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4. Stupid Helper​​​ (4/12)

로맨틱 파이트(Romantic Fight) 2권

4. Stupid Helper

작은 모니터에 생방송 중인 화면이 송출됐다. 해설자들은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경기는 같은 체급의 선수 둘이 꽤 흥미진진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딱히 이슈가 생길 만한 경기는 아니었다. 때문에 쉬어가듯 해설을 마친 그들은 송출되는 전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음 경기는 어떤 식으로 펼쳐지더라도 이슈가 될 만한 경기였다. 거의 네 경기 분량의 협찬이 이 경기로 쏠렸고, 해설을 하는 해설자들조차도 며칠 전부터 이 경기를 고대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기다려온 경기는 당연히 KFC의 대표 이원영과 무소속 선수 천재승의 경기였다.

순간, 안 그래도 뜨겁던 경기장 안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의 함성이 커졌고, 작은 화면에는 어느새 재승과 원영의 프로필 사진이 반씩 걸린 상태였다.

화면을 확인한 해설자들이 잠시 내려놓고 있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들은 눈을 빛내며 퍽 자주 접했던 그들의 프로필을 훑어보았다. 왼편에 앉아 있던 해설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곧 경기장의 흥분이 그대로 전해지는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서 송출되기 시작했다.

“20xx KFC 주관 이종격투기 무차별급 파이트 전. 오늘 하이라이트 경기는 천재승과 이원영. 39승의 천재승과 18승의 이원영이 승부를 펼칩니다.”

“키 186cm 177.8파운드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의 천재승 선수와 키 192cm 225파운드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 그리고 무차별급의 챔피언 이원영 선수가 다시 만났는데요. 전날 인터뷰에서 두 선수 모두 포부가 남달랐다고 하죠?”

“예, 그렇습니다. 이원영 선수는 천재승 선수에게 다시 한번 KO를 선언했고요, 천재승 선수는 반칙이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기겠다며 경기에 대한 열의를 보였습니다.”

“일전 장석환 선수와의 경기에서 2라운드 KO로 승리를 거둔 천재승 선수는 승리 인터뷰에서 KFC 자체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었는데요. 덕분에 오늘 경기가 더욱더 기대되는 가운데, 네! 천재승 선수가 출전하고 있습니다!”

해설자가 소리침과 동시에 화면 속 프로필 사진이 뒤집혔다. 뒤집힌 화면에는 경기장 내부로 들어서는 재승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오늘도 협찬사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까만 오픈핑거글러브를 낀 모습이었다.

다만 일전 경기 때와는 입고 있는 바지가 달랐는데, 오늘 재승이 입은 바지는 관장이 홍보물을 찍는답시고 그에게 사주었던 바지였다.

그러나 관장이 특별하게 사준 비싼 경기복을 입고 있어도 재승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전 장석환의 경기에서 보았던 여유로운 모습을 지금의 재승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재승의 표정은 딱딱했고, 무표정했다. 그렇게 한눈에 보아도 긴장이 역력한 모습을 한 재승은 팬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며 옥타곤의 문 앞까지 걸어갔다.

화면 속의 재승이 생수로 입을 헹군 후, 경기를 준비한다. 마이크를 든 해설자 중 하나가 잠시 멈추었던 말을 다시금 이어나갔다.

“장석환 선수와의 경기에서 첫 KO 패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섰습니다만, 앞둔 경기에서 곧 만나게 될 이원영 선수 때문일까요? 무척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천재승 선수입니다.”

“천재승 선수의 승리를 응원하는 팬들이 무척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경기장의 함성 소리가 유난히 뜨겁지 않습니까? 두 선수의 경기를 직관하고 싶어 하는 이종격투기 팬들의 성원 덕분에 오늘 경기 티켓이 조기 매진되었다고 하죠?”

“네, 그렇습니다. 오늘 경기처럼 관심이 뜨거운 경기도 참 드물 것 같습니다. 이원영 선수를 이기기 위해서 관장님과 함께 전략을 짰다는 천재승 선수. 과연 오늘 경기에서 어떤 전략을 보여줄지. 아주 기대가 큽니다.”

해설자들의 대화가 잠시 끊어진 사이 모니터의 화면이 전환됐다. 재승이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에 있는 입구로 원영이 가드에 둘러싸인 채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확인한 해설자 중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뒤이어 이원영 선수가 출전하고 있습니다! 이원영 선수는 KFC의 대표라는 타이틀로 먼저 이름을 알렸는데요. 선수 데뷔 이후 패배 기록은 단 1패밖에 없었습니다. 선수들이 답답하게 경기를 하는 것 같아서 직접 출전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는 만큼, KFC의 대표이면서도 선수로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는 이원영 선수가 되겠습니다.”

해설자는 추앙하듯 원영의 소개를 읊었다. 화면 속의 원영은 재승과 비슷한 스타일의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앞섶에 KFC 마크가 커다랗게 쓰여 있는 경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선수로 지낼 때보다 KFC의 대표로 지내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원영이었으나, 경기복 또한 제 옷이 맞다는 듯 퍽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회색 정장 차림을 했을 때와 같이 당당하고 단정한 걸음을 걸으며 원영이 점차 옥타곤에 가까워져 갔다.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던 해설자들은 그가 옥타곤 앞에 도착해 입장 준비를 하는 내내 계속해서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이원영 선수의 첫 패배는 판정패로, 200cm가 넘는 미국계 선수와 단 1점 차이를 보였었는데요. 컨디션이 난조한 상태이지 않았습니까? 그땐 참 아쉬운 패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패배를 이겨내고 역사상 가장 빠른 KO를 성공시킨 선수이기도 한 이원영 선수입니다.”

“그렇죠. 그때 당시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로 천재승 선수와의 경기에서 기록을 세웠던 이원영 선수인데요. 뒤집어서 보면 역사상 가장 빠른 KO패를 당한 천재승 선수이니만큼, 이번 경기의 승리로 꼭 복수에 성공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아주 흥미진진한 경기가 예상되는 가운데, 이원영 선수가 육각 경기장 안으로 입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해설자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모니터의 화면이 전환됐다. 열린 철장 문으로 들어서는 원영과 옥타곤 안쪽에 서 있는 재승의 모습이 동시에 비쳤다. 곧 옥타곤의 철장이 닫혔고, 두 사람은 철장 안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사이로 까만 옷의 심판이 다가갔다. 심판은 두 사람의 중앙에서 한 발자국 뒤로 선 채 한쪽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높게 들어 올린 팔이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두 사람의 주먹이 툭 하고 가볍게 부딪혔다.

“경기 시작됐습니다!”

화면을 보고 있던 해설자가 크게 소리쳤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경기장 내부를 가득 메운 것은 그것과 거의 동시였다.

*

원영은 재승의 주먹이 스치듯 부딪치기 무섭게 순식간에 주먹을 빼고 재승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곤 체격에 맞지 않는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재승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직 시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경기의 중반부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심장 박동이 유난히도 거세게 느껴졌다.

원영은 헐벗은 몸 밖으로 심장이 터져 나가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괜스레 재승의 심장이 있을 언저리를 바라봤다. 눈앞의 재승은 원영을 잔뜩 경계하며 계속해서 탐색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어떻게 파고들어서 어떤 공격을 먹여야 유리할지 고민하는 중일 것이다. 물론 원영 또한 고민은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원영이 고민하는 것은 그를 어떤 방법으로 공격을 하느냐가 아니었다. 저걸 감히 어떻게 때리지. 옥타곤 안에서 하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생각을 하며 원영은 입에 넣고 있는 마우스피스를 조금 더 세게 악물었다.

1라운드는 고작 5분이다. 이상한 고민이나 하며 눈치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다만,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주 커다란 문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재승이 먼저 공격을 시도해왔다.

