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Stupid Contract
얼핏 잠에서 깬 재승이 눈을 감은 채 쭈욱 기지개를 켰다. 어떤 시계보다도 정확한 신체 시계를 가진 재승은 지금이 아마 오전 6시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는 것은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고 아침 운동을 나가기 딱 좋은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평소의 재승 같았다면 곧바로 눈을 뜨고 세수부터 하러 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재승은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으로 느껴지는 환경이 묘하게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바닥이 왜 이렇게 푹신하지? 그리고 내가 어제는 텔레비전을 끄고 잤던가? 아니, 아닌데.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뭐지?
재승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덜컹, 침대가 흔들렸다. 그러니까 침대. 재승의 집에는 절대 없어야 할 물건이었다. 놀란 재승은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휙 돌렸다.
재승이 고개를 돌린 오른쪽에는 커다란 창밖으로 어슴푸레하게 파란 새벽빛이 밝아오는 서울의 도심이 내려다보였다. 물론 이것 또한 재승의 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눈을 꿈뻑거린 재승은 드디어 현실을 인지했다.
그러고 보니 난생처음 입원이란 것을 했었지. 고작 어제의 일이지만 영 현실감이 없어 달게 자는 사이 까맣게 잊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어디선가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깨어나자마자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흔치 않다 보니 재승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몸을 펄떡이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귀신이 아니고 아는 놈이었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재승은 소파 위의 커다란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도 인간이 아닌 것처럼 들리더니만, 어째 보이는 얼굴도 영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만큼 원영의 얼굴은 퀭하고 볼품없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환자 같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재승이 딱하다는 기색을 하며 물었다.
“넌 못 잤냐?”
“……잠자리가 바뀌면……. 좀 그래서요.”
원영이 재승에게 대답하며 까칠한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병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간호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천재승 환자님~ 들어갈게요~!”
그 소리에 재승은 언제 편안했냐는 듯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덜덜덜, 바퀴 트레이를 밀며 간호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재승의 침대 옆에 트레이를 세운 간호사가 혈압계를 들고 재승을 바라봤다.
“환자님, 혈압 잴게요~! 팔 좀 내밀어 주시겠어요~?”
친절한 간호사는 재승의 혈압과 맥박 그리고 체온을 잰 뒤 아침 식사 시간까지 가르쳐 주고 나서야 병실을 빠져나갔다. 어제 본 간호사도 예쁘더니 오늘 온 간호사도 예뻤다. 게다가 하나같이 얼마나 친절하고 잘 웃는지. 일부러 자신의 이상형을 모아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승은 아픈 것도 꽤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생 아파본 기억이 별로 없는 재승이었지만, 그래도 아프면 괴롭다는 건 아는데도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친절하고 예쁜 간호사들의 비중이 물론 컸으나, 꼭 그것 때문만이라고 보기만은 어려웠다. 오히려 저기 소파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원영의 덕이 더 클지도 몰랐다. 아니, 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놈의 덕이 더 큰 게 사실이었다.
까마득히 오랜만에 보호자가 생기자 결국은 좋았다. 저녁 식사를 챙겨주고, 함께할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좋았고, 캄캄한 밤에 누군가와 함께 외출을 한 뒤 같이 돌아오는 기분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었다. 게다가 하이라이트는 역시 그거였다. 평소와 달리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는데도 놈이 샤워하는 물소리 덕분에 혼자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더불어 아픈 탓에 경기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것도 패배 후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아주 큰 요인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재승은 솔직히 원영에게 조금 고마웠다.
누구랑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계속 말을 걸었는데, 그걸 무시하지 않아 준 것도 고맙고……. 뭐, 사기를 치려고 들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고마우니까 대충 사기도 당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물론 이건 더 이상 사기당할 구석이 없어서 드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멍하니 원영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던 원영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혹시, 아침 식사는 평소 몇 그릇 정도 하시는 편입니까?”
“음……. 세 그릇?”
“예, 세 그릇……. 저, 밖에서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
“…….”
“……안 가?”
가겠다고 했으면 그냥 나가도 될 텐데 굳이 허락을 받으려고 했었나 보다. 원영은 재승이 질문을 하고 나서야 고개를 꾸벅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재승은 밖으로 나가는 원영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향했다. 역시 관장님이 말씀하시던 것보다는 착한 놈일지도.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원영은 재승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잠에서 막 깨었을 때는 대충 넘어갔지만, 다시 보니까 새삼 그가 헤비급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자신이 입었을 때는 대충 헐렁하게 맞았던 옷이 그가 입으니 쫄티가 되어 있었다. 퍽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었으나,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그런지 의외로 괜찮았다. 그냥 그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운동을 하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물론 운동선수의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예의를 생각해서 물어보지는 않을 작정이지만.
재승은 원영의 다부진 근육을 눈으로 훑다가 그를 제치고 침대로 들어가 벽에 기대앉았다. 그때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사면 기본으로 설정되는 벨소리.
자주 울릴 것 같고 실제로도 자주 울리는 원영의 핸드폰이 아니라, 오조오억 년마다 한 번씩 울리는 재승의 핸드폰이 바로 그 벨소리의 근원지였다.
재승은 관장님에게 전화가 온 것일까 싶어 후다닥 베개 밑을 뒤적이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핸드폰 화면에 찍혀 있는 이름은 관장님이 아니었다. 큰아버지. 큰아버지가 이 이른 시간에 어째서?
재승이 의아해하며 통화 아이콘을 스크롤했다.
“여보세-”
-덕수야, 큰아빠다!
재승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큰아버지가 소리쳤다. 큰아버지는 평소에도 무척이나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그런데 눈치가 없어서인지 정확히 어떤 것이 다른지는 모르겠다. 핸드폰 너머의 큰아버지가 말했다.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입원한 병원이 어디야?
다짜고짜 전화의 목적부터 말하는 사람이었기는 하지만 지금 질문을 전화의 목적으로 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올 것도 아니면서 이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람.
재승은 자신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런 재승의 시야에 뒤늦게 원영의 얼굴이 걸렸다.
재미없는 놈과 식사 전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을 뻔했으니까. 아마도 심심하던 찰나에 재미없는 놈에게 걸려온 전화가 퍽 재미있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원영은 재승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서울 FC병원 1301호예요.”
원영은 엿듣고 있었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사기를 치려면 듣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려 했을 텐데. 역시 관장님의 말보다는 나쁜 놈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재승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FC병원 1301호래요.”
-덕수 너 누구랑 같이 있어?
원영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큰아버지가 당황한 듯 물었다. 때문에 재승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자신이라고 뭐 늘 혼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데, 큰아버지가 그렇게 아는 것만 같아서. 물론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으며 원영은 그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옆에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예.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그렇지만 굳이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재승이 말을 돌려 묻자 큰아버지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 9시쯤…… 갈 거니까, 혹시나 자리 비우지 말라고.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손님 있다면서. 얘기해라. 전화 끊으마.
통보를 끝으로 큰아버지와의 통화가 끊어졌다. 통보는 통보이되 평소와 질이 다른 통보였다. 때문에 재승은 통보를 당해놓고도 헤벌레 입이 벌어졌다.
“오시려나 봐. 나 아픈 건 어떻게 아셨지. 그리고 걱정되셨나.”
원영에게 말을 해주듯 혹은 혼잣말인 듯 재승이 중얼거렸다. 흔한 일이 아니라 얼떨떨했지만 당연히 기분은 아주 좋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자신의 걱정을 해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 당장 돈이 급해서 이러시는 걸까? 아무튼, 그것 때문이라고 해도 역시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그때, 가만히 앉아서 재승의 중얼거림을 듣던 원영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어제, 몰랐는데 저한테 기자가 붙었던 것 같더라고요.”
“아…….”
그걸 왜 이제 말하나 싶기도 하지만, 좋은 일이 있고 난 직후라 그런지 별 감흥이 없다. 재승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자, 그런 그와 눈을 맞추고 있던 원영이 어쩐지 안심한 표정으로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럼…… 큰아버지께서는 아침 식사 후쯤 오시겠네요.”
재승의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건만 어째 원영이 더 기대하는 눈치였다.
*
얼마 뒤, 원영의 비서가 병실에 도착했다. 그는 원영이 갈아입을 정장과 도시락 네 개, 그리고 영어 로고가 쓰여 있는 베이지색 쇼핑백을 원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따 뵙겠습니다.”
용건은 물건뿐이었는지 비서가 짧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원영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 옷부터 좀 갈아입겠습니다.”
재승에게 말한 원영은 밤 내내 입고 있던 재승의 옷을 벗었다. 안 그래도 터질 듯 늘어나 있던 까만 반소매 티셔츠가 원영의 손에 붙들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재승은 잠시 늘어난 티셔츠를 보다가 이내 바닥에 있는 도시락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어제 저녁으로 먹었던 도시락이 하나같이 다 맛있었기에 오늘 아침밥으론 도대체 어떤 도시락을 가져왔을지가 궁금했다. 아침부터 고기 도시락도 나쁘지야 않겠지만, 사실 이른 아침 식사로 무거운 음식을 먹으면 그날 하루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렇다면 아마 샐러드 혹은 나물 같은 게 잔뜩 든 도시락이 아닐까?
