 전화를 받지도 못할 터였다. 그러니 놈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는 일주일 만에 놈에게 익숙해졌고, 정이라는 게 들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정이 들어도, 원래라면 문제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문제의 이유를 말하라면 아마 이유는 바로 그것일 거다.

자신은 이제 놈이 참 괜찮은 것도 같은데……. 이쯤 되니까 놈이 자신에게 바라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거.

관장님이 말씀하시길, 일단 줬으니까 나중에 말 바꿔서 무슨 일이든 시키겠지! 라고 하지 않았던가. 관장님의 말씀대로 세상은 늘 그랬다. 하다못해 큰아버지도 빚을 떠넘긴 채 도망간 판에, 자신이 누구라고 믿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재승은 걱정이 들었다. 관장님의 말씀처럼 사기꾼인 이원영이 이종격투기에 관련된 일이 아닌 다른 나쁜 일을 시키고 싶어 해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게다가 관장님이 또 말씀하시길, 그놈 원래 회사가 위험한 일을 엄청 많이 하고, 자신처럼 띨한 사람 하나 데려다가 나중에 운동시켜준다는 소리를 하며 나쁜 일만 시킨다지 않았나.

만약 관장님이 그래서 이원영과 엮이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라면. 자신은 정말 큰 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이원영이 엮인 이후로 겹겹이 쌓여 있던 나쁜 사고들이 한 번에 해결되기도 했었지. 자신이 그렇게 운이 좋을 리가 없을 텐데.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이상한 일이지 싶었다.

아무튼 걱정은 걱정이고,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생전 해본 적 없는 낮잠이라도 자고 싶어졌다. 재승은 마지막 참외를 달게 씹으며 가물가물한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면서도 또 밖으로 나간 원영을 생각했다.

이원영은 재미없는 농담을 할 때마다 내가 일부러 크게 웃어준 것을 알고 있을까. 근데 웃다 보니까 진짜 웃겼다는 건 알까. 아침에 등산하고 나서 물장난하는 거 엄청 재밌는데. 같이 샌드백 치는 것도 재밌고…….

아, 어쩌면 놈도 친구가 없어서 나한테 잘해주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까 일주일 내내 놈의 전화기는 시시때때로 울렸지만, 온통 비서나 일 때문에 오는 전화들밖에 없었다. 역시 놈도 친구가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던 재승은 어느새 마루에 누워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밤에 원영을 마중하고 싶어서 일부러 잠이 든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날씨가 너무 따듯해서. 마당 뒤편의 샌드백을 치는 것보다는 게으르게 낮잠이란 걸 자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말이다. 정말로…….

*

그렇게 재승이 단잠에 빠져든 그 시각. 원영은 첫 번째 출장지에서 미팅을 마친 후 비서가 모는 자가용의 뒷좌석에 앉아 두 번째 출장지를 향하는 중이었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다음 시즌 경기에 협찬을 대줄 회사 대표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스포츠경기라는 게 매 시즌이 열릴 때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법이라, 회사에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경기를 열려면 협찬은 늘 필수였다.

때문에 협찬하는 회사나 대표들의 얼굴들은 매번 같아도 원영은 번번이 인사를 하러 돌아다녀야만 했다. 뭐, 귀찮아도 어쩌겠는가. 그것이 원영의 일인 것을.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원영에게도 목적이 있었고, 덕분에 인사를 하러 돌아다니는 일이 마냥 귀찮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원영에게 생긴 목적은 평소보다 더 많은 협찬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재승이 KFC 소속으로 공식 데뷔를 하는 만큼, 원영은 웬만하면 평소보다 많은 협찬을 받아서 재승에게 부족함 없는 시즌을 치르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만약 협찬을 많이 못 받는다면 사비라도 털어버릴 예정이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하면 아무래도 티가 나는 법이니까.

이번에 협찬을 받는 금액으로는 일전 경기 때처럼 선수 시설을 정비하고, 재승의 파이트머니로 3억 3천만 원을 챙겨줄 예정이다. 그 뒤에는 사비로는 공식 굿즈를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일단 이번 시즌에는 스포츠 타월과 인형, 그리고 부채 정도까지만 만들어볼까. 다음 시즌에는 피규어나 화보처럼 조금 더 값이 나가는 것을 한다고 치고 말이다.

아무튼, 밖으로 나와 있는 이상 일은 어떻게든 마무리될 것이고. 원영은 출장지를 이동하는 동안 남는 자투리 시간들을 활용해 오랜만에 재승의 팬카페를 탐방하기로 했다.