재승은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원영의 품을 향해 파고들어 왔다. 그렇게 품 안으로 포옥- 안겨 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테지만. 이것은 현실이기에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까만 오픈핑거글러브를 낀 재승의 손이 원영의 얼굴을 향해 날라왔다.

“읏!”

간발의 차로 주먹을 피한 원영의 얼굴 위로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재승이 이번에는 원영의 정강이를 향해 킥을 시도했다. 물론 그 또한 피했으나, 연달아 날아오는 공격이 원영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 선배님 진심이시네. 진심으로 나를 때리려고 하시네.

자신은 이걸 어떻게 때려, 어디를 때려 고민하고 있는 와중인데, 그런 자신을 향해 진심 어린 공격을 퍼붓다니 말이다. 아무리 우위를 정하기로 했기로서니,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더 이상 봐주지 않으리라. 원영이 후욱, 콧김을 내뿜었다. 주먹으로 명치를 쳐서 KO를 시킬까, 장기를 쳐서 KO를 시킬까. 고민하던 원영은 저 얼굴에 차마 주먹질을 하지는 못하겠구나 싶어 재승과의 거리를 벌렸다.

재승은 순식간에 멀어진 원영을 보며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내, 재승은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또다시 원영에게 파고들 준비를 했다. 타닥, 재승이 가까워진다. 그와 동시에 원영은 재승의 키와 엇비슷할 정도로 높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쿵. 원영의 안쪽 복사뼈가 진동했다. 원영의 다리는 짧은 진동을 한 뒤 사뿐히 바닥으로 착지했다. 원영의 앞에는 명치를 얻어맞은 재승이 서 있었다. 재승은 가드를 올리는 것도 잊은 채 한자리에 서서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시야가 흐린 듯 눈이 풀린 그의 옆으로 어느새 달려온 심판이 붙었다. 심판은 원영을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그의 움직임을 막는 손짓을 한 뒤, 양손을 교차해 저으며 원영의 승리를 알렸다.

체감상 아주 긴 시간을 싸운 것 같았지만 원영이 재승을 KO 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8초가 전부였다.

그러나 원영은 승리를 기뻐할 만한 정신이 없었다. 지금 원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 너무 세게 찼다.

재승을 너무 세게 차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

평소에도 승리 인터뷰는 짧게 끝마치는 편이었으나, 오늘 원영의 승리 인터뷰는 인터뷰를 했다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체급 차이가 있어서 이겼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네요.”

승리 소감이랍시고 그 한마디를 내뱉은 원영은 이후 해설자가 무슨 질문을 하든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정신이 영 딴 곳에 가버린 듯한 그의 모습에 결국 해설자도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인터뷰를 끝마친 원영은 꽁지에 불이 붙은 토끼처럼 후다닥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터덜터덜 옥타곤 밖으로 나가던 재승의 뒷모습이 영사기를 틀어놓은 듯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싸움에서 지면 기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원래 싸움이란 게 적당한 힘을 가지고 정확히 급소만 칠 수 있으면 코끼리도 3초 안에 KO 시킬 수 있고 다 그런 건데, 못 이겼으니 억울하기도 억울하겠지.

하지만 체급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조금이라도 몸무게가 더 나가고, 조금이라도 키가 더 크고, 팔과 다리가 길면 길수록 같은 기술을 습득했을 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의 차이를 최소한으로 줄여 더욱 공정한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돕자고 만든 게 체급이라는 등급 제도인 것이다.

그런데 재승은 원영 자신보다 키가 6cm 작았고, 몸무게는 무려 22kg이나 덜 나갔다. 그렇게 근육량의 차이가 크다 보니 재승은 상대적으로 슬림했고, 덕분에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그건, 기를 쓰고 덤벼봤자 원영이 더 유리한 게 당연한 일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원영은 자신의 체구를 십분 활용한 공격만을 주로 사용하였기에, 미들급의 쪼꼬미들과는 공격 양상부터가 달랐다. 물론,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취지의 ‘무차별급’이기는 하다. 하지만 원영이 감히 KFC의 대표로서 말하자면, 그 말은 그냥 돈을 위한 쇼였다. 한 시즌에 경기를 더 늘려보겠답시고 그럴싸하게 갖다 붙인 말이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재승이 그렇게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아니, 도리어 다른 곳에 억울하다고 화를 내야 할 판이었다. 이를테면 일반 경기보다 파이트머니를 더 받는 대신 위험도도 두 배가 되는 경기에 출전을 시켜놓고 월급으로 300만 원을 준다는 그 미친 관장이라든가……, 그냥 미친 관장에게.

이렇듯 원영은 쉬지 않고 재승의 생각을 하며 대기실에 딸린 샤워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에 걸린 시간은 고작 3분. 그 3분 뒤에는 2분 만에 옷을 갈아입었고, 그다음에는 1분 동안 달음박질을 쳐서 야외 주차장으로 향했다.

선수들과 경기 관계자들이 차를 대는 야외주차구역에는 대부분 고급 차량들이 주류를 이뤘다. 하얗게 번쩍, 노랗게 번쩍, 기타 등등으로 번쩍번쩍한 차량 속에서 원영은 자신의 까맣게 번쩍이는 차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원영의 차 앞에는 파랗게 구질구질한 용달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주류 속의 비주류는 두드러지기 마련이라, 재승이 용달트럭을 세워놓은 곳은 그 위치만 다른 차원에 있는 듯 무척이나 눈에 띄게 보였다

덕분에 저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원영이 덕을 봤다. 굳이 힘들게 번호판을 찾을 필요도 없이 재승의 차 앞에 자신의 차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재승이 용달트럭을 타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재승의 차를 바꿔주고 싶지 않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지만.

시동을 켜지도 않고 가만히 재승의 차를 바라보던 원영은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었다는 듯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재승이 도망이라도 쳐버린다면, 그런 그를 무슨 수로 봐야 하나 싶었더랬다.

자신이 준비를 빨리한 덕에 도망을 못 친 것이든 아니면 도망을 칠 생각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든. 뭐든 간에 재승은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을 마친 원영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원영은 제대로 잠기지 않았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새로 잠그며 아마도 재승이 올 듯 보이는 방향을 차창을 통해 계속해서 살폈다.

그렇게 양아치같이 풀어헤치고 있던 복장이 평소와 같이 깔끔해지고, 짧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되었을 즈음. 멀리 커다란 경기장 건물 안쪽에서부터 터덜터덜 원영의 차가 세워져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릎 위쪽까지 올라오는 체크 무늬 반바지에 까만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삼선 슬리퍼를 직직 끄는 남자.

대체로 화가 나 있으며 무표정한 얼굴을 일삼던 그였으나, 지금 그는 무표정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아 보였다. 재승은 그저 우울해 보였다. 딱하게도. 차창을 통해 재승을 확인한 원영이 서둘러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원영은 당당히 재승의 앞을 막고 섰다. 하지만 막상 그의 앞에 서자 말문이 막혔다. 가까이서 본 재승은 오늘도 역시나 푹 젖어 있었다. 그리고……. 저번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향긋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원영은 알았다. 그는 집이 아닌 이상에야 절대로 개인 비품을 챙겨 들고 다니면서 샤워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한테서만 이다지도 좋은 냄새가 나는 이유는.

원영은 멍청한 표정으로 재승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그런 원영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였다.

“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재승이 어느새 원영을 올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여름에 한층 가까워진 지금의 날씨는 밤이 되어도 후덥지근하기만 하다. 그런데 목소리 때문인지 원영만 홀로 추웠다. 원영은 표가 나지 않도록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식사하러 가실래요?”

위로는 해봤자 도움도 안 된다는 생각하에 내뱉은 질문이었다. 물론 밥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 이후의 건강 체크였고, 원영은 오늘도 병원은 안 가느냐는 말이 먼저 떠올랐었다. 하지만 재승이 간다고 할 것 같지가 않았다. 도리어 화를 낼 테지. 그래도 오늘만큼은 절대. 밥을 거절당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너랑 왜?”