재승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곰곰이 도시락의 내용물을 유추했다. 그때, 옷을 홀딱 벗고 정장 바지를 꿰어 넣은 원영이 바닥에 있던 베이지색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원영이 그 쇼핑백을 불쑥 재승의 앞으로 내밀었다.
“…….”
재승은 일단 쇼핑백을 봤다. 영어 로고가 눈에 띈다. BURBERRY. 부라…….
거기까지 생각한 재승이 원영을 올려다봤다. 애초에 쇼핑백에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저 영어를 읽지 못하는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뭐.”
“옷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체크무늬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비슷한 걸로 사 오라고 그랬거든요. 옷도 까만색……, 아마 예쁜 걸로 골라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려놓은 옷은 그냥 제가 가져갈게요.”
체크는 역시 버버리죠, 하핫. 원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원영의 어색한 뒷말 덕분에 브랜드의 이름을 알게 된 재승은 입으로 ‘오’하는 모양을 잠시 만들었다. 명품 브랜드에는 당연히 문외한이었지만, 버버리는 문외한도 알 만큼 유명한 브랜드이지 않은가. ……체크무늬가 아니라 코트가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근데 옷은 늘어나면 집에서 입으면 되고, 그래서 진짜 늘어나도 상관없으니까 준 건데. 새 옷을 받으니 괜히 기분이 그랬다.
와중에 원영은 어느새 바지 지퍼를 올리고 새 와이셔츠를 아주 멋있게 몸에 두르는 중이었다. 재승은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는 원영을 텔레비전 보듯 구경하다가 단추가 세 개쯤 잠겼을 때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
힐끗 재승을 본 원영이 다시 고개를 와이셔츠의 단추가 있는 곳으로 내렸다.
“……제가 고맙죠.”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원영은 ‘그럼요. 제가 고맙죠.’하고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
원영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자 재승이 고대하던 식사가 차려졌다. 원영은 좁은 환자용 밥상 위에 일단 도시락 두 개를 세로로 놓았다. 반찬은 재승이 생각했던 대로 샐러드와 계란, 간이 심하지 않은 나물들이 주류였다. 고추장과 참기름이 있었다면 조금 더 재승의 취향에 가까웠을 테지만, 아무튼 맛은 좋았다.
재승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도시락에 몰두했다. 그러다 문득, 혼자 식사를 하는 게 아닌데 뭐라도 대화를 하면 어떨까 싶어 고개를 들었다.
원영은 음식을 씹으며 재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알을 도르륵 하고 굴렸다. 무언가 할 말을 찾는 것도 같고 눈치를 보는 것도 같은 얼굴이었는데, 곧 꼴깍 하고 음식을 삼킨 그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선배.”
“어.”
“옛날 이름 부르면 싫어하신다고 들었는데 큰아버지께서는 아직 옛날 이름으로 부르시네요? 그……, 덕수……라고.”
원영은 나불나불 말을 하다가 뒤에 가서는 어물거리듯 말을 끝냈다. 원영의 말을 들은 재승이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원영의 말처럼 굳이 개명 전 이름을 부르는 큰아버지가 짜증이 났고 그래서 표정이 구겨진 것이었다.
하지만 원영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는지 허겁지겁 입속으로 밥을 밀어 넣었다. 더 이상의 말실수 없이 밥이나 먹겠다는 뜻인 듯 보였다. 그러나 눈치 없는 재승은 당연히 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승이 도시락을 내려다보며 불퉁거렸다.
“내가 개명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덕수냐. 뭐라고 해 봤자 듣는 척도 안 해.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말을 끝마친 재승은 샐러드를 집어 아삭아삭 씹었다. 원영에게 기분이 상한 것은 없었기에 말의 내용은 그저 큰아버지에 대한 불만뿐이었다. 때문에 입안에 넣었던 밥을 열심히 씹고 있던 원영은 당황한 듯 눈을 키웠다. 그리고 원영의 음식 씹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음식을 삼켜낸 원영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게요. 선수 데뷔하고 스물한 살 땐가 개명하시지 않았어요? 근데 이름은 어쩌다가 개명하신 거예요?”
질문에 대답이 나오는 장면이 여태까지 그렇게 흔한 그림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물어보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노릇인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알 수 없는 재승의 사생활과 개인사라니. 원영이 환장하는 것도 당연히 무리는 아니었다.
“개명하면 더 잘 산댔어.”
재승은 원영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쉽게 대답을 내놓았다.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 재승의 눈빛은 퍽 아련했다. 사실 딱히 아련해지면서까지 회상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거기까지는 당장의 원영이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 누가요?”
“응, 뒷산 사는 보살님이.”
“…….”
“할아버지랑 할머니 친구였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식장에도 와주시고 그래서 감사해서 찾아갔었거든. 근데 개명하면 성공한다고 하셔서. 재주 있고……. 뭐 그런 뜻이래. 원래 이름 촌스럽기도 했고. 요즘 세상에 누가 돌림자를 쓰냐. 덕영이도 확 개명해버리지, 큰아버지 때문에.”
말문이 트인 재승은 원영이 질문하지 않았는데도 구구절절 열변을 토해냈다. 때문에 원영은 재승이 바꾼 이름을 엄청나게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고, 큰아버지 댁에 있는 덕자 돌림의 희생양을 재승이 무척 안타까워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 그랬구나.”
원영이 어색하게 말하며 우적우적 나물을 씹었다. 재승은 샐러드의 양상추를 아삭거리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친척 동생들이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거든? 근데 대학 들어가면 원래 그렇게 바빠? 요즘에는 다들 메신저인지 뭔지 쓴다고 큰아버지가 그래서 그것도 다운 받기는 했는데…, 아무튼 애들이 통 전화를 안 해.”
재승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도 재승은 식사를 이어가는 내내 구구절절 원영이 처음 듣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큰아버지가 온다고 해서인지 이야기의 내용은 대부분 큰집에 대한 것들이었다. 문제는 착취의 세월이 워낙 깊었던지라 재승이 저도 모르는 사이 착취에 대한 힌트들을 툭툭 내뱉었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큰어머니가 춤 교습소를 계속 나가셨거든? 내가 큰집 잠깐 살면서 애들 밥도 해주고, 씻기고……. 근데 애들이 예뻐서 별로 힘들진 않았지.”
춤바람 난 큰어머니 대신 애들을 돌본 사연.
“……그 아저씨랑 싸웠는데, 문제가 그 사람이 멀쩡한 기계를 다 부쉈다는 거야. 진짜, 미친 새끼지. 큰아버지는 공장이 돌아가야 돈을 벌 거 아냐. 그래서 내가 돈 만들어서 드렸어.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좋은 기계라 그런지 기계 값이 비싸기는 하더라.”
큰아버지의 아가리에 속아 돈을 준 사연.
“큰아버지 말대로 살아생전 모셨던 사람이 끝까지 모시는 게 맞지. 도움도 내가 더 많이 받았고. 난 내가 모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큰아버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입을 털어 장례식에 얼굴만 비친 사연까지.
재승의 광범위한 호구짓에 듣는 원영의 속만 부글부글 끓었다. 도시락의 뚜껑을 덮은 원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곧 오실 때가 되긴 했네요.”
원영은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하는 척하며 비서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했다. 곧 천재승 선수의 큰아버지가 병실에 문병을 올 예정인데, 병실 입구에 서 있다가 그가 나갈 때쯤 그를 붙잡아 놓으라는 내용의 문자였다. 그렇게 원영이 전송 버튼을 누르던 그때였다.
“천재승 님!”
누군가 노크도 없이 재승의 이름을 커다랗게 부르며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시죠?”
한껏 예민해진 원영이 남자에게 물었다. ‘님’이라는 말을 붙인 것으로 보아 재승의 큰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와 관계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표정이 곱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대략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쥔 서류 봉투 더미를 흔들며 말했다.
“퀵이요.”
듣는 순간 불길함이 솟구쳐 봉투를 찢고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원영은 참아냈고, 공손하게 봉투를 받아 재승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재승이 서류 봉투를 뜯는 소리를 들으며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번 문자의 내용은 천재승 선수의 큰아버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내용이었다.
그 뒤 원영은 최대한 궁금한 티를 내지 않으며 재승과 함께 먹은 아침 식사의 쓰레기를 치워나갔다. 그러자 곧 기회가 왔다.
“야, 이원영.”
“네!”
“이리 와서 이거 좀 봐줘 봐.”
원영이 뽀르르 다가가자 재승이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뭉텅이로 건넸다. 그리곤 눈치를 보며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나도 읽으면 다 아는데, 다쳐서 머리도 아프고 읽기도 귀찮아서……. 뭐라는 거야?”
“봐드릴게요. 잠시만요.”
원영은 재승에게 대답하며 귀엽다는 듯 잠시 그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서류를 들고 재승의 침대에 앉아 집중해서 서류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류 몇 줄을 읽은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빠르게 눈알을 굴려 첫째 장을 읽었고 뒤이어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 나머지는 휙휙 넘겨 다른 새로운 문서가 없나 확인을 했다. 그렇게 모든 문서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원영은 재승을 바라봤다.
“혹시…… 큰아버지 앞으로 보증 서셨습니까?”
절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들리는 말투였다.
“보증이…… 뜻이 뭐였더라?”