재승과 놀겠답시고 팬카페 구경을 한 주 쉬기도 했던 데다가, 원영 때문에 재승에 관한 이슈가 많기도 많았었다. 덕분에 천재승 갤러리는 원영이 보던 중 역대급으로 글들이 늘어나 있었다. 며칠이 지나서 글의 리젠 속도는 많이 늦어졌지만, 원영은 과거의 글들을 볼 것이기 때문에 볼거리는 아주 충분했다.

사이트에 접속되기 무섭게 10페이지씩 뒤로 넘어가던 원영이 몇 번을 반복해서 넘기고 난 후에야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의 글을 클릭했다.

글의 제목은 ‘이거 하나만 보면 끝 - 이번 달 천재승 관련 굵직한 사건 기사 모음’이었다.

천재승 갤러리

최근 방문 갤러리◁ 천재승

이거 하나만 보면 끝 – 이번 달 천재승 관련 굵직한 사건 기사 모음

ㅇㅇ(777.88) | 20xx.xx.xx.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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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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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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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승갤러리 식구들 좋은 아침!

오랜만에 갤러리 핫해져서 기분 좋은 고인물 인사 드림^ㅁ^

나 포함 어린놈들은 마냥 신나서 글싸는 중이지? 근데 구경 온 할배들(혹시 모를 덕수형 포함) 적응 못 하고 보고 싶은 거 못 보고 갈 것 같아서ㅎㅎ 그렇다면 친절한 나쨩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간단히 보라고 기사들 스크립해서 올린다. 미리 추천 박는 거 잊지말고!

참고로 난 덕수형 초창기 시절부터 경기 따라다니던 골수팬이고, 천재승갤러리 상주하는 안티들한테도 원래는 텃세 안 부리는 편이다.

근데 안티들아! 할배들 놀라니까 이 글 만큼은 불편한 댓글 자제해줬으면 좋겠다! 부탁 좀 할게!

그럼 바로 본문 들어간다!

1. 천재승 VS 장석환

-메인 기사 스크립트

[천재승 ‘이기는 게 당연한 경기’, ‘미친개’다운 완벽한 KO승을 선보였다.]

*월*일 치러진 무차별급 경기에서는 천재승(28)과 장석환(24)이 만났다.

전날 매치 인터뷰에서 장석환은 “이번 경기 진다면 천재승은 은퇴하라”며 천재승에게 강한 기싸움을 걸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천재승은 “최선을 다하겠다”며 간단한 포부만을 전한 바 있었다. 그리고 천재승은 이번 경기에서 아주 완벽한 복수에 성공했다.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기술인 오픈블로우를 2라운드 내내 날리며 장석환의 사기를 꺾은 천재승은 2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강한 킥으로 장석환을 쓰러트렸다. 평소 타격기 기술만을 선보이던 천재승은 2라운드부터 그래플링(grappling : 뒤엉켜 싸우는 일) 기술들을 선보였다.

수세에 몰린 장석환이 겨드랑이 파기를 시도했지만, 완벽하게 방어에 성공한 천재승은 큰 훅으로 KO승을 거뒀다. 천재승의 완벽한 승전보에 팬들의 함성이 떠들썩했다.

한편 천재승은 일주일 뒤인 *월*일 이원영(27)과 리벤지 매치에서 만날 예정이다.

그리고 이 기사는 메인 기사는 아닌데 많이 이슈 됐었고 웃기기도 하니까 가져왔어.

[리포터조차 할 말을 잃었었다. 천재승, ‘이원영은 곧 망할 것 같습니다!’]

*월*일 치러졌던 천재승(28) VS 장석환(24) 전에서 천재승의 승리 인터뷰가 다시 한번 이슈가 됐다. 천재승이 승리 인터뷰에서 “장석환 같은 선수나 키우는 이원영이 곧 망할 것 같다”며 소리쳤던 것을 이원영(27)이 천재승과의 매치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

오늘 매치 인터뷰에서 이원영은 “KFC가 망하려면 못해도 100년은 기다려야 될 것. 그때 대표직을 사퇴할 예정”이라며 천재승의 도발에 뒤늦게 위트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편 이원영과 천재승의 리벤지 매치는 오는 *월*일 치러질 예정이다.