재승이 진짜로 의아하다는 듯, 또 기분 나쁘다는 듯 묻는 것이다.

원영은 혹시나, 하며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곤 아닐 거야, 하며 흔들리는 동공을 차마 숨기지도 못한 채 재승에게 대답했다.

“……저한테 문자 하셨잖아요.”

그 대답에 재승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리곤 원영을 지나쳐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원영은 재승을 따라 쭐레쭐레 그의 용달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멍청했던 지난날의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Fuck You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Fuck You. 넌 천재승을 얕봤어, 인마! 이 사람이 Fuck You 써보라 그러면 스펠링이나 제대로 알겠냐! 근데 뜻이 뭐 어쩌구 어째? 에라이, 나가 뒈져라, 등신아.

하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을 욕해봤자 이미 늦은 건 늦은 것이었다.

아주 늦은 깨달음이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원영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먼저 재승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는 사실. 게다가 애석하게도 재승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여태까지의 착각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해보자면, 원영은 사람을 먼저 좋아하게 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래, 지금 보니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 같았다.

과거 원영이 미약하게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대체로 원영에게 이미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원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기까지 하는 경우는 겪어본 일이 없었다. 재승을 만난 이후부터 짝사랑에 소질을 보이고는 있지만, 짝사랑의 역사가 없다 이 말이다.

그래서 원영은 짝사랑을 할 때 자신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몰랐다. 객관성이 아주 없는 편이라는 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래도 천재승은 게이가 맞겠지? 이상형도 그때 말했던 것처럼 내가 맞겠지?

같잖은 행복회로를 돌리는 원영의 얼굴이 무척이나 희망에 차 보였다. 하지만 원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든 말든, 재승은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글로브 박스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드는 중이었다.

도톰한 입술에 담배를 문 채 자동차에 키를 꽂아 넣는다. 드드드드득,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자동차에 시동이 걸렸다. 재승은 그제야 차문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원영을 바라봤다. 재승이 문을 막고 서 있는 원영을 향해 말했다.

“비켜.”

재승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을 때마다 그의 입술에 걸쳐진 담배가 까딱까딱 춤을 췄다. 고작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냈을 뿐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평소보다 적의가 없다고 느껴졌다.

덕분에 원영은 느닷없이 무서웠다. 정말 귀찮아서, 혹은 정말 관심이 없어서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건가 싶었다. 만약 오늘이 지나버리면 상큼하고(?) 우연적인(?) 만남 같은 것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자신은 재승처럼 어려운 남자를 꼬실 수 있는 방법 따위, 전혀 알지 못했다.

“…….”

원영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답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문 앞에서 비켜서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난번처럼 재승이 몸을 밀면 어쩌나 싶어서 이번엔 몸에 힘을 주기까지도 한 원영이었다.

다행히도 재승은 원영을 밀치거나 또다시 가라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원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담배에 불을 붙였을 뿐이었다. 담배를 한 모금 쪼옥 빨아들인 재승이 왼손을 들어 담배를 손가락에 걸었다. 어쩐지 고뇌하는 표정을 한 그가 원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다 피우…….”

빠아아아아아앙-!

느닷없게도 클랙슨이 끊임없이 울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원영은 한동안 멍했다. 그러니까…….

재승이 쓰러졌고, 재승이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것이 현재 원영의 눈에 비치고 있는 풍경이었다.

빠아아아아앙-! 계속해서 들려오는 무지막지한 소음에 귀가 다 먹먹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재승의 손가락에서 떨어져 나온 불붙은 담배가 데굴데굴 굴러 원영의 구두에 톡 하고 부딪쳤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든 원영은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구급차를 부르고 난 뒤엔 무작정 운전석 위의 재승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원영은 재승을 공주님처럼 안아 든 채 멍하니 구급차를 기다렸다.

제때 검진을 받지 않더니, 결국은 이 사달이 난 거지. 관장 새끼는 아무리 쓰레기 새끼라도 그렇지, 돈 벌어다 준 선수 관리도 제때 안 해주고 도대체 여태까지 뭘 한 거야? 그리고, 그리고……. 이거 내가 잘못 차서 그런가? 나 때문인가?

원영의 얼굴이 곧 죽을 사람처럼 시퍼렇게 질려갔다.

재승과 원영을 실을 구급차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약 3분 뒤였다.

*

“뇌에……일 것 같습니다.”

“그럼 다른 이상은…….”

“아무래도 여기서는 확인이 어렵…….”

차가운 듯 지성이 넘치는 여자의 목소리와 울림 좋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들이 나누는 뇌가 어쩌구해서 저쩌구했다는 대화는 의학 드라마를 틀어놓았을 때 으레 들려오던 대화의 내용과 얼추 비슷한 감이 있었다.

잠들기 전에 늘 텔레비전을 틀어놓기는 한다. 뭐라 그러는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의학 드라마 같은 건 잘 보지 않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재승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떠올렸다. 깜빡, 깜빡, 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뿌옇고 하얗게 안개가 낀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분명 잠에서 깨어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잠에 든 기억은커녕 집에 도착한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굳이 말해 뭐하나 싶지만, 재승으로서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삐용삐용삐용.

대충 정신을 차린 재승은 그제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게다가 그는 어딘가에 고정된 채 누워 있는 상태였다. 고정된 몸은 이따금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코와 입을 막고 있는 마스크 같은 무언가에서는 일정한 속도로 무엇인지 모를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다리 부근에서는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사이좋은 대화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다.

“당장은 알 수 있는 게…….”

“그럼…….”

모든 상황을 겪고 있는 재승의 감상으로 말하자면, 재승은 외계인에게 납치라도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 묶어놓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심지어 경기에서 져서 그런가, 평소보다 기운이 없는 것도 같았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구급차에 탈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재승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언제 도착합니까?”

“최대한 빨리 가고 있어요.”

“……아직 멀었습니까?”

“…….”

남자가 일방적으로 묻고, 여자가 일방적으로 대답을 하는 형태의 대화였다. 그런데 여자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대화는 언제 이어지고 있었냐는 듯 뚝, 끊어지고 말았다. 재승은 방금들은 대화만으로는 상황파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일어나야 할 것 같다. 재승이 묶여 있는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불쑥, 두 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두 개의 얼굴 중 하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였고, 또 다른 하나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사기꾼이었다. 그 두 사람은 눈뜬 재승을 확인하기 무섭게 동시에 소리쳤다.

“선배!”

“환자분!”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도 본 듯 재승을 부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급박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재승은 언제 발버둥을 쳤냐는 듯 얌전하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그러니까 재승의 기준에서 의사 선생님으로 보이는 그녀가 재승을 내려다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정신이 드세요?”

난생처음 받아보는 위급 환자 취급에 재승은 대답도 차마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그냥 정신이 든 게 아니라 아주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정신이 차려진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 선생님이 여자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낯가릴 준비를 끝낸 재승이 안 그래도 다물고 있던 입을 더욱더 꾹 다물었다.

그러든 말든 의사는 재승의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누워 있는 재승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 동공에 불빛을 비춰보았다. 전자 체온계로 체온을 재고, 팔목에 혈압계를 둘러 혈압까지 재고 나자 의사는 원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구운동 정상이시고. 체온도 괜찮으시고. 맥박도 혈압도 모두 정상이시네요. ……환자분 혹시 어지러우세요?”

중요한 결과는 모두 원영에게 말을 한 의사가 다시 재승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재승은 말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낯을 가려서 입으로 말을 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었지만, 기분이 묘했던 탓이 더 컸다.

자신과 하등의 관계없는 사기꾼이 자신의 보호자 행세를 하고 있으니까. 근데, 진짜 보호자가 있었던 시절이 너무 까마득해서. 솔직히 조금은 좋은 것도 같았다.