그러나 재승의 큰아버지가 보낸 서류의 심각성을 알리려면 일단 보증이 뭔지, 그가 과거에 한 짓이 무엇인지 대한 이해부터 시켜야 했다. 누굴 가르치는 데 영 소질이 없는 원영으로서는 정말이지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선배의 큰아버지, 그 씨……, 후, 가요. 대출을 받으면서, 그러니까 돈을 빌리면서 선배 인감도장이 필요하다고 찍어달라고 한 적이 있었을까요.”
그래도 원영은 최선을 다해서 과제를 수행했다. 그 성과로 재승이 드디어 말귀를 알아먹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있었어. 집 사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도장도 그때 처음 만들었거든. 기억난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을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이야기하며 재승이 해맑은 표정으로 원영을 바라봤다. 원영은 그 순간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해주는 걸 보면 그래도 점수를 많이 따기는 딴 모양이라고.
그러나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사랑이 이루어진 어느 날, 원영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가 원양어선에 끌려가든가 장기를 탈탈 털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등바등 모은 점수를 허공에 흩뿌리더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천재승 선배님! 운동 잘하고 예쁘면 답니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무식할 수가 있습니까! 생각을 안 하고 사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그가 받을 상심이 무척이나 클 테니,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았다. 원영이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연대보증이란 게 돈 빌린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대신 갚을 사람을 정해놓는 제도거든요. 그런데 채무자…… 그러니까 선배님 큰아버지께서 이자랑 원금을 한 번도 갚지 않아서요. 그렇다는 말은 갚을 의지가 전혀 없다는 말이고, 그래서 천재승 선배가 이제 빚을 다 갚아야 한다는 건데……, 원금은 총 2억 4천만 원이고, 이율은 23퍼센트. 지금까지 밀린 이자는 총 3천 6백 80만 원이라고 합니다. 하하, 혹시 큰아버지 연락처를 지금 제가 좀 받아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원영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느닷없이 쾅! 하고 병실이 울렸다. 원영과 재승이 동시에 병실 문을 바라봤다. 커다란 소음을 만든 원영의 비서가 그 등장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간 비서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른 아침과는 다르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표님, 아무래도 급한 사안 같아서…….”
“말해.”
“여기서요?”
비서가 당황한 듯 물었다. 원영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의 재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동공에 초점이 없어 보였다. 자신도 그렇지만 아침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건 고작 5분 만에 이루어진 변화였지만, 그걸 모르는 비서는 이내 목을 가다듬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천덕환 님께서는 오늘 오전 7시 사모님인 양유화 님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리고 자녀 두 분은 1년 전 유학을 전제로 필리핀에 먼저 들어가 있었던 상태라고 합니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더 일찍 나가려고 하였으나 전셋집이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요. 그리고 빚……. 네, 여기까지입니다.”
원영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발견한 비서가 눈치 빠르게 말을 멈추었다. 원영은 비서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고, 비서는 고개만 꾸벅 숙인 뒤 재빠르게 병실 안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만 남은 병실 안이 무척이나 썰렁했다. 점심 식사 때의 화목하고 다정한 느낌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영은 재승의 상심이 무척이나 클 것이라고 짐작했고, 그의 생각대로 재승은 실망을 하다못해 약간 울고 싶기까지 했다. 재승은 지금 가슴이 휑했고, 머리가 복잡했다. 가슴에 총을 맞아서 주마등이 스치면 딱 지금과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일이 언젠가는 벌어질 줄 알았다는 것일까. 큰아버지가 그러면 그렇지 뭐. 걱정은 무슨, 기대한 자신이 바보고 등신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약간 마음이 편안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가장 큰 일은 그깟 마음 따위가 아니라 빚이었다.
원금이 2억 4천만 원에, 밀린 이자만 거의 4천이라니. 그 현실감 없는 돈을 도대체 무슨 수로 갚느냔 말이다.
평범한 사람은 갚지 못할 금액임이 분명했고, 자신은 평범한 선수였던 데다가 심지어 이제는 머리를 다친 선수이기까지 했다. 로또를 사서 당첨되지 않는 이상에야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 이건 답이 없으니까, 일단 뽑을 수 있는 돈을 몽땅 뽑아서 도망이라도 쳐야지 뭐 어쩌겠는가.
재승은 살며 처음으로 자신의 스위트 홈을 버릴 생각까지 하며 그래도 살아갈 의지를 다졌다. 그러다 문득 원영의 존재와 현재의 위치가 떠오른 것이다. 재승이 덤덤한 얼굴로 원영을 불렀다.
“야.”
“네.”
“그러고 보니까 의사 선생님은 왜 안 와?”
“아…….”
“나 은행 가야 돼서, 퇴원할 수 있는지 빨리 알고 싶은데. 아프지도 않고, 심각한 것 없으면 그냥 퇴원해도 될 거 같거든?”
원래는 큰아버지에게 돈을 주려고 은행에 가려던 것이지만, 큰아버지가 없어진 지금도 어떻게 됐든 은행은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표정 관리에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 싶다.
재승은 조금만 신경을 덜 써도 땅 밑으로 푹 꺼져버릴 것 같은 입꼬리를 붙들며 원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원영이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말했다.
“……아까 비서가 의사 만났다고 했었어요. 퇴원하셔도 된대요. 준비할까요?”
“응, 응. 그래, 그럼 넌 돈 내고 가. 병원비 내줘서 고맙다.”
“아뇨, 선배가 지금 좀 조심해야 되는 상황이라서. 저도 같이 다닐 거예요. 은행 갔다가 집으로 가시는 거죠?”
“아니, 괜찮은데.”
“아뇨, 안 괜찮아요.”
원영이 강경하게 말하며 또 무언가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재승은 멍하니 원영과 허공 사이를 바라봤고, 한참 동안 문자를 보내던 원영은 힐끗 재승을 바라봤다.
“옷 입고 나오세요.”
그가 문 쪽으로 사라졌다.
*
밖으로 나온 원영이 때맞춰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의 비서였다. 느닷없이 터진 일에 아침부터 계속 문자를 받았으니, 할 일은 많은데 소통은 원활하지 않아서 비서가 고생이 참 많을 터였다.
원영은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핸드폰 화면의 녹색 수화기 모양을 스크롤했다. 곧 정신없는 비서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예, 대표님 접니다!
“그래, 어떻게 됐어?”
-병원 처리는 끝났고, 키는 1층 프런트에 맡겨 놨으니 언제든지 나가시면 됩니다. 기사 나가는 것은 30분 정도 소요될 것 같다고 연락 왔고요, 말씀하신 건 1시간 내로 준비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주차장 위치는 문자로 보내놓을까요?
시킨 일이 꽤나 많았음에도 걱정보다는 퍽 일 처리를 잘하고 있는 듯 들리는 내용이었다.
원영은 일단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비서에게 여러 가지를 시키기야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는 영 믿음이 안 갔다.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물론, 그래봤자 재승만큼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현재 상황을 굳이 요약해보자면, 관장을 떼어내려다가 애먼 큰아버지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쪽 또한 만만치 않은 개새끼였고, 빚을 잔뜩 남겨놓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재승이 언제라도 한 번은 겪게 되었을 일이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심지어 큰아버지라는 인간이 대출을 받은 곳은 원영의 형이 물려받아 운영 중인 FC 캐피탈이었다.
조폭이 개입되어 있다는 소리가 돌아서 평범한 사람들은 어지간히 급하지 않은 이상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3금융권. 게다가 조폭이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고, 만약 재승이 원영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벌어졌을 일은 못해도 새우잡이 원양어선에, 크면 신체 포기각서였다.
아니지. 재승은 잘나가는 선수이기에 원양어선은 타지 않았을 터다. 일단 신체 포기각서는 확정이고, 불법 파이트 도박장 같은 곳으로 팔려나가지 않았을까.
그깟 3억 남짓에 재승에게 벌어질 뻔한 일이었다. 어찌나 소름이 돋았던지 원영이 부르르 하고 몸을 떨었다.
무식한 것도 죄라면 죄겠지만, 재승의 가족 하나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재승의 무식에는 어째 환경 탓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원영은 재승의 죄는 단 한 톨도 없다고 봤다. 굳이 재승에게서 죄를 찾자면, 아까 자신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천재승을 보증인으로 세운 것치고 재승의 큰아버지는 빚을 적게 낸 편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도망가주신 덕분에 재승을 회유하기도 더 쉬워졌고.
인감도장은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이미 만들었다고 하니 다신 못 찍게 집에 가서 찾아다가 몰래 태워버리든가 하면 그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관장. 그놈의 관장이 문제였다.
쓰레기를 한 번에 치우면 물론 원영의 속이야 시원할 테지만, 원영은 어쩔 수 없이 관장의 처리를 뒤로 미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유는 바로 전 병실에서 본 재승의 표정 때문이었다. ‘병원비 내줘서 고맙다’하고 말하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곧 사라질 것 같았던지.
가족이 뒤통수치고, 곧이어 가족 같은 게 뒤통수를 치면 그 얼굴로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서워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곧 인터넷으로 나갈 기사는 ‘천재승 경미한 뇌출혈, 다행히도 장애는 없어. 짧은 휴식기 이후 복귀한다.’ 정도의 헤드라인이 붙을 예정이었다.