2. 천재승 VS 이원영

-메인 기사 스크립트

[30초의 교착, 천재승 또다시 KO패]

30초 동안 교착(그라운드 안의 양 선수가 움직임이 거의 없는 상태)하고 있던 천재승(28)과 이원영(27). 긴장감이 고조된 가운데, 이원영이 시그니쳐인 하이킥을 날렸다.

천재승의 안타까운 KO패로 이원영은 무차별급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했다.

개인적으로 이 기사는 안타까웠어. 천재승 팬이라면 다들 나처럼 안타까워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들급에 기대할 만한 선수들이 대거 나오고 있는데, 그 안에 재승이 형이 없다는 게 너무 슬프다.

마침 첫 번째 무차별급 경기가 같은 미들급이었고, 형이 개 발랐잖아. 형이 무차별급에서 깨질 만한 선수는 절대 아닌데,,, 이원영은 솔직히 상대 선수로 피지컬 차이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

계속 무차별급만 나가는 건 덕수형이 무차별급 챔피언을 따겠다는 욕심이 있는 거겠지? 그래도 나는 다음 시즌에는 제발 미들급경기 볼 수 있으면 좋겠다ㅜㅜ

형이 미들급 마지막 경기에서 챔피언 빼앗긴 이후로 미들 계속 안 나가는데, 제발 이번 연도나 다음연도 안으로 형이 미들급 나오는 거 한 번만 더 봤으면 좋겠어. 그러다 다시 챔피언 따면 좋겠다ㅠ 참고로 내 소원이야.

3. 천재승 뇌출혈

-메인 기사 스크립트

[천재승 경기 직후 기절. 병명은 ‘뇌출혈’]

*월*일 치러진 경기 이후, 천재승(28)이 뇌출혈로 쓰러진 사실이 알려져 장안의 화제다. 주차장에서 만난 이원영(27)이 119를 불러 병원으로 호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재승의 뇌출혈은 경미한 수준으로, 회복을 한 뒤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복귀할 예정이다.

진짜 식겁한 기사였지? 이 기사 다음에 다른 기사로 다음 시즌에 복귀할 정도로 양호하다고 병명은 뇌진탕이었다고 정정기사가 났어.

덕수형ㅜㅜ 바보는 튼튼하다잖아! 늘 건강해야해 ㅜㅜㅜ

4. 천재승 KFC 계약

-메인 기사 스크립트

[천재승, KFC의 대표 얼굴이 되다!]

천재승(28)이 오늘 *월*일 아시아 최대 종합격투기 단체 Korea Fighting Championship의 소속으로 계약을 맺었다. 오늘 *월*일 천재승은 KFC대표 이원영(27)과 비밀리에 만났다.

KFC 측은 “천재승이 *월*일 경기에서의 인연을 토대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며 “앞으로 천재승 선수의 재능에 맞는 여러 경기와 이벤트에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전해왔다.

한편 KFC와 새 출발을 하게 된 천재승은 뇌진탕 회복을 위해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며, 다음 시즌 시작 한 달 전부터 맹훈련에 돌입할 예정이다.

크으,, 다들 내가 이 기사 쓰려고 글 쓴 거 느꼈지? 못 느꼈다면 직접 말해줄게. 나 이 기사 쓰려고 글 썼다ㅎㅎㅎ 기분 최고다!

덕수 형이 능력은 좋은데 계속 회사 안 들어가고 혼자 고생하는 게 늘 마음에 걸렸거든. 물론 형한테는 김춘배 체육관이 있고, 그게 형만의 자부심인가 싶기도 했었지만…… 솔직히 그 쥐좆만한 체육관에서 형한테 서포트를 잘 해줄까? 그게 늘 의문이었거든.

그래서 혹시 일찍 은퇴를 생각하고 있나 그래서 소속사에 안 들어가는 걸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형이 그냥 간 보던 거였나봐!

진짜 이렇게 KFC에 들어가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재승이 형이 늘 KFC에 적대적인 편이었잖아. 안티들은 그것 때문에 형이랑 KFC가 짜고 언플했다는 루머 퍼트리고 있지만,, 재승이 형 머리로 여론몰이라니ㅋ 난 그냥 천재승 공부나 다시 하고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소원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서 행복한 하루다. 식구들도 모두 나처럼 행복한 하루 보내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크게 외치고 퇴장할게.