“그럼 잠깐 일어나서 앉아 보실까요? 구급차에 어쩌다가 탔는지, 기억나세요?”

의사는 친절한 목소리로 재승에게 물으며 재승을 동여매고 있던 벨트와 끈을 풀어주고, 눕혀져 있던 침대의 레버를 돌려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멀뚱멀뚱 의사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재승은 대답 없는 그를 향해 두 사람의 시선이 모이고 나서야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오늘은 평소와 같이 일찍 일어나서 체육관을 갔고, 열심히 몸을 풀었다. 그러다가 관장님이랑 마지막 트레이닝을 했고, 경기장에 가서 경기를 치렀다. 경기에서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생애 두 번째 느껴본 KO의 느낌은 재승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재승은 답지 않게 무력에 빠졌다. 우울한 데다가 하나도 기운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관장은 그런 재승에게 ‘에휴, 버티기라도 해 봐야지 버티는 것도 못 해?’라고 말했다. 그리곤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때문에 재승은 오늘도 대기실에 홀로 남았었다. 이긴 날은 기분이라도 좋았는데, 오늘은 이긴 날보다 더 외롭더라.

거기까지 생각한 재승은 잠시 원영을 노려봤다. 이게 다 이원영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놈이 세다는 건 알고 있었고, 이미 경험도 해봤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었다. 긴장하고 있는 만큼 호각으로 다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디 하나 터트려주기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재승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호자는 무슨. 역시 하나도 안 좋아.

어리둥절한 표정의 원영을 보며 인상을 확 구긴 재승이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회상을 이었다.

아니, 이으려고 했다.

근데, 개인 샤워실에서 찬물로 샤워를 하는 것에서 뚝. 밖을 나와 걷는 것에서 뚝. 차에 앉아 이원영의 얼굴을 본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하지가 않았다.

재승은 원래 뒤끝이 긴 만큼 (몸으로 겪은 일에 대한)기억력만큼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기억력조차 좋지 못한 것 같았다.

“…….”

재승은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재승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던 의사는 자기 혼자 무엇을 알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말했다.

“환자님 한번 웃어보시겠어요?”

뜬금없는 의사의 말에 재승이 도리어 표정을 굳혔다. 의사는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해 웃는 얼굴을 보여주며 재승에게 어서 해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힐끗 원영을 보자 원영도 의사를 따라 하라는 듯 희한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어째서 하라고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원영이 시켰더라면 하지 않았겠지만. 재승은 의사가 시키니까 일단 웃었다. 물론, 의사는 ‘그녀’였기에, 재승의 웃는 얼굴이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재승은 한쪽 얼굴로만 웃었다.

“예……. 팔 이렇게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따라 해보실래요?”

어쩐지 심각해진 의사가 아령을 들 듯 양팔을 위아래로 들어 올렸다 내려 보이며 재승에게 말했다. 재승은 무척이나 손쉽게 의사의 동작을 따라 했다. 심각했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 지령을 내렸다.

“지금 제가 하는 말 잘 듣고, 한번 따라서 말씀해 보시겠어요? 나의 학업은 나날이 일취월장한다.”

“나의…… 학업은…… 나날이……. 일치…… 얼…… 짱……? 한다.”

재승이 의사의 말을 어눌하게 느릿- 느릿- 따라 하고는 그녀의 눈치를 봤다. 물론 그녀가 말한 단어 중 정확히 모르는 단어가 있었던 탓이었다. 그게 의사인 그녀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재승만 몰랐다.

마침 병원의 응급실 앞에 도착한 구급차의 사이렌이 꺼졌다. 의사는 재승이 누워 있는 침대의 레버를 다급하게 내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원영에게 말했다.

“도착했네요. 한시라도 빨리 검사부터 들어가죠.”

*

재승이 누워 있는 응급실 침대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응급실에 들어간 재승은 제일 먼저 간호사가 넣어준 환자복을 원영의 등쌀에 못 이겨 갈아입었고,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 몸이 뜨거워지는 약물을 주입당하며 이상한 기계 안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고 나서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무섭게 느껴지는 검사들을 잔뜩 당한 참이었다.

재승의 소감으로 말하자면, 외계인에게 납치를 당하다 못해 외계인의 실험대 위에 올려진 기분이었다.

병원 내부의 의료진들은 하나같이 심각하고 바빠 보였다. 때문에 재승은 자신이 병원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도대체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보호자를 자처한 원영 덕분에 자신이 쓰러졌다는 것만큼은 인지를 한 재승이었다.

‘환자가 이종격투기선순데, 오늘 경기를 했습니다. 경기 중에 머리를 아주 세게 맞았어요. 차까지 잘 걸어와서는 차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병아리…… 약 먹은 병아리처럼……!’

재승의 보호자를 자청한 원영은 간호사나 의사가 재승의 침대 옆으로 올 때마다 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리고 모든 검사가 끝난 지금. 그는 재승의 옆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나마 눈치 보지 않고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원영에게조차 자신의 상태를 물어보지 못한 것이다.

재승은 원영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건강 상태도 궁금하기는 하다만, 벌써부터 병원비가 걱정되어 죽을 맛이었다.

쓰러지기는 했어도 아프지 않은 걸 보면 죽지는 않을 모양인 것 같은데. 그럼 결과만 듣고, 바로 집에 가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이건 다 맞아야 하겠지? 근데 진짜 병원비는 얼마가 나오려나.

손목에서부터 시작돼 침대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링거 줄을 바라보던 재승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살다 살다 자신의 병원비를 걱정해 보기는 또 처음이라. 이런 날도 다 있구나 싶어서.

그리고 그 순간 재승의 침대 주변을 빙 두르고 있던 커튼이 걷어졌다. 커튼을 걷은 사람은 다름 아닌 원영이었다. 하지만 원영은 침대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커튼만 걷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신 그의 뒤로 따라붙은 두 명의 의료인이 재승의 침대로 바투 다가왔다. 그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재승의 침대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침대가 움직이자 커튼 옆에 서 있던 원영도 침대에 따라붙었다. 원영의 뒤에는 재승과 일면식이 있는 비서도 함께였다. 비서는 앞만 보며 걸음을 걷다가, 가끔 안쓰럽다는 눈빛을 하며 힐끗 재승을 내려다보았다.

때문에 재승의 불안감이 상승했다.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던 재승이 개미 같은 목소리로 원영을 부르기 시작했다.

“야, 야, 야.”

몇 번의 부름에도 원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정면만 바라본다.

“야, 야, 이원영.”

다시 몇 번 더 원영을 부르자, 부른 사람은 돌아보지 않고 대신 부른 사람의 비서가 재승을 내려다봤다.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재승을 바라보다가, 그 앞에서 걷고 있는 원영의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원영이 성난 황소처럼 으르렁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비서는 놀란 듯 흠칫거렸지만, 이내 원영을 향해 사무적인 목소리를 냈다.

“……부르십니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편 비서가 침대를 향해 다소곳한 손짓을 했다. 잔뜩 찌푸린 원영의 눈이 비서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곤 재승의 얼굴을 봤다. 원영은 자신이 언제 화 같은 걸 냈냐는 듯 사르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르셨어요?”

“나 어디 가? 나 많이 아프대?”

“……심각하십니다. 입원하실 거예요.”

원영이 작은 목소리로 재승의 질문에 대답했다. 의료인들이 미는 침대는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타이밍이 좋았던 것인지 재승의 침대는 곧장 엘리베이터 안에 실렸다. 의료인 중 하나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다. 재승이 다시 원영을 불렀다.

“야, 야.”

“네.”

“어디가 어떻게 심각하대? 그리고 병원비 많이 나올까?”

“……상태가 어떠신지는 병실 올라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병원비는 제가 냅니다.”

“아…… 왜?”

“저 때문이지 않습니까. 책임을 다해야죠.”

“…….”