재승의 이용가치를 그의 큰아버지보다 조금 더 잘 아는 관장은 그 정도 기사에 대뜸 재승을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게 다행인 것인지, 불행인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
원영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재승이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재승은 어느새 평정을 찾은 듯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버버리라는 영어가 커다랗게 쓰인 반소매 티셔츠에 버버리체크 반바지를 입고, 심지어 손에 버버리 쇼핑백을 든 모습이라는 것이 약간 문제였다.
“아…….”
돈 주고 샀는데 협찬 같다.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원영은 그 귀여운 모습 때문에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으나, 기를 써가며 웃음을 참아냈다. 원영이 재승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왜 들고 나오셨어요?”
“어……. 옷 챙겼어. 네가 안 가져가면 내가 가져가서 입으려고.”
대답은 잘하는데 영혼이 반쯤 나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니, 사실 재승의 목소리는 덤덤하기만 했다. 그렇게 덤덤하니까. 오히려 원영의 영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원영은 재승이 걸친 협찬 같은 옷을 보아도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재승의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을 조심스럽게 빼앗아 들었다.
“저 주세요.”
이렇게 심각한 와중에 알뜰살뜰하게 늘어난 옷을 챙기는 그가 귀엽긴 하지만, 콩깍지를 잠시 버리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건 그저 궁상일 뿐이었으니까. 원영의 기준에서 재승은 이다지도 궁상이 익숙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원영이 속으로만 혀를 차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가는 동안 앞장서는 원영도, 그를 뒤따라가는 재승도 서로 말이 없었다.
원영이 하는 생각은 재승이 자신에게 언제쯤 도와달라는 말을 할까, 그리고 이 새끼들을 어떻게 조지지 등등 앞서 했던 생각들의 연장선인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재승은 이놈이 언제쯤 사라질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현실적으로 도주는 무리라고 결론을 지었는데, 이놈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도통 맘 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재승이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야, 근데……. 내가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내 트럭 열쇠 어디 있는지 알아? 그리고 트럭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나?”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자신이 어떻게 그걸 까먹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재승은 불안한 듯 원영을 올려다봤다. 그런 재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원영이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서 눈에 익은 낡은 차키가 나왔다.
원영은 재승에게 키를 건넨 뒤, 다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몇 번 화면을 터치한 그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차는 지하 주차장 3층에 있대요.”
곧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주차장에 도착한 재승은 눈에 띄는 용달트럭 앞으로 가 익숙하게 운전석 위로 올라갔다. 값비싸고 쾌적했던 1인실에서의 하루는 물론 좋았지만, 억대 빚쟁이가 된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에게는 그런 장소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낡은 용달트럭 운전석에 앉자 재승은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제자리를 찾았음에도, 당장은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았다.
이유야 당연히 용달트럭의 조수석에 올라타려 하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남자가 자신을 대신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으려는 듯해서.
재승이 조수석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진짜 타게? 그냥 가도 된다니까? 퇴원할 정도면 심각하지도 않은데 몸은 내가 알아서 조심할게.”
그저 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르쇠 해도 되는 일을 가지고 이 정도 해줬으니, 엄청 많이 도와줬고 고맙다 못해 감사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원영은 그렇게 거절하는데도 구태여 조수석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원영이 입은 회색 정장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원영은 행여나 내리라고 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서둘러 문의 손잡이를 쥐었다.
“어어, 문 조심히 닫아!”
재승이 버럭 소리쳤다. 덕분에 원영이 잡고 있던 문은 세게 닫히기 바로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머쓱한 듯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그가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걱정돼서 그러니까, 그냥 이용하세요. ……뭐든지 다.”
누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뭐든지 다 이용해 먹을 만한 인물은 절대 못될 재승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재승은 액셀을 밟았고, 용달트럭은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하 3층의 주차장을 돌아 밖으로 나가는 동안 트럭의 에어컨에서는 어째 미지근한 바람만 나왔다. 평소 같았다면 또 말썽이구나 하며 차라리 에어컨을 꺼버렸을 재승이었으나, 지금은 옆자리의 원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재승이 괜스레 에어컨을 껐다 켰다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게 왜 이러지……. 야, 안 덥냐?”
더우면 이제 그만 헤어져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원영은 도리어 자기가 에어컨을 꺼버리더니 창문을 내렸다.
“날씨가 아직 막 덥지는 않네요. 답답하시면 그쪽도 창문 여세요.”
누가 들으면 차의 주인이 그라고 착각할 만한 말투였다. 힐끗 원영을 바라본 재승이 말없이 창문을 열었다. 차 안으로 거센 바람 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용달트럭은 운전석도 조수석도 무척이나 좁았고, 때문에 조용히 앞만 바라보며 운전한다고 해도 원영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을 옆자리에 태운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커다란 사람이 탄 적은 또 처음이었다.
재승은 빚만 아니었다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돕겠다고 나서는 원영이 이해가 안 가기야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큰 도움이 됐고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재승이 자신도 모르게 또 조수석을 훔쳐봤다. 원영은 미어터질 것 같은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핸드폰은 빚문서 받으라고 확인 전화할 때나 울리는 물건인데, 어쩜 저렇게 하루 종일 핸드폰을 붙들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재승은 그런 원영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때, 원영이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운전을 하고 있는 재승은 곧바로 정면을 바라봤지만, 눈을 마주친 원영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원영은 재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는 제대로 쉬어본 적 없으시죠.”
가족마저 쓰레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시점에 원영 딴에는 물어볼 만도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그 질문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느닷없이 무시라도 하는 건가 생각한 재승이 옅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 쉬는데. 주말에 등산도 가고, 반신욕하면서 기분도 내고…….”
말을 하다 보니 쉰다고 해도 고작 그것밖에 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아니야, 뭔가 더 한 것도 같은데. 생각하던 재승은 남들이라고 뭐 특별하게 쉬겠냐는 정신승리로 괜한 생각을 끝마쳐버렸다.
“아, 아무튼. 일주일에 한 번은 제대로 쉬고 있는데. ……왜?”
재승이 다시 힐끗 원영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원영은 아직 재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을 한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신음할 뿐이었다.
음…….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던 원영이 계속해서 힐끗거리는 재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배 등산 좋아하셨구나. 북한산이 그렇게 좋다던데 가보셨어요? 선배 집이랑도 꽤 가까울 텐데.”
그렇게 말하는 원영의 목소리는 아주 다정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수상한 말 돌리기였고, 심지어는 재승이 가르쳐준 적 없는 집 위치를 알고 있다고 대놓고 티를 내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재승은 눈치가 없었다. 역시 이놈이 뜬금없이 나를 무시하려고 한 건 아니었구나. 재승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많이 가봤지. 사계절 한 번씩 다 가봤는데, 거긴 가을이 제일 좋아. 국립공원도 나름 잘 꾸며놨고, 단풍 지면 경치도 좋고.”
“아아……. 다른 산은 또 어디가 좋아요?”
이어지는 원영의 질문에 재승이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그렇게 은행으로 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화를 이었다. 산 말고 바다는 어떤지, 반신욕 좋아하면 온천은 가보셨는지.
원영의 질문들은 퍽 즐거운 것들뿐이었고, 덕분에 은행에 거의 도착해 갈 즈음, 재승은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즐거운 기분은 은행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이었다. 도착한 은행은 분명 영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닫혀 있었다.
그리고 간판을 올려다보던 원영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작게 탄식했다.
“아…….”
노각오이 저축은행은 며칠 전에 파산했다. 요즈음 뉴스의 경제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제였기에 원영이 그 은행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영은 재승을 내려다봤다. 영문을 모르는 그의 얼굴이 그렇게 안타까워 보일 수가 없었다.
*
원영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는 얼간이를 데리고 일단은 그의 용달트럭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각자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용달트럭 운전석에 앉은 재승은 닫혀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미련이 남는지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은행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힐끗거리던 원영이 답답하다는 듯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며 물었다.
“……선배 혹시 여기 은행에 얼마나 저축하셨어요?”
“응?”
“아…… 모르시겠죠. 여기 은행에 얼마나 넣었는지…….”
“아니, 알아, 1600만 원. 네 회사에서 스파링한 돈인데, 1회차에 받은 돈은 큰아버지…… 줬고, 남은 돈은 다 저금했어. 1년 뒤에 144만 원 더 준다고 그래서 통장 만든 거였는데, 144만 원 못 받아도 지금 꺼내야지 뭐. 어차피 밀린 이자도 못 갚을 돈이지만……. 진짜 은행이 왜 이 시간에 닫았을까. ……근데, 그건 왜?”
재승이 원영을 바라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 얼굴에 얼핏 슬픈 기색이 비친 것도 같았지만,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원영은 차마 말문을 떼지 못하고 구두 속에 숨겨져 있는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스파링에서 준 돈은 6000만 원인데 어쩌다가 2회차 금액이 1600만 원이 된 것인지. 일전에 관장과 함께 있을 때 금액을 이야기했던 것도 같은데, 그땐 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인지. 당장 재승에게 물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그런 걸 묻고 있기에는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말조차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은행이 망한 건 둘째 치고, 재승이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는 애초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래도 파생결합증권(DLS)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도대체 이 사람한테 뭐라고 설명하느냔 말이다. 난생처음 해보는 짝사랑도 어렵기만 하건만,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난이도가 높았다.