천재승 챔피언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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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요.. 젊은 척한다고 노력이 많소... 추천은 박고 갑니다....ㅋ

천재승 멍청한척 하는 거 캐릭터 만들어서 팬 만들려고 지능형으로 짱구 굴린 거다 등신 새끼야. 인간이 그렇게 멍청한 게 말이 된다고 보는 너도 참 불쌍한 새끼ㅋㅋ 그리고 KFC랑 짜고치는 언플 맞음ㅇㅇ

⌞나도 원래 소설 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진심 천재승 요새 계속 KFC선수랑만 싸웠지 않냐? 극적으로 할려고 지들끼리 주작한거 같기도 하고,, 좀 찝찝한 건 사실

요약이라기 보다는 감상 같지만 잘 읽고 간다. 근데 기사에 ‘재능에 맞는’ 저거 진짜 곧 미들급 나온다는 신호같긴 함! 재승이형이 곧 미들급을 뒤집어주실 거다! 같이 기도하자!^ㅇ^

진심 천재승이랑 KFC는 진짜 상상도 못한 조합이긴 한데, KFC가 선수관리 철저히 하기로 유명하니까 다행이다. 게다가 재승이형 간판스타될만 하고 기사에서도 언급하는 거 보면 지원 하나는 빠방할 듯,, 아 벌써 다음시즌 기대된다,, 용사님,, 어디선가 미들급 역사 뒤바뀌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천재승이 KFC망하게 하려고 들어가는 걸지도 ㅎㅎ

간혹 몇몇 개의 댓글이 원영의 비위를 거슬렀지만, 다행히도 원영은 재승과의 일주일 동침으로 인해 아주 너그럽고 관대한 상태였다.

너네 같은 한낱 중생들이 선배의 사랑스러움을 어떻게 다 알겠냐.

원영이 픽 웃으며 생각했다. 이내 제 옆에 놓여 있는 깔끔한 쇼핑백을 바라본 원영은 괜히 한 번 쇼핑백을 만지작거린 뒤 다음 글들의 제목들을 쭉쭉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

글의 양은 많지만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글이 다 윗글에서 본 내용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내용의 제목들도 많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원영은 오늘 무척 자비로웠다. 여론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마 운이 나빠 하필 그런 페이지를 고른 것이 분명하다며 원영은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역시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니 그렇게 기분 나쁜 제목의 글들은 보이지 않았다. 원영은 저 혼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창의 제목들을 쭉 훑고 다음 페이지로, 다시 쭉 훑고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원영은 제 시선을 잡아끄는 글 하나를 더 찾아낼 수 있었다.

원영이 글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꾹 클릭했다.

글의 제목은 ‘나 예전에 등산하다 천재승 만난 앤데 이번에 대박’이었다.

천재승 갤러리

최근 방문 갤러리◁ 천재승

나 예전에 등산하다 천재승 만난 앤데 이번에 대박

ㅇㅇ(111.22) | 20xx.xx.xx.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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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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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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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기억하나 모르겠는데 예전에 엄마랑 할머니 등산 따라갔다가 천재승 만났다고 글 썼던 멸치다. 오늘 또 엄마랑 할머니가 날씨 좋다고 하도 뭐라고 해서 등산 따라갔다 왔어.

그런데 오늘 그 산 가서 느낀건데…… 어쩌면 그 산 오르기만 해도 존나쎄지는 전설의 산일지도 모름.

내가 이말 하는 이유 알 것 같지? 맞다. 오늘도 만났다 재승이형! 근데 오늘은 심지어 다른 선수도 같이 있더라. 재승이 형 옆에 무려,, 무려 이원영이 같이 있었음 ㄷㄷㄷ

암튼 상황 얘기하자면 저번에 좋은 기억도 있고 해서 오늘은 안 뻐기고 엄마랑 할머니가 가자고 할 때 곧바로 산으로 출발했었어. 그래서 저번보다 더 일찍 정상에 올라갔음.

그 다음엔 할머니가 아침에 김밥 싸주셔서 정상에 돗자리 펴고 그거 할머니랑 먹고 있었거든? 한 10분 있다가 산에 존나 안 어울리는 덩치들이 위로 올라오는 거야,, 그래,, 그 덩치들이 바로 천재승이랑 이원영이었다,,

근데 ㅅㅂ 인간적으로 원래 센스 좋은 사람을 따라가야 되는 게 맞지 않냐? 이원영 평소에 스포츠스타 중에 옷 잘 입기로 소문났고 스포츠 잡지에서 화보도 몇 번 찍었잖아. 근데 ㅋㅋㅋ 오늘 산에서 보니까 재승이 형이 저번에 입었던 노란 체크무늬 반바지에 난닝구 입고 있더라 ㅋㅋㅋㅋㅋ 심지어 신발은 정장구두였어. 조합 존나 병신같아ㅋㅋㅋㅋ