재승이 오,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뒤 재승은 배 위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눈만 멀뚱히 깜박거렸다. 병원비 걱정이 줄었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병이야 뭐. 심각하다고는 하지만 아프지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 책임을 다하기까지 한다는데 이원영이 대충 치료를 해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치료받고 나면 운동하는 것도 문제없겠지.

재승은 편안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땡, 하는 알람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린 것은 그것과 동시였다.

*

재승은 침대가 안정적으로 멈춰 서기 무섭게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승의 침대가 들어간 곳은 재승이 생전 처음 보는 1인실이었다.

1인실은 원래 다 그런지 몰라도 방 한번 더럽게 넓었다. 커다란 창문도 있고, 커다란 냉장고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소파도 있고…….

재승은 오늘따라 처음 겪어보는 일도 참 많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집보다 좋은 병실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사이, 재승을 따라 들어온 의료인들이 재승의 링거를 확인하고 재승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가르쳐 줬다.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비상벨을 눌러주세요. 3시간마다 간호사가 오는데 자리를 지키고 있어주세요. 외출을 할 때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주세요.

기타 등등 제대로 듣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은 내용의 주의사항들이었다. 곧 이야기를 끝마친 의료인들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재승은 멀어지는 의료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넓은 병실의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원영과 원영의 비서는 넓은 자리를 놔두고 굳이 병실의 한쪽 끄트머리에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의료인이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열심히 대화를 나누더니, 재승이 눈길을 주기 무섭게 대화를 멈추기까지 했다.

만약 이 일을 겪은 것이 재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따돌림 혹은 무시와 같은 단어들을 생각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그런 대우가 익숙한 편이었다. 게다가 원영과는 친하지도 않았고, 그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던 재승은 그저 덤덤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비서가 원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저는 병실도 확인했으니 다녀오겠습니다.”

그 인사에 원영은 ‘그래, 가봐.’ 하고 짧게 대답했다. 대화가 끝날 만해서 끝났다는 것을 과장되게 알리는 듯한 인사였다.

그 뒤 비서는 재승을 향해서도 고개를 꾸벅인 뒤, 뚜벅뚜벅 무거운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때문에 재승만 괜스레 어리둥절했다.

물론, 어리둥절한 것은 재승만의 사정이다. 1인실의 문은 재승을 기다려 주는 것 없이 쾅 하고 닫혀버렸다. 마침내 병실 안에 원영과 재승 단 두 사람이 남은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원영이 어딘지 모르게 굳은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재승은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앉아 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상기해냈다.

놈의 말로는 상태가 심각하다고.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심각한지는 모르겠지만 병원비를 내준다는 놈이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병실을 구경할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건만,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왔다.

원영은 어느새 재승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승이 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언제 와?”

“……내일 아침에 오실 겁니다.”

“심각하다면서. 내일 아침에 와도 나 괜찮은 거야?”

“원래 다 그렇습니다. 심각하든 심각하지 않든. 그…… 링거주사. 지금 맞고 있는 링거주사가 약이에요.”

“아…….”

재승이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위를 올려다봤다. 팔을 통해 주입되고 있는 약액은 어느새 반 정도가 비워진 상태였다. 그럼 이것만 다 맞으면 괜찮아지는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좋은 병실에 굳이 입원할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다.

재승이 다시 원영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친 원영은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문 채 재승의 시선을 받아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눈만 마주치던 그가 재승의 시선을 피하며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었다.

“……선배 상태 말입니다. 그…… 머리에 충격이 가서…… 터졌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터져? 뭐가?”

“…….”

재승의 물음에 원영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힐끗힐끗 눈치를 봤다. 똑똑하고, 돈도 잘 벌고, 싸움도 잘하는 원영은 만날 때마다 유독 그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자신의 눈치를 봤다. 그러니 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재승은 지금만큼은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원영이 자신의 눈치를 볼 이유는 무엇일까. 재승은 답지 않게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백날 묵사발을 만들어 놓아도 병원비 내놓으라는 상대편 선수는 없었는데 원영이 병원비를 내주겠다고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마 엄청나게 심각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 뇌가 다치면 아프지는 않다는 말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재승이 원영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뇌?”

“예에……. 그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뭐야! 그럼 나 어떻게 돼?”

재승이 기겁을 하며 큰 소리를 냈다. 자신이 아무리 지식이 부족해도 뇌가 다치면 큰일이 난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선수 중에 뇌를 다쳐서 돌연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은 멀쩡하지만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원영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런 재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느닷없이 머리를 붕붕 저었다.

“지금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냥 그거 다 맞고, 푹 쉬시면 됩니다.”

“어어, 진짜? 하루? 하루만 쉬면 돼?”

“아, 아뇨. 한…… 몇 개월……?”

말꼬리를 올리는 원영의 목소리가 영 자신 없다는 듯 들렸다. 때문에 잠깐이나마 가벼워졌던 재승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몇 개월 동안 아파서 쉬어야 한다니. 그럼 안 그래도 시즌을 말아 먹었는데, 관장님한테 월급을 받는 것도 눈치가 보일 것 아닌가.

물론 평소의 재승이라면 관장님이 돈을 적게 주더라도 그 돈 받고도 생활이 가능할 거라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재승은 어제 큰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아주 오랜만에 큰아버지가 재승을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재승이 보고 싶어 하던 큰집 아이들은 집에 없었다. 하지만 재승은 큰어머니가 만들어준 맛있는 매운탕을 대접받았다. 칭찬도 잔뜩 받고, 예쁘게 깎은 맛있는 과일도 후식으로 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재승을 잔뜩 대접해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간곡하게 부탁을 해온 것이다.

‘집세 도와달라고 한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래서 우리도 미안하게 생각은 한다. 그런데 이번에 느이 큰아버지가 사업을 조금 크게 키웠다가 자금이 모자라서…….’

그러니까, 일전에 큰아버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생활비 할 돈밖에 남은 돈이 없다고 한 말을 믿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승이 당장 생활비 할 돈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당연히 사실이었다. 하지만 노각오이 저축은행에 1600만 원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재승은 어차피 자신이 그 큰돈을 쓸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 돈으로 빚을 갚든, 큰집을 주든. 줄 때 주더라도 144만 원을 받고 나서 주고 싶었기에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경기에서도 멋없게 졌고 때문에 관장님한테 부탁할 수도 없어졌다.

역시 144만 원은 포기해야겠네.

재승이 못내 아쉬운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재승은 뒤늦게 자신의 생활에 대한 걱정을 이어나갔다. 병원비는 이놈이 내준댔고, 그럼 생활비랑 이자만 걱정하면 되는데…….

“나 퇴원은 언제 해? 약 다 맞으면 뇌는 안 꿰매도 되는 거야?”

재승의 심각한 물음에 원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원영은 대답 대신 화들짝 놀라며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원영이 재승을 향해 핸드폰 화면을 보이며 말했다.

“저 잠시만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전화가 와서……. 돌아와서 말씀드릴게요!”

분명 원영이 보여준 화면에는 불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으나 밖으로 나가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도망치는 것 같아 보였다. 재승은 원영의 손에 의해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 위에서 대롱거리고 있는 링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하긴, 날 속여서 무슨 이득이 있겠냐. 머리도 다쳤다는데.

당장 경기도 못 뛰는 선수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한없이 우울하고 막막했다. 관장님한테도 전화를 해야 할 테지만…….

재승은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으나 꺼낸 핸드폰을 그저 머리맡에 내려놓기만 했다. 오늘은 시간이 늦기도 했고, 괜히 걱정하실 수도 있으니 전화는 내일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물론 자신 또한 괜찮았고 말이다.

*

“어어, 양 비서. 어디야?”

병실의 문을 닫고 나온 원영은 소리를 죽여 전화를 받으며 성큼성큼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의 전화를 건 사람은 말은 안 하고 봉지를 부스럭대기 바빴다. 평소라면 화를 내거나 전화를 끊어버렸을 원영이었으나, 지금의 원영은 무척이나 너그러운 상태다.