분명 나쁜 일은 한 번에 터지기 마련이었다. 원영 또한 여태 살아가면서 나쁜 일을 겪을 때면 꼭 모든 일이 한 번에 몰아닥치곤 해서 힘들었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연속으로 사기를 당하고, 심지어 은행이 망하고, 사기 친 놈 중 하나가 해외로 나르기까지 하는 일은 직접 겪어보기는커녕 주변에서 구경해본 일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첫 짝사랑 상대께서 기어코 해내신 것이다.
원영은 여태 사기를 치면 쳤지 사기를 당하며 살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재승이 슬플 건 알아도 온전하게 그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정말 할 말은 많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이 끝나면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 정한 다음 입을 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개 돌리면 닿을 거리에 앉은 남자가 그를 기다려 주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원영이 무언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던 재승이 기다림에 지쳤는지 기어코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원영은 재승의 매끈한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마음을 다잡았다.
“선배.”
원영이 다급하게 재승을 불렀다.
“왜.”
“그,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
쓸데없이 비장한 서두에 재승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원영은 그 얼굴을 보며 긍정적으로 마인드를 다졌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선배가 도와달라고만 하면 어차피 내 선에서 다 끝날 일이다.
“저번에는 제가 기억을 못 했었는데, 방금 기억이 났거든요. 그러니까…… 선배가 돈 넣은 이 은행이……. 근래에 망했습니다.”
“……응?”
“망한 지는 아직 일주일도 안 됐습니다. 원래도 상태가 썩 좋은 은행은 아니었어요. 위험도 높은 투자 상품을 일반 정기예금이나 적금인 것처럼 속여서……. 아무튼, 이번에 대표가 횡령을 좀 과하게 했는데, 근래에 팔아치운 파생상품과 관련 있는 나라가 전쟁이 나는 바람에…… 횡령도 걸리고, 여차저차해서…… 파산했습니다.”
원영은 재승이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말들을 다 잘라버리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그러자 상황 판단이 덜 됐는지 돈 많은 은행이 어떻게 망하냐며 재승이 구시렁거렸다.
원영은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유명 포털사이트의 경제면 기사를 눌렀다. 재승의 손에 핸드폰을 친절히 쥐여주자 그의 눈알이 도록도록 허공을 굴렀다.
노각오이 저축은행 파산, 예금보상 보장 어려워
기사입력 20xx.xx.xx. 오전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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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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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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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승이 기사를 읽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기에, 원영은 바보도 대충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헤드라인을 고른 상태였다.
멍하고 현실감각 없어 보이던 재승의 얼굴이 곧 잔뜩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얼굴을 일그러트린 재승은 구겨진 얼굴을 새빨갛게 익히기까지 했다.
마침내 완성형이 된 재승의 얼굴은 원영이 보기에 꼭 우는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지 그가 실제로 울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이, 씨발! 이게 말이 돼!”
재승이 방언이라도 터트리듯 욕설을 내뱉었다. 욕설을 한번 내뱉자 참을 수 없었던지, 재승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가며 욕을 해댔다.
어쩌면 큰아버지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계속 이렇게 욕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것도 가족이라고 옆에 없는데도 욕도 화도 못 내며 참고 있다가, 뒤늦게 다른 일이 또 터지니 이제야 참고 있던 것을 터트리는 것인지도.
그렇다면 재승이 화를 내는 모습조차도 원영의 눈에는 여리고 안쓰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원영은 재승을 위로하고 싶었다.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문 채 가만 재승을 바라보며 원영은 한참 동안 고민했다. 재승은 와중에도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을 꽥꽥 소리치는 중이었다.
“씨발! 아니 뭐 이런 좆같은 경우가 다 있냐고! 나가 뒈지라는 거야, 뭐야! 이, 이, 씨발!”
똑같은 욕을 계속해서 반복하던 재승이 숨을 커다랗게 몰아쉬었다. 아마 지금이 위로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생각하고 보니 괜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원영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재승의 팔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냥 불우이웃 도왔다고 생각하세요.”
원영의 목소리와 팔을 잡는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하지만 재승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원영은 그제야 이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원영이 하릴없이 뒷말을 이었다.
“그, 기부했다고 생각하시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실 것 아닙니까.”
하핫. 원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사실 1600만 원이면 원영의 기준에서는 기부금도 못 되는 수준의 돈이 맞았다. 1600은 기부하고도 욕먹는다. 천이면 천, 이천이면 이천. 뒤가 딱딱 떨어져야 내는 기분도 좋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금액이 커 보이지.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원영 딴에는 난생처음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위로가 맞았다.
물론, 재승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와 다른 문제였지만.
“근데, 이 씨발…… 놀리냐? 재밌어?”
재승이 이를 악물고 눈을 희번덕거렸다. 재승은 그렇게 얼어 있는 원영을 노려보다가, 정면을 바라보며 시동을 걸었다. 양손으로 핸들을 잡은 재승이 말했다.
“간병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내려.”
목소리가 어찌나 차갑던지 등골이 오싹했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들리는 그 목소리가 만약 지금 이 트럭에서 내리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만 그러면 안 됐다. 왜냐하면 아직 제대로 꼬셔보지도 못했으니까!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는 것이고, 원영은 재승에게 목이 말랐다. 지금 재승은 말할 것도 없이 돈에 목이 마른 상태일 텐데, 그런 그는 목이 말라도 우물 파는 법을 모르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친절히 우물을 파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선배 돈 필요하시잖아요! 제가……,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건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고,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는 일이 분명할 터였다.
재승이 원영을 바라봤다. 아직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역시나 한결 화가 가라앉은 듯 보이는 얼굴이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영은 재승을 낚는 것에 성공했다.
재승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돈이 급했고, 자신이 당장 무슨 짓을 하더라도 3억에 가까운 돈을 만들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원영이 이 기회를 틈타 못 쳤던 사기를 치려고 한 것이라 해도, 재승은 그의 말이라도 들어보는 것밖에 해볼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보다 나빠지기도 힘들 텐데,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KFC랑 계약하세요. 계약금으로 5억 드릴게요.’
하지만 원영이 내뱉은 말은 지푸라기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나 화려했다. 말만 들어서는 황금 동아줄이었다. 겉보기에 화려한 동아줄이라, 그 동아줄이 썩었는지, 썩지 않았는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망한 인생이니까, 여기서 조금 더 망해봤자 뭐가 더 있기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빚을 갚고도 2억에 가까운 돈이 남을지, 그게 아니라 조금 더 망할지. 뭐든 해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승은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원영이 계약을 빌미로 시내 한복판에서 홀딱 벗고 춤을 추라고 해도 알았다며 할 용의가 있었다.
차 안에서 나눌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며 원영이 일단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 뒤에는 비서가 와야 한다며 재승에게 주소를 물었고, 그 뒤론 입을 다문 채 쭉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재승은 원영을 힐끗 바라본 다음 다시 시선을 정면에 집중했다. 라디오를 틀지 않아 조용한 내부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 덕분에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이 와 닿았다. 물론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잠깐의 희망일지라도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 상태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
얼마 뒤 재승의 트럭은 비포장도로를 진입했다. 덜그럭덜그럭 차가 흔들리자, 핸드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원영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환한 대낮이다 보니 늘 푸르던 녹색 풍경은 유독 더 푸르게 빛났다. 그 풍경을 처음 보는 원영은 아주 당연하게도 당황하고 말았다.
차가 다니는 길만 잡초가 죽은 비포장도로. 귀신을 쫓아내기는커녕 도리어 귀신처럼 보이는 커다란 장승 세 개. 트럭을 타고 산을 오르는 느낌은 난생처음이라 그런지 아주 기괴했고, 이 길의 끝에 정말 ‘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기는 한 건지 점점 불안해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게, 집은 실제 했다. 칠 벗겨진 옥색 기와지붕. 이 나간 시멘트벽. 마루는 원래 색이 그랬을까 싶을 만큼 거무튀튀했고, 마당은 아마 차를 세우지 싶은 공간을 빼면 잔디인 척하는 잡초들이 옹기종기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요즘 어르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자주 봐오던 집이다. 참고로 유행한다는 프로그램의 내용은 속세를 벗어나 자연 속에 터전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생활하며 힐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려.”
어느새 시동을 끈 재승이 안전벨트를 풀고 트럭의 운전석 문을 활짝 열었다. 원영은 뒤따라 안전벨트를 풀고 재승의 집 앞마당을 밟았다. 집 뒤로 우거져 있는 나무가 확실히 속세와 벗어난 느낌이다.
사실 재승이 빚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 혹시나 집이 있는 땅에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싶어 재승의 뒷산을 모두 매입한 원영이었다. 저 산이 내가 산 그 산이구나. 괜한 감상을 해봤지만, 그 감상이 그렇게 좋은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재승의 집은 그냥 마루를 통해서도 들어갈 수 있게 생긴 집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굳이 현관문을 열었다.
신고 있던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벗은 재승이 현관 앞에 신발을 버려둔 채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집 안의 풍경이 들여다보였다. 원영에게 새로울 것이 아주 많은 집 안이었지만, 원영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에 골몰했다.
어떻게 현관 입구에 그 흔한 타일조차도 깔려 있지 않을 수가 있는 건지. 곧장 거실의 누런 장판이 보이는 집이라니,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러다 원영의 눈에 신발장이 들어왔다. 현관 밖에 세워진 플라스틱 신발장. 신발장을 집 밖에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은 원영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때, 집 안으로 사라졌던 재승이 불쑥 현관 앞으로 다가왔다.