그리고 역시나,, 재승이 형도 똑같이 입고 있더라,, 아마 이원영이 천재승네 집에 놀러 왔던 거 같은데,, 이쯤 되면 궁금해짐. 천재승 옷장에는 똑같은 옷이 도대체 몇 벌이나 있을까? 설마 빌려 입은 게 아니라 이원영이 그 옷을 산 건 아니겠지,,,? 이원영은 구두 신고 있었으니까 아니라고 믿으련다,, 설마 천재승이랑 친해지면 다 저렇게 변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오늘은 둘이라 그런지 약수통 저번에는 천재승이 4개 다 들고 올라왔는데 오늘은 이원영이랑 2개씩 나눠 들고 있더라. 난 돗자리에서 안 일어나고 할머니한테 숨어서 계속 훔쳐보기만 했는데 천재승이 이원영한테 말해서 이원영 통부터 약수 받기 시작했거든.

근데 내가 재승이 형 팬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진짜 계약 때문에 물타기 했나 조금 의심이 들었던 게,, 내가 보기에 둘이 원래 친했던 사이 같았음.

그때 둘이 했던 대화 대충 기억해서 말해보자면

이원영 : 선배 이거 설마 마실 거 아니죠?

천재승 : 너도 마셨는데? 아 근데 오늘은 물이 모자랄 것 같기도 하네. 약수통 하나 더 들고 올 걸 그랬다. 그냥 너부터 목욕해.

이원영 : 선배 그냥 목욕물로만 쓰세요. 이런 거 먹으면 탈나요. 박테리아가…….

천재승 : 아닌데 나 한 번도 탈 난 적 없는데. 근데 박, 뭐?

대충 이런 대화였거든?

쓰고 보니까 좆도 쓸모없는 대화 같기는 한데 그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쓸모없는 대화 나누는데도 둘이 존나 친해 보였어. 다쳐서 쉰다고 훈련도 안 한다면서 둘이 뜬금없이 산에 나타난 것도 솔직히 뭔가 싶잖아.

솔직히 병원 데려가 준 인연이라는데, 그럼 아직은 존나 서먹해야 하는 거 아니냐? 얼마나 지났다고 취미 활동?까지 같이 하는 건지,,

암튼 그건 그거고 오늘도 말 걸고 사진 같이 찍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못 찍었다. 재승이 형 혼자 있을 때는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말 걸어 볼 만한 포스였는데, 이원영이랑 같이 있으니까 멸치는 너무 무섭더라,,

그래도 너네들이 주작이라고 하면 안되니까 몰래 둘만 사진 찍었음. 그리고 일기장이라고 욕하는 새끼들 때문에 오늘은 한 줄 요약 안 한다. 다 읽든지 말든지ㅅㄱ하시고.

아 맞다. 정확히 말하는 거 깜빡 잊고 있었는데, 나는 재승이 형이 KFC랑 짜고 약간 주작했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욕하는 놈들은 운동선수가 운동만 잘하면돼지 왜들 그러케 지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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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카충 ㅆㅂㄹㅁ ㅋㅋㅋㅋㅋ 근데 사진 진짜 잘찍었다ㅋㅋ 포스 지리네ㄷㄷ 등산광고같아ㄷㄷ

시발 몸 죽인다 말못건거 ㅇㅈ 나 헬스 3년찬데 내가 만났어도 말 못걸었을듯

⌞윗놈 안물안궁ㅋ 그리고 글쓴이 되지, 그렇게 ㅂㅅ아, 글 쓸거면 맞춤법 좀 배우고 써라.

⌞윗새끼 드립모르네 ㅋㅋㅋㅋ 천재승 더 배우고 와라 ㅋㅋㅋ

이새끼 글은 신기하게 매번 시끄럽더라

⌞씨발롬아 쳐 보지를 말던가ㅡㅡ

ㅇ이나어라얼 암튼 난 다른 건 모르겠고, 재승이형이 주작했으면 존나 킹받을 듯

글의 내용과 댓글을 모두 정독한 원영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스크롤을 위로 올려 글쓴이가 찍었다는 사진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글쓴이가 찍었다는 사진은 총 3장이었다. 그리고 그 3장의 사진에는 각각 약수가 나오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원영을 올려다보는 재승의 모습, 둘이 마주 보고 서서 웃고 있는 모습, 재승이 약수를 마셔보라며 원영에게 약수를 튕기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원영은 당연히 그 사진들을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리곤 잠시 다른 글들을 읽는 것을 중단하고 사진첩에 들어갔다.