비서가 원래도 일을 잘하는 편이기는 하다만, 오늘은 전화하는 타이밍까지도 아주 예술이었다 할까.

원영은 칭찬받아 마땅한 비서를 가만히 기다렸다. 곧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비서가 허둥지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확인 좀 하느라고…… 이제 도시락 샀습니다. 병실에서 쓸 물건까지 다 사고 나면 대략 10분 이내로 도착할 것 같은데요.

“그래, 최대한 빨리 와. 기사는? 기사 잘 났어?”

-예. 인터넷 스포츠 메인은 죄다 천재승 선수 기사로 바뀐 상태입니다. 저녁 10시에 방송으로도 나간 건 Y뉴스, N뉴스, J뉴스 세 방송사고요. ……정정기사는 언제쯤 내보내라고 할까요?

“아직 고민 중이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일단 빨리 와.”

짧은 통보를 끝으로 원영은 비서와의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원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민의 내용은 당연히. 재승의 퇴원 날짜를 도대체 언제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인가였다.

그렇다. 원영은 일단 저지르고 본 것이었다. 세상만사 어찌 생각대로만 흘러가겠느냐마는, 재승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관장이 그를 버릴 것 같아서 일단 저질렀다. 고로, 재승은 지금 아주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물론, 재승이 쓰러진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원영 또한 재승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무척 놀랐었고.

하지만 CT 확인 결과, 재승의 뇌는 깨끗했다. 그러나 원영이 재승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재승의 머리는 터졌다. 뇌가 아니라 뼈 옆의 혈관이.

다르게 말하자면 재승의 머리에는 지금 아주 예쁘게 혹이 나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몰라도, 눌러보면 꽤나 아플 터였다.

‘머리뼈가 아주 튼튼하신 것 같네요.’

걱정에 눈이 뒤집어져가던 원영을 보며 의사가 방긋 웃는 얼굴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의사가 이어 말하기를,

‘경미한 뇌출혈…… 같은 것도 전혀 없으시고. 쓰러졌으니까 가볍진 않고, 무거-운 뇌진탕이었던 것 같습니다. 큰 충격이 가해진 상태에서 담배를 태우셨다고 하셨는데, 아마 체내 이산화탄소 농도가 갑자기 높아져서 쓰러지지 않았나 싶고요. 상태 봐서 내일 퇴원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참 다행이네요.’

라더라.

재승이 아프면 자신의 마음도 아프기에 원영은 안심했다. 그리고 마음이 안정되기 무섭게 굿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기회를 잡았다.

그런고로 원영은 운 좋은 승리자였다. 오늘만큼은 재승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로또 꼴찌 정도의 운 좋은 승리자. 나머지는 또 다른 운, 혹은 그의 능력에 달린 상태였다.

*

얼마 뒤 비서가 양손 가득 무언가를 주렁주렁 매단 채 병원 입구로 들어왔다. 짐을 건네받은 원영은 비서에게 퇴근을 알렸다. 그리곤 돌아가려는 비서를 향해 뒤늦게 이번 달은 보너스를 두둑이 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했다. 비서가 없었다면 이렇게 빠른 일 처리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이 얼마나 유능한 비서인지. 그러니 비서도 무언가를 누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원영은 병실에서 도망치듯 나왔다는 것을 어느새 잊은 사람처럼 서두르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은 잊은 것이 맞았으나, 아직까지 적어도 반 정도는 잊지 않은 상태였다. 이를테면, 자신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못 해도 구만 리 이상 남아 있다는 것.

그래, 그래서 서두르는 것이었다. 아직 갈 길은 멀었는데, 같이 있을 시간이라도 1분이나마 더 늘려야 할 것 같아서.

원영은 일단 내일 아침까지는 정정기사를 내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퇴원도 내일 가봐야 알 것 같다고, 재승에게는 그렇게 말을 해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원영이 막 정리한 생각을 잊지 않도록 세 번 정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재승의 앞에만 서면 답지 않게 거짓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혹여 실수라도 저지르면 아주 큰일이니까 말이다.

아까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던지.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 나가는 집안에서 자라기는 했다만, 그런 것치고 말을 못 하지는 않는 편이었는데……. 정말 어쩌다 반하게 된 걸까. 느닷없이 반해 버리기엔 천재승은 누가 봐도 그저 잘생긴 남자일 뿐인데 말이다.

뭐든 열심히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순하고, 요정처럼 맨날 맨발로 돌아다녀서 반했을까?

원영은 문득, 자신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재승을 떠올렸다. 그러니 느닷없는 감상에 젖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품에 안아보니 무게도 들어 올리기 딱 좋기는 하더라. 게다가 냄새도 향긋했고, 옷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조차 따끈따끈하니 좋았다. 쓰러져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퍽 고왔었지…….

그렇게 짧은 감상을 끝낸 원영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반할 만해서 반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보다 얼굴을 따졌던 모양이라는 깨달음도 얻은 원영이었다.

……근데 관장한테는 잘만 속는 사람이 왜 나한테만 그렇게 까다로운 거야.

일순 불퉁한 생각이 튀어나와 원영이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그때 땡 하는 엘리베이터의 알림이 울렸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재승이 있는 병실 층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더 이상 생각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원영은 괜스레 손에 들린 봉투들을 확인했다.

어차피 잘 속는 사람이야. 괜히 과한 디테일 살리다가 멸망의 길을 걷지는 말자, 이원영. 정신 차리고.

속으로 다짐 아닌 다짐을 하는 원영의 표정이 무척이나 비장했다. 이제는 실전이니까. 재승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려면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원영이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기세로만 봐서는 오늘 내로 연애는 물론 결혼까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작게 심호흡을 한 원영은 병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넓은 병실의 한가운데,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재승이 보였다.

재승은 여태 링거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멍하니 치켜들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내리는 그의 표정이 꼭 오늘내일하는 시한부와 같았다.

원영은 잠시 넋을 놓고 재승과 눈을 마주쳤다. 어쩜 저렇게 꼭 안아주고 싶게 생겼는지. 콩깍지가 단단히 씐 원영의 눈에는 지금 재승이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여리고 연약해 보였다.

“너 언제 가?”

“…….”

그러나 원영의 어린 밤비는 그가 돌아오기 무섭게 그를 어딘가로 보내려 들었다. 덕분에 원영은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다.

그래, 천재승은 시한부가 아니다. 그가 누구인가. 의사도 인정한 아주 튼튼한 머리뼈를 가진 사내. 평소의 행실은 경기가 끝나도 절대 검진을 받지 않는 용가리 통뼈에 둔치였고, 머리가 터져도 카메라 앞에서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상남자였다.

그래도 역시……. 무거-운 뇌진탕에 혹이 나기까지 했으니까. 원영의 눈에 가엾고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안 가?”

이어지는 재승의 물음에 원영이 뻣뻣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원영은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느끼며 침대 옆에 붙어 있는 밥상을 올려줬다. 그 위에 도시락이 가득 담긴 봉투를 내려놓은 그가 다른 봉투에 든 잡다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며 말했다.

“저 때문이니까 계속 같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병원비 내야죠.”

“아…….”

재승이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일단 하나 넘겼어! 원영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영은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관리하며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베개 두 개, 무릎담요 두 개, 세면용품도 두 개. 신혼여행 가는 커플의 물건들처럼 물건들이 하나같이 한 쌍을 이뤘다. 그걸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빈 봉투를 곱게 접은 원영이 힐끗 재승의 얼굴을 훔쳐봤다. 재승은 원영이 꺼낸 물건에는 눈길 한번 안 주고 밥상 위의 봉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느껴보려는지 재승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분명 말은 안 하고 있는데 ‘배고파.’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고기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지금 먹을까?”