“안 들어올 거야?”
재승은 뭐하고 있느냐는 듯 고개를 까닥거리며 원영에게 말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원영이 후다닥 재승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대낮에 불이 켜져 있는 거실은 현관 밖에 있는 신발장보다야 덜 충격적이었지만, 아무튼 충격적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일단 재승의 집은 거실로 들어서면 집 안의 모든 전경이 보이는 구조였다. 부엌은 거실에 딸려 있고, 방은 총 두 개인데 문이 달려 있지 않은 덕분이었다. 방 하나에는 세월의 흔적이 다분한 옥색 선풍기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어디에서 샀는지 출처가 궁금해지는 레드와 핫핑크의 꽃 패턴 이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다른 방에는 골동품점에서나 만날 수 있게 생긴 장롱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무려 봉황이 자개로 수놓여 있는 자개장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불이 있는 방 쪽으로 거실에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는데, 무려 뒤통수가 툭 튀어나와 있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이었던 것이다!
곡선화면에 3D화면에 HD화질이 기본인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곳은 90년대, 혹은 80년대 가정집을 모티브로 일부러 꾸몄다고 해도 믿길 만한 수준이었다.
“…….”
원영은 말을 아끼며 가만히 바닥을 노려보고 섰다. 힘들게 사는 줄은 알았지만, 환경이 이 정도로 열악할 줄이야. 재승의 큰아버지가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사기를 쳤다는 것에 다시금 화가 났다. 게다가 관장은 재승을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의 집으로 찾아온 적조차 한번 없었을지 몰랐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과 별개로 원영의 기분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드디어 재승의 본거지로 들어왔다. 만약 재승이 자신을 피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그를 찾아올 수 있는 본거지를, 재승이 직접 가르쳐 준 것이다. 여기서 원영이 이 주소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별개였다. 어차피 재승은 그 사실을 절대 모를 테니까!
“일단……, 앉아.”
오랜만이든 처음이든, 재승은 집에 손님이 있다는 게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수줍게도 보이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원영은 휘익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앉으라니까 앉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그때, 재승이 한 발자국 다가와 텔레비전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앉아.”
어쩐 일로 눈치까지도 참 빨랐다.
“……뭐 마실 거라도 좀 줄까?”
심지어 이런 센스라니. 원영이 감탄하듯 입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재승이 걸음을 옮겨 거실 끝의 옥색 냉장고 앞으로 갔다. 옥색……. 그래, 차라리 색깔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자. 원영이 바닥에 앉으며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텔레비전이 올라가 있는 텔레비전 장은 아마 방에 들어가 있는 자개장과 세트인 듯 보였다. 까맣게 코팅된 나무 사이사이에 뭔지 모를 그림들이 자개로 수놓여 있다. 신기한 건 집 안의 물건도 얼마 없지만, 그 물건이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보니 바닥도 깨끗하고 테이블 장에 들어가 있는 DVD플레이어와 DVD들도 깨끗했다.
그래, DVD.
DVD플레이어 옆에 가득 쌓여 있는 DVD를 바라보는 원영의 눈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핸드폰이나 태블릿 또는 컴퓨터로 구매를 해서 다운받아 보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라지만, 아직까지 아날로그를 고집해 DVD를 소장하는 사람들이야 많고도 많았다. 그러니 원영이 놀란 이유는 DVD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쌓여 있는 DVD 중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DVD가 어쩐지 불법으로 보이고, 또 아주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야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유명한 속설처럼 운동선수들은 대체로 스태미나가 남아돌았다. 남자야 원래도 짐승이지만, 조금 더 짐승인 경우가 많다 할까. 그래서 제대로 뛰지 못하는 휴식기가 되면 성욕이 미쳐 날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니까 원영이 놀란 이유는 ‘DVD가 야동이어서’라기보다는 그 야동의 배경에 여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게이가 나오는 야동이었더라면 ‘하핫, 선배도 참’ 했겠지! 근데 여자가! 심지어 머리가 짧고, 가슴은 굉장히 큰데 허리는 잘록하니, 누가 봐도 몸매 좋다고 할 만한 여자가! 심지어는 키도 커 보이고, 어쩐지 운동을 좋아하게 생긴 백인 여자가!
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DVD 앞으로 손을 뻗었다. 하나를 들어 올려 그 아래를 확인하자 그와 비슷한 느낌의 여자가, 또 그 아래를 확인하자 그와 비슷한 느낌의 여자가, 그렇게 계속해서 비슷한 느낌의 여자가 있었다.
DVD를 제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원영이 눈을 감고 양손으로 눈자위를 꾹꾹 눌렀다. 천재승은 게이가 아니었다. 어차피 재승밖에 보이지 않는 지금, 이제 와 그런 사실을 알아차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은. 자신을 이상형으로 꼽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난 세월의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하고 딱해서. 괜스레 목이 타고 가슴이 먹먹했다.
“야, 받아.”
어느 틈에 다가온 재승이 원영에게 유리잔을 내밀었다. 원영은 하도 눌러대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재승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심한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목이 타들어 갔다.
원영은 재승이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 예스러운 디자인의 유리잔에는 투명한 듯 까만빛을 띠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아메리카노일 듯 보인다. 원영의 취향에 퍽 맞아떨어지는 음료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와중에도 인사를 잊지 않은 원영이 이내 벌컥벌컥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 뒤 원영은 생각했다.
음……. 향긋한…… 계피 냄새.
“크윽, 크헉.”
씁쓸하거나 구수한 아메리카노를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수정과 폭격을 당한 원영은 사레가 들린 듯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제자리에 서서 제 몫의 수정과를 마시던 재승은 기침하는 원영을 보더니 냉장고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목말랐나 보네. 더 가져다줘?”
“컥, 아뇨, 괜찮습닉, 다.”
“……그래, 그럼.”
재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어쩐지 머뭇거리며 원영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곧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됐다.
재승은 부담스러우리만치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만약 DVD의 여자를 발견하기 전이었더라면 키스를 바란다거나 혹은 이상형에 가까운 제 얼굴을 보며 넋이 나간 것이라고 착각했을 만큼 아주 뜨거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재승은 아마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일 터였다. 원영은 그 얼굴을 보며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들을 해나갔다.
이 사람이 조금만 더 똑똑하고, 조금이라도 능력이 없었으면 관심 같은 것 절대 가지지 않았을 텐데. 이 사람이 조금만 덜 귀여웠어도 영상 같은 것 절대 찾아보지 않았을 텐데. 팬 페이지도 찾아보지 않았을 텐데. 그랬으면 게이설 같은 단어를 검색해 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그가 정말 게이인 것처럼 헷갈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남자에게 반하는 일 또한 절대, 절대 없었을 텐데.
그러다 원영은 뜬금없이 따지듯 물었다.
“……가슴 큰 거 좋아하시나 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나간 말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입술까지 삐뚜름히 올라간 상태였다. 여전히 눈을 맞추고 있던 재승이 작게 중얼거렸다.
“봤구나?”
재승은 텔레비전 밑의 DVD를 흘깃하고 봤다. 평소 누군가 아무런 적의 없이 말을 걸어도 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건 아닌가 하며 예민을 떨어댔지만, 정작 상대방의 표정이 정말 이상한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재승이었다.
그도 그럴 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를테면 구청에서 왔다던 노각오이 저축은행을 소개해준 그 아줌마라든가)이 아니면 집에 손님이 올 일이 없었으니까. 손님이, 그것도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표정 같은 걸 신경 쓸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재승은 원영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박거리다가 덤덤한 얼굴로 제 DVD가 놓여 있는 곳을 다시 힐끗거렸다. 혼자 살고, 아무도 안 오는 게 익숙하다 보니 아무리 비밀스러워야 하는 물건이라도 숨겨놔야 할 필요성을 몰랐었다. 그래도 같은 남자가 봐서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이왕이면 큰 게 좋지.”
민망하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재승은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이제부터 야동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숨겨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괴이한 헛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가슴 큰데…….”
“…….”
재승이 원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놈이 한 이야기가 맞을까. 그리고 만약 맞다 하면……. 도대체 나한테 뭘 어쩌라고?
재승의 얼굴에는 그가 하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원영은 느끼는 바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원영이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말대로 커다란 가슴이 와이셔츠 안쪽에서부터 부각되어 보였다.
그러나 재승이 말한 가슴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그것이었다. 저렇게 보기만 해도 딱딱한 것은 같은 가슴이어도 ‘갑빠’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터였다. 그리고 그 가슴을 혹시라도 만지고 싶어진다면 그건 부러워서, 혹은 어떻게 관리했는지 궁금해서일 텐데…….
아무튼,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무엇이건 간에 야동 얘기를 하다가 내뱉을 만한 소리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재승은 그 말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이상한 말 이해하려고 용쓸 시간에 자신에게 중요한 대화나 이어서 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지 않겠느냐는 게 재승의 생각이었다.
“아까 차에서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줘. 진짜 나한테 5억이나 줄 거야?”