이후 원영이 시작한 일은 당연히 사진을 보정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손에 대비되어 조막만 해 보이는 핸드폰을 든 채 원영은 쥐 죽은 듯 보정을 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깟 일을 하면서 어찌나 진지한지 미간에는 깊게 골까지 파인 상태였다.

앞선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듯 운동선수의 여론은 어차피 오락가락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루머가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재승에게 있다는 것이고, 선수로서 재승의 상품성이 뛰어나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마 이번 시즌만 지나도 사이트의 반을 채우고 있는 헛소리는 수그러들 터였다. 게다가 KFC의 지원을 받는 재승이 경기를 제대로 치르지 못할 일도 없으니, 오히려 재승의 상품성은 더욱 위로 치솟기만 할 것이었다.

여태까지야 재승은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는데 그를 향한 여론마저 더러우니까 화가 났던 것이었고, 지금은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재승이 인터넷을 자주 봐서 온종일 우울해한다면 또 모를 테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걸 어떻게 장담하냐고 묻는다면, 원영은 일단 천재승은 하다못해 야동조차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분이시지 않느냐고 답하겠다.

물론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재승의 집에는 구시대 유물처럼 보이는 넷북이나마 갖추어져 있기는 했었더랬다. 그걸 보는데 과연 천재승도 아이티 강국의 시민이었구나 싶어서 자신이 얼마나 놀랐었던지…….

하지만 원영이 직접 물어봤더니 재승은 그걸로 가끔 영상을 봤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잘 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경기 영상은 텔레비전으로 봐야지 그런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게 아니라는데, 이 선배한테 컴퓨터도 큰 화면이 있다는 걸 가르쳐 줘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원영은 아직도 고민이 됐다.

만약 커다란 모니터를 가져다준다면 재승은 얼마나 얼빠진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던 원영이 픽 웃으며 마침 보정이 끝난 첫 번째 사진을 저장했다.

그 뒤 원영은 첫 번째로 보정한 사진을 일단 배경화면으로 지정했다. 두 번째로 보정할 사진은 잠금화면으로 쓰고, 마지막으로 보정할 사진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프로필 사진으로 쓰기엔 역시 조금 그렇겠지……. 마지막 사진은 역시 재승에게 전화가 올 때 보일 화면으로 해야겠다.

결정을 마친 원영이 그렇게 생산성 있는 활동을 이어가려던 그때였다. 앞에서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던 비서가 느닷없이 원영을 불렀다.

“대표님.”

“어?”

“생각해보니까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시간 난 김에 지금 김춘배 브리핑하도록 할까요?”

“아아.”

원영이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미러를 통해 원영을 확인한 비서는 그렇게 닦달을 해놓고 잊을 것이 따로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원영을 향해 긴말을 시작했다.

“일단 김춘배 체육관에 바로 고소 진행 가능하게끔 준비해놨습니다. KFC가 대리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거가 조금 미흡해서 천재승 선수 통장 입출금 내역 정도만 따로 뽑아주셔도 아주 좋을 것 같다고 담당 변호사가 부탁했고요. 또 아무래도 김춘배가 천재승 선수와 정식 매니지먼트 계약을 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분명히 탈세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고소할 시에 따로 세무조사를 먼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그래, 알아서 잘하고 있네.”

“그럼 언제 진행할까요?”

“흠……. 아직. 계속 준비만 잘해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필리핀으로 간 천덕환, 양유화 부부의 거처도 알아냈습니다만, 그건 어떻게 할까요?”

“아아, 찾았어?”

원영이 화색을 띠며 비서에게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비서는 어쩐지 불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꼭 ‘저 양반이 왜 저럴까’하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원영은 비서가 그러든 말든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울 뿐이다.

원영은 문득, 일전에 재승을 보며 나쁜 일은 늘 한꺼번에 몰아닥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좋은 일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해보면 좋은 일 또한 늘, 한꺼번에 몰아닥치기 마련이었다.

“그럼 직접 잡으러 가야지.”

그 좋은 일이 비서에게는 나쁜 일의 연속이 되어버릴지 몰라도. 원영은 전에 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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