“네. 드세요.”

“오…….”

재승이 그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분주하게 봉투 속의 도시락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종류별로 나오는 고기반찬에 재승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비서가 오늘따라 일을 어찌나 잘했는지, 그냥 고기라고만 말했을 뿐인데도 고기의 종류며 양념이 모두 달랐다.

재승은 그중 갈비 도시락을 제 앞에 놓고 나머지 도시락으로 산을 쌓았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하나씩 도시락의 수를 헤아려본 재승이 원영을 보며 딱, 젓가락을 쪼갰다.

“나도 도시락 여섯 개는 무린데.”

“……그중 한 개는 제 겁니다.”

“아…… 입맛이 없나 봐?”

재승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입안 가득 쌀밥을 욱여넣었다. 그리곤 고기를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는데, 딱히 원영의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는 눈치였다. 원영도 딱히 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고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좁은 밥상 위에 놓여 있던 도시락 다섯 개를 바닥으로 내리고, 그다음엔 하나 남겨놓은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딱, 원영의 나무젓가락이 반으로 갈라졌다. 원영이 고른 도시락은 애석하게도 오늘마저 닭이었다.

그러나 원영은 몹시도 행복했다. 이 자연스러운 겸상이라니. 비서가 사 온 용품들 때문에 안 그래도 비좁은 병실 침대는 더욱 비좁았고, 그 비좁은 침대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는 느낌이란 정말이지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밥을 먹이니까 딴생각도 안 한다. 재승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원영이 말실수를 하게 될 확률도 줄어드는 것이 당연했다. 원영은 이 평화로운 상태가 쭈욱 이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근데.”

“네……?”

“나 그래도 저번보다 10배 넘게 버텼다. 좀 더 훈련하면 이길 수도 있어.”

재승이 힐끗 눈치를 보듯 원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또 열심히 도시락을 먹는다. 덕분에 원영은 잠시 눈을 키웠다. 재승이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것이 의외이기도 했고, 사람이 이다지도 귀여울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해서 놀라웠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무려 ‘10배’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크흑, 똑똑하고 기특해. 오늘따라 나한테 적의도 없는 것 같아.

원영의 입술이 삐죽삐죽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원영은 혹여 비웃는다는 누명을 쓸까, 젓가락을 쥔 쪽의 반대편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원래도 대단하시지만, 노력까지 하시는 모습 존경합니다. 사실 제가 체급 아니었으면 실력으론 선배 절대 못 따라가죠.”

어떻게 말하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나름 고심해서 내뱉은 답이었다. 재승은 그 대답이 썩 마음에 찬 듯 보였다. 느닷없이 환자복 소매를 걷어붙인 그가 더욱 전투적으로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원영이 분명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적 있는 표정이었다.

아, 천재승 갤러리. 팬이랑 찍은 사진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이다.

덕분에 원영은 더 이상 팬 페이지의 남자가 부럽지 않았다. 음……. 그래. 그가 재승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만 뺀다면.

*

이후 식사는 이렇다 할 대화 없이 원영의 바람대로 평화롭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 모두가 식사를 거의 끝내갈 때쯤, 병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재승은 뒤를 돌아봤고, 원영은 그런 재승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곧 병실의 문이 열리고 커다란 바퀴 트레이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천재승 환자님, 링거 다 됐죠~? 어머, 식사 중이셨네요? 그럼 링거만 빼고 나서 식사하실까요?”

트레이를 밀며 들어온 간호사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딱딱하게 굳은 재승은 간호사가 시키기도 전에 링거가 꽂혀 있는 팔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간호사가 뻗어 나온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간호사가 바늘을 뽑는 동안, 원영은 재승의 얼굴을 관찰했다. 바늘이 뽑혀 나갈 때도, 지혈 패드를 붙여줄 때도. 재승은 한결같이 딱딱한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 얼굴에 대한 감상은 ‘되게 귀찮아하시네.’ 정도.

그리고 다른 감상을 덧붙이자면, 목덜미가 매끈하니 깨물어보고 싶게 생겼다? 뒷목까지 뽀득뽀득 잘 씻으시나 봐. 저기에 코라도 한번 박아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원영은 재승이 샤워 직후에 풍기던 향긋한 냄새를 떠올리며 입맛을 쩝 다셨다. 그동안 어느새 재승의 팔에 지혈 패드까지 붙여준 간호사가 그의 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5분 동안만 붙이고 계시다가 바로 떼어내서 버려주세요. 만지시면 안 돼요~!”

간호사는 친절한 주의사항을 남긴 채 트레이를 밀며 침대에서 멀어졌다. 달칵, 병실의 문이 닫히자, 병실에는 또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재승은 아까보다 입맛이 떨어진 듯한 표정으로 남은 밥을 먹었다. 그렇게 원영이 먼저 도시락을 모두 비워냈고, 재승이 뒤이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깨끗하게 빈 도시락통 여섯 개를 든 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휴게실로 들어간 원영은 재활용품 수거함에 도시락통을 넣은 뒤 자판기 옆을 빙글빙글 돌았다. 식사는 더없이 완벽했고, 자신은 지금 상태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재승이 만족해야지 자신이 만족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당장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했다.

가만 무언가를 생각하던 원영이 자판기 위로 카드를 찍었다. 원영은 자판기에서 이온음료 하나와 캔커피 하나를 뽑아 든 채 휴게실을 벗어났다. 지금처럼 하되 너무 들뜨지만 말아야지. 꼴에 현실적인 다짐을 하는 원영의 모습은 다짐과 같지 않게 들떠 보였다.

달칵, 원영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재승은 원영이 나가기 전 모습 그대로 밥상을 올린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상태였다. 막 떼어낸 듯 보이는 지혈 패드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던 재승이 문 열리는 소리에 잠시 뒤를 돌아봤다. 들어온 사람이 원영이라는 것을 확인한 재승은 잠깐 ‘너였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손장난을 이어갔다.

때문에 원영은 괜스레 서운했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하게 재승의 앞으로 다가간 원영이 밥상 위에 이온음료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재승의 침대에 앉아 멀뚱멀뚱 자신의 신발코를 내려다봤다. 흘깃, 재승의 옆모습을 훔쳐본 원영이 들고 있던 캔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

재미있으신가.

다 큰 성인이 피 묻은 지혈패드를 가지고 놀아봤자 뭐 그렇게 재미있겠느냐마는, 정말 재밌어서 저러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궁금했다. 그렇지만 물어보면 안 되겠지. 원영이 다시 커피를 홀짝거렸다. 뭐라도 말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아무런 말 없이 잠깐씩 훔쳐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워 큰일이었다.

그때, 치이익 하고 캔 음료 따는 소리가 들렸다. 힐끗 옆을 보자 재승이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 게 보였다. 원영은 재승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재승이 캔을 내리려고 할 즈음 잽싸게 정면을 바라봤다.

재승은 타인의 시선을 잘 못 느끼는 편이었고, 원영은 안 본 척하기의 달인이었다. 때문에 재승이 커피를 마시고 원영이 그를 훔쳐보는 일은 몇 차례 반복되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야, 근데.”

재승이 원영을 불렀다.

“……네?!”

재승이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은 원영은 커다랗게 눈을 뜨며 막 발끝으로 돌렸던 시선을 재승에게 되돌렸다. 과장된 그 표정에 재승은 당황한 눈치였다. 재승이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원영에게 말했다.

“그냥…… 이런 병실은 하루에 얼마나 하나 해서…….”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분명 괜히 말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말끝까지 흐려가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재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은 한지 원영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한 원영이 머쓱한 듯 코끝을 긁적였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알았다면 미리 알아봐 두었을 텐데. 공금이 아니면 딱히 세세하게 신경 써가며 소비를 하지 않았던 탓에 재승의 질문에 대한 답을 원영 또한 알지 못했다.