재승의 질문에 원영은 어쩐지 불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들고 있던 잔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못마땅하다는 표정과 다르게 대답은 긍정이었다. 재승은 그의 대답에 안도하면서 내내 신경 쓰이던 것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럼 난 뭐해야 되는데? 경기 나가나? 그리고 시키는 일은 잘할 테니까 빚 갚을 돈은 먼저 주면 안 될까? 너무 큰돈이라 바로 주기엔 믿음이 안 갈 수도 있는데, 나 약속은 잘 지켜. 그리고 도망갈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5억이면 뭔 일인지는 몰라도 엄청 오래 일해야겠네. ……그치?”
말을 내뱉고 보니 문득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빚에 깔려 죽는 것보다야는 나을 테지만.
큰아버지가 떠넘긴 빚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병원비를 모두 갚고 나면 대략 1억 8천만 원 정도가 남는다. 그건 재승의 기준으로 6년은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만약 그것보다 계약 기간이 더 길다면 조금은 문제가 있겠으나, 재승은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사실 그보다 더 오래 일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히, 이원영은 사람을 굶겨 죽일 만한 놈은 아닌 듯 보였다. 병원에서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도시락을 챙겨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 두 끼의 도시락은 무척이나 흡족했었다.
무슨 일을 시킬지는 몰라도, 저놈이 날 굶겨 죽이지는 않을 거야. 재승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일단 선배가 오래 일하셔야 하는 건 맞지만, 5억은 일해서 받는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영이 영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한다. 재승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계약금은 말 그대로 계약을 하니까 주는 돈이에요. 착수금…… 그러니까 KFC랑 같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뭐 그런 뜻에서 주는 돈이요. 대신 계약 사항을 어기면 5억의 다섯 배, 중간에 해지하시면 5억의 스물다섯 배를 KFC에 보상하셔야 합니다.”
“뭐? 야! 나 그런 돈 없어!”
5억의 스물다섯 배라는 소리에 놀란 재승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원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곤 별거 아니라는 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해지만 안 하시면 보상금 같은 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빚도 바로 갚고, 돈도 엄청 많이 버실 수 있어요. 월 1000만 원이 뭡니까, 월 1억은 가볍게 넘도록 벌 수 있으실걸요. ……해지 안 하실 거죠?”
계약을 하겠느냐고 묻는 것이 먼저일 텐데, 원영은 계약이 기정사실인 양 해지를 걱정했다. 물론 자존심을 챙길 것 없이 재승은 계약할 것이다. 어차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고, 장기를 털어봐야 125억은커녕 5억도 나오지 않을 터였다.
재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원영이 퍽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바닥에 있는 유리컵을 들어 올린 그가 남은 수정과를 들이켜다가 팍,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문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현관을 향했다. 하지만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 곳은 현관이 아니라 창문이었다. 툭, 툭, 두꺼운 창호지가 발린 창문이 애매한 노크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사장님! 천재승 선수! 계십니까!”
노크를 한 것은 원영의 비서였다. 재승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도착한 그는 재승이 현관을 열고 나가자 마루 앞에 서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천재승 선수님.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오는 길 내내 화장실이 한 군데도 없어서…….”
현관 앞으로 종종 달려온 비서가 어쩐지 재승을 원망하는 듯 말하며 다리를 비비 꼬았다. 재승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그를 막으며 손가락으로 반대편 방향을 가리켰다.
“화장실은 저쪽으로 가면 문 있어요.”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비서는 어정쩡한 걸음으로 화장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사라졌다. 참으로 딱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
얼마 뒤 평정을 되찾은 듯 보이는 비서가 차 안에서 사람 하나를 더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비서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문서 공증을 위해 불려온 변호사였다.
변호사와 원영 그리고 재승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서는 누런색 종이봉투 안에서 서류를 하나씩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그가 첫 번째로 늘어놓았던 서류를 양 손바닥을 곱게 펴 가리키며 말했다.
“자, 첫 번째로 보이는 서류는 천재승 선수가 큰아버지인 천덕환 님의 대출에 연대보증을 섰다는 내용의 서류입니다. 대출은 FC캐피탈에서 받았지만, 현재 KFC에서 대출을 인수해 온 상태이고요, 그러니 천재승 선수는 빚을 KFC로 갚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서류를 보시면, 이게 KFC와 천재승 선수의 계약에 관련한 계약서인데요, 제가 1조부터 차례차례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약팔이 약장수 같은 음색으로 신나게 연설을 한 비서가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서류를 한 장 뒤로 넘겼다. 다시 비서가 이야기를 이었다.
“제1항은 계약의 목적에 관한 부분입니다. 저희 KFC는 소속사로, 이종격투기 선수 천재승 님의 전반적인 선수 생활을 책임집니다. 그리고 천재승 선수님은 저희 KFC를 통해서만 선수로서의 영리활동을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 가시죠?”
재승은 ‘영리활동’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으나 분위기상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가 힐끗 원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손가락 끝으로 계약서의 다음 조항을 가리켰다.
“제2항은 권한과 책임에 관한 부분입니다. 천재승 선수는 KFC와 협의하지 않은 영리활동을 제3자를 통하여 진행하실 수 없습니다. 만약 저희 모르게 진행하실 경우 KFC는 이를 계약 위반으로 봅니다. 본 계약 위반 시 그에 따른 천재승 선수의 책임은 계약금의 다섯 배입니다. 계약금에 관련된 부분은 뒤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서는 이제 이해가 가냐는 질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재승은 또 분위기상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다음 조항이었다.
“제3항은 계약 기간에 관한 부분입니다. 본 계약은 종신 계약입니다. 천재승 선수의 선수 생활이 끝날 때까지 KFC는 천재승 선수의 소속사로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제4항은 천재승 선수가 본 계약을 진행함으로 인한 대가에 관련한 부분입니다. KFC에서는 계약금으로 계약 즉시 천재승 선수에게 5억을 지급합니다. 그리고 경기 등 천재승 선수의 선수 활동에서 벌어들이는 금액은 천재승 선수가 순매출액의 90%, KFC가 10%의 비율로 나누게 되며 영리활동이 끝나고 회사를 통해 금액이 들어온 시점에 곧바로 천재승 선수의 계좌로 지급합니다.”
세 장짜리 서류의 두 번째 장 설명이 끝났다. 그 뒤로 비서는 다음 장의 비밀유지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재승의 손에 만년필을 쥐여줬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계약서의 설명은 모두 끝났다.
재승은 무표정한 얼굴로 3장짜리 계약서 총 2부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비서가 안타까운 눈으로 재승을 내려다봤다. 원영은 근래 들어 가장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제 끝난 건가?”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던 재승이 고개를 들며 원영에게 물었다. 원영은 언제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냐는 듯 진지한 척 얼굴을 꾸민 상태였다. 하지만 눈을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재승에게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대신 여태껏 알아듣지 못할 계약서를 설명했던 비서가 계약서를 꺼낸 누런 종이봉투 밑에서 다른 종이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가 재승을 향해 서류를 보이며 말했다.
“천재승 선수님, 아직 확인하셔야 할 서류가 몇 가지 더 남았는데요.”
덕분에 재승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비서는 다시 딱하다는 기색을 표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비서가 재승의 앞으로 새로운 서류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지금부터 보실 서류들은 KFC가 천재승 선수의 매니지먼트를 완벽히 해내는 데 필요한 추가 서류들입니다. 자, 그래서 첫 번째로 보실 서류는…….”
법적인 뭐시기를 위임하는 별첨 서류, 뭐시기의 저시기를 위임하는 별첨 서류. 기타 등등의 별첨 서류 끝에는 변호사의 공정증서가 남아 있었고, 그 뒤에는 빚을 정산하고 확인받는 절차까지 진행했다. 재승은 끝도 없이 설명을 들었으며, 팔이 아플 정도로 사인을 했다. 안 그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던 비서의 말은 모든 사인이 끝나갈 무렵엔 단 한 단어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변호사와 비서는 모든 서류정리를 끝마치고 재승에게 수정과 한 사발씩을 얻어 마신 뒤에 차를 타고 사라졌다. 재승은 그들의 배웅을 나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 옆에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린 재승이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올려다봤다.
뻐꾸기 없는 뻐꾸기시계는 정각이 되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때문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쩐지 기운이 없더라니. 속으로 생각한 재승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릇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밥 먹어야겠다…….”
“어어, 선배! 제가 비서한테 사 오라고 할게요!”
느닷없는 인기척에 놀란 재승이 몸을 흠칫 떨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서류에 짓눌려 까맣게 잊고 있던 남자가 재승을 올려다보며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재승은 대답하기 전에 손사래부터 치며 일단 원영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비서를 부른다고 하는 건지. 물론, 원래 같았으면 원영의 비서가 사다주는 맛있는 도시락을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재승은 비서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이유야 당연히 그 사람이 또 다른 서류들을 들고 와서 자신에게 읽어줄 것만 같아서다. 정말 어찌나 과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이게 과대망상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알지만, 불안할 일은 아예 만들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됐어, 배고파 죽겠는데 어느 세월에 사와. 오기 전에 굶어 죽지. 내가 해줄게.”
재승이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벌컥 냉장고 문을 열자 어느새 재승을 따라온 원영이 힐끗 냉장고 안을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가요?”
“그럼 네가 할래?”
재승이 되묻자 원영이 못 미덥다는 얼굴을 하고도 고개를 휘휘 저었다.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어째서 못 미덥다는 얼굴을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재승은 혼자 산 지 무척 오래되었기 때문에 귀찮아서 하지 않을 뿐 대체로 모든 밑반찬이 가능한 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내가 무시할 만한 그런 몸이 아니었구나, 하고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하기에는 당장 너무나도 배가 고프다.
재승은 요리를 하는 대신 냉장고 안에서 미리 만들어 놓았던 밑반찬들을 꺼냈다. 멸치볶음, 익어버린 겉절이, 진미채 볶음, 콩나물.
그렇게 꺼낸 반찬통은 제 옆에 서 있는 원영의 손 위로 건네놓고, 싱크대에 뒤집혀 있던 그릇을 하나 꺼내서 냉장고에 들어 있던 계란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혼자서는 다섯 개. 하지만 지금은 두 명이니까 총 열 개였다.
그 뒤 재승은 깜빡하고 꺼내지 않은 고추장을 꺼내 원영이 들고 있는 반찬통 위에 얹고, 멍청하게 서 있는 원영을 바라보며 턱 끝으로 텔레비전의 앞쪽을 가리켰다.
“그거 갖다 놓고 앉아 있어.”
재승의 명령에 원영은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멀어졌다. 그 얼굴을 보는데 문득, 자기 때문에 다쳤다면서 미안하니까 간호를 해줘야겠다고 들러붙은 놈이지만, 그가 예상보다 금방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재승은 그런 그에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놈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할 만큼 했으니까. 게다가 평생 가도 못 갚을 빚을 순식간에 처리하게 만들어 준 놈이니 서운함을 가지기는커녕 평생 감사하며 살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나가 죽으라는 건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
재승이 히죽 하고 웃었다. 은행이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현재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인 감상을 할 수 있는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었다. 이런 감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원영 덕분이리라. 밥 먹으면서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꼭 해두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재승이 가스레인지에 불을 지폈다.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1.8L짜리 식용유를 콸콸 부었다. 그 뒤에는 계란을 차례차례 까 넣었다. 하나, 둘, 셋…….
재승의 프라이팬은 계란 다섯 개가 들어가면 딱 알맞은 크기다. 계란 다섯 개를 모두 까 넣자 기름이 부글부글 끓으며 계란후라이가 순식간에 익어갔다.
계란이 익는 사이, 재승은 서둘러서 싱크대 옆 바닥에 놓여 있는 전기밥솥을 열었다. 하루가 지났다고 약간 누렇게 변한 쌀밥이 밥솥 한가득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고기랑 같이 먹으려고 그날 새로 밥을 안쳐두고 나갔었는데 덕분에 시간을 아껴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모두 다 먹을 것이기에 약간의 변색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테고.
“그러고 보니까 고기가 있었네…….”
재승이 안타깝게 탄식하며 익은 계란후라이를 접시에 수거했다. 그리곤 프라이팬에 새로운 계란을 깨 넣으면서 고기는 저녁으로 먹으면 되겠다고, 그래도 저녁에는 나름 대접을 할 수 있겠다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와 같이 먹겠다고 밥을 차린 지가 도대체 얼마 만인지, 요리는커녕 계란후라이만 10개를 부치고 있는데도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다 익은 계란후라이를 접시로 수거한 재승은 싱크대 선반 위에 있던 참기름 통을 집어 들고 원영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돌아다닌 끝에 식사 준비는 대략적으로 끝이 났다. 텔레비전 앞으로 가지고 온 옥색 선풍기가 돌돌 돌아가며 바람을 일으킨다.
재승은 그 앞에 앉아 미리 가져다 놓은 반찬들을 커다란 볼 안으로 때려 넣었다. 참기름을 붓고 고추장을 퍼 넣은 뒤 숟가락 두 개로 열심히 비빈 다음 들고 있던 숟가락 중 하나를 원영에게 건넸다.
원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수저를 받아 들었다. 재승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른 수저에 잔뜩 묻어 있던 비빔밥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맛있게도 씹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쟨 집에 돈이 많으니까……, 그럼 분명히 곱게 자랐을 텐데……. 하는 생각.
“……덜어 먹을래? 그릇 가져다줘?”
그래서 재승은 당장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무릎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원영이 재승의 바지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원영은 대답을 끝마치기 무섭게 들고 있던 숟가락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숟가락에 붙어 있던 밥을 씹으면서 빨리 제대로 앉으라는 듯 재승을 향해 손바닥을 휙휙 위아래로 내젓기까지 했다.
재승은 그 반응이 어쩐지 떨떠름하다고 느껴졌지만, 별수 없이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두 사람은 커다란 볼을 내려다보면서 밥을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원영은 아무렇게나 섞어서 비빈 비빔밥을 생각보다 훨씬 잘 먹었다. 혹여 원영이 반찬 투정을 했더라면 당장에라도 고기를 구워줬을 텐데. 그럼 고마움도 표현하고, 그 김에 겸사겸사 고기도 먹고…….
아, 맞네. 인사.
퍼뜩 떠오른 생각에 재승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
“저.”
그러나 원영 또한 느닷없이 하고 싶은 말이 생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고, 또 동시에 입을 닫았다. 그리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서로 눈치를 보며 눈을 마주치고 있던 두 사람이 또다시 동시에 피익 하며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재승이 웃은 이유는 알고 지내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서였다. 재승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어쩌다 동시에 운을 떼었다고 해도 대부분 눈치 같은 건 보지 않았으니까.
제일 큰 예로 큰아버지와 관장님이 그렇지 않은가. 그 둘은 눈치를 보기는커녕 무조건 먼저 말을 이어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원영이 제 눈치를 보고 있으니, 재승은 그게 이상하게 웃겼다.
그런데 원영이 웃은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뭐가 웃겼지. 재승이 원영을 바라보자 원영이 숟가락으로 밥을 퍼올리며 말했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 그냥……. 도와줘서 고맙다고. 물론 일이기는 한데, 아무튼 너한테 일 못 받았으면 큰일 날 뻔했으니까.”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감사 인사일 뿐이건만, 그런 인사도 양보를 받아서 하다 보니 괜스레 쑥스러운 것 같았다. 말을 끝마친 재승은 비빔밥으로 입안을 봉쇄했다. 그러자 원영이 씹고 있던 것을 꿀떡 삼켜냈다.
“……저기, 선배.”
“움?”
“제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시작하려는 말이 장황하다. 재승이 눈을 끔뻑이며 어서 말하라는 듯 눈치를 줬다. 원영은 그 뒤로도 한참을 주저하다가 재승이 씹던 음식을 다 삼키고 닦달을 한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게, 아까 계약서 말입니다.”
“응.”
“그 계약서에 쓰여 있는 말이요, 물론 잘 아시겠지만 한 번 더 확인시켜드리고 싶어서요. 선배는 이제 KFC에서 시키는 일로만 돈을 버실 수 있는 거예요. 관장님이 시켜서 스파링에 나갔다, 이런 거 다 계약 위반이니까 절대 하시면 안 되고요. 그리고 계약 기간은 종신 계약…… 선배가 이종격투기에 관련된 일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가는 계약이거든요? 나이가 들어도 이종격투기 코치로 일할 수 있을 거고, 뭐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간다고 보면 되는데, 그러니까 계약을 해지하려면 무조건 125억을 내셔야 한다고요. 다 아실 테지만……. 비서가 발음이 안 좋아서 혹시 제대로 못 들으셨을까 봐요.”
말을 끝낸 원영이 꾸역꾸역 입안으로 비빔밥을 욱여넣었다. 그 순간 챙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원영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점점 얼굴을 굳히던 재승이 그가 말을 끝내자 기어코 들고 있던 수저를 방바닥에 떨어트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재승이 충격을 받았음은 굳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재승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그게 말이 돼?”
재승이 물었다. 재승은 몰랐겠지만, 물론 말이 됐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원영이 재승을 돕고 싶어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완전하게 돕기만 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퍼주기만 하면 쓰나.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이고 수단인데.
대신 KFC의 역사에 다시 없을 9 대 1이라는 퍼센티지를 주지 않았던가. 그 퍼센티지로 KFC가 종신 계약을 해준다고 하면, 이종격투기의 꿈나무들은 너도나도 달려들어 자리싸움을 할 터였다.
물론, 재승은 그 사실 또한 모를 것이 분명했지만.
“선배는 발 묶였다는 거 하나 빼면 전혀, 아무것도 나쁠 것 없는 계약이에요. 나중에 125억 모았다고 나간다고 하지만 마세요. 저랑 해지 안 한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약속 잘 지킨다고도 하셨고.”
입에 음식을 넣고 허둥지둥 말하는 꼬라지가 퍽이나 진실성이 있어 보였다. 재승은 원영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드는 자괴감에 재승이 가만 눈을 감았다.
아무리 위급한 일이 있어도 사인은 함부로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재승이 생에 처음 해보는 아주 똑 부러지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 다음으로 재승이 떠올린 것은 관장님의 얼굴이었다.
‘그놈이 뭐라고 하든 말 듣지 마. 무슨 사기를 치려는지…….’
아아, 관장님. 관장님한테 먼저 도와달라고 해 볼 걸 그랬지. 후회는 빨리해봤자 늦은 거랬다. 늘 무식한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아주아주 무식하고 멍청하고 바보 같은 데다가 어리석기까지 한 계약을 맺은 것 같았다. 무려 평생 가는 계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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