“글쎄요. 저도 잘……. 그런 건 비서가 처리하니까요.”

자신은 정말 알지 못하는데 재승이 혹시나 저를 무시해서 대답해주지 않는다고 오해를 하면 어떡하나 싶어 괜히 말을 덧붙인 원영이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정말 괜한 말이었다.

나 병원비 내려고 병실에 남았었지, 참.

원영이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재승은 원영의 말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아쉬워만 했다. 안타깝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뱉은 재승이 다시 원영에게 말을 걸었다.

“야, 근데.”

“네.”

“내가 지금 밖에 나가면…… 좀 그럴까?”

질문을 마친 재승은 원영을 바라보며 퍽 애타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보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밤에 왜 나가고 싶으신 걸까. 잠시 생각하던 원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담배가 태우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걸까요?”

만약 그래서가 맞다고 하면, 외출은 안 된다고 대답을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소화가 안 돼서. 어디든 한 바퀴만 뛰고 싶은데.”

그리곤 의사도 아니고 그저 병원비 내주는 인간일 뿐인 원영의 눈치를 봤다. 원영의 눈에 초롱초롱 빛나는 재승의 토끼 같은 눈망울이 보였다. 그러자 한강 둔치를 사이좋게 뛰고 있는 자신과 재승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재생되었다.

산책……. 산책 말이죠.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원영의 헛소리가 다행히 입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한강 둔치를 뛰어다니는 상상 속의 두 사람 사이를 훨훨 날아다녔다. 그때, 상상의 벽에 얕게 금이 갔다.

“아니면 걷기라도…….”

원영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재승이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 뒤 재승은 어쩐지 기죽은 것 같은 얼굴로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아픈가?”

작게 내뱉는 말투에서 슬픔이 뚝뚝 묻어났다. 아마 막 도시락을 챙겨 들고 왔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였다. 그때 보았던 밤비가 지금 다시 보이는 걸 보면 아주 분명했다.

물구나무서서 머리통으로 뛰어다니지 않는 이상 너무 아프실 일 따위 절대 없으실 텐데.

생각하는 원영의 얼굴이 재승과 같이 슬퍼 보였다. 아프지 않은 사람한테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이다지도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는 일이었을 줄이야. 그러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사실을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산책 가실래요?”

재승은 대답도 없이 후다닥,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

적절한 온도의 실내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외부의 밤공기는 후덥지근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밤잠이 오지 않아 홀로 나온 환자부터 해서 야식을 시켜 먹는 환자와 보호자, 캔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환자 무리. 기타 등등 사람은 많았지만, 그중 누구도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두 남자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원영으로 말하자면 한여름에 정장을 빼입고 야외를 뛰자니 삐질삐질 땀이 났다. 문제는 그래도 기분이 좋아서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친놈으로 보여도 괜찮았다. 지금 자신의 옆에는 재승이 있고, 뛰고 있는 재승의 표정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으니까.

“아, 소화된다.”

내리 10분을 넘게 뛴 재승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를 문질렀다. 정장을 입은 원영보다야 덜했지만, 그의 이마에서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씻어서 젖은 것도 보기 좋지만, 땀으로 젖은 건 어째 더 보기 좋은 것 같다.

원영은 괜한 상상을 하게 될까 봐 시선을 바닥으로 돌리며 재승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올라갈까요?”

재승의 그림자가 끄덕끄덕 하고 흔들렸다. 원영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는 재승의 그림자가 삐약, 삐약, 귀여운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1인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은 원영은 조용한 복도에서 잠시 재승의 숨소리를 즐겼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원영은 의식적으로 재승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의 거울로 재승을 흘깃 살펴본 순간이었다.

재승과 눈이 마주쳤다. 재승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원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

체감상 꽤 긴 시간 동안 눈 맞춤이 이어졌다. 재승은 입술을 말아 문 채 원영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원영은 자신이 언제 이렇게 눈을 맞춰보나 싶어 재승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더욱 길어질 것 같았던 침묵을 깬 것은 재승이었다. 재승이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나 퇴원 언제 해?”

질문을 받은 원영은 과연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딱히 대단할 것도 없으면서 미리 정해놓고 세 번이나 되새겼던 대답뿐이었다.

“내일……, 아마 내일 봐야 알 것 같아요.”

원영은 한 번 말을 더듬었으나 적어도 재승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거짓말을 해냈다. 재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마침 땡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재승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뒤따라올 원영에게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나 만약에 내일 퇴원 못 하면, 허락받고 잠깐 나갔다 올 수는 있댔지?”

“예. 어디 가시게요? 집?”

“아니, 은행 좀 갔다 오려고. 여기 병원 근처에 노각오이 저축은행 있나?”

“……글쎄요.”

노각오이 저축은행. 흔히 사용하는 은행도 아닌데 최근에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근데 그보다 일단 내일 퇴원을 시키고, 집에서 간병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그의 집에 눌러앉아 버리는 것도 좋은 생각 같은데.

나쁜 생각을 하는 원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원영이 재승의 집에서 벌어질 일을 망상하는 동안, 두 사람은 1인실의 문 앞에 착실하게 도착했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재승이 원영의 비서가 사 온 세면용품과 새 속옷 한 장을 챙겨 들었다. 그리곤 잠시 원영을 바라보다가, 1인실 서랍 안을 뒤적거렸다.

재승은 서랍에서 꺼낸 물건을 원영의 손에 쥐여줬다. 까만 반소매 티셔츠와 체크무늬 반바지. 입원하기 전까지 재승이 입고 있었던 옷을 건네받은 원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재승이 턱밑을 긁적이며 말했다.

“땀났잖아. 그리고 잘 때 불편할 거고……. 좀 늘어나도 괜찮으니까 일단 너 입어. 나 먼저 씻는다.”

말을 끝마친 재승은 부끄럽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솨아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재승의 옷가지를 손에 쥔 원영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그가 쥐고 있던 옷을 들어 올렸다. 옷을 품에 꼬옥 안고,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서 코를 묻은 채 킁킁거렸다. 어쩐지 저렴한 느낌의 세재 냄새와 함께 재승의 체취인 듯 느껴지는 포근한 냄새가 났다. 원영은 그 냄새를 더 맡기 위해 더욱 열심히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물소리가 끊겼다.

“야, 근데!”

화들짝 놀란 원영이 옷가지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화장실 안의 재승이 다시 소리쳤다.

“나 병원복 새 거 달라고 그러면 안 되냐? 땀났는데!”

“네! 받아다 드릴게요!”

병실 끝자락에 있는 소파 위에 재승의 옷을 살포시 내려놓은 원영이 후다닥 병실을 빠져나갔다. 심장이 펄떡펄떡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환자복을 받은 원영은 심호흡을 하며 병실의 문을 열었다. 심호흡을 하기는 했으나, 재승은 아직 화장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재승은 이미 샤워를 마무리했고, 심지어 속옷만 입은 채 병실 안을 활보 중이었다. 때문에 원영의 심장은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어, 왔네. 너도 씻어.”

재승의 속 모르는 인사에 원영은 그의 눈길을 피하며 다소곳이 그에게 받은 옷가지들을 주워들었다. 신혼 첫날밤의 새신랑도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하긴, 그놈들은 곧 할 수 있는데, 저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모르니 당연한 말일까.

원영은 세면도구와 속옷을 서둘러서 챙겨 들고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는 수도승의 그것처럼 찬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펄떡이는 심장도 벌떡일 뻔한 하반신도 겨우 잠재웠다.

꼭 끼는 재승의 옷을 입은 원영이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어둠 속에 도롱도롱 작게 코를 고는 재승이 보였다. 재승은 저게 입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앞섶을 풀어헤친 채 배 위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론 머리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섹슈얼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적어도 원영의 눈에는 옷 벗고 달려드는 몽마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원영은 기껏 차게 식힌 몸이 다시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밤이 길 것 같았다. 서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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